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period(Goryeo dynasty,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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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천석(元天錫)의 역사의식과 유불도(儒佛道) 삼교관 (A Study on the Historical Consciousness and View of the Three Religions of Won Cheon Seok)

  • 정성식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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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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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5-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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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 연구의 목적은 고려 말과 조선초기라는 역사적 전환기에 삶을 영위한 원천석의 역사의식과 유불도 삼교관을 탐구하는데 있다. 원천석은 당시 백성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대변하려 하였다. 백성들을 고통과 도탄에 빠뜨리고 있는 권세가들의 전횡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그의 태도는 고려 말 신진사류들의 입장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그는 요동정벌이 시행되자 고려의 기상을 떨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겼으나 현실상황은 자신의 기대와는 다르게 전개되어 나갔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말을 돌려 회군을 함으로써 국가적 위기상황을 맞이하게 되자 원천석은 이성계의 행위에 대한 강한 부정적 입장을 표명하였다. 원천석은 유학자로서 불교와 도교를 부정하지 않는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는 유불도가 하나의 이치로 통하는 것이라 파악하였다. 유학에 학문적 토대를 둔 그가 유교 그 자체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교적 세계관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를 도모하여 유교적 사유체계에서 오는 현실적 갈등과 대립의식을 승화시키고 있었다. 열린사회와 글로벌화를 지향하며 다문화사회로 접어든 현대는 다양한 가치관이 공존하고 점차 민족 간 문화적 교류 빈도가 증대해가고 있다. 이러한 현실적 변화과정으로 볼 때, 타자에 대한 넓은 이해와 소통, 그리고 상호존중의 교섭적 특성을 갖는 원천석의 유불도 삼교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Painting of a Buddhist Figure Accompanied by a Tiger on the Silk Road: Itinerant Monk, Arhat (Nahan) and Sansin

  • KIM, KYONG-MI
    • Acta Via S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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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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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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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Following the introduction of Buddhism to China by Xuanzang (玄奘 602-664), the visual tradition of an itinerant monk became a popular subject. This theme developed into a Buddhist figure with an accompanying tiger, especially in Korea where tigers were an object of worship and ritual. This paper examines Korean examples of post-itinerant monk Buddhist figures accompanied by tigers, in particular the portrayal of itinerant monks as arhats and sansins. The supernatural powers of arhats were diverse, and they often tamed the tigers who then accompanied them on their journeys. The arhat, who was introduced during the Unified Silla period and gained popularity during the Goryeo period, was loved by the general public during the Joseon Dynasty as a familiar presence that brought good fortune. Special portraits of monks accompanied by a tiger, known as sansindo (山神圖), form a unique Korean genre. Sansin religious beliefs formed through a fusion of the newly introduced Buddhism and the age-old indigenous worship of sacred mountains and tigers. Most Buddhist temples include a sansin shrine containing on altar with sansin statues and portraits. Tigers in the portraits of itinerant monks and the stories of Buddhist monks who tamed tigers became famous and widely accepted in Korea, a nation already rich in tiger lore. Folklore and indigenous shamanism contributed to the establishment of Buddhism in Korea, and tigers played a central role in this.

조선시대 녹각성과 수중목책의 조성 및 활용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Creation and Use of Nokgakseong and Underwater Wooden Fence)

  • 심순희;김충식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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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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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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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방어시설로 추정되고 있는 목책(木柵)은 조선시대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까지 군사적인 방어기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城)이나 병영(兵營) 외부에 설치되는 성책(城柵), 영책(營柵)의 개념으로 정립되면서 방어를 위한 필수시설로서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본 연구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 문헌조사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관방시설로 이용되었던 목책을 연구한 결과로, 녹각성(鹿角城)과 수중목책(水中木柵)의 용도와 기능 그리고 설치 방법 그리고 목책의 소재 등을 집중적으로 고찰하였다. 본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여말선초 외적의 침략이 빈번해짐에 따라 목책은 주요 성외 방어시설(防禦施設)로써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목책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나 관방정책, 입지 환경에 따라 목책성, 녹각성 그리고 수중목책 등 다양한 유형으로 변용(變容)되어 설치되었다. 둘째, 목책은 요충지(要衝地)의 산성(山城)이나 영(營), 진(鎭), 보(堡), 성(城) 등 군사적 목적의 관방시설(關防施設)에 설치되었으며, 유사시 방어의 시급성에 따라 농번기(農繁期)를 피해 인력의 동원이 수월한 농한기(農閑期)에 맞춰 설치되었다. 문헌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 조선시대 목책의 규모는 포백척(布帛尺)으로 환산한 결과 그 둘레가 4,428척(2,066m)부터 55척(25m)까지 매우 다양한 규모였다. 또한, 목책의 재료는 소나무와 참나무류가 주로 사용되었다. 셋째, 녹각성은 일반적인 목책보다 공격성을 겸비한 효율적인 전투 지원시설로,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녹각성기록은 세종대에 20회로 가장 많은 기록이 나타났다. 지역별로는 4군 6진 지역인 평안·함길도(12) 등 변방(邊防) 험지(險地)에 주로 설치된 것으로 나타났다. 넷째, 15세기 초반 조정에서 남해안 연해지역(沿海地域)의 해상 방어 전략을 수립하게 되면서부터 1510년 삼포왜란(三浦倭亂) 이후 본격적으로 읍성(邑城)을 비롯한 주요 치소(治所)나 진, 보 등 여러 관방시설 주변에 왜적의 병선(兵船)을 저지하기 위한 방어시설로서 수중목책의 설치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다섯째, 삼포왜란을 전후한 15세기부터 17세기 사이 남해안과 강화도에 수중목책이 설치되었다. 특히 15세기에 제포와 같은 경남 해안 요해처(要害處)에 수중목책이 집중적으로 설치되었다. 수중목책의 재료는 소나무와 참나무류가 주종을 이루지만 이 밖에도 합다리나무, 서어나무류, 칠덩굴도 목책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우리나라 다문화 현상의 효시로 본 백정신분 해방운동의 복합적 요인에 대한 연구 (A Study on the Various Factors of Liberation of Baekjeong identity by the Present of Multicultural Phenomenon in Korea)

  • 설기환;박경란;박명혜;유석호
    • 디지털융복합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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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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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05-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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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백정이라고 하면 조선이후의 하천민인 도살업을 하는 신분의 사람이라는 일반적 인식이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백정이란 호칭은 일반농민의 한 신분을 칭하였고 도살업의 신분은 화척, 재척 등으로 호칭된 북방에서 유입된 이민족으로 조선초기에 제민화정책에 따라 신백정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가 조선후기에 백정으로 불리었다. 정책의 실패로 농민 중심이던 일반인이 저급하게 여기는 직종에 종사하면서 천대와 멸시가운데서 살았던 다문화의 대 선배이다. 이들 백정이 어떻게 그 신분의 굴레를 벗게 되었는지 그 배경과 흐름을 살펴서 오늘날 우리사회의 화두가 되고 있는 다문화 정책을 결정하는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이 연구의 목적이다. 과거의 현상이 연구의 기반이 되므로 역사연구자들의 연구를 기반으로 백정해방 운동의 원인을 파악하고 현시점의 다문화에 관한 관점은 정부의 관련기관의 통계를 유의미하게 해석하여 조망하였다. 연구 결과, 백정해방은 매우 다양한 시대적 사회적 원인과 과정을 거쳤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다문화 사회의 현상과도 비슷한 양상을 가지고 있어 요인분석에 더해서 해방과정을 좀 더 연구한다면 정책개발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김유신 관련 사료를 통해 본 시기별 인식 (Periodical Perceptions from Historical Materials for KIM Yoo-Shin)

  • 박찬흥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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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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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7-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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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김유신은 살아 있을 때는 물론이고 죽은 뒤에도 신라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살아 있을 때는 태종과 문무왕을 보필하여 '일통삼한'의 대업을 이룩한 최고의 신하로 평가받았다. 당나라는 물론이고 고구려와 일본에서도 김유신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 평가했다. 김유신은 죽은 뒤에도 태종을 도와 대업을 이룬 '좋은 신하' 또는 '성스런 신하'라고 인식되었다. 또, 문무왕과 함께 '두 명의 성인'으로 추앙되었으며, 불교적으로 33천의 한 사람이 내려온 것이 김유신이라고 인식되었다. 신라 하대에는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어 '무(武)를 일으킨 대왕'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고려시기에는 신라에 이어서 진천현 태령산의 사당에서 국가제사로 받들어졌다. 김부식은 김유신과 태종무열왕 문무왕의 관계를 빗대어 자신의 처지를 보여주려 했는데, 김유신을 두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큰 공을 이룬 인물로 평가했다. 또 윤관은 김유신이 신령스러운 기적을 많이 일으킨 장군으로 인식했고, 이승휴는 김유신이 오묘한 병서를 얻어 무예에 뛰어났다고 말했다. 고려 말의 정추도 김유신이 기이한 능력을 가진 장수이고 큰 무공을 세웠다고 인식했다. 조선시기에서도 태종무열왕 문무왕과 신하 김유신의 절대적인 신임관계로 인해 김유신이 큰 공적을 세웠다는 평가가 지속되었다. 그리고 김유신은 신라의 무(武)를 대표하는 인물이거나 신라 왕조 전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고 보았다. 나아가 중국의 인물에 견줄만한 능력과 공훈이 있는 인물이라고 인식되었다. 조선에서도 김유신이 병법에 뛰어났고 쇠뇌와 같은 훌륭한 무기를 활용했다고 보았으며, 특히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그들은 김유신이 왜적을 소탕해주기를 바랐다. 김유신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무(武)를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되었다. 그리고 성리학적 관점에서 이러한 김유신의 행적을 통해 그를 충신이라고 인식했다.

세종대왕의 유불화해의식에 관한 연구 (A Study on King Sejong's Amicable Consciousness of Confucianism and Buddhism)

  • 조남욱
    • 윤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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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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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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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이 글은 조선왕조 제4대 군주 세종대왕의 정신세계를 고찰하는 일환으로 그에게서는 유교와 불교가 동시에 중시되었다는 점을 밝혀 보려는 것이다. 왕조실록에서는 세종이 '해동의 요순(堯舜)'으로 평가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부처를 숭신했던 사례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왕실에서 생명의 위험성이 다가오면 구병(救病)을 위한 기도행사를 펼쳤으며 선왕의 사당에는 불당까지 겸비할 것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이면에는 세종의 유불화해의식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신(儒臣)들은 숭유억불의 기조를 따라 유교문화 확장의 차원에서 부단히 척불론을 전개했다. 특히 왕실의 불사(佛事)에 대해서는 군주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종은 불교의 역사성과 현재성, 그리고 자신의 종교체험 등에 유의하여 그 적폐를 제거하면서도 불교 자체의 존재가치를 긍정하였다. 그렇다고 유교사상을 내세워 불교를 비난하거나 불교정신을 따라 유교를 경시하는 것도 아니었다. 즉 그는 유교를 높이면서도 불교를 버릴 수 없는 것으로 보고, 또 불교를 긍정하면서도 유교적인 삶의 태도를 중시했다. 현실적 삶의 태도로서는 유교윤리를 추구하고 생사 초월의 신앙적 측면으로는 불교를 높이며 융화해가는 입장을 보인 것이다. 특히 생사문제 등 인간으로서의 한계의식이 깊어질 때는 유교의 천명사상이나 제사의례뿐만 아니라 부처에의 믿음으로 위안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세종에서 유불화해의식의 절정은 선왕을 모시는 사당 문소전에 반드시 불당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와 같은 화해의식이 작용하게 되는 원인으로는 첫째 유교와 불교는 모두 왕조국가의 기조를 튼튼히 하는 데에 긴요하다고 인식되었다는 점, 둘째 기도에 대한 감응을 얻으며 안심입명의 안정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 셋째 인간 평등의 가치관이 중시되고 있었다는 점 등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세종 유불화해의식이 가지는 의의로서는 ① 사람들의 정신적 상황 그대로를 긍정하여 평화적 삶의 기반을 제고시킬 수 있다는 것, ② 도덕적인 삶과 종교적인 삶의 포괄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 ③ 여러 가지 사회적 대립형상을 예방하는 데에 기여한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 능비(陵碑)의 건립과 어필비(御筆碑)의 등장 (Formative Stages of Establishing Royal Tombs Steles and Kings' Calligraphic Tombstones in Joseon Dynasty)

  • 황정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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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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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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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 논문은 조선 초 중기, 조선후기, 대한제국기 세 시기로 나누어 조선왕릉에 건립된 신도비와 표석의 시기별 건립추이와 양식적 특징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그 결과 왕실 능비(신도비와 표석)는 일반 사대부가와 달리 건립한 시기와 주체, 후계왕의 의도에 따라 시기별 차이를 보이며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15~17세기는 왕릉 신도비의 건립과 재건이 이루어진 시기, 18세기는 신도비가 표석으로 대치되어 다수 건립되었고 국왕의 어필을 직접 돌에 새긴 어필비가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이며 대한제국기는 황제국으로 격상됨에 따라 조선 개국자인 태조와 왕후, 선조들에 대한 추숭(追崇) 사업이 활발해지면서 표석 중건이 이루어진 시기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본다면, 결국 우리나라 능비의 역사는 조선후기를 기점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왕릉 신도비의 형식은 삼국시대의 부정형한 석비의 초보적인 형태에서 벗어나'귀부이수'형의 당비(唐碑) 형식을 수용한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 말 탑비의 퇴화된 양식에서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15세기 건립 당시부터 선왕에 대한 숭모 예를 표현하고자 하는 국왕과 왕의 치적이 국사(國史)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므로 신도비를 별도로 세울 필요가 없다는 신료들의 입장이 대치되면서 건원릉 제릉 헌릉 구 영릉 4곳에만 건립된 채 왕릉에는 한동안 석비가 건립되지 않았다. 신도비 건립이 중단된 이후 17세기에 이르러 왕릉에 아무런 표(表)를 해 둘 수 없다는 의견이 제기됨에 따라 형식이 간소한 표석이 건립되기 시작했으며, 1682년 작 영릉(寧陵)의 표석은 최초로 왕릉에 건립된 표석이자 장대한 규모, 섬세한 조각기법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왕릉의 능표는 영조 재위 기간인 1740년대부터 대규모로 건립되었다. 열성(列聖)에 대한 추숭과 어필간행 등을 통해 자신의 왕위 계승의 전통성을 공표하고자 했던 영조는 제릉의 신도비를 재건하는 한편, 의릉(懿陵)을 비롯하여 총 20곳에 달하는 곳에 표석을 세우는 역사(役事)를 추진했고, 처음 친필 글씨를 돌에 새긴 어필비를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 어필비 제작 현상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소실된 어필을 보존하려 한 숙종의 신념을 계승한 영조에 의해 제도적으로 추진되면서 어필을 새긴 능비가 등장한 배경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시대사적으로 주목할만하다. 이러한 표석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다시 한번 다량 제작된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고종은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태조의 조선 건국에 두고 태조와 그 4대 선조에 대한 추숭과 기념물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고 전면과 후면 모두 자신의 글씨로 채움으로써 역대 어느 왕보다 통치자로서 권한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었다. 이상 언급한 왕릉의 신도비와 표석의 건립 추이는 동시대 원 묘에 건립된 신도비, 표석과 비교 고찰을 통해 시대별 특징과 왕실 조각품으로서 성격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날 것으로 생각한다.

제주의 불교미술과 자복미륵 (A study of Jeju Buddhist art and Bok-sin Maitreyas)

  • 이경화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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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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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4-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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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제주 불교미술에 대한 관심은 한국미술에서 조금 소외되어 있는 편이다. 이 글은 주요 제주 불교미술에 대한 서술과 자복미륵에 중점을 두어 분석하였다. 제주의 불교문화는 고려후기에 흥기하였다. 법화사는 원 황실의 원찰이자 고려의 비보사찰이었다. 묘련사에서는 1296년에 고려 조정에서 내린 불전을 받들어 제주도판을 다시 새겼고 이는 제주의 지식문화를 시사한다. 수정사 청석탑 부재에 새겨진 금강역사상은 고려 후기의 회화로 주목된다. 불탑사 오층석탑은 제주 현무암으로 만들어졌고 14세기 전반경의 체화된 제주불교미술이다. 제주의 조선시대 불교미술에서 자복미륵은 민간신앙화된 미륵의 세 유형을 합성하여 독특한 모습이다. 자복미륵은 원정모와 관복을 착용하였으며, 석인상형 미륵처럼 좌우에 놓여 지역을 살피고 지키며, 튀어나온 눈으로 호위하는 역사(力士)인 신장상형 미륵의 특징을 수용하였다. 따라서 자복미륵은 조선시대 세속화된 미륵의 유형을 분석하는 데에 의미 있는 형식이다. 자복미륵을 이해하는 데에 특기할 불상이 1471년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병립상, 1491년경 옥천 대성사 석불, 광주 십신사지 석불 등이다. 원정모형 보개를 지닌 불상은 조선전기에 집중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미륵을 조선으로 끌어들여, 조선을 건설한 신진사대부의 모습에 기인하여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 진다. 공교롭게 옥천 대성사 석불입상의 조성에 제주목사를 역임하는 육한이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자복미륵은 그러한 불상들의 지역에 따른 변형에도 불구하고 연결고리를 확인하여 주었다.

『불정심관세음보살타라니경(佛頂心觀世音菩薩陀羅尼經)』의 치병법을 통해 살펴본 한국 불교의학의 일면 (An Aspect of Buddhist Medicine in Korea Studied through the Sūtra of Great Dhāraṇī of the Uṣṇīṣa-cittā)

  • 이유진;안상우;김동율
    • 한국의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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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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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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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The $S{\bar{u}}tra$ of Great Dhāraṇī of the Uṣṇīṣa-cittā is one of the most widely published scriptures of Esoteric Buddhism during the Goryeo and Joseon dynasty. The sutra is often referred to as a Buddhist medical scripture whose recitation is believed to allay diseases such as difficult birth, chest pain, and infectious and incurable diseases. It utilizes two major methods for healing: reciting and copying the sutra or copying the dharani and talisman which appear at the end of the text with fine cinnabar and ingesting them with aromatic water. In order to understand the medical and historical value of this sutra, this study examines the historical background of its establishment in early China and its migration to Korea in the Goryeo period. This study also investigates the identity and value of the scripture in Buddhist medical history. The oldest known printed texts of the sutra in Korea are dated to the late 11th century. Because of the material benefits of the text, the tradition of printing and distributing the sutra was very popular between the 13th and 19th centuries. Therefore, examples of the sutra having been used for medicinal purposes during rites are found in historical records. Finally, the study tries to identify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reatment methods of the Sutra and those of Korean traditional medicine focusing on several Korean traditional medical texts such as the Hyangyak-Jibseongbang (Compilation of Native Korean Prescriptions), the Donguibogam, and the Euibang-Hapbu.

한국의 가두행렬(街頭行列)과 전통연희 (Korea's Street Processions and Traditional Performing Arts)

  • 전경욱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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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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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13-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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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행렬도는 묘 주인의 등급에 따라 인원수와 각종 대열 및 인원 배치가 규정될 정도로 상당한 수준의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가두행렬에 동반되는 연희들은 대부분 산악 백희의 종목들이었다. 특히 안악 3호분의 악대는 고취와 횡취를 갖추고 있어서, 이 행렬의 국제적 교류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호위병, 의장대, 악대, 연희자를 갖춘 고구려의 행렬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어가행렬과 일치하므로 그 영향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대표적 가두행렬은 왕의 어가행렬이다. 연등회에서 왕이 봉은사나 흥왕사를 다녀올 때, 왕이 지나는 차도의 좌우에는 등산과 화수를 설치했으며, 그 가두행렬의 규모가 매우 컸고 다채로운 음악과 공연을 연행했다. 나례는 중국에서 생겨난 의식으로 고려시대의 궁중의례에 수용되었다. 고려의 나례에서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가두행렬과 연희를 행했다. 그리고 정초에 풍물패가 행하는 지신밟기도 나례의 유풍이다. 조선전기의 궁중나례에는 방상시 12지신 이외에 판관 조왕신 소매 등 새로운 배역이 등장한다. 그래서 나례가 시대의 변천에 따라 변모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환궁행사에서 왕이 탄 가마는 전후의 고취악대가 행진음악을 연주하고, 산붕이 인도하는 가운데 대궐을 향해 가두행렬을 진행했는데, 이때 각종 연희도 공연되었다. 이 환궁행사는 고려 의종 때의 환궁행사와 매우 유사하다. 조선시대의 삼일유가와 문희연은 양반층의 축제였다. 급제자는 악사와 연희자들을 대동하고 서울 시가를 3일간이나 돌아다니며 가두행렬을 벌이면서, 자기 가문의 경사를 축하하고 가문의 위세를 과시했다. 조선시대의 동제와 읍치제의에서는 사당의 신상이나 신대를 앞세우고 가두행렬을 진행했다. 중국의 마을제사인 영신새회가 후대에는 나례의 연문축역과 융합되었듯이, 한국의 마을제사도 지신밟기와 결합되어 마을의 수호신을 상징하는 신대를 앞세우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는 가두행렬이 형성되었다. 수영야류의 가두행렬은 가면극 공연의 홍보 효과가 있었고, 참가자들의 일체감을 조성하면서 축제적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북청군 토성리 관원놀이의 중심은 관원의 행차를 모방한 가두행렬이었다. 토성 관원놀이는 인명의 안과와 마을의 오곡 풍성을 기원하는 민속신앙의 기능, 가두행렬과 여러 연희들을 통해 흥과 신명으로 즐기는 오락적 기능, 주민들의 단결과 화합을 조성하는 사회적 기능을 갖고 있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가두행렬은 자생적 가두행렬과 외래 기원의 가두행렬이 있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행렬도의 고취와 횡취, 고려시대에 상원이라는 연등회의 시기와 왕이 참석한 가운데 행해지는 교방가무희 및 백희 공연, 동제의 지신밟기 등을 통해서 국제적 교류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상원연등회는 중국에서 유입되었지만, 왕이 선대 임금들의 초상화를 모신 봉은사에 다녀올 때의 가두행렬과 그 노변에 설치되는 등산과 화수 및 수많은 등은 고려 연등회의 특징이다. 이상의 모든 행사에서 가두행렬은 축제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큰 몫을 담당했고, 행렬의 중간이나 행렬이 끝난 후 펼쳐지는 전통연희의 공연에서 참가자들이 일체감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가두행렬의 참가자들은 각 행사를 통해 문화적인 긍지와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고, 자기들의 역량을 과시하고 자랑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