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궤, 금궤록과 중경금궤록의 관계에 대한 고찰

  • 양영선 (북경중의약대학 의사교연실)
  • 발행 : 2006.02.28

초록

북송(北宋)의 교정의서국(校正書局)에서는 치평(治平) 3년에 왕수(王洙)가 발견한 ${\ulcorner}$금궤옥함요약방(金玉函要略方)${\lrcorner}$을 다시 정리하여 장중경(張仲景)의 ${\ulcorner}$금궤방론(金方論)${\lrcorner}$이라는 이름으로 발간하면서, 그 서문 뒤에 ‘중경금궤록(仲景金)’이라고 언급하였는데, 필자는 역사적인 각도에서 금궤라는 명칭의 연원과 금궤 금궤록이 ${\ulcorner}$금궤방론(金方論)${\lrcorner}$서문 뒤에 언급된 ‘중경금궤록’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하여 고찰하여 보았다. 금궤라는 명칭은 귀중한 서적이나 물품을 보관하던 장소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는데, 서명으로는 ${\ulcorner}$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lrcorner}$${\ulcorner}$감여금궤(堪輿金)${\lrcorner}$라는 명칭으로 최초로 등장하며, 의서로는 ${\ulcorner}$진서(晋書)${\lrcorner}$갈홍전(葛洪傳)에 ${\ulcorner}$금궤약방(金藥方)${\lrcorner}$이라는 서명으로 최초로 나온다. 현존하는 ${\ulcorner}$도장(道藏)${\lrcorner}$ 제(第)6부(部) 동현부(洞玄部) 옥결류(玉訣類)에 있는 ‘신선복이단석행약법(神仙服餌丹石行藥法)’의 일부분의 내용이 갈홍(葛洪)의 ${\ulcorner}$포박자(抱朴子)${\lrcorner}$와 서로 같고, 이것이 ${\ulcorner}$금궤록${\lrcorner}$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손기(孫奇) 등 송(宋)의 신하가 ${\ulcorner}$금궤방론(金方論)${\lrcorner}$ 서문 뒤에 인용한 내용은 ${\ulcorner}$주후비급방${\lrcorner}$ 서문과 ${\ulcorner}$포박자내편(抱朴子內篇) 잡응(雜應)${\lrcorner}$의 내용과 서로 일치한다. 송(宋)의 신하가 인용한 서문은 갈홍(葛洪)이 쓴 것을 다시 인용하였을 가능성이 높고, 그 중에 ${\ulcorner}$금궤록${\lrcorner}$과 관련이 있는 내용은 장중경(張仲景)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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