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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말 구산선문(九山禪門) 사찰의 입지 연구 - 풍수적 측면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Location of Zen Buddhist Temples During the Late Silla Dynasty in Korea - from Feng-shui(風水) Perspective -)

  • 조성호;성동환
    • 한국지역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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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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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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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 신라 말 선종계열 사찰을 대표하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개산(開山)은 지방문화의 발흥과 자신감의 표현이었으며 지방 호족들의 사회 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선종(禪宗)이 유행하던 시기에 주로 재창되었던 구산선문의 입지 특색은 풍수적 논리를 따른 것이다. 풍수가 성행하기 이전에 건립된 사찰들은 주로 전통적인 토착신앙 세력들이 신성시하던 성소, 성지(聖所, 聖地)를 택해 입지했고, 신라의 경우 왕성의 도심 곳곳에 사찰이 수없이 많이 건립되었다. 이후 신라말기에 선종의 유행으로 인해 선종사찰들이 많이 건립되고 풍수도 본격적으로 성행하게 되어 사찰의 입지에 풍수논리가 뒷받침되기 시작했다. 구산선문이 개산(開山)하기 이전의 사찰은 주로 삼산, 오악(三山, 五岳) 등의 영지(靈地)개념에 따른 입지가 많았으나 구산선문은 당시로서는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지역으로 확대되어 독립적인 산문을 재창하였다. 구산선문 각 사찰의 경우 산과 물이 짜임새 있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 풍수지리적인 전체성이 잘 드러나고 있다. 각 사찰은 계곡물이 모여 완만히 감싸는 곳, 물을 얻기 용이하면서도 산이 사방으로 들러쳐진 아늑한 곳, 즉 풍수에서 길지(吉地)로 여기는 '산에 기대고 물에 접한' 땅에 입지하여 풍수적인 조건을 잘 갖추고 있다. 구산선문은 주로 분지상의 지세에 입지하였으며 사찰의 축선(軸線)은 지형(내룡(來龍)의 맥세(脈勢))에 따라 이루어졌다. 각 사찰에서 나타나는 장소의 약점은 풍수적인 비보책(裨補策)을 통해 보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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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경은(寫經院)과 염승익(廉丞益) 발원(發願)의 사경(寫經)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7권본 1부 (A Study on the set the seven roalls of the Saddarma Pundarika Sutra Prayed by Yeom Seong-Ik and Script Center)

  • 권희경
    • 한국기록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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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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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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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사경은 남계원(南溪院) 석탑의 출토품으로 1915년 남계원석탑(南溪院石塔)을 개성시(開城市)의 덕암동(德岩洞)의 원 위치로부터 경복궁으로 옮길 때 발견된 감지은니사경(紺紙銀泥寫經)의 염승익발원(廉丞益發願)의 사경(寫經)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7권본 1부는 권자본(卷子本)으로 세로 31.1cm이며, 표지화와 변상화(變相畵)가 안팍을 이루고 있는데 폭은 27.2cm이다. 이 사경은 또한 1행 14자로 쓰여지고 있는데, 이러한 특징은 표지화 변상화의 양식과 더불어 고려국왕별원 금 은자사경의 양식과 같다. 이 사경을 발원한 인물은 충렬왕대의 권신이던 염승익이다. 염승익은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의하면, 기인을 동원하여 지은 자신의 집을 대장경사경소(大藏經寫經所) 금자대장사경소(金字大藏寫經所)로 내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이 사경은 염승익이 자신과 그 일가권속의 복락을 빌기 위해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7권부 1부를 금자대장사경소(金字大藏寫經所)에서 제작하고, 충렬왕(忠烈王) 9년 남계원석탑(南溪院石塔)을 수리할 때 탑에 함께 봉안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경의 가장 중요한 점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기록처럼 금자대장소로 내놓았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금자대장소란 장소적 의미가 강조된 것으로 금경사와 더불어서 금자원과의 차이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단서라고 할 수 있는 점이다. 그러나 이 사경이 충렬왕대 고려국왕발원 금 은자사경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비록 개인발원사경이라 할지라도 금자대장사경소(金字大藏寫經所)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에 금자원(金字院)(혹은 은자원(銀字院))의 스타일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점과 이러한 점을 통해 남겨진 기록들과 발문을 중심으로 사경원 금 은자원의 성격을 밝히는데 힘썼다.

대구지역 여고생들의 성(性)적 학대 경험에 관련된 신경증에 관한 연구 (A Study on Neurosis According to Experience of Sexual Abuse among Female High School Students in Taegu)

  • 박형배;김진성;장상렬;노태용;서혜수;김창수;이광헌;김영욱
    • Journal of Yeungnam Medical 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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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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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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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5
  • 성적학대와 관련된 신경증적 경향을 알아보고자 1994년 7월 10일부터 17일까지 M.H.Q의 신경증척도를 대구시내 소재의 여자고등학교 학생 32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하여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1) 성적학대를 받은 군에서는 대조군보다 불안(p<0.05), 공포(p<0.01), 강박증(p<0.01), 신체화(p<0.05), 우울(p<0.01) 등의 신경증적 경향의 점수가 통계학적으로 유의하게 높았다. 2) 단일횟수보다 여러번의 성적학대를 받았을때 신체화(p<0.01), 우울(p<0.01), 히스테리(p<0.01) 등의 신경증적 경향의 점수가 통계학적으로 유의하게 높았다. 3) 성적학대를 받은 기간이 1년이하보다 1년이상일 경우 강박증(p<0.05), 신체화(p<0.05), 우울(p<0.05) 등의 신경증적 경향의 점수가 통계학적으로 유의하게 높았다. 4) 성적학대의 강도가 높을수록 공포, 신체화, 우울등의 신경증적 경향의 점수가 통계학적으로 유의하게 높았다(p<0.01). 5) 가해자는 낯선사람이 31명(45%)으로 가장 많았고 친척 10명(14%), 형제 7명(10.3%), 동네 이웃사람 6명(8.8%) 등의 순서였고, 상담이나 치료를 받은 적이 있은 사람은 68명중 34명(50%)이었으며 이 중 상담대상으로 친구가 23명(68%), 부모 7명(11.7%)등의 순서였고 전문가는 2명(5.9%)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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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과 기록학 학문의 인연, 학제의 괴리 (History and Archives : Colleagues or Strangers?)

  • 오항녕
    • 기록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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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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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9-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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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필자는 동료 교수들과 함께 지난 10년 동안 역사학의 재정의(再定義)를 통해 재직하고 있는 역사학과의 개혁을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역사-기록, 역사학-기록학, 역사학과-기록학과의 오랜 인연을 확인하였다. 동시에 현존 역사학이 기록학으로부터, 기록학이 역사학으로부터 서로 지원과 동력을 받지 못하는 양상을 발견하였다. 1장에서는 두 학문이 멀어지게 된 이유 가운데 현존 (한)국사학계의 문제점을 먼저 다루었다. '국민국가사' 중심의 역사학과 커리큘럼은 국민의 기억을 특권화함으로써, 개인, 가족, 사회, 단체, 시민, 지역으로서의 기억을 배제한다. 이는 다양한 역사 차원을 가진 인간의 현존재에 부응하지 않는다. 이에 더하여 역사학계에 팽배한 '역사는 해석'이라는 편견은 역사학을 사실이 아닌 관념적 구성물로 이해하게 함으로써, 경험주의로부터 역사학을 멀어지게 만들었다. 국민국가사 중심으로 연구될 경우 다양한 차원의 아카이브는 고려되지 않고, 해석을 강조하며 사실에서 멀어지는 한 기록은 부수적이 된다. 동아시아 역사학의 전통과 역사의 개념에서는 두 학문이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사(史)는 역사와 기록, 둘 다 의미하였다. 진본에 대한 고민은 젠킨슨이나 듀란티에서 시작된 것도 아니고, 전자기록과 함께, 또는 2006년 공공기록법과 함께 시작된 개념은 더구나 아니다. 역사학과 기록학에서 사용하는 주요 개념, 즉 문서-기록-사료, 직서/곡필-진본성, 편찬-평가-감식, 편찬-정리, 해제-기술 등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기표(記表, signifiant)가 다르더라도 그 개념 및 의미 내용인 기의(記意, $signifi{\acute{e}}$)는 같았다. 출처주의와 원질서 존중의 원칙은, 'provenance', 'original oder'라는 기표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전래의 기록관리 교육과 실무에서도 유지되었다. 3장에서는 현존하는 역사학과 기록학 사이의 학문적 전문성과 보편성의 방향을 모색하였는데, 역사학계의 측면에서는 기록의 생산-전달-활용을 다루는 학문으로서의 역사학과의 기록학과화(化)를, 기록학계의 측면에서는 전문성의 핵심인 평가와 기술 부문에서 기존 역사학의 성과를 충분히 수렴할 것을 제안하였다. 역사학은 탈-기록학을 반성하고 있는 듯하다. 다행이다. 반면 기록학은 탈-역사학을 시도하는 듯하다. 어리석다. 역사학이 기록학의 손을 놓으면 토대가 흔들리고, 기록학이 역사학의 손을 뿌리치면 뿌리를 잃는다. 더구나 동지는 많을수록 좋다. 우리 앞에는 불길한 조짐과 새로운 가능성, 둘 다 놓여있다.

체제전환 이전과 이후 폴란드 문학에 나타난 폴란드 이민자들의 디아스포라적 의식 비교 연구 (2) (A comparative study on Diaspora consciousness of polish emigrants before and after the transformation of the political system reflected in the polish literary works (2))

  • 최성은
    • 동유럽발칸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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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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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3-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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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이 논문은 1989년 체제 전환 이전과 이후에 발표된 드라마 가운데 '디아스포라'를 소재로 한 두 편의 텍스트를 선정하여 연구·분석해봄으로써 각기 다른 정치체제(사회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체제)에 귀속된 폴란드 이민자들이 조국을 떠나 타지에서 경험하게 되는 갈등과 혼란의 구체적인 양상을 비교하려는 목적으로 집필되었다. 체제전환 이전의 작품으로는 스와보미르 므로젝(Sławomir Mrożek)의 『이민자들(Emigranci)』(1974)을, 체제전환 이후의 작품으로는 야누쉬 그워바츠키(Janusz Głowacki)의 『뉴욕 안티고네(Antygonaw Nowym Yorku)』(1992)를 선정하였다. 연구대상으로 선정된 이 두 편의 드라마는 집필 시기는 다르지만, 폴란드 문학사에서 전후(戰後) '이주문학(literatura emigracyjna)'의 대표작으로 인정받는 상당히 중요한 작품들이다. 므로젝과 그워바츠키는 각기 자신의 작품 속에서 2차 대전 이후 '구(舊) 소련의 위성국가'이자 '약소국' 혹은 '후진국'이라는 멍에를 짊어진 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주를 선택해야만 했고, 냉전 체제 이후에는 보다 나은 경제 조건을 찾아 서방으로 떠났던 폴란드 이민자들이 낯선 이국땅에서 '경계인'이자 '이방인'으로 겪어야만 했던 냉혹한 현실, 그로 인한 심리적 방황과 고민,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노스탤지어, 정체성 혹은 민족성에 대한 탐구 등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세계 제 2차 대전과 냉전시대를 겪으며 사회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체제를 모두 경험했고, 그 과정에서 유달리 많은 해외 이민자를 배출한 폴란드는 문학 작품을 통해서 폴란드 이민자들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과 상실감 등을 정교하게 그려냈다. 특히 혹독한 검열로 인해 문학이 정치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주의 체제 당시 (1948~1989), 폴란드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20세기 폴란드 문학의 정전(正典)으로 손꼽히는 여러 편의 명작들을 해외에서 출간함으로써 고유한 문학적 전통을 계승해나가는데 이바지했다. 그러므로 '이주문학(literatura emigracyjna)'은 20세기 폴란드 문학이 역사적 격동기를 겪으며 일구어 낸 소중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