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time-kill method

검색결과 42건 처리시간 0.019초

손 위생 제품에 대한 in vitro, ex vivo, in vivo 항균 시험법 비교 (Comparison of In Vitro, Ex Vivo, and In Vivo Antibacterial Activity Test Methods for Hand Hygiene Products)

  • 이다은;여현주;정혜윤
    • 한국식품위생안전성학회지
    • /
    • 제39권1호
    • /
    • pp.35-43
    • /
    • 2024
  • 손 위생 제품이 다양화됨과 동시에 각 활용 방법에 따라 그 효능을 평가하는 여러 시험 방법들이 보고되고 있다. 하지만 평가 방법에 따라 각 제품의 항균 효능은 다르게 나타나며, 이로 인해 제품의 실제적인 효능을 확인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손 위생 제품의 효능평가방법 비교에 초점을 둔 연구는 매우 제한적이며, 특히 돼지피부를 이용한 ex vivo에 대한 연구는 극히 드물다. 이에 본 연구는 손 위생 제품 중 리브온 소독제와 워시오프 세정제에 대해 각각의 항균 평가 방법을 종합적으로 비교했고, ex vivo 시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인을 파악하여 연구 단계에서 효율적인 ex vivo 시험의 신뢰성을 향상시키고자 하였다. in vitro 시험으로써 액체 현탁을 기반으로 하는 time-kill 시험을 진행했고, in vivo 시험은 최소 20명의 참여자를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ex vivo 시험은 규격화된 돼지 피부를 이용하여 in vivo 시험과 동일한 방법으로 진행하면서 소독제의 최적 처리량과 세정제 사용 시 첨가되는 물의 양을 제안했다. 시험에 사용된 손 소독제는 in vitro 시험에서 모두 5 log 이상의 세균 감소율을 보인 반면, ex vivo와 in vivo에서는 훨씬 낮은 살균 활성을 보였으며, 특히 알코올 함량이 낮은 손 소독제에서는 1 log 미만의 살균 활성을 나타냈다. 반면에 손 세정제의 in vitro 시험 결과, 대장균에 대해서는 1 log 이하의 낮은 항균력을 보였으나, ex vivo 와 in vivo 시험 결과에서는 이보다 높은 항균력을 유사하게 나타냈다. 본 연구에서는 ex vivo 와 in vivo 시험 방법이 리브온과 워시오프 타입 제품의 두가지 다른 항균 메커니즘을 반영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이로 인해 최적의 조건으로 설정된 ex vivo 시험은 빠르고 정확한 항균 평가법이 될 수 있음을 제시한다.

정조(正祖)의 사대부(士大夫) 인식(認識)과 그 특징(特徵) (King Jeongjo's recognition on Neo-Confucian literati and it's historical meaning)

  • 박성순
    • 동양고전연구
    • /
    • 제32호
    • /
    • pp.103-128
    • /
    • 2008
  • 정조는 척족이 특권세력으로 발호하던 영조대 후반의 탕평정치에서 아버지를 여읜 피해자였다. 노론의 거센 방해공작을 뚫고 왕위에 오른 정조의 목표는 왕권 강화였다. 정조는 탕평정책을 영조 50여년 치세의 대업적으로 칭송하고 척신과 탕평당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신하들에게 왕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국변인(國邊人)'이 되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정조가 즉위 직후부터 설치 운영한 규장각(奎章閣)은 겉으로는 어제(御製)의 봉안 등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정조의 우군을 양성하기 위한 기구였다. 그만큼 정조가 외척들을 누르고 어떻게 사대부들을 포섭하는가 하는 문제는 정권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본고에서는 정조가 사대부들을 어떻게 굴복시키고 포섭하려 했는가라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조명하였다. 그것을 통해서 정조가 시도한 왕권강화책의 논리와 방법을 확인해 보고자 하였다. 정조는 경학(經學)의 본질은 성리학이 아니라 실생활과 절실하게 관련된 학문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사대부들의 이념적 근거를 붕괴시키고자 하였다. 정조가 사대부들의 풍기와 세도를 비판하고 그들의 학문인 주자성리학의 의미를 축소했던 것은 사대부들을 왕권에 복속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붕당론이나 성학론을 기본으로 하는 사대부들의 정치 이념과 학문적 근거를 반박함으로써 공론(公論)의 주체로서 국왕의 권위를 강조하려고 하였다. 정조가 영조의 '군사(君師)' 개념을 계승하고 왕호도 '홍재(弘齋)'에서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으로 바꾼 것은 그의 사대부 비판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자 했던 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