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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onsideration on the construction process of the Sacheonwangsa Temple in Silla

신라사천왕사(新羅四天王寺) 건립과정(建立過程) 재고(再考)

  • Received : 2019.02.15
  • Accepted : 2019.04.12
  • Published : 2019.04.30

Abstract

The Sacheonwangsa temple in Silla was completed in 679, just after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s. In recent years, we have been critically considering the history of the chronology based on the existence of 'Geumdang of the previous generation', which has emerged through the research report of the Sacheonwangsa temple. It is the one to reconsider the construction process of the Sacheonwangsa temple centering on the re-interpretation of the construction time and the character of the first stage of the foundation which was confirmed from within the Geumdang site. The results of this study are as follows : 1)The "Chang(創) of Sacheonwangsa temple" in [Three Affairs that Queen Seondeok had already known] that it is presumed that the construction of the Sacheonwangsa temple, which was designed by Anham before 640 years ago, will convey the fact that the first of the King Munmu's reign (661 ~) has been finalized after the initial discussion. 2)Although the theories after excavations are predicated on the existence of 'Geumdang of the previous generation', there is no reason to believe that a lasting predecessor building with roof and pillar walls on predecessor buildings is considered to have been built. The foundation was associated with the "build a temple out of coloured silk(以彩帛營寺)" i.e. 'Jochang(祖創)' in 670 years before the construction plan was formally finalized. However, it is presumed that the remains of the platform construction on the premise that it will be used on the construction of Geumdang. 3)The decision to 'rebuilding( ??)' based on a formal construction plan is determined to be from 670 to 672 years. The maintaining of the original cathedral axis line, to the north on the boundary of the southern limit of the foundation flat portion, the result of developing and embodied the relative position of the Geumdang in the newly determined cathedral unfold and embody, the center of the building base and Geumdang, it is presumed that the centers of them are divided into North and south. 4)The completion of the Sacheonwangsa temple in 679 is understood as the conclusion of 'rebuilding' to "build a temple out of coloured silk" i.e. 'Jochang' in 670 years. The pent roof of the Geumdang was initially considered not to be in the plan, but it is judged to be before the completion of the Sacheonwangsa temple.

Keywords

 1. 서론

신라사천왕사는 삼국통일 직후인 문무왕 19년(679)에 낙성된 사원으로서, 경주 낭산남록에 그 유지가 전하고 있다. 三國史記직관지에는 관부 조직인 성전이 설치된 7곳의 사원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사천왕사는, 수록된 순서나 관원 구성 등으로부터 수위의 사격을 지녔던 것으로 평가된다.1)  종래 사천왕사 창건에 관련해서는, 『三國遺事』 문호왕법민조2) 및 『三國史記』 문무왕 19년조3)에 의거해, 670년 당 침공에 대한 방어책으로서 明朗법사에 의해 신유림에의 사천왕사 창건이 건의되었고, 긴박한 상황하에 우선 明朗의 교시에 따라 彩帛으로써 절을 짓고 문두루비법을 행하여 당군을 수몰시킨 후, 절을 고쳐 지어 문무왕 19년(679)에 낙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그런데, 근년 사천왕사지 발굴조사를 통해 금당지 내 선축기단유구4)가 확인되었고 이것이 선대금당지로 간주되면서, ‘선대금당’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나당전쟁발발 이전 창건설5), 통일신라후기 금당증축·익랑설치설6) 등이 대두, 사천왕사 건립과정에 관한 제설은 착종·병립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원건립과정에 관한 문제는, 사지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일련의 유구를, 동시대 일원적 계획 하에 조영된 사원건축의 잔존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시대와 구상을 달리하는 둘 이상의 조영계획 즉, 이원적 혹은 다원적 계획에 의해 점진적으로 완성되어간 사원의 그것으로 볼 것인지에 직결된다. 藤島亥治郎의 연구7) 등을 비롯하여, 지표조사 결과에 기초해 제시되었던 건축사학 분야에서의 사천왕사 관련 제설을, 근년의 발굴조사 성과에 비추어 검증하고, 여전히 유의미한 지적만을 가려, 이를 발판 삼아 연구를 한층 진전시키는 일은 목전의 과제로 남아 있지만, 그러한 작업 어느 것도 건축 유구의 편년에 기초하게 되는 바, 그 선결과제로서 상기 문제는 재검토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본 연구는, 근년 사천왕사지 발굴조사보고서 등을 통해 대두된, ‘선대금당’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제 편년관을 건축사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나아가 새로 확인된 금당지 내 선축기단유구의 축조시기와 성격에 대한 재해석을 기초로 사천왕사 건립과정을 재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본고의 구성에 있어서는, 먼저 사천왕사 건립과정에 관한 제설을 발굴조사 전·후로 구분해 정리하고, 이어 선대금당의 존부, 창건 관련 사료 간 부정합, 금당지 내 선축기단유구 해석 등 핵심 쟁점 사항들을 검토한 후, 마지막으로는 고찰 내용을 기초로 하여 사천왕사 건립과정을 재정리하는 것으로 한다.

2. 사천왕사 건립과정에 관한 제설

2-1. 발굴조사 이전(∼2006)

발굴조사 이전의 견해를 예시하자면 다음과 같다. 文明大(1976)는8) “676년 드디어 당군을 완전히 몰아내자 그것을 기념하는 뜻에서 사천왕사를 창건하기 시작하여 680년에 완성”했다고 보았고, 崔完秀(1979)는9) “四天王寺의 年代를 三國遺事의 기록대로 하면 文武王 一○年으로 볼 수 있는데”, 이미 사천왕사가 존재하고 있었다면 그렇게 갑자기 채백을 쳐 놓고 밀법을 행할 필요가 없었을 것인 바, “그 以前에는 四天王寺가 없었다는 얘기로 봐야”한다고 했으며, 姜友邦(1979)10)은 “六七九年 四天王寺가 본격적으로 建立”되지만, 六七○年에 假設한 四天王寺야말로 “四天王寺가 創建되는 不動의 緣起를 보여”주는 바, “실질적인 四天王寺의 創建은 文武王十年 六七○年으로 보아야 타당하다”고 했다. 또 張忠植(1996)은11) “명랑에 의한 문두루 비법이 행해지던 때는 (중략) 壇席을 마련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며, 이후 사천왕사가 건립될 당시(679) 가람의 균형을 고려하여 좌우대칭으로 마련”되었을 것으로 판단했고, 金相鉉(1996)은12) “狼山의 神遊林에 四天王寺를 창건하기 시작한 것은 문무왕 10년(670)”이었지만, “이때는 당의 침공으로 인한 급박한 상황이었기에 채색비단을 이용해서 임시로 지었던 것이고, 실제로 이 절이 낙성된 것은 문무왕 19년(679)”이었다고 했으며, 郭敬淳(2004)은13) 사천왕사를 “670년에 임시로 초창된 후 679년에 완전한 사원의 모습을 갖추어 새롭게 창건된 사찰”로 정의하며, 단석은 “초창 당시 위치가 정해져 있었고”, “679년에 통일을 기념하여 새로운 사원의 모습으로 갖추어질 때, 쌍탑은 오방의 배치에 맞게 사찰의 전방에 (중략) 금당은 중앙에” 배치된 것이라고 했다.

발굴조사 이전에 제시된 이들 견해 간에는 사료 해석상 엇갈리는 부분도 없지 않다. 즉 문호왕법민조상, 문무왕 10년(670)의 ‘以彩帛營寺 草搆五方神像’을 ‘草創’으로 볼 것인지 ‘始創’으로 볼 것인지, ‘後攺刱寺’의 ‘攺刱’은 調露元年己卯(679) 당해 년에 이루어진 것인지 그보다 이른 시점에 시작된 것인지, 상기 ‘以彩帛營寺 草搆五方神像’의 일이 679년 낙성된 사천왕사의 규모· 배치계획에 영향을 미쳤는지 아니면 무관한 것이었는지 등의 문제에 있어 견해차를 보이는 것이 그것이지만 670년 가설, 679년 낙성이라고 하는 사원건립과정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의 틀은 공유되어 왔다고 판단된다.

2-2. 발굴조사 이후(2006∼2018)

한편, 이러한 종래의 일반적 견해에 대해 다른 관점에서의 편년이 시도되기 시작한 것은, 근년 전면적인 사지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였다.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는 2006년부터 2012년까지 7년에 걸쳐 사천왕사지발굴조사를 실시했고, 그 성과를 연차적으로 세 권의 보고서로 정리·발간했는데, 각각의 새로운 견해들은 주로 이들 보고서를 통해 대두되었다. 그 요지와 논거를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四天王寺I』(2012)에서14)는 금당지 내 선축기단유구와 후축기단부의 축조방식이 토석교축·혼축으로 대비되는 점, 기단지대석 상에 두 가지 유형의 탱주 홈이 혼재하는 점, 동서계단 양측 기단지대석의 형태와 크기가 타 개소의 것과 상이한 점, 하층기단 초석(이하 차양칸 초석으로 함)의 경우 완형의 것으로부터 일부를 깨어 기단지대석에 붙여 설치한 점 등을 금당 ‘확장’(증축)의 증거로 간주하고, 금당지 이형대석 하부에서 출토 된 목탄시료의 AMS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A.D.700)를 참고로 하여, 사천왕사 창건(679)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금당 ‘확장’(증축) 및 익랑 설치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발굴조사 이전의 제 견해에 대비해, 이 보고서에서는 현 금당지를 창건 당시의 것이 아닌, 후대 어느 시점에선가 ‘확장’(증축)된 것의 잔존으로 보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이 같은 견해는, 무엇보다도 금당지 내 선축기단유구를 ‘선대금당지’로 해석한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후속 고찰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四天王寺III』(2014)에서는,15) 『三國遺事』 선덕왕 지기삼사조16) “王果崩…後十餘年文虎大王創四天王寺於王墳之下”의 기사에 착목, 선덕왕 崩御년(647)으로부터 기산해 10∼20년이 되는 기간과 문무왕 재위기간(661∼681)이 겹치는 661∼667년 사이, ‘선대금당’과 목탑으로 구성된 사천왕사가 창건되었고, 나당전쟁기인 670∼676년 사이 단석이 조성되었으며, 이후 676∼679년 절을 고쳐 지어 이때 ‘후대금당’과 각 회랑, 강당 및 귀부·석교 등이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나당전쟁발발 이전 창건설’로 가칭함)하는 한편, 『三國遺事』 아도기라조에17) 황룡사·분황사·영묘사는 ‘始開’, 사천왕사는 ‘開’로 기록된 점을 들어, 사천왕사의 ‘開’ 이전에 ‘始開’가 있었다고 전제하고, ‘創’과 ‘攺刱’ 역시 다른 것이므로, 문호왕법민조의 조로원년(679)은 창건 연대가 아닌 개창 연대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제창했다. 또 여기에 덧붙여, ‘선대금당’을 세우기 이전에 “낭산의 구릉을 편평하게 잘라 사역을 확보하고 성토를 몇 겹으로 다진 뒤 대지를 구축”하는 작업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그것은 상당한 기간을 필요로 하는 바, 나당전쟁 시가 아닌, 선덕왕 붕어 후 십여 년 뒤이거나 적어도 나당전쟁 이전 시기에 일련의 작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 설은, 전술의 『四天王寺I』(2012)에서 금당지 내 선축기단유구를 ‘선대금당지’로 해석함에 따라 선·후대라고 하는 시기, 그리고 각 시기별 가람배치 양상에 대한 해명이 요구되었고, 이에 대한 답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도출된 것인데 발굴조사 성과를 부감해 가면서 종래 사천왕사 창건 연대에 관련해서는 그다지 중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선덕왕지기삼사조를 재검토해, 이를 근거로 사천왕사 건립과정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시도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 되는 것은, 『四天王寺I』(2012)에서와는 달리, ‘후대금당’을 679년에, ‘선대금당’을 나당전쟁발발이전에 각각 편년했다는 점이다. 이 같은 편년관의 차이는 ‘선·후대 금당지’ 기단부 내 출토유물이 없었거나 소량의 파편에 그쳐 어느 쪽도 유물에 의한 축조시기 판단이 불가했던 점에 기인하는 것으로 판단되지만, 사천왕사 건립과정 상 ‘선대금당지’를 자리매김함에 있어 사료적 한계가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사원건립과정에 관한 의론은 이로써 일단락된 것이 아니었다. 최종 발굴조사보고서인 『四天王寺III』(2014)에서의 설은 2년 후, 『四天王寺 I』(2012)의 견해에 기초한, 國立慶州文化財研究所 내부로부터의 이견에 직면하게 된다.

金東河(2016)는18)『三國史記』 문무왕 19년조, 『三國遺事』 문호왕법민조의 기사를 근거로, 사천왕사는 679년에 창건되었다고 거듭 밝히고, 건물지 기단축조 방식 및 건물지간 상대위치관계 등으로부터 ‘선대금당’·목탑·단석, 삼면회랑, 중문, 강당 및 강당 동서편 건물이 창건 당시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 그는 최근 학술대회(2018)에서19) 『四天王寺I』(2012)에서의 금당지 이형대석 하부 출토 목탄시료의 AMS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650AD(94.3%)820AD)를 근거로, 금당 증축 및 익랑 설치가 통일신라후기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견해(통일신라후기 금당증축·익랑설치설로 가칭함)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 같은 견해는 『四天王寺III』(2014)에 제시된 ‘나당전쟁발발 이전 창건설’을 우회적으로 부정하고 『四天王寺I』(2012)의 견해가 國立慶州文化財研究所의 최종적 편년관에 가까운 것임을 재공표하는 데에 그 본질을 두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논란의 여지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상기 학술대회에 토론자로서 참가했던 崔兌先은20) 익랑이 창건기(679)가 아닌 후대의 금당 증축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金東河의 견해에 대해, “익랑과 동서회랑이 연결되는 부분에서 증축이라고 볼 수 있는 고고학적 정황은 없어” 보이는 점 등을 지적했다. 부감컨대, 발굴조사 이후에 제시된 상기의 세 가지 견해는, ‘선대금당’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점에서 발굴조사 이전의 제 견해와는 대별되는 한편, ‘선·후대 금당’을 각각 어느 시기에 편년할 것인가의 문제에 있어서는 서로 궤를 달리하고 있다.

2-3. 소결

이상, 사천왕사 건립과정에 대한 제 견해를 발굴조사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정리하자면, 발굴조사 이전에는 주로 한정된 문헌사료에 기초해 사원건립 과정을 파악해 왔고, 때문에 해석상에 부분적인 견해차는 있었지만 전체적인 이해의 윤곽은 공유되어 왔다고 할 수 있는 반면 발굴조사 이후에는 새로 확인된 고고학적 사실들을 문헌사료에 비추어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제설이 병립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하겠다. 이 사원건립과정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발굴 기관을 중심으로 검토가 이루어져 그 고찰 결과가 보고서 등을 통해 이미 제시되어 있는 상태이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확정적인 결론에 도달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제시되어 왔던 사천왕사 건립과정에 대한 주요 견해들을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표 1. 사천왕사 건립과정에 대한 연구자별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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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선대금당'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제 편년관 에 대한 건축사적 관점에서의 비판적 검토

3-1. 금당증축설의 4가지 근거에 대한 재검토

『四天王寺I』(2012)에서는, 금당지 내 선축기단유구와 후축기단부의 축조방식이 토석교축·혼축으로 대비되는 점 등을 근거로 삼아, 현 금당지를 창건 당시의 것이 아닌, 후대 어느 시점에선가 ‘확장’(증축)된 것의 잔존으로 간주했지만, 이에 대해서는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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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선대·후대 금당’ 기단부 범위 (國立慶州文化財研究所, 「慶州四天王寺址發掘調査(5次) : 자문회의 자료」, 2010, 5쪽)

첫째, 금당지 발굴조사에서 선축기단유구와 관련된 초석적심군의 설치흔적은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이점에 대해 보고서에서는, “현재 잔존하는 후대금당지의 기단보다 선대금당의 기단부가 더 높게 조성되었으나, 확장하면서 기단부 상면을 일부정지해서 얕게 조성된 선대금당 초석의 적심이 제거되어 그 흔적이 확인되지 않는 경우”를 상정하고 있으나21) 이른바 ‘선·후 대금당 기단’ 간 사선방향(\) 경계면에 대해 '선대 기단부에 깔려 있는 돌 때문에 직선으로 자르지 못하고 지그재그 모양으로 기단토가 잘려 있다'고 기술22)되고 있는 것에 반해, [그림 4]에서와 같이, 토석교축부분(7단)과 그 위 60㎝ 이상의 성토부 사이의 토층 경계면은 정연한 바, 削平을 확신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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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북쪽Tr.동벽토층단면 그림 3. 동쪽Tr.서벽토층단면 (그림2,3출처: 「慶州四天王寺址發掘調査(5次) : 자문회의 자료」, 2010, 5쪽)

또 보고서에서는 현 금당지 기단에 대비해, 작고 보다 높은 형태의 '선대금당' 기단을 가정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림 5]상, 적어도 가람중축선을 기준으로 한 금당지 남편 트렌치조사로부터는, 선축기단유구에 대응하는 계단의 설치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금당지 내 선축기단유구 상에 지붕과 기둥·벽을 갖춘 항구적인 前身건물이 세워졌다고 볼 수 있는 확실한 근거는 사실상 없는 것이다.

둘째, (동서계단지 양측을 제외한) 기단지대석 상의 탱주홈 위치는 모두, 현재 남아 있는 금당지의 기단 크기, 주칸, 계단의 위치·폭 그리고 개별 기단지대석의 위치·길이와 맞물려 있기 때문에 기단지대석 윗면에 혼재하는 두 가지 유형의 탱주홈 어느 것도 각각의 지대석이 현 위치에 놓인 이후에 비로소 새겨진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상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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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금당지 남편트렌치 기단부 토층도 (『四天王寺I : 金堂址發掘調査報告書』, 2012, 119∼120쪽, 도면 15. 이 기단부 토층도에서는 토석교축 7단 위 성토부까지 포함해 ‘선대금당’으로 간주하고 있는데, 삭평의 상정은 이에 부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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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금당지 ‘선대 기단’ 부석 마지막단 평면도 (『四天王寺I : 金堂址發掘調査報告書』, 2012, 128쪽, 도면 19; 같은 책, 151쪽, 도면 27의 금당지 석조물유구번호 일부를 가필했음)

각 탱주홈의 위치는 금당지 중심을 기준하여 거의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각 기단지대석의 끊긴 위치는 동 기준 좌우 비대칭이다. 기단지대석의 길이가 제각기 다름으로 인한 것이지만, 두 가지 유형의 탱주홈이 어느 시점에 설치되었는지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가 여기에서 찾아진다. 즉 현 상태로부터 기단 크기, 주칸, 계단의 위치·폭 중 어느 하나가 바뀌게 될 경우, 기단지대석 일부의 재배치나 대체는 불가피하며, 개별 기단지대석의 상대위치가 바뀌면 바뀔수록 기존의 탱주홈 전부가 금당지 중심을 기준하여 좌우 대칭 되는 자리에 다시 놓이게 될 가능성은 희박해지는 것이다. 이는 현 상태의 유구로부터 조건변화를 가정했을 때 예상되는 문제들이지만, 역으로 현 상태에 이르는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조건변화와 그렇지 않은 것들을 판별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단서가 된다. 보고서에서는 “기단 지대석의 탱주홈의 변화는 금당지 기단의 규모 변화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았고23), 이를 금당 ‘확장’(증축)의 한 증거로 제시하고 있지만, 이른바 ‘선대금당’의 기단 크기, 주칸, 계단의 위치·폭은 물론, 그러한 것들이 독립적인 건축요소로서 존재했었는지조차 불명한 바 그 논리적 비약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기단지대석 상 탱주홈 유형의 혼재 양상은 기단외장재료 및 공법에 대한 인식 변화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될 뿐, 기단 크기의 변화, 금당 '확장'(증축)과는 무관한 것으로 판단된다 할 것이다.24)

셋째, 동서계단 양측 기단지대석의 보충에 대해서는, 차양칸 설치에 따른 계단 폭의 축소 조정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된다.25)  상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금당지 남·북편 각 2개소의 계단자리에서 기단지대석은 끊긴다. 그 단부에는 탱주홈이 각 1개소씩 두어졌고, 기단지대석 외연의 1단 쇠시리는 이들 탱주홈 앞에서 일단 마감되는데, 서편 계단지에 잔존하는 계단지대석 2점 ([그림 5], 29·30)의 외연에서도 1단 쇠시리가 확인되는 바, 기단지대석 단부 탱주홈 앞에서 양자 쇠시리가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당해 위치에 계단이 들어섰음을 재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인데, 동서계단 양측의 경우 남·북편의 경우와 달리 정합하지 않는 양상을 보인다. 즉, 기단지대석의 끊김과 그 단부 상의 탱주홈, 기단지대석 외연 쇠시리의 마감 공히 본채 측면 어칸의 양측 기둥열 상에서 확인됨에도, 각 계단지대석은 그 기둥열 부근이 아니라 그로부터 측면 중앙 쪽으로 1m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고, 기단지대석 단부와 계단지대석 사이에는 쇠시리 없이 길이·높이만 맞춰 지대석을 놓아 공백을 메꾸고 있는 것이다. 보고서에서는 이를 금당 ‘확장'(증축)과 관련하여 보수했던 흔적으로 간주하고,26) 금당 증축의 증거로 내세운 것이다. 그런데 동편·남동편 계단지에 있어, 기단지대석 외연 쇠시리가 끝나는 지점 간의 거리(4,386㎜, 2,664㎜)를 당척으로 환산할 경우27) 각각 15척, 9척으로 整除되는 바 주목된다. 그 이외의 개소에서 수치상 약간의 편차를 보이기는 하지만, 계단 폭의 설정과 기단지대석 외연 쇠시리의 마감 위치는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동서계단의 폭은 당초 본채 측면 어칸을 기준하여 15척으로 설정되었고,28) 이후 어떠한 이유로 축소 조정되었던 것 아닐까 추찰된다. 그 이유란 어떤 것이었을까. 동서계단 양측 기단지대석의 끊김과 그 단부 상의 탱주홈, 기단지대석 외연 쇠시리의 마감 공히 본채 측면 어칸의 양측 기둥열 상에서 확인됨은 이미 전술했다. 그런데 그 기둥열 상에서 확인되는 것은 다름 아닌 차양칸초석이다. 차양칸은 증설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29) 고찰컨대, 금당 차양칸 증설이 결정됨에 따라 당초 본채 측면 어칸에 맞춰 설정된 동서계단의 폭은, 차양칸초석을 본채 측면 어칸 양측 기둥열에 맞춰 설치하기 위해 축소 조정되어야 했고, 결국 남·북편 계단 폭과 더불어 9척으로 정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어 계단 폭 축소 조정으로 인해 비게 된 부분에 쇠시리 없이 길이와 높이만 맞춰 지대석을 보충 설치하고, 본채 측면 어칸 양측 기둥열에 맞춰 차양칸초석을 놓은 것이 현재와 같은 상태로 결착하게 된 일련의 경위가 아닐까 한다.

넷째, 차양칸초석에 대해 보고서에서는, 기존에 완형으로 사용되던 것을 후대에 금당 기단의 ‘확장’에 따라 일부를 깨어 재사용한 것으로 보았다.30) 그러나 차양칸초석이 본채초석에 비해 보다 높은 주좌(12∼15㎝)를 갖게 된 것은, 차양칸 설치에 있어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상층기단지대석과 구 지표와의 레벨관계에 의해 하층기단의 높이가 제한될 수 밖에 없었던 여건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추찰된다.31) 즉 하층기단을 높일 수 없는 여건하에서 우수로부터 차양칸기둥 하부를 보호하기 위해 취한 조치로 이해되는 바, 차양칸초석 그것은 재사용된 것이 아닌, 목적과 여건에 맞게 제작 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이 경우, 상층기단 지대석에 접하는 초석면의 가공상태가 거칠다는 점은 설치상의 문제로 국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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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금당지 상층기단 지대석·구 지표·하층기단면·차양 칸초석 간 높이관계 (『四天王寺I : 金堂址發掘調査報告書』, 2012, 107쪽, 사진137)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볼 때, 前身건물 즉 ‘선대금당’이 존재했다는 확실한 건축·고고학적 근거는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요컨대, 금당지 내 선축기단유구와 후축기단부에 관해서는 기단축조단계에서 설계변경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다시 후술하기로 한다.

3-2. 선덕왕지기삼사조의 '創'의 해석 문제

『四天王寺III』(2014)의 ‘나당전쟁발발 이전 창건설’에서는, 『三國遺事』 선덕왕지기삼사조 “王果崩…後十餘年文虎大王創四天王寺於王墳之下”의 기사에 착목해, 661∼667년 사이, ‘선대금당’과 목탑으로 구성된 사천왕사가 이미 창건되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만약 설에서 제창하는 것처럼 661∼667년 사이 ‘선대금당’과 목탑으로 구성된 사천왕사가 창건되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면, 문호왕법민조상 670년의 시점에 사천왕사의 창건이 제안되는 것은 모순이며, 긴박한 상황하에 彩帛으로써 임시로 절을 지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32)  전술한 대로, 금당지 내 선축기단유구와 후축기단부에 관해서는 기단축조단계에서 설계변경이 있었다고 보일 뿐, 前身건물 즉 ‘선대금당’이 존재했다는 확실한 건축·고고학적 근거는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논점은, 사천왕사 창건과 관련해 문호왕법민조와 선덕왕지기삼사조의 기사 내용이 정합하지 않는다는 점, 즉 사료간 부정합의 문제로 옮겨지는 바,33)  이어 양자와 타 사료와의 관계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우선, 三國遺事 문호왕법민조 기사는 동 의상전교조34) “以咸享元年…命神印大徳明朗假設宻壇法禳之 國乃免”, 동혜통항룡조35) “…有髙僧明朗入龍宫得神印(梵云文豆婁此云神印) 祖創神逰林(今天王寺) 屢欀隣國之冦”의 기사와 정합하는 반면, 동 선덕왕지기삼사조의 기사 내용에 대응되는 사료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음 전자의 경우, 鷄林道判官 겸 知子營總管으로 임명되어 押運使의 역할을 수행하던 郭行節이 咸亨 2年(671) 풍랑으로 인해 배가 부서져 익사하였다는 기록36) 등으로부터 “비록 설화적이지만, 일정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이를 확대·과장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반면,37) 후자에 관해서는 “신라 하대에 도리천장지를 예언했던 안함의 전기와 비문이 찬술되면서 안함의 예언과 함께 주인공인 선덕왕도 재조명”된 것이며, 선덕여왕의 뛰어난 능력을 내용으로 하는 지기삼사의 형성은, 신라 하대에 여왕으로 즉위했던 眞聖王의 정통성 확보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고 이해되고 있다.38) 이와 같이, 사료의 신빙성이라는 측면에서만 논하자면, 후자를 전자에 우선하기는 어렵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양자가, 來源과 傳承 경로를 달리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는 바,39) 선덕왕지기삼사조의 ‘創四天王寺’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는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三國史記』선덕왕 16년조에 의하면 선덕왕의 崩御는 647년 1월의 일이다.40) 『隋書』에 기록된 신라의 殯葬기간 1년을 취해41) 선덕왕의 葬事를 붕어년으로부터 1년 후로 가정하고, 이를 기점으로 십여 년 후를 다시 기산 할 경우, 상기 설과 동일한 방식에 의하자면, ‘創’은 661∼668년으로 조정된다. 다시 殯葬기간 3년을 가정 할 경우,42) ‘創’의 하한은 670년 즉, 긴박한 상황하에 彩帛으로써 절을 지은 그 해가 된다. 그러나 ‘後十餘年’의 ‘餘’는 ‘그 수를 넘음’의 뜻으로 쓰이는 접미사로, 연대의 하한에만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즉 殯葬기간은 ‘創四天王寺’의 이해에 크게 영향을 미칠 만한 요소가 되지 못한다고 판단된다. 그렇다면 다시, 지기삼사조의 ‘創四天王寺’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海東高僧傳』에 의하면,43) 安含(?∼640)은 讖書에 “第一女主葬忉利天…四天王寺之成”을 예언 했었고, 翰林 薛某가 왕명을 받들어 새겼다는 비명에는 “后葬忉利 建天天寺”라 적혀졌던 바, 일련의 구상은 安含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44) 추측컨대, 일찍이 선덕왕대 安含에 의해 立案되었던 사천왕사 건립이, 선덕왕(?∼647)을 낭산에 장사지낸 지 10여년 후, 문무왕 재위초(661) 수면 위로 부상해 논의 를 거쳐 확정되었고, 그 과정에서 “后葬忉利 建天天寺”의 설정이 불경에 이르는 바와 정합한다는 사실이 비로소 알려지게 된 것이, 후대에 기사와 같은 형태로 남게 된 것 아닌가 한다. 한편 ‘나당전쟁발발 이전 창건설’에서는, ‘선대금당’을 세우기 이전에 “낭산의 구릉을 편평하게 잘라 사역을 확보하고 성토를 몇 겹으로 다진 뒤 대지를 구축하였다”고 지적하고, 일련의 과정에 상당한 기간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점을 들어, 문호 왕법민조의 670년보다 이른 시기, 즉 선덕왕지기삼사조에 기록된 선덕왕 붕어 후 십여 년 뒤 혹은 그로부터 나당전쟁 발발이전의 기간에 이미 일련의 작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45) 신라중고기 興輪寺의 경우, 법흥왕 14년(527) 터를 잡고, 21년(535)에 天鏡林을 크게 벌채하여 처음으로 공사를 일으켜, 진흥왕 5년(544) 낙성되기까지 약 17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는데46) 이에 비추어 설의 상기 견해는 일리 있다고 여겨진다. ‘선대금당’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점은 한계로 지적되지만 말이다. 이상의 제반 내용들을 종합해 볼 때, 선덕왕지기삼사조의 ‘創’에 관해서는 사천왕사 건립의 확정과 그에 따른 부지조성공사의 시행 정도로 이해해 두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3-3. 문호왕법민조상의 ‘攺刱’에 관한 문제

『四天王寺III(2014)』의 ‘나당전쟁발발 이전 창건설’에서는, 문호왕법민조상의 ‘攺刱’을 선덕왕지기삼사조상의 ‘創’에 대한 고쳐 지음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一然은 혜통항룡조에서 670년의 일을 ‘祖創’으로 적고 있는 바, 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47)  문호왕법민조상의 ‘攺刱’은 ‘以彩帛營寺’ 즉, ‘祖創’에 대한 고쳐 지음으로 보는 것이 보편타당한 해석이라고 판단된다.

한편, 문호왕법민조상 '攺刱'의 시점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문무왕 10년(670)의 “以彩帛營寺草搆五方神像”을 ‘草創’으로 볼 것인지 ‘始創’으로 볼것인지, ‘後攺刱寺’의 ‘攺刱’은 調露元年己卯(679) 당해 년에 이루어진 것인지 그보다 이른 시점부터 시작된 것인지 등의 문제에 있어, 종래 견해차가 있어 왔기 때문이다. 문호왕법민조에서 一然은 당 수군 1차 수몰(670)에 이어 “後攺刱寺 名四天王寺 至今不墜壇席”이라 적고, 여기에 “國史에는 이 절의 攺刱이 調露원년 己卯에 있었다고 하였다”라고 주를 붙였다.48) 그런데, ‘以彩帛營寺’ 당시의 것을 현재 사천왕사지 유구로부터 확인되는 규모의 것으로 고쳐 짓는 일이 調露원년(679)의 수개월 만에49)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여겨진다. 이에 관련해, 당 수군 2차 수몰(671) 후, 당 髙宗과 朴文俊 간의 問答에50) “厚荷上國之恩一統三國 欲報之徳 新刱天王寺於狼山之南 祝皇壽万年長開法席而已”라 있어 주목된다. 여기에서의 ‘新刱’은, 670년 있었던 ‘以彩帛營寺’의 일을 지칭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문답을 계기로 곧 절을 살펴보도록 파견된 당 사신에 대해 신라 조정이, 사천왕사의 남쪽에 일부러 새 절을 지어 거짓으로 유도하는 수고를 감내해 가면서까지 사천왕사를 감추려 했던 일은, 일시에 거두어들일 수 있을 만한 성격의 것이 아닌 사천왕사가 이미 실체로서 존재하고 있었음을 傍證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新刱’은 ‘以彩帛營寺’ 당시의 것을 고쳐 짓는 ‘攺刱’에 다름 아니며, 그것은 상기의 문답 이전에 이미 이루어졌거나, 문답 당시 이루어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찰된다. 이에 문답의 시점은 ‘新刱’ 즉 ‘攺刱’ 착수 시점의 하한으로 간주되는데, 그것에 관해서는, 당 수군 2차 수몰(671)에 이어, ‘是時’라 하며 문답에 관한 내용이 전개되고 있는 바, 그 직후로도 보이지만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다. 다만, 문답에 따른 당 사신의 派遣·歸朝·上奏 이후, 強首의 ‘請放仁問表’로 仁問이 석방된 일에 주목된다.51) 673년 1월, 強首에게는 관등 ‘沙湌’ 등이 내려지는데,52) 이는 強首의 ‘請放仁問表’를 읽은 당 髙宗이 눈물을 흘리며 왕의 동생 仁問을 풀어 준 것에 대한 포상으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53)  그렇다고 한다면, 상기 문답은 673년 1월 이전의 일이 되며, 그것은 ‘新刱’ 즉 ‘攺刱’ 착수 시점의 하한이 되는 바, 一然의 주에도 불구하고, 사천왕사의 ‘攺刱’이 시작된 것은 670∼672년 사이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3-4. 선축기단유구의 축조시기와 성격 재고

선축기단유구의 축조시기와 성격에 관해서는, 발굴조사 이후에 제시된 제설로부터 이미 검토되어 있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선대금당'의 존재는 인정되지 않는 바, 재고해 둘 필요가 있다. 사료는 한정되어 있어, 현재로서는 유구 자체로부터 단서를 찾아내고 이를 문헌 사료에 비추어 가며 윤곽을 파악해 가는 방법밖에 없을 듯하다. 이하 선축기단유구와 금당지, 그리고 부지 간의 관계로부터 상기 문제에 대해 재고해 보고자 한다.

선축기단유구와 금당지, 양자의 중심은 남북방향으로 어긋나 있다. 이를 선후관계에 따라 환언하자면, 후자의 중심은 전자를 기준하여 북으로 약 2.55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또 선축기단유구와 금당지 양자의 평면크기를 비교하자면, 전자의 경우 동서길이 18.96m, 남북길이 12.01m(토석교축 최하단 기준), 후자의 경우 동서길이 20.70m, 남북길이 14.43m(상층기단 모서리 탱주홈 기준)으로 확인되는데, 후자는 전자에 대비해 동서 1.74m, 남북 2.42m가 크다. 『四天王寺I』(2010)에서는, 전자의 南을 기준으로 하여 후자가 北으로 확장되었으되, 동서방향의 중심은 이동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했다.54)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사역 전체를 부감해 가며 이 같은 부정합의 양상을 나타내게 된 경위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선축기단유 구의 중심은 가람남북중축선 상에 위치한다. 이는 선축기단유구와 금당지, 양자의 중심이 남북방향으로 어긋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축기단유구가 사천왕사 건립계획과 무관한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四天王寺III』(2014)에서는 “선대금당지를 세우기 이전에 낭산의 구릉을 편평하게 잘라 사역을 확보하고 성토를 몇 겹으로 다진 뒤 대지를 구축하였다”고 보았다. 선축기단 유구의 위치는 부지조성 후, 측량을 거쳐 정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하 선축기단유구와 부지와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살펴보고자 한다.

가람일곽 내 구 지표고는 53∼54m로 대체로 평탄하고, 가람일곽남측, 귀부·비각지 부근의 구 지표고는 47∼48m로 전자와는 6m가량의 레벨차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는데,55)  GPR탐사결과로부터56) 남회랑지에서 귀부비각지 사이 구간에는 따로 석축을 두지 않고, 경사면으로 처리했던 것으로 보이는 바, 부지조성공사 시,평탄면의 南限은 현재의 남회랑지 부근까지였다고 파악된다. 그런데, 남회랑지 외측주근(중문지 중심)으로 부터 선축기단유구 중심까지의 거리는 44.10m로, 이를 당척57)으로 환산하면 약 150척이 얻어진다. 이로부터 추찰컨대, 평탄면의 南限을 기준하여 方 300唐尺(方50步)의 가람규모가 구상되었고, 그 중심에 선축기단유구가 축조된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정식적인 조영계획이 확정되기 이전의, 잠정적인 초기구상에 의한 것이었다고 판단된다. 이후 가람 일곽규모 및 일곽 내 당탑 등의 상대위치와 규모가 확정·건립되는 단계에 있어서, 다시 부지 평탄면의 南限을 기준하여 북으로 가람일곽이 전개되고, 새로 확정된 일곽 내 금당의 상대위치와 규모가 구현된 결과, 선축기단유구와 금당지 양자, 현재와 같은 양상으로 남게 된 것이라 추찰된다. 선축기단유구의 축조방식(토석교축 7단)은 상부 구조물의 하중을 염두에 두었음을 시사하며, 전술한 바와 같이 선축기단유구의 중심은 가람중축선 상에 위치하는 바, 그것의 축조과정에 있어서 어떠한 식으로든지 ‘금당’을 인식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판단된다. 요컨대 선축기단 유구는, 가람규모계획, 당탑 등의 배치 및 평면계획 등이 정식 확정되기 이전에, 그러나 이후 금당 건립 시 쓰일 것을 전제로 하여, 초기구상에 기초해 잠정된 가람일곽의 중심에 축조된 기단, 그것의 잔존이 아닌가 한다. 단, 앞서 검토한 바와 같이 선축기단유구 상에 지붕과 기둥·벽을 갖춘 항구적인 건축물이 세워졌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또 선축기단유구의 축조시기에 관련 해서는, 선덕왕지기삼사조에 기록된 문무왕 재위초기까지 상한을 올려볼 수도 있겠지만, 초기구상단계임에도 불구하고 일부를 구현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계기가 있었을 것이라는 관점으로부터, 문호왕법민조상 670년에 있었던 ‘以彩帛營寺’ 즉 ‘祖創’과 연관지어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후 가람규모계획, 당탑 등의 배치 및 평면계획 등이 정식 확정되고, 새로 확정된 일곽 내 금당의 상대위치와 규모가 부지 상에 구현되었을 당시, 선축기단유구는 거의 그대로 금당기단의 일부로 다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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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사천왕사지 추정가람배치도 (필자 작도. 『四天王寺I : 金堂址發掘調査報告書』, 2012, 63∼64쪽, 도면4.사천왕사지 유구배치도를 바탕으로 했음)

3-5. 금당 차양칸 증설의 경위

여기까지 ‘선대금당’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제 편년관에 대해 건축사적 관점에서 재검토해 왔는데, 이하, 여기에 금당 차양칸 증설의 경위에 대해 약간의 고찰을 더해두고자 한다. 통일신라기 가람인 感恩寺·高仙寺·佛國寺의 경우, 익랑 내측단부 초석은 금당 측면 계단 지대석 끝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놓여 졌던 것으로 보인다. 유구도면상58) 익랑지 내측단부 초석적심군으로부터 금당지 측면 기단지대석까지의 거리는 각각 1.34m, 1.52m, 1.65m로 확인되는데, 익랑 도리칸의 1/2을 익랑 측면의 박공내밀기로 가정하고59) 익랑지내 측단부 초석적심군을 기준하여 금당지 쪽으로 이를 전개해 보면 대체로 금당지 측면 계단자리 중간 즈음에 이르는 바, 금당·익랑 접속부는 공히 금당 처마 끝직하까지 익랑 맞배지붕의 끝이 이르고 그 익랑 측면 박공 밑에 금당 측면 계단의 일부가 놓여지는 구조 즉, 우천시에도 비에 젖지 않고 이동할 수 있는 구조였을 것으로 추찰된다.60) 그런데 사천왕사의 경우, 익랑지 내측단부 초석 적심군으로부터 금당지 상층기단 지대석까지의 거리는 3.33m전후로, 전술한 3사의 그것의 2배에 달하는 바, 금당익랑 접속부 구조 역시 달랐을 가능성이 있다. 이 부분은 좀더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금당 본채 처마내밀기는 어느 정도였을까. [그림 5]상 확인되는 금당 상층기단의 내밀기는 약 1.7m로, 본채 처마내밀기와 연관시키기에는 길이가 충분치 않다고 판단된다. 한편 금당 남동쪽 상층기단 지대석으로부터 약 160㎝ 외곽에서 하층기단지대석 ([그림 5], 28) 1점이 확인되었는데, 동시대의 感恩寺 금당의 기단내밀기가 약 3.5m에 이르는 점에 비추어, 이를 본채 처마내밀기와 관련시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별도의 차양칸 지붕 없이 하층기단 상의 기둥이 곧바로 본채의 처마 또는 공포 하부를 지지하는 구조도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서편 계단지 양측 상층기단지대석으로부터 약 120㎝ 외곽에서 확인된 지대석 2점 ([그림 5], 25·26)이다. 이들 지대석은 '주변에 깔려 있는 전돌보다 높이가 낮아, 당시에는 전돌 밑에 묻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고 있는 바,61)  그것의 설치는 하층기단면의 형성보다 시기적으로 앞섰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62)  이 점에서 이들 지대석이 본채 처마내밀기와 관련성을 갖고 있는 것 아닌가 추찰 되는 것이다. 이에 대비해 전술의 남동쪽 하층기단지대석은 차양칸 처마내밀기와 연관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익랑 도리칸의 1/2을 익랑 측면의 박공내밀기로 가정하고 익랑지 내측 단부 초석적심군을 기준하여 금당지 쪽으로 이를 전개해 보면 대체로 남동쪽 하층기단지대석의 외연을 지나는 장방형 윤곽선에 근접함을 확인할 수 있는 바, 본채 처마 끝 직하와 익랑 내측단부 지붕 사이의 간극을 별도의 차양칸 지붕이 메우고 있었던 것으로 추찰된다. 그러나 처음부터 금당 본채 처마 끝 직하로부터 동떨어진 곳에 익랑 내측단부를 설정할 이유는 없다. 그것은 익랑 내측단부 지붕을 금당 본채 처마 쪽으로 붙여 대는데 있어 저촉되는 요소가 있었던지 아니면 붙여대지 않아도 이미 필요한 기능을 충족시킬 수 있었던지 하는 주어진 여건에 입각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수순상 차양칸 증설은 익랑의 내측단부 결정 및 도리칸 분할보다 선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다만 가람중축선상 금당의 남북방향위치는 익랑을 매개로 동서회랑의 도리칸 분할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바, 차양칸 증설의 시종은 사천왕사 낙성(679) 이전의 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이제 왜 차양칸 증설이 필요하게 되었을까 하는 문제가 남는데, 이하, 구조·기능의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한 바를 적어보고자 한다. 하나는 본채 추녀부 처짐에 대한 보강 필요성이 대두되었을 가능성이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1376·중수)의 경우, 처마내밀기는 약 2.87m, 추녀·사래 내밀기는 약 4.72m로 확인되는데63)  추녀 하부에 활주를 두어 지지하고 있다. 사천왕사 금당 본채 외진주열로부터 서편계단지 양측 지대석 외연까지의 거리는 약 2.9m로, 앞서 고찰한 바와 같이 이를 본채 처마내밀기와 연관시켜 이해할 경우, 무량수전의 경우처럼 추녀부 처짐에 대한 보강이 요구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기둥 배치 개소의 다소, 초석 주좌 직경의 격차, 적심군의 유무 등으로부터 전·후자 간 대응정도의 차이는 분명해 보이는 바, 단지 본채 추녀부 처짐에 대한 보강 목적만으로 차양칸 증설을 결정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된다. 다른 하나는 繞堂을 위한 繞道의 마련이 요구되었을 가능성이다.64) 『三國遺事』 의상전교조 “湘住皇福寺時 與徒衆繞塔…其徒離階三尺 履空而旋”, 동 현유가해화엄조 “瑜珈祖大徳大賢 住南山茸長寺 寺有慈氏 石丈六 賢常旋繞 像亦隨賢轉靣”, 동 김현감호조 “新羅俗 每當仲春 初八至十五日 都人士女 競遶興輪寺之殿塔爲福㑹”의 기사로부터65) 신라불교에 있어서 繞佛·繞塔·繞堂 등이 행해졌던 사실이 확인된다.66) 낭산남록에 사천왕사가 건립될 당시 그 북북동 약 2㎞ 지점에는 중고기 불교치국책의 중심사원이자 규모·사격에 있어서 신라 제일의 사원이었던 皇龍寺가 존재하고 있었다. 발굴조사 결과, 皇龍寺 중금당(584)은 도리칸 9칸, 보칸 4칸의 본채에 차양칸 1칸을 두른 구조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는데67) 차양칸초석이 놓인 하층기단 상에서 무문전이 깔려진 상태로 확인된 바, 차양칸은 ‘중금당에 모셔진 불상을 건물 밖의 사방에서 예배하기 위한 공간’ 즉 요잡을 행했던 공간으로 이해되고 있다.68) 사천왕사 금당지의 하층기단 상에서도 차양칸초석과 더불어 보상화문전 등의 문양전이 깔려진 상태로 확인되었다. 이에 사천왕사금당 건립에 있어서 繞堂을 위한 繞道시설 마련과 연계해 차양칸 증설이 결정되었던 것은 아닐까 추찰되는 것이다.69) 또 같은 관점에서, 금당 본채 기단내밀기를 참조해 차양칸 기단내밀기를 새로 정하고 범위 내에서 가능한 한 繞道 폭을 확보하기 위해, 차양칸초석 일부를 깨어 본채 기단지대석에 붙여 설치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다고 판단된다.

4. 맺음말

이상의 고찰 내용을 바탕으로 사천왕사 건립과정을 재구성해 제시하는 것으로써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1)사천왕사 건립은 선덕왕 9년(640) 이전 안함에 의해 입안되었다. 선덕왕지기삼사조의 '創'은, 일찍이 안함에 의해 입안되어 있었던 사천왕사 건립이, 문무왕 재위초(661∼) 비로소 수면 위로 부상해 논의를 거쳐 확정된 사실을 전하는 것으로 추찰된다. 이 같은 추론에 기초할 경우, 낭산남록 상 부지조성공사의 상한은 이 시기까지 올려볼 수 있을 것이다.

(2)발굴조사 이후의 제설은 어느 것이나 ‘선대금당’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으나, 검토 결과, 금당지 내선축기단유구 위에 지붕과 기둥·벽을 갖춘 항구적인 前身건물이 세워졌다고 볼만한 확실한 근거는 사실상 없다. 금당지 내 선축기단유구는 문무왕 10년(670)의 ‘以彩帛營寺’ 즉 ‘祖創’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며, 가람규모계획, 당탑 등의 배치 및 평면계획 등이 정식 확정되기 이전에, 그러나 이후 금당 건립 시 쓰일 것을 전제로 하여 축조된 기단, 그 것의 잔존으로 추찰된다. 수순에 있어서는 낭산남록상 조성된 부지에 가람중축선을 설정하고, 평탄부 南限(현 남회랑지 부근)을 경계로 하여 방 300당척(방50보)의 가람규모를 구상, 그 중심에 기단을 축조한 것 아닌가 한다.

(3)사천왕사의 가람규모계획, 당탑 등의 배치 및 평면계획 등이 정식 확정되고, 그것에 입각해 ‘攺刱’에 착수한 것은 670∼672년 사이의 일로 판단된다. 또 ‘攺刱’에 있어 당초의 가람중축선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부지 상 평탄부 南限을 경계로 하여 북으로, 새로 확정된 가람일곽과 일곽 내 금당의 상대위치를 전개·구현한 결과, 선축기단과 금당 양자의 중심은 남북으로 어긋나게 된 것으로 추찰된다.

(4)문무왕 19년(679)의 사천왕사 낙성은 670년의 ‘以彩帛營寺’ 즉 ‘祖創’에 대한 ‘攺刱’의 완결로 이해된다. 금당 차양칸 설치는 ‘攺刱’ 착수 당시, 계획에 없었던 것으로 보이나, 금당익랑 접속부 관계로부터 볼 때, 익랑의 내측단부 결정 및 도리칸 분할보다 이른 단계에서 결정된 것이 분명하며, 익랑을 매개로 하여 가람중 축선상 금당의 남북위치와 동서회랑의 도리칸 분할은 밀접한 관계를 맺는 바, 차양칸 설치의 시종은 사천왕사 낙성(679) 이전의 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 된다.

유구 내용에 관한 이해를 포함해 부족한 부분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질정을 부탁드린다.

 

References

  1. 金富軾撰, 三國史記
  2. 一然撰, 三國遺事
  3. 覺訓撰, 海東高僧傳
  4. 長孫無忌魏徵등 撰, 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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