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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유적 조사연구법 시론 (Proposals on How to Research Iron Manufacture Relics)

  • 김권일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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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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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4-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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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고는 1970년대 이래 제철유적에 대한 조사가 꾸준히 증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조사방법에 대한 연구는 이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을 인식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제철유적은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전국적으로 조사가 급증하였으며, 특히 최근에는 생산유적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더욱 주목받고 있는 유적의 하나이다. 하지만 분묘유적이나 취락, 성곽유적 등에 비해 제철유적의 조사방법에 대한 소개와 연구는 크게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제철조업의 프로세스는 매우 복잡하고 다양할 뿐 아니라, 공정의 이해를 위해서는 금속공학적인 기초지식까지 학습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즉 고고학 조사와 연구에 있어 제철과 관련된 유구 유물의 성격이 이러한 프로세스와 어떠한 상관관계를 가지는지 밝히기가 몹시 어렵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철생산 및 철기제작의 공정과 철재, 철괴 등 관련유물의 금속학적 특징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제철유적 발굴조사의 순서와 방법, 유물의 분류 및 정리방법에 대한 시론을 제시함으로써 정밀한 조사와 심도 있는 분석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본고에서는 제철유적을 조업공정에 따라 채광, 제련, 정련, 단야, 용해, 제강유적의 6가지 유형으로 분류한 후, 사전조사와 지표${\rightarrow}$시굴${\rightarrow}$발굴조사로 이어지는 각 단계별 조사방법에 대해 정리하였다. 또한 가장 대표적인 제철관련유물인 철재의 분류 및 정리에 있어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 보았다. 더불어 유적의 성격파악에 필요한 자연과학분석 및 제철로 복원실험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언급하였으며, 내용의 구성에서는 사례 제시와 도면 사진자료를 최대한 활용하였다. 본고에서는 다양한 조사연구방법의 응용과 개발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하지는 못하였지만, 유구 유물의 세밀한 관찰을 통해 공정에 따른 다양한 제철유적의 조사연구 방법론 개발이 매우 시급한 과제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유적의 종합적인 성격규명을 위해서는 고고학적 지식뿐만 아니라 자연과학 분야가 다양하게 응용되어야 하며, 더불어 실험고고학의 측면에서도 지속적인 제철로의 복원실험이 필요함을 알 수 있었다.

국가 지정 문화재 '명승'의 유형과 팔경(八景), 동천구곡(洞天九曲)과의 연관성 (Types of Scenic Sites of State-Designated Cultural Property and Relationship between Pal-Kyung and Doncheon-Gugok)

  • 노재현;신상섭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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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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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8-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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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국내 명승 지정 추이와 유형 및 변천 그리고 분류상의 제문제를 검토하고 국가 지정 문화재인 명승 총 68건을 대상으로 전래팔경 및 동천구곡 그리고 현대팔경과의 연관성을 추적하여 전래경승적 의미와 가치가 현재에도 유전되고 있음을 밝히고자 한 본 연구의 주요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역사 문화경관적 성격을 갖는 명승의 지정이 늘고 있음은 초기 문화재보호법상 지정 사유로 명기된 문화적 활용성 역사성 문학성 사상적 배경 등의 개념을 적극 수용하기 위한 취지로 이해됨에 따라 고정원과 전망점 등 문화적 명소 개념이 명승 지정의 중요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음은 매우 고무적 현상이다. 둘째, 명승 지정 유형별로 분류하면 '자연경관이 뛰어난 곳'이 30건(44.16%), '저명한 건물 또는 정원 및 중요한 전설지' 21건(30.9%),' 저명한 경관 전망지점' 9건(13.2%) '역사 문화 경관적 가치가 뛰어난 곳' 7건(10.3%) 그리고 '동 식물의 서식지로서 경관이 뛰어난 곳' 1건 순으로 분석되었다. 셋째, 현재 명승 분류기준에 따르면 팔경지로 분류되는 명승은 7건, 동천으로 분류되는 명승은 3건이며 구곡으로 분류되는 명승은 없는 것으로 볼 때, 외형적으로 전체 명승 중 팔경 및 동천구곡으로 분류되는 명승은 도합 10건(14.7%)에 지나지 않는다. 넷째, 문헌자료 및 인터넷 분석에 따른 전래팔경 관련 명승은 46건(67.7%)이고 이 중 경관대상(장)으로 팔경에 포함된 명승은 38건(55.9%), 경관시점(장)으로 팔경에 포함된 명승은 8건(11.8%)으로 집계됨에 따라 총 46건(67.7%)의 명승이 전래팔경과 관련된 명승으로 분석되었다. 다섯째, 동천과 관련된 명승은 8건(11.8%)이었고 구곡과 관련된 명승은 4건(5.9%)이었으며, 총 40건(48.9%)의 명승이 현대팔경으로 설정되어 지역 명소로서의 역활과 관광홍보 콘텐츠로 활용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여섯째, 전래팔경 및 현대팔경 또는 동천구곡과 관련된 명승은 총 62건(91.2%)으로 외형적 분류와는 달리 지정 명승 대부분은 경관에 내재된 역사적 문화적 의미와 깊숙이 관련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미륵사지서탑 축조의 구조 원리에 관한 기초 연구 6~7세기 전반 목탑과의 비교분석을 중심으로 (Basic Study on the Building Principles of Structure in Mireuksaji Stone Pagoda)

  • 조은경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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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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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6-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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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미륵사는 백제 무왕(재위 600~641)이 창건한 사찰로 이와 관련한 창건 기록이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제이(第二) 무왕조(武王條)에 언급되어 있다. 서원의 미륵사지서탑은 해체 전 6층까지의 일부가 남아있었으며 미륵사지 내의 유일한 현존 건축물로서 최근 사리장엄 발견으로 639년이라는 건립연대가 밝혀졌다. 또한 백제 사찰의 발굴조사 자료가 축적되고 동아시아의 학술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미륵사지서탑의 조영을 당시 불탑 건축의 발전 과정과 연관시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미륵사지서탑의 축조에 적용된 구조원리와 1층 평면의 형성을 중심으로 6~7세기 불탑 건축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대형의 불탑건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관한 기초적 연구를 시도하였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미륵사지서탑은 내부와 외부가 독립적인 개념으로 축조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고층 불탑건축에서 나타나는 구조원리의 표현으로 보여진다. 영녕사 목탑지에서 확인된 탑실심체와 같이 내부의 구조체를 형성하는 개념과 유사하게 내부 적심을 형성하고 외부 부재를 부가하는 방식으로 축조된 것이라 판단된다. 둘째, 미륵사지서탑에서는 상부의 적심부와 동시에 심주석이 동시에 존재하는 혼합 구조를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중국의 영녕사 목탑과 같은 실심체의 구조보다 발전된 것으로 조팽성 불사의 심초석과 항토 실심체의 구조와 유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혼합 구조는 황룡사 목탑이나 일본의 목탑과 같이 내외진을 전부 목구조로 형성하고 심주가 독립적으로 지지되는 구조 방식보다 선행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미륵사지서탑의 경우 1층에 십자형의 공간이 형성된 것은 심주석에 위치한 사리 봉안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심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4방향의 구심적 공간이며 사리의 본질적 의미에 기인하여 백제 6~7세기의 횡혈식 석실분과 유사한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횡혈식 석실분의 축조기법은 사리가 봉안되어 있는 상징적 공간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방법인 동시에 석재를 사용하여 축조된 서탑에 있어서 재료적 동일성으로 인하여 수용이 더욱 용이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점토대토기의 실연대 -세형동검문화의 성립과 철기의 출현연대- (The Calendar Date of Pottery with Ring-Rim -Appearance Date of the Slim Bronze Dagger Culture and Ironware-)

  • 이창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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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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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8-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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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이 논문은 한반도 남부와 일본열도 서반부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있어서 금속기의 생산과 유통이 활발했던 시기의 실연대를 $^{14}C$연대측정을 통해 추정한 글이다. 이 시기의 일상용기였던 점토대토기의 실연대를 구축하여, 토기와 금속기의 고고학적 출토양상을 통해 세형동검문화의 성립과 철기의 출현연대를 밝히고자 하였다. 연구사를 통해 점토대토기 기원전 300년 상한설이 학계의 대세임을 알 수 있는데, 이는 현재에도 계속해서 지지되고 있다. 이것은 세형동검문화의 성립연대와 초기철기시대의 개시연대와도 연동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세형동검문화와 원형점토대토기문화의 성립을 동일시하는 견해를 지지하지 않는 연구자도 있으며, 목탄의 $^{14}C$연대를 통해 점토대토기의 출현시기를 올려 보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연구사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필자가 직접 조사를 통해 채취 처리한 시료를 중심으로 $^{14}C$연대측정을 실시, 그 결과를 바탕으로 점토대토기의 실연대를 구축하였는데, 그 시료는 약 100점에 달한다. 원형점토대토기는 기원전 6세기에 출현했을 가능성이 높고, 삼각형점토대토기는 기원전 300년 전후에 출현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철기는 원형점토대토기의 가장 늦은 단계에 출현하기 때문에 그 출현연대를 기원전 4세기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실제로 철기와 원형점토대토기가 공반된 유적의 $^{14}C$연대와도 정합적이었다. 이를 통해 기원전 4세기 초~중엽일 가능성을 제시하였고, 초기 철기가 출토된 유적보다 확실히 이전 단계에 해당되는 초창기의 세형동검문화는 기원전 5세기 후반으로 파악하였다. 이렇게 파악된 실연대는 야요이토기와의 병행관계 및 $^{14}C$연대와도 정합적이며, 고고학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가능성 높은 연대라고 할 수 있다. $^{14}C$연대를 통한 한일 공통의 편년이 처음으로 구축된 것이다. 새로이 구축된 점토대토기의 실연대에 의하면, 현재 학계의 일반적인 시대구분과는 맞지 않기 때문에, 연대의 조정을 통해 새로운 수정안을 제시하였다. 철기의 출현시기(기원전 4세기 초~중엽)부터 초기 철기시대로 하여, 청동기시대는 원형점토대토기 단계의 상당 부분과 세형동검문화를 포함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를 청동기시대 후기로 설정하여, 송국리식을 중기로 하는 안을 제시하였다.

북송 동경 변량성의 조영과 특징 (The characteristics of capital city plan of the BianLieng palace, the Dongjing Walled Town (東京城), the Northern song Dynasty)

  • Dashu, Qin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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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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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4-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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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송대는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를 통틀어 중국 역사상의 중요한 전환기이며, 정치제도와 경제체제, 사상의식과 문화특징 등 모든 면에서 중요한 변혁이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대부분 당대(唐代) 후기에 시작되어 북송시기에 완성되었다. 물론 그 발전이 비교적 긴 과정을 거쳤지만, 그 변화는 거대하고도 본질적인 것이었다. 때문에 각 분야의 제도에 비교적 강력하게 나타났으며, 그 가운데 도성의 조직체계와 특징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송대 정치제도 변화의 핵심은 동한(東漢) 이래 형성된 사족문벌제도(士族門閥制度)가 철저하게 붕괴되고 황제를 중심으로 긴밀하고 완벽한 관료체제가 형성되었다는 것으로, 송대는 고도로 집중된 중앙집권체제를 이루었다. 이는 대략 재상(宰相)집단의 형성, 중앙정권의 권력분화, 황제의 지방통제 강화, 관리선출과 과거제도의 개선 등의 내용을 포괄한다. 이로부터 황제는 전 분야에 뻗치는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되었으며, 각종 제도의 제정은 황제의 권력과 지위 강화라는 목적으로 직결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동시에 송대는 경제가 고도로 발전한 시기로, 농촌에서는 조전제(租田制)를 핵심으로 하는 생산구조가 형성되어 농업발전이 극대화되었고, 만당(晩唐) 시기부터 농업과 수공업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상품경제의 발전이 가속화되기 시작하여, 송대에 이르러서는 상업의 사회경제적 위상이 크게 향상되고 나아가 도시경제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정치제도의 변화와 경제적 발전이 각종 도시제도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 글에서는 1980년대 초기 이후로 북송 동경 변량성(東京 지금의 河南省 開封市)에 대해 진행된 고고학적 작업을 정리하고, 또한 그 성과에 근거하여 북송 동경 변량성의 특징을 간략하게 종합해 보고자 한다.

변산반도국립공원 내 새로운 미선나무 자생지의 식물학적 연구 (A Study on the Botany of New Natural Habitats of Abeliophyllum distichum Nakai in the Byeonsanbando National Park)

  • 오현경;소민석;노재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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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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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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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대상지인 미선나무 자생지는 2010년도에 새롭게 확인된 곳으로, 일반인의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 지역에 입지하고 있다. 이 자생지는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 청림 소재 미선나무 군락지(천연기념물 제370호)에 비해 개체수가 많고 생육상태가 양호한 편으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향후 천연기념물로써의 가치여부 및 모니터링자료로 활용하고자 식생 및 토양환경을 면밀히 조사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변산반도국립공원 내 새로운 미선나무 자생지의 식물상은 45과 82속 93종 4변종 3품종으로 총 100분류군이 확인되었다. 이중 IUCN 평가기준에 따른 희귀식물에는 미선나무(멸종위기종), 개족도리(약관심종), 이팝나무(약관심종)가 발견되며, 특산식물에는 고광나무, 미선나무, 병꽃나무, 청괴불나무 등 4분류군이 확인되었다. 본 미선나무 자생지는 부안호로 유입되는 백천유역의 북서사면 낮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풍화토인 전석지에서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미선나무 자생지는 밤나무군락 3개소, 느티나무군락 3개소, 졸참나무군락 1개소 등 7개 군집구조로 구분되었다. 이중 층위별 중요치는 밤나무군락에서 말채나무, 굴피나무, 은사시나무, 느티나무, 까마귀베개, 팽나무 순으로, 느티나무군락에서 팽나무, 갈참나무, 때죽나무, 굴피나무, 당단풍, 복자기 순으로 나타난 반면 졸참나무군락에서는 굴참나무, 밤나무, 산벚나무 순으로 분석되었다. 한편 미선나무의 중요치는 밤나무군락에서 6.6%, 느티나무군락에서 5.6% 그리고 졸참나무군락에서 5.1%로 분석되었다. 또한 7개의 조사구에서 토양시료를 채취하여 토양산도, 전기전도도, 유효인산, 유기물함량, 치환성양이온(칼륨, 칼슘, 마그네슘)을 분석한 결과, 조사구 3번인 느티나무군락에서 다른 조사구나 군락에 비해 토양의 화학적 특성이 상대적으로 높게 분석되었다.

충주 금천창 연구 (The Study of Keumcheonchang in ChungJu)

  • 조길환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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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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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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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이 글은 탄금대 서쪽에 위치하는 충주 창동유적 발굴조사 결과와 조선왕조실록의 금천창으로부터 시작한다. 벼루가 연결된 좁고 경사가 급한 지형에 자리잡은 주칸거리 420cm의 여러 동의 건물지 조사는 구전으로 전해온 금천창에 대한 일부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태종 11년(1411)에 낙동강과 한강을 잇는 충주 금천(金遷)에 새로이 200여 칸의 창고를 지어 금천창이라고 이름하고 충주인근의 전세 뿐만 아니라 경상도 전세도 함께 수납하여 경창으로 운송하게끔 하였다. 세조는 강력한 중앙집권을 위해 관선조운체계를 구축하였고, 이것은 조선 중기까지 이어진다. 조선은 적은 인구와 낮은 도시화율에 의해 하삼도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절대적이었다. 하삼도 토지에 부과된 세곡은 국가재정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조운은 삼면이 바다인 지리적 잇점에 의해 서구자본이 밀려오기 전까지 가장 효율적인 물류체계였다. 조선은 고려의 조운을 근간으로 하는 물류체계를 구축하였다. 조선의 9조창은 왜구에 의해 파괴된 고려의 13조창을 개편한 결과이며, 특히 내륙 물길인 수운(水運)을 강화하여 왜구의 노략질 및 해난사고 등의 망실을 해결하고자 하는 고민이 담겨 있다. 금천창은 태종 11년(1411)에 건립되어 세조 11년(1465)까지 54년간 사용된 좌수참임을 알 수 있다. 가흥창으로 전세 수납처가 옮겨지면서 그 중심적 지위를 잃게 된다. 금천창은 조선이 고려에서 벗어나 사회안정과 새로운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관선조운에 의해 선택된 내륙수운개발의 결과물이다.

외암리 민속마을에 나타난 한국정원의 전환기적 양상 (A Study on the Transitional Aspects in Korean Gardens that Reflected of the Korean Folk Village 'Oeam-Ri')

  • 이원호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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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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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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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 연구는 1920년대 외암리 민속마을을 사례로 정원의 전환기적 양상에 대해 정원요소를 중심으로 다루었다. 이 시기에는 사회 경제 문화적 변화에 따른 종래의 전통적 정원양식과 다른 양식의 정원구성요소가 나타날 것이라는 가설하에 정원구성요소로 수경, 식물, 구조물, 포장 등의 변화를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전환기적 시기인 1920년대는 외부적으로는 외세의 영향과 안으로 실학사상, 개화사상과 더불어 신분제도상의 붕괴조짐이 정원설계요소 변화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외세의 영향으로 외래양식의 도입과 외래수종의 사용이 증가하였으며, 내부적 신분제도상의 변화는 정원양식의 탈규범화를 촉진하여 상위지향적 형태 및 재료의 사용과 공간기능의 변용을 초래하였다. 전환기적 정원의 특성이 나타나는 정원 조영자는 신분제도상의 붕괴에 불구하고 경제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변화에 지배계급으로 위치를 공고히 한 상류계층에 국한되어 있으며, 식민치하의 사회 혼란상으로부터의 도피적 행태나 선진문물을 선구적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를 통하여 정원의 변화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의 결과로, 자연에 심산 유곡에 위치한 정원의 입지와 지형처리기술을 발달시켰으며, 외래의 양식을 차용하고 사랑마당 정원을 변모시키는 정원조성행태를 보이게 된다. 정원의 배치 및 공간구성에서 전환기적 양상이 두드러진 유형은 건물과 마당(내원)으로 공간구획의 유형이 가장 높은 빈도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전환기적 정원설계요소의 출현이 빈번한 유형으로 수경관의 형태와 정원공간의 변화는 사랑 마당을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으며, 외래적인 요소의 영향이 지대한 수경관과 수목, 점경물 등의 도입이 주요한 공간변화를 일으킨 요인으로 볼 수 있다. 전환기적 정원요소로 수경관에서는 계류를 중심으로 한 부정형지의 회유식 연못이 주를 이루며, 식물은 전통수종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외래수종과 토피아리형 수목인 상록침엽수, 관목류의 출현이 두드러지며 건조물은 외래형식이 가미되고 점경물은 형태와 배치기법 등에 변화가 나타나며 원로가 자주 사용되기도 한다. 전환기적 정원조성기법의 특징은 적극적인 지형처리기법과 정원소유를 위한 영역성의 증대, 정원재료 및 형태의 변화와 양식의 혼재, 정원의 장식미 추구, 정원 내 의식공간의 퇴조, 동선처리 기법의 변화, 차경에서 선경으로의 취경기법의 변화, 사랑마당 공간 변화, 정적인 정원감상기법에서 동적으로의 변화 및 은유에서 직유로 정원표현기법이 달라지고 있다. 또한 정원을 중심으로 한 내부지향적 시각구조로의 변화를 들 수 있다. 본 연구는 한국전통정원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일환으로 전통과 현대의 교량 역할을 하는 근대시기에 대해 접근해 본 것으로 시기적 양상은 전통정원에서 근대정원으로 전이되는 전환기적 양상을 중심으로 고찰한 것이다. 향후, 한국조경사의 한 부분으로 근대조경의 시기가 인식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사례의 다각적인 접근을 통한 연구가 지속되어야 할 것이며, 이는 추후 과제로 삼는다.

Nd/YAG레이저를 이용한 포항중성리신라비 표면오염물 제거와 보존처리 (Conservation of Removing Surface Contaminants on Silla monument at Jungsung-ri using Nd:YAG Laser Cleaning System)

  • 이태종;김사덕;이주완;오정현;이명성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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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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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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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포항중성리신라비는 2009년 경상북도 포항시에서 발견되었다. 부정형 형태를 가진 비석의 크기는 최대높이 105cm, 너비 47.6~49.6cm, 두께 13.8~14.7cm, 무게는 115kg이다. 비석은 흑운모화강암이며 보존처리 공정은 훼손지도 제작, 표면 오염물 세척, 에틸실리케이트를 이용한 강화처리 순서로 진행하였다. 레이저를 이용한 검은색 표면 오염물 제거를 위해 표면의 60%이상을 덮고 있는 검은색 오염물을 분석하였다. 분석목적은 오염물 확인 뿐 만 아니라 동일한 오염물을 가진 암석을 확보하여 예비세척을 실시하기 위해서다. 암석 확보를 위한 현장조사 중 경주남산 시료를 p-XRF로 분석한 결과 역시 중성리신라비와 유사하게 Mn이 높게 검출되었다. 중성리신라비와 같이 동일 오염물로 확인된 암석을 10개의 샘플로($5cm{\times}5cm$) 제작하여 Nd/YAG Laser로 예비 세척하였다. 포터블현미경을 이용한 표면 관찰 결과 파워 460mJ, 파장 1,064nm, 방사횟수는 $25cm^2$당 1,800~2,300회가 가장 효과적이었다. 위의 조건을 감안하여 비석 전체를 세척 후 강화처리 하였으며 보존처리에 대한 평가는 색차계 측정 및 성분분석을 통해 오염물 제거 정도를 확인하였다. 색차계 측정 결과 명도($L^*$)값이 $33{\rightarrow}49$로 상승하여 밝아진 것을 수치로 확인하였으며 성분분석 결과 Mn 함량이 $50,000{\pm}5,000ppm{\rightarrow}10,000{\pm}2,000pmm$로 80%가량 감소하여 오염물 역시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경주 남산 이조리귀부에 관한 고찰 (A Study on the Ijori Tortoise Pedestal of Namsan Mountain in Gyeong-Ju)

  • 이은석;조현경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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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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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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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경주 내남면 이조리에 소재하는 최진립신도비의 받침인 석제 귀부(龜趺)는 1740년경에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통일신라시대 귀부를 모사한 조선시대 작품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당시 제작되는 귀부 형식과는 다르고, 모사한 원 귀부의 형식은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모습들이 확인되고 있다. 첫째, 제작 과정을 기록한 '문루일기(門樓日記)'에는 비석을 먼저, 이후에 귀부를 제작했음이 밝혀져 있다. 그러나 비좌 삽입부가 작아 비석 양쪽 끝단을 잘라 삽입한 흔적이 보이며, 비석의 크기를 고려하지 않고 귀부와 비좌를 만들었다는 것은 공정상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또한 비석 제작 부분은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백운대라는 사찰터에서 제작되었다고 할 뿐, 공정 내용이 언급되지 않은 점은 당시 실사를 하고 기록했는지 의심되는 부분이다. 둘째, 이조리귀부의 구름문양은 초기의 태종무열왕릉귀부와 서악리귀부 구름문에서 이행되는 시간상의 세리에이션(Seriation)을 잘 반영하고 있다. 비좌 주변을 장식한 연화문은 중앙에 형식화된 보상화가 표현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 전성기인 8세기대 기와 등에 가장 잘 나타나던 문양이다. 셋째, 전진하는 모습의 이조리귀부는 지금까지 경주에 전해지는 귀부들에서도 찾기 힘든 생동감을 가지고 있으며, 일렬상의 귀갑문 배치는 이전 귀부의 문양 배치보다 훨씬 간결해지고 공간 활용을 고려한 발전된 형식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이조리귀부는 시기적 변화를 보여주는 문양 형식, 비신과 비좌의 불일치, 기록상의 고찰을 통해 볼 때, 18세기 조선시대 석공이 신라문양의 형식변화 등을 모두 고려하여 제작한 모사품이라기보다는 8세기 중반 경에 제작된 통일신라시대 귀부였음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