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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시된 효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인왕선영도(仁旺先塋圖)> 연구 (Showing Filial Piety: Ancestral Burial Ground on the Inwangsan Mountain at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 이재호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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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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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3-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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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인왕선영도(仁旺先塋圖)>(덕수5520)는 그림과 발문(跋文) 열 폭으로 이루어진 병풍으로, 작가는 조중묵(趙重黙)(1820~1894 이후), 주문자는 박경빈(朴景彬)(생몰년 미상), 발문을 쓴 사람은 홍선주(洪善疇)(생몰년 미상), 제작연대는 1868년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낱장으로 보관되어 온 <인왕선영도>를 병풍으로 복원하고 특별전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에서 최초로 공개하였다. <인왕선영도>에는 오늘날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과 홍은동을 아우르는 인왕산 서쪽 실경이 묘사되어있고 원경에는 북한산 연봉이 그려져 있다. 화면 속에는 인왕산(仁旺山), 추모현(追慕峴), 홍재원(弘濟院), 삼각산(三角山), 대남문(大南門), 미륵당(彌勒堂)이라는 지명이 표기되어있다. 이 지역을 나타낸 조선후기 지도와 비교해보면 지형 표현과 지명 표기에 유사성이 있다. 조중묵은 넓은 공간을 포착하기 위해 지도의 지리정보를 숙지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경의 현장을 답사한 결과, 조중묵은 각각의 경물을 과장하거나 생략하였고 수평의 화면에 나열식으로 조합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조중묵은 남종화풍 정형산수에 뛰어났던 화가로, <인왕선영도>의 세부 표현에서 사왕파(四王派) 화풍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 19세기 도화서 화원들이 화보를 활용하여 가옥을 그리거나 토파에 호초점을 찍고 당분법(撞粉法)으로 꽃을 나타내는 등 장식적인 화풍을 구사한 경향도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인왕선영도>에는 바위를 짙은 먹으로 쓸어내리듯 붓질한 기법, 산세의 괴량감, 가로로 붓을 대어 단순하게 그린 소나무 등 18세기 정선(鄭敾)(1676~1759)의 개성적 양식도 가미되어있다. 조중묵은 인왕산 실경산수로 유명한 정선의 양식과 권위를 차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인왕선영도>는 유기적 공간감과 현장의 인상이 잘 드러나지 않으며, 연폭 화면이라는 매체도 조중묵의 개인 양식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인왕선영도>는 발문의 텍스트와 화면의 이미지가 잘 조응하는 작품이다. 발문의 내용을 여섯 단락으로 나누어 보면 ①무덤의 주인공과 이장 경위, ②무덤의 입지와 풍수, ③묘제(墓祭)와 신이(神異)한 응답, ④무덤 관리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협력, ⑤병풍 제작의 동기인 박경빈의 효성과 수묘(守墓), ⑥발문을 쓴 의의로 파악된다. 이 가운데 화면에서 시각적으로 구현하기 용이한 ②의 내용은 화면에 충실하게 재현되었다. <인왕선영도> 제작의 직접적 동기인 ⑤를 보면 주문자 박경빈이 "무덤이 마치 새롭게 단장한 것 같이 눈에 완연하다."라 하여 <인왕선영도>에 만족했음을 알 수 있다. 경물 하나하나를 설명하듯 나열한 구도는 회화미는 떨어지더라도 무덤의 풍수지리를 전달하는 데는 더 적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상당수의 산도(山圖)는 18세기 이후 제작된 목판본 선영도로서, 족보와 문집에 수록된 경우가 많다. 16~17세기의 기록에서는 족자 선영도를 첨배(瞻拜)의 대상으로 삼은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선영도 첨배는 현실적으로 수묘(守墓)가 곤란할 때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의례로 인정되었다. 한효원(韓效元)(1468~1534), 조실구(曺實久)(1591~1658) 등이 선영도를 제작한 후 당대의 명사에게 서문을 요청하고 효심을 과시한 사례는 <인왕선영도>의 선구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정처사유거도(石亭處士幽居圖)>(개인 소장),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국립중앙박물관) 등은 선영도는 아니지만 계회도 형식의 족자이고 풍수를 도해했다는 점에서 17세기 선영도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인왕선영도>는 첨배라는 측면에서 초상화와도 의미가 비슷했다. 발문의 "부친의 기침소리를 직접 접하는 듯하고, 그 태도와 몸가짐을 눈으로 보는 듯하다."는 표현과 부친의 초상에 조석 문안을 올린 서효숙 고사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박경빈이 일반적인 선영도 형식이었던 족자나 목판화 대신 연폭 병풍의 실경산수화를 주문한 의도는 분명히 알기 어렵다. 19세기에는 민간에서도 사례(四禮) 의식에 다수의 병풍을 배설(排設)하였는데, 의례의 성격에 따라 그림의 주제를 반드시 구분하여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인왕선영도> 또한 여러 의례에 두루 배설하거나 장식 병풍으로도 사용하기 위해서 선영 그림이라는 주제를 실경산수화 이미지 아래에 가렸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인왕선영도>의 핵심 소재인 무덤 봉분이 모호하게 처리된 것은 사산금표(四山禁標)의 금제 위반을 숨기기 위함일 가능성이 있다. <인왕선영도>에 묘사된 인왕산 서쪽 산기슭은 분묘 조성 금지구역이었다. 1832년에 금표 내에 몰래 쓴 묘를 적발하여 즉시 파내고 관련자를 엄히 처벌한 사례로 볼 때, 19세기 중엽까지도 사산금표 내의 분묘 금제는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인왕선영도>의 발문에는 장지를 얻기 위해 쏟은 정성이 상세하게 쓰여 있다. 장지조성에 마을사람들의 협조와 묵인이 필요했던 것은 금표 구역 내에 묘지를 조성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인왕선영도>와 비교 가능한 동시대 연폭 병풍의 실경산수화로 이한철(李漢喆)(1808~1880)이 그린 <석파정도(石坡亭圖)>(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를 들 수 있다. <석파정도> 제작시기를 전후한 1861년에 이한철과 조중묵은 철종어진도사에 함께 참여하였으므로 조중묵이 이한철의 <석파정도> 제작 과정을 보았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조중묵이 몇 년 후 <인왕선영도>를 주문받았을 때 <석파정도>의 인상적인 연폭 실경산수를 본 경험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두 작품의 화풍 차이는 주문자의 취향과 제작 목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왕선영도>는 실경산수화와 선영도의 중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관람자의 지식수준과 주문자와의 친분, 관람에 들이는 시간에 따라 천차만별의 의미로 수용되었을 것이다. <인왕선영도>의 발문에는 무덤 주인의 이름과 자호, 본관이 일체 작성되지 않은 채 '박공(朴公)'이라고만 표기되어 있다. 주문자인 박경빈의 인적 사항도 파악할 수 없었으나 다만 관직에 나아가지 못한 가계를 미루어 볼 때 재력이 있음에도 지배계층으로 올라설 수 없는 신분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음은 짐작할 수 있다. 발문을 쓴 홍선주 또한 사대부로 보기 어려우며, 『승정원일기』 기록에 나타나는 경아전 서리일 가능성이 있다. 박경빈은 상류 계층에 진입하고 싶은 욕망으로 보수적인 가치인 효(孝)를 강조하여 부친의 무덤을 명당으로 이전하고 <인왕선영도>를 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인왕선영도>는 금제위반 적발에 대한 우려, 병풍의 다목적성 등의 이유로 본래의 제작의도를 뚜렷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모순적인 이미지가 되었다. 병풍이 제작된 지 47년 만에 각 폭이 분리된 채 미술상을 통해 이왕가미술관 소장품이 된 상황을 보더라도, 박경빈이 <인왕선영도>에서 꿈꾸었던 명당 발복과 가문의 신분상승은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 화훼식물의 이용과 상징성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Utilization and Symbolizes of the Joseon Dynasty Flowering Plant)

  • 김승민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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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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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4-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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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본 연구는 조선시대의 고문헌과 옛 그림에서 나타나는 화훼식물을 재료로 궁궐정원과 민가정원에 나타나는 지피식물의 이용특성과 상징성을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문화재 지역 및 현대 조경공간에 활용을 위한 기초자료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었다. 첫째, 조선시대 고문헌과 옛 그림에서 출현한 화훼식물의 출현빈도는 매화, 연꽃, 모란, 국화, 파초, 영산홍, 장미, 진달래, 작약 등이 10회 이상으로 높은 빈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다음으로 비교적 출현 빈도가 높은 식물은 치자, 석류(8회), 패랭이꽃, 포도(7회), 난초, 정향, 봉선화, 원추리, 맨드라미, 무궁화, 철쭉류, 창포, 접시꽃, 황매화, 유자(5회), 부용, 동자꽃, 금전화, 베고니아, 해바라기, 양귀비, 수선화, 서향화, 옥잠화 등(4회)이였으며, 그 외에는 29분류군 총 81종의 화훼식물이 조사되었다. 둘째, 궁궐과 민가에서 사용되었던 조선시대 화훼식물의 이용은 분에 심어 가까이 두고 완상하거나 화단, 화계, 화오, 연못 및 담장주변 등에 주로 식재하였음을 고문헌의 기록과 정원도 및 민화의 그림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산홍의 식물재료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에서 다루어지고 연구되어진 민가정원의 관련된 문헌(6점)이나 옛 그림(766점)에서 출현한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대중에게 유통이 극히 일부에 국한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조선시대 화훼식물 상징성은 유교의 절개, 군자, 청빈, 충효사상을 나타낸 경우, 도교의 신선사상이나 불로장생을 나타내는 경우, 민간신앙의 부귀영화나 만사형통을 기원하는 경우로 구분할 수 있었다. 이는 식물을 덕성함양의 대상이나 기복의 대상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조선시대 이용했던 화훼식물은 선비가 닮고 싶은 이상과 지향하는 정신세계와 일치하였기 때문에 선조들의 상징으로 나타났다고 본다. 조선시대 이용하였던 화훼식물은 수목종류에 따른 보편적인 판단기준이 아닌 다양하고 주관적이며, 또한 정신적인 측면으로 접근하여 해석할 때에 조선시대 화훼식물의 조경공간에서의 활용범위 또한 넓어질 것으로 사료된다.

둔덕리 이웅재고가(李雄宰古家)의 공간 및 경관 구성적 특성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Spatial and Visual Composition of Yi Ung-Jae's Old House, Dundeok-ri)

  • 노재현;이정한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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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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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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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본 연구는 전통정원의 가치 발굴과 재조명을 목적으로, 임실 이웅재고가의 공간적·시각적 배치 특성과 경관과 정원 구조를 검토하여 전통정원으로서의 문화재적 가치를 부상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시도되었다.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고가가 입지한 둔덕리 동촌마을은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형국으로 3개로 모인 물줄기 북측에 전착후관한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단구대와 삼계석문의 경승을 갖는 동촌마을은 노적봉과 계관봉은 안산(案山)으로 한 '지네가 하늘을 나는 형국(飛天蜈蚣形)'의 길지로 이해된다. 이웅재고가는 16C 중반 춘성정 이담손에 의해 조영된 전북지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가이자 조선 왕실가문의 종가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및 일제강점기 일본에 저항한 충정과 대문채의 효자정려 그리고 편액과 주련에 담긴 충효의 가풍은 물리적인 가옥의 가치를 부상시키는 요소가 되기에 충분하다. 경사진 지형에 거스르지 않게 배치된 사랑채나 안채의 배치 그리고 높은 돈대에 올린 사랑채는 최대한 원경을 차경하는 효과를 거두며 왕가 건물로서의 위엄성과 위계성을 높이고 있다. 또한 사주문과 중문을 통한 안채 진입방식, 넓은 후원과 채원의 할애 그리고 안채에 배려된 공루 등의 가옥 구성은 일반 사대부가에 비해 매우 독특하다. 그러나 전후관계로 보면 사당을 주변으로 넓은 후원을 안배함으로써 유교적 이상을 실현하는 한편 자연과의 조화를 꾀하고 있다. 한편 지금은 교란·훼손되었으나 외원에는 비교적 넓은 면적을 갖는 방지원도형(方池圓島型)의 지당(池塘)이 존재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고가에서 주목되는 식재수종은 후원의 소나무, 팽나무, 감나무, 매화, 홍단풍 그리고 측정의 산수유를 비롯하여 외원의 자두나무 등이다. 석축 위로 조성된 화계는 고가의 정원상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공간으로 정원 특성을 잘 간직한 공간이지만 화계 식생경관에 어울리지 않게 종 다양성과 사당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함이 극도로 높아 식재의 짜임새를 상실한 느낌이다. 이웅재고가는 조선 전기 궁궐 밖에 조성된 궁가(宮家) 건축의 한 단면을 보여줄 수 있는 조영물이라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이와 같은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이웅재고가의 관리 개선방안을 제안하였다.

("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 중(中) 사혈(瀉血)에 관한 연구(硏究) (A Study on the Blood-Letting Therapy in Elementary Questions)

  • 이준근
    • 대한한의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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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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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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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Blood-Letting Therapy is a rational and ecological medical treatment by which we can heal most of the diseases by removing the static blood which precipitates in the blood vessel and blocks the flowing of blood. And the static blood is the generic term for the injurious, bad, dead and precipitated blood which is blocked the capillary vessel. The Yellow Emperor's Canon of Internal Medicine says that "the patient is treated with drugs internally and stone acupuncture externally. "In the old texts, the blood-letting therapy is mentioned as blood-letting, network vessel pricking, bloodletting, pricking, and arousing pulses etc and it is noted down as the method of network vessel pricking in 'On the Application of Needles' of Spiritual Pivot. Nine-pricking therapy, twelve-pricking therapy and five-pricking therapy are recorded in the methods of network vessel pricking and among them, the method of squeezing blood after pricking the affected part is explained as the network vessel pricking. There are four methods of network vessel pricking, pricking, picking, cluster needling and scatter-pricking and they are fluidly applied to the various symptoms of diseases. In 'On Discriminative Treating for Patients of Different Regions' in Elementary Questions, Ki-baek emphasizes "most of the local people, there are black in skin and loose in striate, and their diseases are mostly of carbuncle kind. It is suitable to treat the disease with stone therapy to prick with stone, so the stone therapy is transmitted from the east. "And in 'On the Corresponding Relation Between the Eum and Yang of Man and All Things' in Elementary Questions, when the Emperor asked Ki-Back, he answered "sthenia means the sthenia of evil, and deficiency means the deficiency of healthy energy. When the blood is sthenic, the evil should be discharged by pricking when out letting the blood; deficiency of vital energy is the asthenia of channels and network vessels, so the energy should drain from the channel which is not deficient, to replenish. "And in this case we can use the methods of 'Breaking out the static bloods', 'driving out the static bloods', blood-letting'. With this we can infer that the blood-letting therapy is made use of the important medical treatments from the ancient times. Especially in referring to the principles of treatment in The Yellow Emperor's Canon of Internal Medicine, it mostly alluded to acupuncture therapies and only eleven times to medicinal treatments. This is to verify that the blood-letting therapy formed the foundation of the medical art. In Dong's Therapy of Acupuncture-Moxibustion and Bloodletting, Dong Kyeong-Chang gave emphasis on the points that there must be extravasated bloods without exception in the serious illnesses which is old, unnatural, accompanying acute pains and so we can revive our body‘s sprit by circulating 'gi' and static blood piled up in the network vessel, regulating the weakness and strength, and controling the disharmony of the internal organs. The blood-letting therapy has effect on the orifice in emergency, such as fore draining, freeing network vessels, harmonizing gi and blood, relieving pain, dispersing swelling and concretion, sedation, resolving toxin as well as strengthening the heart, relieving itching. So it has distinguished effect on all kinds of medical treatment to the modern people. But by the change of social customs and the confucianism of confucius - it is widely spread on the period of North and South Dynasties, 'Wi' and 'Jin' in china and the period of the Three States in korea - The blood-letting therapy which was regarded as the most important medicinal treatment withered rapidly. And Confucius accentuated the importance of our body and all its members, loyalty and filial piety and banned any damage of our body under no circumstances. As a result of it, the therapy of blood-letting had a rapid decrease and barely kept itself in existence in both countries. What is worse, at the period of Japanese colonial rule of korea and our nation's founding of early stage, it has been withered by the high-handed policy to change Oriental Medicine into modern medical science. So the therapy of blood-letting barely kept itself in existence in some Buddhist temples. Another case, it has handed down as a old-fashioned quick fix in folk remedies. But all kinds of the contamination of heavy metals and the misuses of antibiotics are widely spread nowadays, which increased diseases of adult people and incurable diseases as modern society unavoidably made its way into a highly industrial society. To make us more miserable, the western medical science - the antibiotics and surgical operation medical science - already reveals itself into a limit. The necessity of a new medical science which can give a security to the patients who are suffering from the diseases of adult people and the incurable diseases is especially come into the force nowadays. In view of the results after bibliographically studying on the blood-letting Therapy in Elementary Questions of the Yellow Emperor's Canon of Internal Medicine, the blood-letting therapy has acted for the important Oriental medicinal science and has been clarified the prominent effects on the diseases of adult people and the incurable diseases. So it is regarded as an appropriate thing that we lay out a determined theory of the blood-letting therapy and of course prevent the unwanted side effects from inappropriate medicinal treatments, and make full use of clinic by elevating the curative value and that we win back our self-respect of medical treatment which is dominated from the western medical science and ultimately contribute to national medical welf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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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청전에 대한 현대적 상상력과 스토리텔링 전략 - 영화 <마담 뺑덕>(2014)을 대상으로 - (A Study on the Modern Understanding of SimChong-Jeon and its Storytelling Strategy in the Movie )

  • 신호림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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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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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03-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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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고는 영화 <마담 뺑덕>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심청전에 대한 현대적 인식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기존의 심청전 서사를 변용시키는 현대적 상상력을 '스토리텔링'이라는 용어로 포착하고자 했다. 먼저, <마담 뺑덕>의 내러티브를 시간구조에 따라 세 단락으로 구분해서 살펴보았다. <마담 뺑덕>은 심학규를 중심으로 인물들 간의 관계망을 형성시키지만, 심학규가 그의 욕망을 현실에 개입시키면서 점차 관계는 파탄에 이르게 된다. 내러티브 초반에는 등장인물들의 개별적인 욕망이 서로 얽혀있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마담 뺑덕>에 드러나는 '문제-해결'의 방식은 심학규의 욕망에 초점을 맞추면서 구성된다. 여기에서 욕망으로 인해 관계가 파국에 이르고, 그 욕망이 심화됨으로써 심청에 대한 강제적인 희생이 요구되는 과정은 기존 심청전의 서사와 맞닿아 있다. 그러나 <마담 뺑덕>에서 마지막으로 던지고자 했던 메시지는 욕망의 끝에 찾아온 '사랑'이라는 새로운 관계의 기표와 관련이 있으며, 이는 스토리텔링의 관점에서 <마담 뺑덕>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한다. 심학규의 내러티브에만 주목했을 때, 심청전의 서사와는 독립된 또 하나의 '내러티브-축'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모든 결핍을 채우고자 했을 때 더 큰 결핍을 조우해야 했던 심학규를 그려냄으로써 이제 결핍은 욕망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를 두어야 함을 보여준다. 바로 그 시점에서 어그러진 모든 관계를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욕망이 빠져나간 자리를 대체하게 되고, 그 관계는 '사랑'이라는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기표를 획득하게 된다. 즉, 심학규의 내러티브는 욕망으로 점철된 인간이 순수한 관계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를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담고 있는 것이다. 안맹이나 가난과 같은 이중적 결핍을 심학규의 욕망과 연결 짓고, 그 욕망에서 벗어나 사랑이라는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심학규의 내러티브는 심청전에서 보이지 않던 새로운 이야기를 말하는 것과 연결된다. 심청전의 서사를 지배하고 있던 심청 중심의 이야기에 대항하여 '다른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마담 뺑덕>은 어떻게 보면 스토리텔링의 '사회적 실천'을 이행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마담 뺑덕>은 고전(古典)이라는 이름 아래에 그동안 심청전을 해석함에 있어 심청의 희생 또는 효에만 천착한 것을 비판하며, 새로운 내러티브가 창출될 수 있는 스토리텔링 전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조선(朝鮮) 초기(初期)의 병서(兵書) 편찬(編纂)과 병학(兵學) 사상(思想) (Compilation of Books on Military Arts and Science and Ideology of Military Science in the early Joseon Dynasty)

  • 윤무학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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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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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25-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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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이 논문은 조선 초기에 편찬된 병서(兵書)를 통하여 지식인들의 병학(兵學) 사상을 개괄한 것이다. 선초는 대외적으로는 남북으로 외세(外勢)를 극복하고, 대내적으로는 새로운 왕조(王朝)의 기반을 확립하는 상황이었으며, 이것은 병서 간행에 있어서도 전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당시의 병서는 병학 자체의 정립 목적과 아울러 여말(麗末)의 무장(武將)이자 조선(朝鮮)의 개조(開祖)로서 활약상을 반영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고려하고 있다. 선초에 출간된 병서는 일부 전쟁사 기술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무경칠서(武經七書)와 그 주해에 근거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병학 정립의 시급성과 아울러 우리나라 고래의 병서가 전해지지 않았던 데 원인이 있다. 그러나 당시 지식인들은 무경칠서를 권모궤계(權謀詭計)에 치우친 것으로 평가하고 유가적 입장에서 병학을 재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로부터 중국과 우리나라의 지리적(地理的) 차별성이 병학 논쟁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병학과 음양가(陰陽家), 병학과 유가(儒家)와의 관계에 대한 논쟁도 있었다. 선초의 병서에서는 무엇보다 장수의 문무겸전(文武兼全)의 리더십과 군대의 화합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현실적 측면에서 예악(禮樂)과 병형(兵刑)의 겸용(兼用)을 강조하고, 순자(荀子)의 '부민(附民)'(일민(壹民))의 사상을 대량으로 원용(援用)하고 있다. 이 점은 중국의 병가(兵家)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성리학의 정립 과정에서 맹자를 전제로 하는 것과는 다른 경향이다. 요컨대 선초 지식인들은 문무병용(文武竝用)이라는 전제하에 병학을 유가의 성현(聖賢)과 연계시키고, 양자의 접합점으로서 인의(仁義), 예악(禮樂), 충효(忠孝), 삼강(三綱), 오륜(五倫) 등의 덕목을 들고 있다. 특히 병학을 유가의 삼강이나 오륜과 연계시키는 것은 중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며, 한 마디로 조선 초기 병학의 특징은 '병학(兵學)의 윤리화(倫理化)'라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유교의 통속화와 「저승전」의 이념성 - 조선후기 권선서(勸善書)의 유행과 관련하여 - (A Study on the Spread of Taoist Gwonseonseo in the 19th Century and the Ideological Nature of Jeoseungjeon)

  • 김정숙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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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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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7-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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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이글은 조선후기 성리학이 균열되고 확장되는 과정에서 종교적 윤리성이 강화되어 현세의 윤리적 실천이 내세의 복으로 이어진다는 세속적 생활윤리로 변화되고, 또 한편에서는 유불도 사상이 결합된 도교 권선서가 유입된 이래 언해, 간행되어 민간에 널리 퍼져 생활 이념화되었던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유교의 세속화 및 조선후기 권선서의 윤리적 이념성이 19세기 한글필사본 소설인 "저승전"의 윤리관과 연결되고 있음에 주목하여 19세기 권선서(勸善書)가 갖는 시대적 의의를 살펴보고 "저승전"의 이념성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조선후기 권선서(勸善書)는 크게 두 가지 축으로 구분할 수 있으니, 유교를 바탕으로 하되 귀신이나 명계(冥界), 선행으로 인한 내세의 복리(福利) 등 종교적 실천을 강조한 유교적 권선서와 주로 중국 도교 권선서의 언해로 유불도 사상이 결합되고 옥황상제, 문창성군 등 도교의 신을 존숭(尊崇)할 것과 선행으로 인한 복을 받은 이들의 예화를 적극 수록한 도교적 권선서가 그것이다. 이 중 유교적 권선서는 조선후기 경학 연구자였던 심대윤(沈大允)의 "복리전서(福利全書)"에서 그 일단을 찾아볼 수 있는데, "복리전서"의 서문(序文)에서 드러나듯 이 책은 일반 백성들의 행동 교화를 목적으로 하여 기본적으로 유학자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저서 곳곳에서 귀신과 저승의 보응을 강조하여 천인감응의 인과론과 이승에서의 선행을 적극 강조한다. 심대윤의 사상은 성리학의 관점과 달리 내세와 보응을 중시하고 불교의 윤회설과 유사한 듯하지만, 이는 철저히 현실에서의 선행과 그로 인한 복리를 강조한 것일 뿐 귀신을 섬기거나 현실을 부정하는 종교적 태도와는 다르다. 조선 후기 권선서 유행의 다른 한 축인 도교 권선서는 충효 등의 유교 윤리를 권선징악적 입장에서 강조하고 그 실천을 통해 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는 입장에서 유교적 권선서의 태도와 유사하다. 다만 중국 도교 권선서의 언해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도교의 신들을 엄히 신봉하고 탄신일을 지키며 일상에서 지켜야 할 덕목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세세하게 제시한다. 이는 현실에서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신의 감시 하에 있으며 그에 대한 점수가 사후와 직결된다는 의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이들 도교 권선서는 임금의 명과 지식인들의 적극적 개입뿐 아니라 민간에서는 책을 간행, 배포하는 것만으로도 복을 받는다는 의식 때문에 파급력이 매우 컸다. 특히 도교 권선서에는 이승에서 선악을 행한 뒤 저승에서 겪는 구체적 사례를 매우 다양하고 방대하게 수록하였는데 도교 권선서의 이러한 서사성은 여성을 비롯한 하층민에게 도교 권선서가 효과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원인이 되었다. 생활 속 실천 윤리의 강조와 보응이라는 소박한 종교적 태도의 유교 권선서와 종교적 성향은 훨씬 강하긴 하지만 일상 생활에서 지켜야 할 행동 규칙을 세세하게 제시함으로써 권선의 목적을 확실하게 드러낸 도교 권선서는 종교의 차원을 넘어 조선후기 서민들의 일상 속 윤리 교과서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담당하였다. 19세기 필사본 한글소설 "저승전"은 선승인 지선이 득병(得病)하여 저승에 다녀온 내용으로, 일반적 불교 저승체험담의 형식을 지니면서도 이념 지향 면에서 독특한 면모를 지닌다. "저승전"은 기본적으로 불교적 인물의 저승 체험이라는 불교적 외피에, 옥황상제나 각종 도교적 신들의 위계에서 보듯 도교적 상상력과 삼강오륜 등의 유교적 윤리가 어우러져 있다. 그중에서도 주인공이 목격한 저승의 심판 장면은 매우 구체적이고, 단지 추상적 선(善)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직분과 신분에 따라 지켜야 할 사항을 일일이 제시하며 이를 어긴 자에 대한 처벌 또한 상세히 묘사하였다. 이러한 "저승전"의 특징은 바로 19세기 권선서에서 일반 백성들에게 선행과 보응의 엄밀함과 선행의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여 생활 속 실천으로 이끌고자 하던 당시의 사회 문화적 분위기와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북한산 조계동 송계별업(松溪別業) 정원 복원을 위한 경관해석 (A Study on the Landscape Interpretation of Songge Byeoleop(Korean Villa) Garden at Jogyedong, Mt. Bukhansan near Seoul for the Restoration)

  • 노재현;송석호;조장빈;심우경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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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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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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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문헌연구와 현장연구를 바탕으로 17C 중반 북한산 조계동(曹溪洞)에 조영된 송계별업의 장소성과 별업의 정원상 및 경관상을 추적하여 송계별업 원림의 복원을 전제로 한 경관해석을 시도한 본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송계별업은 인조의 3남이자 효종의 아우인 인평대군 이요가 인조 24년에 조성한 왕가별업이다. 본제는 직선거리로 약 7km 떨어진 건덕방 타락산 아래의 궁집 석양루로서, 대군이라는 조영주체의 신분적 특수성 때문에 송계별업 또한 단청 및 건물의 제도가 매우 화려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의 장소정체성이자 핵심경관은 구천은폭으로 중국 여산폭포에 비견되는 다층의 폭포를 갖는 관폭과 청음의 공간이었으며, 별업 멸실 이후에는 왕릉 부석장으로 역할과 부석금표처의 장소이미지가 더해졌다. 조계동천을 중심으로 한 송계별업 내원은 구천은폭을 비롯하여 한담과 창벽 등의 자연경관과 비홍교, 보허각, 영휴당 그리고 계당 등의 인공요소가 절묘하게 조화되었다. 또 현존하는 '송계별업'과 '구천은폭' 바위글씨는 별업원림의 조영자와 영역성을 상징하는 경관언어이자 장소 표식으로, 보허각을 중심으로 비홍교, 창벽, 한담 등의 경물명을 바위에 세기고 의미를 부여하였다. 특히 시각적 종점의 역할을 하는 구천은폭은 캐스캐이드형의 다단폭포로서 그 하부는 말구유 형상의 절리상 포트홀의 지형경관적 특성을 보인다. 한편 외원은 별업 정문과 행랑채 성격을 갖는 공간과 내 외원 양자를 연결시켜주는 계당과 돌다리 그리고 기거를 목적으로 한 영휴당 등으로 구분된다. 영휴당에서는 보허각만 관망되는 반면 보허각에서는 구천은폭을 비롯하여 영휴당 등 사방의 조망이 가능하도록 한 이원적 조망 틀짜임이 읽혀진다. 또한 비홍교에서 구천은폭과 창벽 그리고 한담을 상호 부감 앙시하게 되며, 비홍교를 건너 보허각에 올라 구천은폭과 조계동천을 바라보는 단계적 행위를 체험케함으로써 속세에서 선계로 이행되는 시각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안평대군 비해당(匪懈堂) 원림의 의미경관과 조경문화 (An Interpretation of the Landscape Meaning and Culture of Anpyung-Daegun(Prince)'s Bihaedang Garden)

  • 신상섭;노재현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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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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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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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안평대군(1416-1453)의 비해당 원림을 대상으로 집현전 학사들이 차운한 연작시 '비해당사십팔영'의 경관 어휘소를 분석하여 조선 전기 사대부정원에 담긴 의미경관 및 정원문화를 해석한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안평대군이 인왕산 기슭에 비해당 원림을 가꾸면서 제영한 '사십팔영'의 소표제는 동식물의 태생과 형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의미와 상징성 등을 음양의 접합과 같이 대비적으로 연작하는 규범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경물 중 38개는 식물소재를, 8개는 점경물과 동물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둘째, 정원 명칭을 원림(園林), 정제(庭除), 임천(林泉), 화원(花園)등으로, 뜰의 밀도와 위치에 따라 공정(空庭)과 만원(滿園), 중정(中庭)과 후원(後園), 원락(院落: 안뜰)과 별원(別院) 등으로 세분하여 표현하고 있다. 한편, 누정과 수경시설은 물론 디딤돌과 계단, 그늘시렁, 평상, 화분, 석가산, 괴석, 우물, 롱(籠)(새장), 꽃밭(오(塢)), 생울타리 등이 작정 소재로 다양하게 도입되고 있으며, 뜰 관리자를 사화(司花), 정원수 심기와 가꾸기를 재배(栽培), 연못 속 섬을 부구(浮丘), 축소 경관을 조성하는 축지(縮地) 등의 명칭을 사용하였다. 셋째, 바깥뜰에는 버드나무를 심었고, 서재 앞에 매화를 심어 대나무숲길로 이어지게 했으며, 화원을 만들어 작약, 동백, 모란, 배롱나무 등을 심었다. 점경물로는 이끼 낀 괴석, 작은 석가산, 유리석과 화분을 두었고, 장방형 연못을 조성했으며, 뜰에는 사슴, 꽃 비둘기, 금계, 학 등을 사육했다. 넷째, 경물을 상징화하여 (1) 군자와 절개, (2) 부귀영화, (3) 신선 풍류, (4) 은일과 은둔, (5) 기타 효행과 덕, 성찰 등 의미경관을 취했다. 즉, 기화이초와 진금기수가 어우러진 원림을 조성하여 격물치지의 교훈, 은일과 은둔문화의 대입, 불로장생과 무릉도원을 염원하는 선경처의 구축 성향 등 의미경관 요소가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다. 다섯째, 경관을 취하는 기법으로 앙경(仰景)과 부경(俯景) 그리고 저경(低景), 외부경관의 차경, 꽃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의미경관을 즐기고 (유경(幽景)), 꽃구경의 흥취를 돋우며 노닐 수 있는 요정(遼庭), 꽃가꾸기 취미인 화색향벽(花色香僻) 등이 발견되고, 사계절과 시간에 따라 감흥을 달리하며 즐기는 시어가 추출된다.

다산의 인간관과 효(孝)·제(弟)·자(慈)의 실천 (Tasan's Viewpoint of Human Being and Practice of Xiao (孝)·Ti(弟)·Ci(慈))

  • 정상봉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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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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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7-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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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이 논문은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형이상학적 설명을 한 주자의 관점을 비판하였던 다산이 어떻게 인간을 이해했는가, 그리고 인간의 윤리실천에 대하여 어떤 주장을 하였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다산에 따르면, 신체와 정신의 결합체인 인간은 신체적 성향과 도덕적 성향을 타고난다. 특히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성향은 인간 존재의 본질이다. 이것은 상제로서의 하늘이 인간에게만 부여해 준 것이다. 또한 인간은 자율적 판단능력과 주체적 실천의지인 자주지권(自主之權)을 갖추고 있다. 향선(向善)의 경향성이 있지만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의 행실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 이에 상제(上帝)는 인간의 동기와 행위의 선악 여부를 언제 어느 때고 감찰한다. 상제의 목소리는 인간의 도심(道心)을 통해 울려나온다. 이것이 윤리실천의 외적 동인(動因)이요, 내적 동인이다. 인간의 제반 실천윤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을 표상한 개념어가 바로 인(仁)이다. 즉 인간은 부모와 자식 형과 동생 임금과 신하 남편과 아내 친구 등의 관계에서 자신의 위상에 합당한 도리의 실천을 통하여 인(仁)의 덕을 쌓아간다. 인(仁)의 덕(德)을 이루는 데는 효(孝) 제(弟) 자(慈)가 기본이다. 이 천륜에 관한 윤리에는 유가윤리의 쌍무적 정신에 대한 존중이 담겨 있다. 효(孝)를 바탕으로 임금을 섬기고, 제(弟)를 바탕으로 어른을 섬기며, 자(慈)를 바탕으로 백성을 부려야 하는 것이다. 이 효(孝) 제(弟) 자(慈)를 토대로 한 윤리실천의 방법이 바로 '서(恕)'다. 서(恕)는 나의 마음을 미루어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추서(推恕)로서 신체적 성향에 관한 것과 도덕적 성향에 관한 것을 두루 포괄한다. 전자의 경우, 자기 욕구의 절제나 양보가 필요하다. 후자의 경우는 공동체 사회내의 당위의 구현을 목표로 삼는다. 결론적으로 다산의 윤리학은 도덕적 성향과 자주지권을 갖고 타고난 인간은 상제의 뜻이 투영된 도심(道心), 즉 도덕적 양심에 귀 기울여 효(孝) 제(弟) 자(慈)의 윤리를 서(恕)의 방법에 따라 실천해 나감으로써 인(仁)의 덕(德)을 쌓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것이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요, 또한 상제인 하늘을 섬기는 길인 것이다. 이에 다산은 수사지학(洙泗之學), 즉 공맹철학의 핵심사상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