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 론
태초부터 인류는 이미지에 천착했다. 주체는 외부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감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그 가운데 ‘눈’이 가장 탁월한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소통에서 나아가 인류는 회화, 사진, 영화 등 다양한 시각적 매체를 문명사에 등장시켰고, 사실주의, 초현실주의, 인상주의, 표현주의, 네오리얼리즘, 모더니즘, 팝아트 등 표현형식에서도 새로운 시도를 이어왔다. 이미지를 통한 예술적 심상의 표현이라는 소기의 목적이 있었지만, 본 연구에서는 보다 근원적인 심급에서의 원인이 있음을 주장하고자 한다. 이미지는 주체로 이행하는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주체 속에 내재하는 근원적 결여를 메우기 위한 시도로써도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이상의 주장을 위해 연구자는 의식적 주체가 아닌 의식의 이면에 가라앉아 있는 무의식에서 그 근원을 찾아보고자 한다. 무의식은 주체를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영역이지만, 의식의 토대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 에너지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연구의 전개를 위해서는 라캉(Jacques Lacan)의 정신분석학을 토대로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에서의 이미지 역할과 주체에게 작용하는 이미지의 중요성을 되짚어본 후, 특히 분열의 주체에게 이미지가 환상의 매혹성으로 다가가는 과정에 주목하고자 한다. 물론 라캉을 비롯한 정신분석학에서 주체와 이미지, 이미지의 차별적 역할 등에 대해 다루었고, 영화학에서도 관객이론을 위해 정신분석학을 적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미지가 주로 정신활동에 대한 규명을 위해 활용되었고, 영화학에서는 정신분석이 관객이론과 영화분석을 목적으로 적용되었다면, 본 연구에서는 정신분석학을 통해 주체에게 작용하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절대성을 규명함으로써 보다 근원적인 층위에서의 주체와 이미지에 대해 밝혀보고자 한다.
2. 주체와 이미지
무의식은 종종 수면의 아래에 가라앉아 있는 빙산에 비유된다. 수면 위에 떠 있는 빙산이 수면 아래에 있는 빙산에 의해 지지되고 움직이는 것처럼 데카르트적 의식도 무의식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것이다. 주체1) 속에 가라않아 있는 무의식은 이미지와 매우 깊은 상관성을 가지고 있다. 주체가 스스로의 능동적 이유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작용에 따라 이미지에 끌리게 되는 이유이다.
이미지는 먼저 자아(Ego)2)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역할을 수행했다. 거울단계(Mirror Stage)에서의 과정이다. “라캉의 정신분석이론에 따르면 유아는 거울에 맺힌 스스로의 이미지에 매료되면서 시각적 이미지가 제공하는 쾌락을 경험하게 된다. 비록 스스로의 신체적 통제가 불가능하지만, 거울에 의한 환희는 욕구와 욕망의 생산에 중요한 상호작용을 발생시키면서 주체의 형성에 크게 작용한다.”3) 아기는 거울상을 보면서 자신의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하게 되고, 파편화되지 않은 스스로의 모습에 매료되었다. 거울상과 대면하기 전의 아기는 통제되지 않는 신체와 부분적으로만 볼 수 있는 이미지들로 인해 자신의 통합적 총체성을 인지할 수 없었다. 그러나 거울상은 유기적이며, 완전한 모습으로 아기에게 안도감과 함께 시각적 쾌락을 경험하게 했다. 스스로에 매료되어 나르시시즘을 느끼게 했던 이미지는 주체에게 강열한 인상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이미지는 주체에게 쾌락의 근원으로 자리 잡았고, 주체는 나르시시즘적 쾌락의 재현을 반복적으로 요구하게 되었다. 이미지가 의식의 단계를 뚫고 무의식의 깊숙한 곳에 각인됨으로써 주체는 이미지에 의한 경험의 재현을 꿈꾸게 되었던 것이다.
심리학자 앙리 발롱(Henri Wallon)은 보다 구체적인 이미지의 역할에 대해 “유아가 자신의 신체와 신체 기능들에 대해 인식하여야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을 외부 환경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반드시 외부 세계를 인식해야한다. 즉 부상하는 자기에 대한 감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거울상을 인식하고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해내는 유아의 능력이다.”4)고 했다. 유아가 거울단계에서 이미지와의 동일시를 경험한 후, 자아로 이행하는 단계에서 이미지가 정보의 수준을 초과하여 존재를 완성시키는 매개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미지에 의해 형성된 주체는 이미지의 효과를 결코 잊을 수 없게 된다.
라캉은 이미지를 통해 자아가 형성되는 일련의 과정을 상상계(The Imaginary)라고 하였는데 보다 구체적으로 “자아는 이미지가 가진 조직하고 구성하는 특성에 의해 형성되고 동시에 그 이미지로부터 형태를 취하는 이미지들의 효과이다. 자아는 통일성과 숙달된 느낌을 주는 환영적 이미지에 근거한 것이다. 자아의 기능은-파편화와 소외라는 진실의 수용을 거부하는-오인(mis-recognition)의 하나이다.”5)라고 했다.
둘째, 거울단계와 상상계에서 이미지는 주체에게 안도감과 쾌락을 부여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 이미지에 의해 오인된 주체는 소외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라캉은 “조각난 몸(fragmented body)의 이마고에 대해 언급하면서 심지어 거울상처럼 통합된 이미고들 조차도 기저에 깔린 공격성을 끌어들이는 전체성의 착각일 뿐이다”6)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총체적 주체로의 이행, 타자와의 분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는 주체에게 간과될 수 없었다. 정보의 수집을 초과하여 존재의 가치를 주체에게 부여했기 때문이다. 개별적 주체로의 인식이 스스로에게 유일성을 부여하기는 했지만, 소외라는 더 큰 시련을 안겨주기도 했다. 소외가 주체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과정이라고 할 때, 소외는 주체가 욕망하는 근원이 되고 환상을 향한 출발점이 되었다. 완성되고 통합된 이미지에 대한 주체의 환상이 반복적으로 생산, 재생산되면서 주체에게 잠재된 욕망을 부과했던 것이다.
셋째, 주체는 상상계를 거쳐 상징계(The Symbolic)로 진입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독자적으로 형성될 수 없었다. “사람은 존재하기 위하여 타자에 의해 인식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우리 자신과 동일한 우리의 이미지가 타자의 응시에 의해 매개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타자는 우리 자신들의 보증인이 된다.”7) 주체는 타자와의 관계망 속에서 형성되어 나가기에 이때에도 이미지는 대체할 수 없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미지가 주체의 형성은 물론 주체를 둘러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상호성을 전개하기 때문이다. 주체가 타자의 응시에 의해 인식되고 응시 속에서 구축되어 간다고 할 때, 주체는 내부에 근원을 둔 자발성뿐만 아니라 이미지를 통해 주체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물론 타자도 주체의 ‘눈’에 의해 인지되면서 상호 구축되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누군가의 눈이 우리를 보고 있다는 점에 의존한다. 우리가 파악해야 할 것은 응시의 선재성이다. 나는 단 한 지점에서 볼 뿐이지만, 나의 실존 속에서 나는 사방에서 응시되고 있다.”8) 주체는 타자의 응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응시의 과정에서 주체가 이미지화되고, 주체는 응시에 의해 구축되어가기 때문이다.
넷째, 이미지는 무엇보다도 무의식을 향한 통로였다. 이미지의 절대적 역할에 대해서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보다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본능은 재현표상에 의해 중개되는 경우에만 심리장치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9) 주체에게 각인된 이미지는 의식의 이면에 접근하기 위한 독보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생존을 위한 표상, 소망을 향한 기표,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 등의 이미지는 주체 속에 감추어진 이면을 비추는 통로였다. 때문에 이미지는 주체에게 긍정적 의미로 잠재되거나 혹은 무섭거나 추악하게 각인될지라도 무의식의 주체와 지대한 상호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바꾸어 상징적으로 실현이 불가능한 무의식의 대상일지라도 재현표상으로서의 위치는 언제나 확보하고 있다. 본능과 생존을 넘어 욕망의 대상을 향한 표상으로서의 이미지, 끊임 없이 생산되는 욕망의 기표로서의 이미지는 주체에게 숨겨진 절대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을 향한 기표이자 무의식에 의해 부상하는 욕망의 대리인으로서 이미지는 주체와 무의식간의 진실을 교환하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미지는 무의식 속에서 주체로의 이행, 소외에 따른 환상, 욕망의 생산과 같이 매우 복잡하며 획일화되지 않는 과정의 연쇄를 촉발시켰지만, 신체의 긴장을 낮추는 것과 같은 일차적인 과정에도 관여했다. 위험한 순간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거나,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욕구를 해소하는 것과 같은 일련의 행동에도 관여했던 것이다. 프로이트는 “욕구의 긴장을 낮추는 것은 우리의 의식 기관에 의해 유쾌한 것으로 느껴지고, 긴장의 증가는 곧 불쾌한 것으로 느껴지는데, 이를 ‘쾌락 원칙의 지배’”10)라고 했다. 주체는 쾌락원칙에 따라 신체를 안정시키기 위한 대상을 필요로 하지만 신체의 균형은 언제나 즉각적으로 해소되지 않는다. 불쾌감과 좌절감이 발생하는 이유이다. 쾌락원칙을 따라 주체가 만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상에 대한 인식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주체는 대상을 이미지로 인지한 후, 재생하여 쾌락원칙을 쫓음으로써 긴장을 해소할 수 있었다. 이미지가 신체를 안정시키는 과정에 깊숙이 관여했기에 생존을 위한 욕구의 절실함에 대응하는 이미지는 주체에게 뿌리칠 수 없는 수단이었다.
의식은 물론, 무의식의 층위에서도 이미지는 주체와 떼어놓을 수 없는 상호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자아로의 이행, 주체의 형성, 욕망의 생산 그리고 주체의 이면과의 조우에 이르기까지 이미지는 주체 속에 깊숙이 관여했기에 주체는 이미지를 뿌리칠 수 없는 것이다. 주체가 이미지들에 매료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3. 분열의 주체
“라깡의 주체는 한 곳에 존재하고(상상계 또는 실재계) 다른 곳(무의식)에서 생각하며 이들 사이에는 교차점이 없다.”11) ‘데카르트의 주체’와는 상이한 ‘무의식의 주체’는 그림 1에서와 같이 ‘사라진 코기토’로 인해 무의식으로 향하고 있다.
Fig 1.Subject of Lacan.
그러나 상징계로의 진입은 주체에게 숙명이다. 주체는 상상계를 거쳐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분열되고 분리되지만, 주체는 사회적 체계인 상징계로 나아가기 위해 무의식을 깊은 곳으로 되돌려 보내야만 했다. 무의식은 상징체계에서 수용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유보될 때 주체가 상징계로 진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열(Spaltung)은 존재가 정신에서 가장 깊숙한 부분인 자아와 의식적인 담론, 행동, 문화의 주체로 나뉘는 것을 의미한다. 라캉에 의하면 담론 혹은 보다 일반적으로 상징체계에 의해서 주체는 ‘중계되고’ 빠른 속도로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된다.”12)
주체의 근원인 무의식은 깊은 곳으로 잠재워지는 듯하고, 주체는 스스로가 능동적 주인이라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주체는 심연 속에 숨겨진 무의식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능동적인 주체라는 자각은 상징계에 위치한 주체의 그릇된 인식일 뿐이다. 실제 주체는 능동성의 이면에 자리 잡은 무의식에 의해 움직여진다. 상징체계 속에서 주체는 ‘주체화’된 것이 아니라 무의식 속에 가려진 소외, 결여, 욕망에 의해 '주체화'되어가는 것이다. “분석을 통해 잘 드러나듯 주체의 진실은 이 주체가 주인의 입장에 있을 때조차 주체 자신이 아니라 대상 속에, 본성상 베일 속에 감춰져 있는 대상 속에 있다.”13) 주체가 진정한 주인으로서의 지위를 가질 수 없는 이유이다.
“인간은 상징계 속에 들어갔을 경우에만 자신의 개별성을 획득할 수 있는데 개별성이란 독창성이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의한, 타자를 위한 존재인 인간이 교환을 통해 개별성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징계로 진입하게 되면 ‘주체는 분열’되고, 주체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 상실된다. 상징계에서 주체가 재현되거나 변형되기 때문이다.”14) 분열된 주체에게 근원적 요소는 타자와 명확히 구별되는 변별적 지점이기도하다. 하지만 상징계로의 이행은 거부할 수 없는 과정이기에 근원적 요소는 잠재되고, 주체는 타자성에 의해 채워지게 된다. 주체는 말을 매개로 상징체계를 배우게 되면서 진정한 자신은 거부할 수밖에 없는 길로 들어서게 된다. 순수한 자신의 근원을 외면함으로써 주체는 구성원으로 인정받게 되지만 커다란 대가를 피할 수 없다. 진정한 ‘나’를 잊고, ‘나의 본질’을 무의식으로 잠재우는 것이다.
“주체는 대립관계-기표와 다른 기표들의 관계-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상징 혹은 기표체계의 그물망 속에 사로잡히게 된다. 언어로 중개된 주체는 회복될 수 없을 만큼 분열된다. 주체는 즉시 의미의 연쇄 고리로부터 추방당하고 그 연쇄 고리 속에서 ‘재현된다.’ 이리가레이(Luce Irigaray)는 분열의 주체와 상징의 주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공식화 했다.”15)
Fig 2.Subject of Split and Subject of Symbol.
분열된 주체로서 (그0)는 상징차원의「그1」로 기입되고, 실제 존재로서의 그는 사라지게 된다. 분열은 “로고스와 일반적인 상징계에 진입함으로써 주체가 개별성을 부여받는다는 점에서 이것은 유익하다. 그러나 발화의 주체 (나)와 발화된 것의 주체「나」는 결코 결합될 수 없으므로 주체의 소외의 변증법이 시작된다.”16)
분열에 따라 소외된 주체는 상실된 근원을 찾아 상실을 메우고자 한다. 그러나 결여의 공간, 빈 공간은 결코 채울 수 없는 공간으로 남아 있다. 마치 진공 상태처럼 비어있지만 채워지지 않는 공간이다. 상징체계 속의 주체는 스스로의 결여를 인식하지 못하지만 완벽하게 잊을 수도 없다. 주체의 명확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여의 주체는 진공의 공간에 대한 대상을 찾아 방랑하게 된다. 회피할 수 없는 길로 들어선 주체 속에서 욕망은 잉태되고, 주체는 욕망을 욕망하게 된다. 때문에 욕망은 의식에 기반을 둔 욕망이 아니라 근원의 상실에 대한 욕망으로서 무의식의 욕망인 것이다.
욕망의 원인에 대해 라깡은 ‘대상 a’의 개념을 부여하였는데 “타대상(objet petit a)은 욕망이 지향하는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원인이다. 욕망은 대상에 대한 관계가 아니라 결여에 대한 관계이다.”17) "여기에서 ‘대상 a’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거치면서 발생한 주체의 결핍을 보상해주는 대상물이라 할 수 있으나, 어떠한 대상물도 ‘모체와 분리되기 전의 완벽한 상태’를 실현시킬 수 없기 때문에 ‘대상 a’는 언제나 충족될 수 없다.”18) 결코 충족될 수 없는 ‘대상 a'는 구체적 대상이 아니기에 끊임없는 욕망을 생산해내는 원천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라캉은 실현될 수 없는 주체 와 ‘대상 a’와의 결합을 라는 도식으로 표현하면서 완전한 만족과 결합의 불가능성”19)을 보여주고 있다.
충족의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주체는 언제나 그 대상을 찾고 있다. 그러나 주체는 ‘대상 a'에 상응하는 대상을 명확히 찾을 수 없는데, 궁극적 대상이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체가 욕망의 대상을 다른 곳에서 찾는 원인이기도하다. 주체는 다른 곳, 즉 타자에게서 대상을 찾고자 하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다. 주체는 타자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오인하여 욕망하고 쫓지만 이는 주체의 빈 공간에 들어 맞지 않는다. 타자의 시선을 느끼며 타자의 것을 가진 것처럼, 그리고 거울상에서의 오인처럼 일치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거울상이 완벽한 나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었듯이 타자의 것은 언제나 나의 것이 아니다. 주체의 상실된 부분이 타자의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발생한 근원적 결여인 까닭이다.
주체에게 발생한 결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거치면서, 즉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발생되었기에 결코 채워질 수 없다. 상징계의 주체는 욕망을 통해 결여를 해소하고자 시도하지만 근원적으로 해소되지 못하는 결여는 또 다른 욕망을 잉태할 뿐이다. 주체가 생산하는 욕망은 결여를 메우기 위한 상징적 기표일 뿐, 언제나 결합되지 못하고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나 주체는 기표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끊임없이 기표에 매달리며 욕망을 호소할 수밖에 없다. 주체속의 욕망이 상징계의 틈을 비집고 실재계(The Real)를 드러내며 환상의 형태로 주체에게 다가오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4. ‘환상’과 이미지
‘대상 a’는 지명되지 않은 욕망의 대상으로서 욕망의 원인이며, 주체를 끝없이 방황하도록 한다. 때문에 ‘대상 a’는 상징계에서 미끄러짐을 반복할 뿐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이때 주체의 “무의식적 욕망들은 환상을 통하여 나타난다. 환상은 주체가 주인공이며 항상 소원의 성취를 대표하는 상상된 장면으로서 방어기재들에 의해 다소 왜곡된 방식으로 표현된다.”20)
욕망을 향하는 과정에서 주체를 이끄는 환상은 결여된 주체의 개인적인 산물이다. “환상은 욕망을 환각적으로 만족시키는 한 형식으로 무의식의 기본적인 기표들은 환상을 조직해내고, 은유 속에서 압축되며, 환유적으로 결합한다.”21) “상징의 체계로 이루어진 환상은 주체의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해결해주는 것처럼 보인다.”22) 그러나 욕망이 채워질 수 없는 것처럼 “상징계 안에 존재하는 실재계의 중핵은 빈자리로 인식되며 모든 그 외의 표상들, 이미지들 그리고 기표들은 이 간극을 메우고자 하는 시도일 뿐이다.”23) 비록 환상이 궁극적인 욕망을 드러내지 못하지만 욕망으로 나아가는 단계에서 환상과의 대면을 경험한 주체는 욕망의 실현이라는 찰나적 경험으로 인해 환상에 매료된다. 주체가 욕망을 욕망하듯 환상을 환상하게 되는 것이다.
환상을 향한 무대는 이미지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욕망과 욕동의 장으로서의 시각은 시관 욕동(Pulsion Scopique)의 특성을 가지고 있고, 나아가 가시성의 영역에서 응시를 중심으로 욕망, 환상, 충동의 메커니즘이 작동된다.”24) 하지만 환상은 하나의 이미지로 상징화될 수 없다. 라캉이 “환상 속의 이미지가 지니는 힘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이것은 이미지 자체가 지닌 본래의 특질 때문이 아니라 이미지가 상징적 구조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 때문이다. 환상은 항상 ‘의미화 구조 내에서 작용하는 이미지 세트’이다.”25)라고 한 것은 환상이 욕망과 결합하는 방식을 의미하고 있다. 즉 환상은 구체화될 수 있는, 구체적인 장면이 아니라는 것이다.
욕망의 무대로서 이미지와 연관되어 있는 환상은 절대적으로 개인적 맥락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특수한 방식으로 자신의 세계를 조직하는 방식이며, 그(주체)의 환상에 관한, 우리가 결코 공유할 수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 그의 그러한 부분은 ‘절대적으로 특수한 것’이다.”26) 기표의 무대는 타자에게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일 수도 있다. 나아가 주체도 욕망을 향한 무대인 환상을 쫓으며 자신만의 환상공간을 구축해나가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이끄는 환상과 환상공간을 알지 못한다. 욕망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주체가 욕망에서 전이된 환상의 장면을 명확히 인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체는 명확히, 능동적으로 환상과 조우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으로 특수한’ 환상을 보이지 않는 상호성으로 조직해나간다. 기표는 상징체계 속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지지만, 만약 주체가 환상의 중핵과 문득 마주치게 된다면 주체는 환상에 매혹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욕망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환상의 “특수성은 절대적이고 '매개'에 저항하며 더 크고 보편적이며 상징적인 매개의 일부로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환상을 향해 일종의 거리를 취함으로써만, 그러한 환상의 궁극적인 우연성을 경험함으로써만, 모든 사람에 각자에게 적합한 태도로 자신의 욕망의 궁지를 은폐하는 방식으로써 환상을 이해함으로써만 다른 이의 환상의 존엄성을 갖는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환상의 존엄성은 바로 그 ‘환영적’이고 깨지기 쉬우며 무력한 특성에 존재하는 것이다.”27) 이러한 이유로 인해 주체는 자신도 모르는 방식으로 환상과 대면하게 된다.
“환상은 우리가 자신의 주이상스에 대한 불만 및 실재계의 불가능성과 화해하게 하는 한 방법이다. 통제나 제어가 불가능한 실재계에 대응하기 위하여 우리는 환상을 통해 우리의 사회현실을 구성한다.”28) 즉 환상은 욕망의 무대이지만, 환상이 주체를 지탱하는 것이다. 이처럼 환상이 욕망의 무대로서 주체를 끌어당김에 따라 환상에 대한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지게 된다. 주체는 이미지와 함께 전개되었고, 환상도 이미지와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에 욕망을 반영하는 환상에 대한 재현을 우리는 멈출 수 없는 것이다.
5. 결 론
인류는 외부와의 소통을 위해 시각에 의존했고, 회화, 사진, 영화 등의 시각매체를 창조하여 이미지를 생산해왔다. 그러나 시각이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는 것만으로는 이미지에 천착해온 인류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주체가 무의식의 주체이며, 주체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이미지와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토대로 주체, 나아가 인류가 이미지에 매혹되어 왔음을 중심으로 주장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토대로 논의를 전개하였다.
먼저 이미지는 주체가 자아로 이행하는 단계에서 시각적 즐거움과 나르시시즘적 쾌락을 선사했다. 거울단계로 불리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통합된 이미지를 바라본 자아는 통합적 이미지를 무의식 속에 각인한 후, 시각적 쾌락을 잊을 수 없게 되었다. 상상계에서 이미지는 주체에게 시각적 즐거움을 경험하게 했지만 이미지와 통합되지 않은 주체를 소외의 길로 이끌기도 했다. 이미지는 쾌락, 시련과 연관되면서 주체는 이미지의 효과를 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능동적 주체는 외부의 정보를 위해 시각에 의존했지만, 무의식의 주체는 타자의 응시를 통해 형성되어 나갔다. 사방에서 응시되는 타자의 시선을 통해 진정한 상징계의 주체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지는 거울단계에서의 경험과 유사하게 상징계에 진입한 후에도 이미지를 통해 개인적 맥락을 주체 속에 각인했다. 생존, 삶, 욕망의 반영 등 이미지는 주체를 비추는 통로였다. 이미지가 주체와 무의식의 진실을 교환하는 수단인 이유이다.
보다 세부적으로 무의식의 주체는 무엇보다 분열된 주체이다. 상징계로 이행하면서 무의식을 되돌려 보내야만 했던 주체는 코기토에 의해 가려진 일부분 으로서의 주체였던 것이다. 때문에 주체는 상실된 근원을 언제나 메우고자 했고, 욕망의 원인인 ‘대상 a'는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이미지를 통해 부상하기를 시도했다. 바로 ’환상‘의 효과이다. 욕망의 대상이 은유와 환유의 과정을 통해 환상의 형태로 부상하면서 주체를 이끌었던 것이다.
이미지의 효과는 정신분석학에서도 심층적으로 다루어졌고, 영화학에서도 정신분석을 적용했었다. 그러나 기존의 논의는 이미지를 중심으로 바라본 접근이 아니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인류가 이미지를 쫓았던 보다 근원적 요인이 무의식의 주체이며, 무의식의 주체가 이미지를 통해 형성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미지가 단순한 정보, 소통, 심상적 표현의 수준이 아니라, 주체의 형성, 욕망의 욕망, 환상의 과정 등 보다 심급에서 주체와 보이지 않는 소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결여의 주체, 욕망하는 주체는 언제나 이미지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시각 매체가 발달하고 이미지 콘텐츠가 끊임없이 생산되겠지만, 인류가 언제나 이미지를 향할 수밖에 없는 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바로 주체의 무의식에 있었다. 언제나 이미지가 무의식의 주체에게 보다 근원적이며 심층적 층위에서 보이지 않는 작용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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