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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Spatial Structures of Suwon in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일제강점기 수원의 도시공간구조에 관한 연구

  • Received : 2019.02.15
  • Accepted : 2019.07.27
  • Published : 2019.08.31

Abstract

After opening Suwon railway station in 1905, a new road was constructed between Suwon station and Paldalmun(the South gate). It was the starting point to change urban structures of Suwon and shape the new city scape. In 1914, administrative districts of Suwon were reorganized. Suwon-myeon (township, a subdivision of Suwon-gun) was promoted to Suwon-eup(town) in 1931. Suwon-eup expanded its territory and changed the address system from 'li(里)' system to Japanese address system, 'Jeong(町)' in 1936. From 1920s, road system was changed and transformed Suwon's urban structures. A straight road was built from Jongro intersection to Janganmun(the north gate) in 1928. Another straight road was constructed between Suwon station to Padamun in the early 1930s. Public office buildings used the Hwa Seong HaengGung(華城行宮) and some of building moved to new location with new buildings. Main buildings of most schools in Suwon were reconstructed since 1930s. Commercial buildings and stores were sprung up and had their own characteristics by region. Around Suwon station, there are more hotels and restaurants than other areas. Rearranging administrative areas, developing road system and new buildings transformed Suwon's spatial structures. Constructing new roads formed a straight road passing through Suwon. After reorganizing administrative areas, this road turned to be the central axis of Suwon. Buildings in new style on the axis made the modern cityscape in Suwon.

Keywords

1. 서론

수원은 1900년 이전까지 화성(華城) 사대문 안의 구도심과 장안문과 팔달문(八達門) 외곽에 주거지를 형성하고 만석거와 축만제를 기반으로 하는 농경지를 형성하였다. 수원시는 1905년 경부선의 개통으로 본격적인 확장이 시작되었고, 수원역 주변에 일본인들이 모이면서 신도심이 형성되었다. 일제강점기 초 행정개편과 더불어 작성된 1911년 지적도와 토지조사부는 급변하던 수원 도시공간의 변화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다. 그러나 1930년대나 해방직후의 자료는 한국전쟁 로 인해 행방이 묘연한 실정이다.

수원의 근대도시와 관련하여 기존연구를 정리하면, 장영실(1990)이 도시지리학 관점에서 18세기말부터 20세기말까지 수원의 공간구조 변화과정을 밝혔다.1) 김재국(1998)은 건축 및 도시 분야의 연구로 시기별로 나누어 근대도시의 변화과정을 분석하였고, 건축물을 시기별 주요특징 및 건축 관련 업종의 분포 등을 정리하였다.2) 김백영(2012)은 수원을 권업모범장을 중심으로 한 농업도시라는 시각에서 벗어나 다각적 측면에서 수원의 변화양상을 분석하였다.3) 안국진(2014)은 현재 국가기록원에 남아있는 수원의 근대건축물 도면들을 모두 정리 및 기술하였다.4) 김병희(2015)는 화성과 전주의 읍성의 유사성에 주목하여 비교하였다. 특히 종교시설물을 중심으로 근대화 과정을 규명하였다.5) 백선경(2016)은 일제강점기 수원이 농업도시로서 성장하게 된 과정과 관련시설 분포를 파악하여 도시변화와의 관계를 조명하였다.6) 최성환(2017)은 1911년 수원의 지적도를 통해 토지소유현황을 국적과 인물별로 분석 하여 일제강점기 초 수원의 토지현황을 분석하였다.7)

본 연구에서는 1905년 경부선 개통시기부터 1945년 까지의 수원역에서 수원화성까지 이르는 지역을 연구 대상으로 하였다. 기존연구에서는 수원의 도시에 대해 도시규모와 가로경관 측면에서 다루었으나, 행정구역과 도로체계의 변화양상을 구체적으로 다루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도시변화를 살피기 위해 당시의 지적도와 측도를 분석하고, 조선총독부 관보 및 신문기사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기존 연구에서 분석되지 못한 부분들을 밝혀냈다.8) 이에 본 연구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수원의 행정구역 변화 과정을 밝힌다.

둘째, 수원의 도로체계 및 도시경관의 변천사를 규명한다.

셋째, 수원의 주요건축물의 위치 및 특징을 정리한다.

행정구역의 변화에서는 1936년 일본식 주소 체제로의 변화 과정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를 새롭게 분 석하였다.

수원의 도로체계가 변하는 구체적인 시기와 순서를 정리하였다. 주요건축물의 위치는 관공서의 위치변화와 주요회사의 설립시기별 위치 등을 통해 수원의 도시구조를 파악하였다.

2. 도시공간의 변화

2-1. 행정구역의 변화

1910년 10월 1일 종래의 13도제를 그대로 유지하는 조선총독부령 제6호가 공포되었다. 그 후 1914년 3월 1일9)에 전국적으로 행정구역을 재편하였다. 기존의 330개 군을 220개 군으로 통폐합하고, 12개의 부(府)를 신설하였다. 경기도의 남양군을 수원군으로 통합하면서 수원군은 21개면(面) 279리(里)를 관할하게 되었다. 기존의 40개면에서 21개면으로 축소되었고, 그중 수원역 일대와 수원화성 6개의 리로 구성된 수원면 이었다. 1917년 10월 1일10)에 전국의 면 중에서 비교적 인구가 많고 상공업이 발달한 곳을 지정면(指定面)으로 하는 지정면제도를 실시하였다. 대체로 일본인 비율이 높은 지역이 지정면이 되었다. 수원면도 지정면이 되었는데, 1931년 4월 1일에 전국의 지정면들이 일제히 읍(邑)으로 승격이 되면서 수원면이 수원읍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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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1914년 수원면의 6개리(里) (1911년 수원면지적도)

1936년 10월 1일11) 수원읍이 확장되었고, 행정구역 명칭도 일본식 행정구역인 정(町)체제로 바뀌었다. 기존의 6개리였던 수원읍은 17개의 정으로 되었다. 행정 구역의 개수가 늘어나면서 각각의 관할지역의 면적이 작아졌다. 또 주요도로가 행정구역의 경계가 되었던 기존의 방식과는 달리 정(町)체제에서는 주요도로가 행정구역의 중심으로 이동하였다. 일본식 주소체제로 바뀌면서 행정구역의 변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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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1936년에 확장 된 수원읍 영역(1943년지도 재편집, 수원박물관 소장)

첫째, 행정구역의 개수가 6개에서 17개로 늘어나면 서 각의 행정구역 관할 면적이 축소되었다. 팔달문 주변 지역인 본정 1·2·3·4 정목은 그 면적이 가장 작은데 이는 상업 밀집지역으로 관할지역을 세분화 시킨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도로의 역할이 변하였다. 기존의 주소체계에서 도로는 관할구역을 나누는 역할을 했었으나, 일본식 주소체계에서는 화성 북측의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지역이 중심도로가 행정구역의 중앙에 위치 하고 있다. 중심도로를 기준으로 행정구역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중심도로와 이를 둘러싼 주변 지역을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설정하였다.

2-2. 도로구조의 변화

1905년 경부선을 개통하면서 수원역과 수원화성을 잇는 직선도로를 개설하였다. 수원화성 안의 곡선 도로와는 구별된다. 이후 가로 정비 사업이 시작되면서 수원화성 안의 도로체계도 변하기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설치된 도로는 1928년에 종로사거리12)에 서 장안문까지 이르는 직선도로이다.13) 원래의 수원화성 도로는 팔달문-장안군 구간은 직선 도로가 아니었다. 화성 중심의 십(十)자 형태의 도로(종로사거리)에서 장안문에 이르는 도로는 동쪽으로 휘어진 두 개의 도로였다. 이 도로들은 수원 화성 내 시장으로 인해 굽어진 길이다. 이러한 도로를 둔 채 장안사거리와 장안문 에 이르는 직선 도로를 신설하였다. 이로 인해 팔달문에서 장안문까지 이르는 직선도로가 완성이 되었다.

또 다른 큰 변화는 1930년대에 신설된 수원역∼팔달 문간의 신축 도로이다. 『매일신보』 1932년 8월 17일자 기사에 의하면 팔달문과 수원역간의 기존 도로는폭이 좁아 상업의 발달과 유동인구의 증가로 교통 상 불편한 점이 많았기 때문에 16미터 폭의 넓은 도로를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1936년에 제작된 그림지도인 ‘관광의 고도 수원(觀 光の 古都 水原)’을 보면(그림 4), 신축도로가 표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932년과 1936년 사이에 도로 가 신설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 도로는 기존의 팔달문 -수원역 구간의 도로와 나란히 평행하게 이어진다. 기 존 도로는 서쪽으로 두 번 꺾이면서 수원역까지 연결 되지만 신설도로는 한 번 꺾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림 3) 신설도로가 더 넓은 폭에다 방향전환이 더 적은 것으로 보아 수원의 중심도로로 만들기 위한 의도임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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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가로정비사업으로 확장된 수원의 도로들 (1943년지도 재편집, 수원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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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수원역-팔달문간의 새로운 직선도로(1936년 수원조감 재편집, 수원박물관 소장)

장안문에서 팔달문을 지나 수원역까지 이어지는 도로는 수원의 중심을 관통하는 중심도로가 되었다.

2-3. 소결

1914년 수원군의 행정구역 재편성과 함께 수원면은 지정면이 되었다. 1931년 수원면이 수원읍으로 승격되었고, 1936년에는 수원읍의 영역확장과 함께 주소체제 도 일본식인 정(町)체제로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크게 두 가지의 변화가 있었다.

첫째, 관할지역이 세분화 되면서 6개였던 행정구역이 17개로 증가하게 되었다. 특히 상업밀집 지역인 팔달문 주변은 행정구역의 면적이 가장 작다.

둘째, 도로의 역할이 변하였다. 원래는 관할구역을 나누는 기준선이었다가 중심도로가 행정구역의 중앙으로 위치하였다.

도로체계는 1905년 경부선의 개통과 함께 팔달문과 수원역 잇는 직선도로가 먼저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의 수원의 중심도로 체계는 1920년대가 되어서야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928년 종로사거리와 장안문을 잇는 직선도로가 건설되었고, 그 후 1932년 이후에 팔달문-수원역 구간을 잇는 도로(신작로)가 신설되었다. 더 넓고 이동이 용이하게 설계하여 새로운 수원의 중심도로를 건설하였다.

단계적으로 도로체계가 변하게 되면서 새로운 주소 체계로 재편된 행정구역의 중심을 관통하는 수원의 중심축이 생겨났다.

3. 주요 건축물의 위치

주요 건축물은 ①공공기반 시설로써 관공서와 교통건축, ②일제 식민사관의 근거지로 활용했던 학교와 종교시설, ③경제기반 시설로써의 상업시설, 이렇게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3-1. 관공서 및 교통건축

(1) 관공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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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1917년 수원의 관공서 위치 (1917년 지도 재편집, 수 원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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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1943년 수원의 관공서 위치 (1943년 지도 재편집, 수원박물관 소장)

표 1. 수원관공서 건축행위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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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에 개청된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은 원래 강 무당(講武堂)14)에 있다가 1920년 3월에 수비대의무실로 사용하고 있던 행궁의 이아(貳衙) 건물을 헐고 신축이전을 하였다. 1895년부터 낙남헌(落南軒)15)에 설치 되었던 수원군청은 일제강점기에도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이후 1938년에 원래 수비대가 있었던 중영이 있던 위치로 신축이전하였다.16) 수원면사무소는 초기에 행궁 앞 사거리(종로사거리)에 위치하였으나 (그림 5)의 ⑧) 1923년 6월에 팔달문 부근으로 신축·이전을 하였다.17) 이후 1931년에 수원면이 수원읍으로 승격되면서 수원면사무소는 수원읍사무소로 개칭되었다.

위치가 변하지 않은 시설은 수원자혜병원, 수원우편국, 수원경찰서이다. 수원자혜병원은 1910년 9월 5일에 화녕전에 처음 개원하였으나, 1911년 화성행궁으로 한 차례 이전을 하였다. 그 후 계속 그 위치를 유지해오다 1925년 4월 1일 경기도립수원의원(京畿道立水原醫 院)으로 개칭하였다. 1923년에는 2층 조적의 신본관의 건설을 시작으로 점차적으로 행궁을 철거하고 병원의 개축을 진행하였다.18)

신설된 기관으로는 도서관, 토목관구, 본정파출소,세무서, 소방파출서, 세무서, 소방관리소, 역전우편국, 역전파출소가 있다. 도서관은 수원군청이 있었던 낙남헌 자리에 신설되었다. 이외에도 수원역 앞이 점차 상업밀도가 커지면서 역전파출소와 역전우편국이 새로이 생겨났다.

전체적으로 이전 한 관공서의 위치변화 특징을 살펴 보면, 동쪽으로 치우쳐 있었던 관공서들이 중심도로 쪽으로 모이는 양상을 띠었다.​​​​​​

(2) 교통건축

수원의 대표적인 교통건축으로 수원역을 꼽을 수 있다. 수원역은 1905년 1월 1일 경부선의 개통과 함께 영업을 시작하였다. 초기 수원역 건물은 단순한 일본식 목구조 건물이었다. 1926년 철도국에서 조선 전체 명승고적, 고사찰 등 42개소를 선정하여 고적이 많은 지역의 역사를 한국전통양식으로 짓는 것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19) 이에 따라 1927년 5월에 수원역을 한국 전통양식으로 짓기 결정하였고, 1928년 9월 1일에 수원신역사의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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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수원신역사 (1929년)  그림 8. 전주신역사 (1929년)

수원신역사의 설계자는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 사토우 쿠마타로우(左藤熊太郞)였다. 건물의 기초와 바닥 은 철근콘크리트, 지붕은 팔작지붕의 겹처마였다.20) 이러한 양식의 역사가 호응이 있자 사토우는 1929년에 전주의 역사도 같은 양식으로 설계하였다.21) 두 건물 모두 전통 한옥의 팔작지붕 형태로 외관상 공간구조가 유사하다. 두 건물 모두 중앙에 현관(포치)이 있고, 대합실과 연결된 익랑형태의 회랑을 덧붙였다. 수원역과 전주역은 일본 설계자가 한반도에 한옥양식으로 설계한 보기 드문 경우로, 특히 공공건축물(역사)에 전통 한옥 양식으로 설계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3-2. 학교 및 종교시설

 

표 2. 수원의 학교와 종교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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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교

일제강점기 교육정책은 조선인과 일본인에 대한 차별로 서로 달랐다. 조선인들이 다니는 보통학교를 6년제에서 4년제로 축소하고 고등교육기관은 설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문화정치로 기조가 바뀌면서 수업연한을 늘리는 대신 일본역사 및 일본어 교육을 강화하였다. 조선어 수업은 필수에서 수의(隨意)과목으로 되었다가 1943년 제4차 조선교육령 시기(1943∼1945)에는 조선어가 교육과정에서 제외되었다.22)

수원공립보통학교((그림 9)의 ①)는 1896년에 수원 군공립소학교로 수원향교 부근에서 시작하였다. 1902년 12월 남군영으로 이전하였고, 1906년 화성유수부의 객사인 우화관(于華關)을 교사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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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수원의 학교 및 종교시설 위치 (1943년지도 재편집, 수원박물관 소장)

1906년 9월 18일 학부령 제28호로 수원공립소학교는 수원공립보통학교로 개칭되었다. 소학교는 일본인들이 보통학교는 조선인들이 다니는 학교로 구분하기 위해서 개칭한 것이었다. 이후 1937년에 다시 ‘소학교’로 개칭하도록 하였으나 이미 일본인들이 다니는 수원소학교가 있다는 이유로 수원공립보통학교는 ‘신풍심상 소학교(新豐尋常小學校)’로 바뀌었다. 1941년에는 군국주의 강화로 ‘국민학교(國民學校)’로 바꾸게 하면서 ‘신풍국민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24)

수원공립보통학교는 건물의 증개축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1921년에 주변 대지를 수용하여 운동장을 확장하였고, 1933년에는 신교사가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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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0. 수원공립보통학교 (1930년대 초) 그림 11. 수원공립보통학교 (1940년대)

수원공립심상고등소학교는 일본인의 교육기관으로 일본인이 밀집되어 있는 매산리에 위치하였다. 1906년 수원거류민소학교(水原居留民小學校)로 창립되었다가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수원공립심상고등소학교로 개칭되었다. 1941년 총동원체제아래 소학교가 모두 국민학교로 변경되면서 ‘수원공립국민학교’로 바뀌었다.25)

초기 건물은 목구조의 단층건물이었으나 건물의 노후화와 입학생의 증가로 교사의 개축을 결정하였다. 1931년 12월에 연와 2층의 본교사 건물이 새롭게 지어졌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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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2. 수원공립심상고등 소학교 (1923년) 그림 13. 수원공립심상고등소 학교 신교사 (1930년대)

(2) 종교시설

수원향교는 1291년(고려 충렬왕 17) 화성시 봉담읍 와우리에 처음 건립되었다. 1795년(정조 19)에 지금 현재 위치인 수원시 권선구 교동 44번지로 이전하였다. 수원향교는 뒤편에 문묘인 대성전을 두고 그 앞에 명륜당과 좌우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각각 마주보는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배치를 보여준다. 수원향교는 근대식 교육체제가 들어오면서 교육적 기능은 거의 상실하게 되었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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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4. 수원향교 (1929년) 그림 15. 수원신사 (1923년)

1915년 조선총독부는 「신사사원규칙」을 발표하고28) 지역마다 신사를 설립하기 시작하였다. 수원신사도 이에 따라 1917년 10월 20일에 준공되었다.29) 수원 신사는 팔달산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는데 문묘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수원신사 맞은편에는 수원사(水原寺)가 있으며 그 주변으로 묘법사, 서본원사, 대람사 등의 일본식 사찰이 위치하였다.

3-3. 상업시설

19세기말부터 시작된 국내외의 다양한 상황들은 상인층의 변화를 가져왔다. 수원의 상인층은 새로운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한일 강제병합 전후로 크고 작은 회사들이 설립되었다.30) 개인상점들도 근대문물의유입으로 전에 없던 물품을 취급하는 상점이 생겨나고 업종도 점차 다양해졌다. 주식·합자 회사의 분포와 함께 일반상점의 지역별 분포를 통해서 수원의 상업지역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주식·합자회사

1900년대부터 수원에는 다양한 회사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서립시기별로 회사들의 위치를 파악해 보면 1910년대까지는 특정지역에 집중되어 있지 않고 전체적으로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이후 1920년대부터는 수원역 주변에 운송업 업종의 회사가 집중적으로 설립되었다. 이는 1920년대에 수원의 운송업이 집중적으로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회사는 팔달문 주변 지역에도 집중되었는데, 이 지역은 행정구역상 본정 1·2·3·4 정목에 해당되며, 상업밀집도가 가장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또, 1930년대부터는 팔달문과 수원역 사이의 신작로에 설립된 회사도 일부 있다. 상업이 발달한 두 지역 즉, 수원역 주변과 팔달문 주변을 잇는 신작로는 두 지역을 잇는 중요한 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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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6. 수원의 주요회사 위치 (1943년지도 재편집, 수원박 물관 소장)

표 3. 수원의 주식·합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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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반상업

1942년에 수원상공회의소에서 발간된 ‘수원상공인명록’에는 수원의 업종별 상점목록이 표기되어 있다. 주소와 주인이름이 함께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다시 행정구역별로 분류하여 보면 지역별 특징들을 몇 가지 알 수 있다.

상점수의 경우, 점포수는 매산정1정목이 86개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본정4정목인 82개이다. 이렇게 지역별로 상점 수 만 놓고 보면 매산정1정목이 가장 상업이 밀집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행정구역의 면적대비 상점수를 비교해보면 본정2정목의 상점밀도가 가장 높다. 나머지 본정1·2·4정목도 상업 밀도가 높게 나타나고 있다. 주인이름에서 일본인으로 추정할 수 있는 상점을 추려보면, 지역별로 분포가 다르다. 일 본인 주인이 가장 많은 지역은 매산정1정목으로 31개로 이 지역에서 36%를 차지한다. 이는 일제초기 수원역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유입과 정착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궁정, 본정1정목 순으로 일본인 비율이 높다.

일반상점을 통해서 상업의 분포를 살펴보면 크게 수원역 주변과 팔달문 주변 지역의 상업이 집중되어 있다. 두 지역을 비교해보면 수원역 주변보다 상업밀도 측면에서 팔달문 주변지역의 상업이 더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표 4. 1940년대 수원의 행정구역별 상점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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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소결

일제초기 화성행궁 내에 관공서가 설치되다가 1920년대부터 일부 관공서는 신축·이전 및 증·개축이 시작 되었다. 이전한 관공서들의 위치 특성을 살펴보면 화성내 동쪽에 치우쳐 있던 관공서들이 가운데 중심도로 주변으로 이동하면서 1940년대에는 화성 중심에 관공 서가 주로 분포되는 특징을 나타낸다.

학교시설은 조선인들이 다니는 학교와 일본인들이 다니는 학교로 구분되었고, 수원화성 내에는 조선인 학교(수원공립보통학교, 삼일여학교, 삼일학교)가, 일본인 밀집거주지역인 매산정에는 일본인학교(수원공립심상고등소학교)가 위치하고 있었다.

종교시설은 일제초기 수원화성 내에 일본절인 동본 원사가 들어선 것을 시작으로 1917년에는 수원신사가 팔달산 산자락에 들어섰다. 수원신사 주변으로 수원사와 대각사, 묘법사, 서본원사 등의 일본식 사찰이 조성 되면서 그 일대는 종교시설 밀집지역이 되었다.

상업시설은 크게 수원역 주변과 팔달문 주변지역이 발달했다. 먼저, 수원역 주변지역이 운송관련 회사들이 1920년대에 집중적으로 설립되었고, 일반상점의 경우 일본인 점주 비율도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다. 팔달문 주변지역은 대부분의 주식·합자 회사들이 가장 많이 분포되어있으며 일반소매점 또한 집중되어 있다. 행정구역에 따른 상점수를 면적대비 살펴보면 이 지역의 상업밀도가 가장 높았다.

4. 결론

본 연구는 세 가지를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첫째, 수원의 행정구역의 변화과정이다. 1914년 전국적인 행정구역 개편으로 수원군의 행정구역도 재편성 되었고, 수원면은 지정면이 되었다. 1931년 수원면은 수원읍으로 승격되었고, 1936년에는 수원읍의 영역확장과 일본식 주소체계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6개의 ‘리’가 17개의 ‘정’ 으로 분할되면서 행정구역의 경계선 역할을 했던 주요 도로가 행정구역의 중심으로 위치가 이동하면서 각 지역의 중심축 역할로 바뀐 것이다.

둘째, 수원 도로체계의 변화를 규명하였다. 도로체계의 큰 변화는 먼저 1928년에 종로사거리∼장안문간의 직선도로 건설을 시작으로 1930년대 초반에 증설된 팔달문∼수원역간의 도로이다. 수원화성내의 유기적 형태의 곡선도로는 넓은 폭의 새로운 직선도로가 생기면서 원래의 중심도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새 도로는 팔달문에서 장안문까지 직선으로 한 번에 연결되었다. 1930년대 초팔달문∼수원역간의 직선도로가 증설되면서 장안문에서 팔달문을 지나 수원역까지 한 번에 이어지는 도로가 완성되었다. 1936년의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이 도로는 수원의 중심축이 되었다.

셋째, 주요건축물의 위치와 그 특징을 정리하였다. 먼저 관공서의 경우 일제 초기 화성행궁 건물을 차용하다가 일부 관공서가 신축·이전하면서 관공서의 분포는 화성내에서 동쪽으로 치우쳐 있던 것이 수원화성의 중심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종교시설의 경우, 수원신사가 수원향교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기 시작하고 그 주변으로 일본식 사찰이 모여들면서 일대가 종교시설 밀집지역으로 변하였다. 상업은 주요회사와 일반상점들 은 팔달문 주변과 수원역 주변 두 지역에 주로 밀집하였다. 그 중에서 팔달문 주변 지역의 상업밀집도가 가장 높게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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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7. 1943년 수원의 지역적 특성 (1943년지도 재편집, 수원박물관 소장)

본 연구를 통해, 수원 근대도시공간은 확장되면서 행정구역 개편과 도로체계는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새로운 시설인 수원역이 신축되면서 그 주변으로 상업지역이 자연스레 형성되고, 행정구역 개편과 도로확장을 통해 수원의 중심축이 만들어지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또한 건축물이 지역별로 관공서, 상업, 종교 시설이 밀집되어 있는 특징을 알 수 있었다.

본 연구는 자료의 한계로 수원의 모든 주요건축물을 다루지 못하였다. 차후 건축물의 수를 보다 폭넓게 확보하여 도시공간에 대입해 보는 지역 공간아카이브 구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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