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은 퇴계(退溪)를 어떻게 이해하였는가? - 『사칠변증(四七辨證)』을 중심으로 -

Woodam Jeong Si-han's Understanding of Toegye

  • 투고 : 2010.05.12
  • 심사 : 2010.06.05
  • 발행 : 2010.06.30

초록

이 논문에서는 퇴계학파가 형성되고 전개되는 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인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1625-1707)이 퇴계(退溪)(1501-1570)의 사상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사칠변증(四七辨證)』에 나타난 우담의 관점과 견해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우담(愚潭)은 17세기의 일원론(一元論)과 이원론(二元論)이 양립하는 시대를 살았다고 할 수 있는데, 퇴계의 사상에 대한 우담의 이해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담은 기본적으로 퇴계를 주자의 정통으로 보면서, 이기(理氣)에 대한 변론(이기지변(理氣之辨))과 성정(性情)의 근원(성정지원(性情之原))에 대한 퇴계의 진지(眞知)·실득(實得)을 따르고 실천하려고 하였다. 둘째, 우담은 옛날과 지금 사람들의 학문(學問)이 어긋난 이유는 다만 '이(理)'자(字)를 알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발(發)하는 것은 기(氣)이고, 발(發)하는 까닭은 이(理)이다"라는 율곡(栗谷)의 주장을 비판하고, 이치(理)의 궁극적 실재성·운동성(작용성)·근원성(주재성)과 이치(理)의 체용(體用)을 주장하는 퇴계의 견해를 따르지만, "이기(理氣)가 묘합(妙合)한 가운데, 이(理)는 항상 주(主)가 되고 기(氣)는 항상 보(輔)가 된다"(이주기보(理主氣輔))고 하면서 퇴계의 학설을 더욱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우담은 같음(동(同)) 가운데서도 다름(이(異))을 볼 수 있고 다름(이(異)) 가운데서도 같음(동(同))을 볼 수 있으며, 분석(분개(分開))할 때는 분석하고 종합(혼륜(渾淪))할 때는 종합하면서도 이를 입체적(통간(通看))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퇴계의 정신을 따르면서, 율곡의 학설을 비판하고 퇴계의 호발설(互發說)을 옹호하였다. 이렇게 볼 때 우담은 퇴계의 이기(理氣)와 심성(心性)에 관한 견해를 깊고 바르게 이해하고,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퇴계의 정신에 따라서 실천하며 살려고 노력하였다고 할 수 있다.

Woodam(愚潭) Jeong Si-han(丁時翰, 1625-1707)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formation and development of the Toegye School. This writing explores the way Woodam understood the thought of Toegye(退溪, 1501-1570) as presented in The Book of Four-Seve Demonstration(四七辨證) The 17th century that Woodam lived in was the period in which monism and dualism coexisted. Woodam's understanding of Toegye's thought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1) Woodam followed Toegye's li(理)-qi(氣) defense and his view on the origin of nature and emotion, acknowledging Toegye as the orthodox transmitter of Zhu Xi's teachings, 2) Woodam considered that the difference between the past and the contemporary teachings was simply caused by the difficulty of comprehending the character "li (principle) ". Thus he criticized Yulgok(栗谷, 1536-1584)'s claim that "that which rises is qi (material force), and that which gives rise to qi is li," and followed instead Toegye's views of the entivity, dynamism, and ultimacy of li and its substantial function. Yet, Woodam further developed Toegye's thought and asserted that "in the midst of the marvelous unity of li and qi, li is always dominant and qi is always ancillary." 3) Woodam criticized Yulgok's thought and advocated Toegye's doctrine of the mutual motion of li and qi(理氣互發說), thereby following Toegye's insistence that difference can be observed in sameness and sameness can be observed in difference, that integrative thinking is needed to constructively embrace both analytic and synthetic judgments. In conclusion, Woodam understood profoundly and correctly Toegye's views on the relationship between li and qi and between nature and emotion, and explained them more concretely. In so doing, he endeavored to live the life by the teachings of Toeg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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