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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능산리고분군 동하총 석재의 암석기재적 특성과 안구상편마암의 역사적 활용성 고찰 (Consideration for Historical Application of Augen Gneiss and Petrographic Characteristics for Rock Properties of Donghachong Tomb from Royal Tombs of Neungsanri in Buyeo, Korea)

  • 박준형;이규혜;이찬희
    • 자원환경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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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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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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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능산리고분군 동하총은 바닥을 포함하여 15면으로 이루어졌으며, 가장 많이 사용한 암석은 복운모화강암으로 7면(46.6%)에 활용하였다. 또한 안구상편마암 3면(20.0%), 화강섬록암, 편마상화강암 및 우백질화강암을 각각 1면(6.7%)으로, 모두 판석으로 구성하였다. 현실과 전실 바닥의 각섬석편암(13.3%)은 모전석으로 사용하였다. 이 암석들은 모두 부여 일대에서 산출되며 주로 금강변에 산지가 분포한다. 당유인원기공비는 뚜렷한 편리와 안구상조직을 갖는 전형적인 안구상편마암이다. 이 암석은 동하총, 산직리 고인돌 및 세탑리 오층석탑의 일부 석재에 활용한 안구상편마암과 같은 종류이다. 이 안구상편마암은 부여 증산리에서 공주 덕지리로 연장되는 대규모 암체로 분포하며, 현재 정원석과 조경석 및 골재용 채석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부여일대에서는 청동기시대부터 안구상편마암을 활용하기 위한 공급지가 있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이는 암질이 약해 가공에 수월성은 있으나, 어두운 색을 띠어 벽화의 바탕과 각자에는 단점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백제인들이 거리와 지형 및 효율성과 수월성을 두고 어떤 운송체계를 선택했을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미국에 있는 베트남전쟁 메모리얼에 나타난 기념성 (A Study on Commemoration Characteristics of Vietnam War Memorials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 이상석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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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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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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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본 연구는 미국에 있는 베트남전쟁 메모리얼 중 외부공간에 다양한 요소들이 도입되어 공간적 개념을 가지고 만들어진 87개 메모리얼을 대상으로 설계개념, 공간적 특성, 조경디테일의 특성, 기념조각의 특성, 그리고 표현내용을 분석하고, 이에 기초하여 메모리얼에 나타난 기념성을 고찰하였으며, 연구의 주요결과는 다음과 같다. 1. 베트남전쟁 메모리얼 85개소(97.7%)에서는 희생자를 추모하고 국가를 위한 헌신이 강조되었고, 84개소(96.6%)에서 지역 부대 집단의 명예를 고양하는 것이 기본적 설계개념으로 적용되었다. 2. 메모리얼의 공간적 형태는 59개소(67.8%)에서 원형이나 축적 구성을 통하여 독립적인 공간의 완성이 추구되었고, 11개소(12.6%)에서 넓은 부지에 다양한 도입요소나 대지조형을 통하여 공간이 구성되었으며, 기념벽을 주요소로 한 것도 12개소(13.8%)에서 나타났다. 3.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주로 기념벽이 사용된 곳이 65개소(74.7%)였고, 대부분의 메모리얼에서 다른 전쟁메모리얼처럼 국가 및 지역, 부대의 명예 고양을 위해 기와 엠블렘이 사용되었다. 이 밖에 빈 의자, 기념비나 마커, 기둥 및 열주, 폰드 및 수로, 헬리콥터 등이 일부 메모리얼에 도입되었다. 4. 메모리얼에서는 V자형 검은색 기념벽을 자주 사용하였기 때문에, 기념조각은 상대적으로 적은 21개소(24.1%)에서 도입되었다. 이 중에서 승리를 고무하는 영웅적인 전투 장면보다는 병사상이나 부상 장면을 묘사한 사실적 조각이 16개소(18.4%)로 대부분이었고, 일부에서 추상조각 및 은유조각이 사용되었다. 5. 전사자 및 실종자 등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기념벽에 전사자 및 실종자 이름을 새기거나, 일부에서는 전사자 및 실종자의 사진 및 추모시를 음각하였고, 'DUTY, HONOR, COUNTRY'와 같은 상징적 문구를 적었으며, 전쟁으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던 전쟁포로 및 실종자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MIA/POW 이미지를 활용하였다. 6. 미국에서는 기념벽을 중요한 요소로 활용하여 전사자 실종자 참전군인의 이름을 새기고, 성조기 부대기 주기 등을 게양하며, 'ALL GAVE SOME, SOME GAVE ALL' 및 'DUTY, HONOR, COUNTRY'를 자주 표현하여 희생자를 추모하고, 명예를 고양하는 민주주의적 애국주의를 강조하였다. 반면, 베트남에서는 전쟁승리 및 민족 저항정신을 강조하였고, 사회주의의 대표적 양식인 기념조각 및 기념탑을 자주 사용하였으며, '조국은 당신을 기억한다'는 의미의 'TO-QUOC-GHI-CONG(토-국-기-공(土-國-記-功))'을 새기어, 민족주의, 사회주의, 애국주의를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대조적이다. 향후 베트남 및 미국 이외에 베트남전쟁 참전국인 한국 및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 베트남전쟁 메모리얼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국가적 기념성에 대한 비교 연구가 필요하다.

경주 지역 지석묘 문화의 특징과 종말기의 양상 (The Characteristics of Dolmen Culture and Related Patterns during the End Phase in the Gyeongju Region)

  • 이수홍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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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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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6-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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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경주 지역 청동기시대 무덤 문화를 검토하고 지석묘의 종말기 양상을 살펴보았다. 청동기시대 무덤 유적 18곳, 초기 철기시대 이른 시기 즉 종말기의 무덤 유적 9곳을 분석하였다. 경주는 검단리 문화 분포권에 포함된다. 현재까지 경주 지역에서 청동기시대 무덤은 약 120기 조사되었다. 주거지의 수에 비해 무덤의 수가 부족한 편인데, 검단리 문화권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무덤의 수는 부족해도 매장주제부의 구조는 다양하다. 경주 지역 청동기시대 무덤의 특징은 토광묘와 묘역식지석묘·적석제단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이 축조된다는 점이다. 토광묘는 동산리유적 부장품인 방추차를 통해서 볼 때 북한 동북 지역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묘역식지석묘와 적석제단은 송국리 문화권에 주로 분포하는데, 특이하게도 검단리 문화권인 경주 지역에서 많이 확인된다. 초기철기시대가 되어도 청동기시대의 영향이 이어진 묘역식지석묘와 적석제단이 계속 축조된다. 새롭게 이주한 점토대토기 문화인들은 목관묘를 축조하였다. 초기철기시대가 되면 새로운 고소의례가 등장하는데 국읍(國邑)에서 주재하는 천신제사(天神祭祀)의 장소일 가능성이 있다. 화천리 산251-1유적과 죽동리유적은 고소의례의 양상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이러한 고소의례에도 묘역식 지석묘와 동일한 형태의 적석제단이 축조되고 지석묘의 상석과 유사한 바윗돌이 이용되었다. 초기철기시대에도 청동기 시대 전통을 유지한 묘역식지석묘와 적석제단이 계속 축조, 이용되는 것은 새로운 시대가 되었어도 지석묘가 가진 권위가 계속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청동기시대로 알려진 묘역식지석묘나 적석제단 일부에서는 초기철기시대까지 의례 행위가 지속되었을 것이다. 기원전 2세기 후반이 되면 목관묘가 군집하기 시작한다. 철기 문화가 확산하고, 중국 중원의 유물이 유입되는 등 경주 지역을 비롯한 남부 지역이 동아시아 네트워크에 포함되는 시점이다. 이때 지석묘 문화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미륵사지서탑 축조의 구조 원리에 관한 기초 연구 6~7세기 전반 목탑과의 비교분석을 중심으로 (Basic Study on the Building Principles of Structure in Mireuksaji Stone Pagoda)

  • 조은경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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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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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6-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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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미륵사는 백제 무왕(재위 600~641)이 창건한 사찰로 이와 관련한 창건 기록이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제이(第二) 무왕조(武王條)에 언급되어 있다. 서원의 미륵사지서탑은 해체 전 6층까지의 일부가 남아있었으며 미륵사지 내의 유일한 현존 건축물로서 최근 사리장엄 발견으로 639년이라는 건립연대가 밝혀졌다. 또한 백제 사찰의 발굴조사 자료가 축적되고 동아시아의 학술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미륵사지서탑의 조영을 당시 불탑 건축의 발전 과정과 연관시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미륵사지서탑의 축조에 적용된 구조원리와 1층 평면의 형성을 중심으로 6~7세기 불탑 건축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대형의 불탑건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관한 기초적 연구를 시도하였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미륵사지서탑은 내부와 외부가 독립적인 개념으로 축조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고층 불탑건축에서 나타나는 구조원리의 표현으로 보여진다. 영녕사 목탑지에서 확인된 탑실심체와 같이 내부의 구조체를 형성하는 개념과 유사하게 내부 적심을 형성하고 외부 부재를 부가하는 방식으로 축조된 것이라 판단된다. 둘째, 미륵사지서탑에서는 상부의 적심부와 동시에 심주석이 동시에 존재하는 혼합 구조를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중국의 영녕사 목탑과 같은 실심체의 구조보다 발전된 것으로 조팽성 불사의 심초석과 항토 실심체의 구조와 유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혼합 구조는 황룡사 목탑이나 일본의 목탑과 같이 내외진을 전부 목구조로 형성하고 심주가 독립적으로 지지되는 구조 방식보다 선행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미륵사지서탑의 경우 1층에 십자형의 공간이 형성된 것은 심주석에 위치한 사리 봉안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심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4방향의 구심적 공간이며 사리의 본질적 의미에 기인하여 백제 6~7세기의 횡혈식 석실분과 유사한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횡혈식 석실분의 축조기법은 사리가 봉안되어 있는 상징적 공간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방법인 동시에 석재를 사용하여 축조된 서탑에 있어서 재료적 동일성으로 인하여 수용이 더욱 용이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 있는 베트남전쟁 메모리얼에 나타난 기념성 (A Study on Commemoration Characteristics of Vietnam War Memorials in Korea)

  • 이상석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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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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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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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는 한국에 있는 베트남전쟁 메모리얼의 입지, 공간, 조경디테일, 기념조각, 그리고 기념텍스트 등 조경의 관점에서 나타난 기념성을 분석하고, 여기에 나타난 기념문화에 대한 고찰을 하였으며, 전쟁 당사국인 베트남과 미국에 있는 베트남전쟁 메모리얼과 비교분석을 통하여 국가별 특성을 규명하였다. 연구는 베트남전쟁과 관련하여 국가보훈처에서 지정한 현충시설과 전사자 및 참전군인을 위한 국립묘지인 현충원 및 호국원 등 59개소를 대상으로 하여 현장조사, 문헌연구,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 및 고찰을 하였으며, 연구의 주요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공공성과 개방성이 높고, 별도의 부지매입비용이 필요하지 않은 국립묘지, 공원, 가로, 광장에 모뉴멘트를 세웠으며, 6 25전쟁 메모리얼과 함께 설치하기도 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참전군인의 명예를 고양하고자 하였다. 둘째, 국립묘지에서는 홍살문${\rightarrow}$현충문${\rightarrow}$현충탑으로 이어지는 중심축을 강조하고, 주변에 노단식으로 묘역을 조성하는 전통적 방식을 따른 반면, 규모가 작은 모뉴멘트는 대칭축과 사각형을 기본적 형태로 사용하고, 사각형 기단에 기념탑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관습적인 방법 때문에 메모리얼이 획일적으로 단순해졌다. 셋째, 기념탑, 기념비, 참전부대 문장(紋章), 기념벽 등을 기본적 도입요소로 사용하였고, 표준적이며 사실적 이미지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적 양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베트남전쟁 참전기념탑 건립과 관련된 사회적 담론이 허용되지 않았고, 예술가 스스로도 베트남전쟁 메모리얼을 만드는데 있어 시대에 뒤떨어진 양식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넷째, 참전군인을 영웅이나 전사로서 용맹성을 강조하였고, 아이구출 조각을 통한 인도주의적 이미지를 나타내는 등 사실적 근대조각이 많았으며, 세밀한 표현이 부족하다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또한, 사자, 해태, 태극 등 전통적 상징물을 이용하여 국가적 기념성을 높였다. 다섯째, 한국에서는 베트남전쟁 참전의 명분으로써 자유수호', '세계평화', '국가경제발전의 초석' 등 반공주의 및 애국주의의 이념적 가치를 내세우고, 지역 및 부대별 참전군인명을 새기어 명예를 고양하는 집단성을 표현하였다. 아쉽게도 전쟁메모리얼에서 본질적으로 추구해야하는 희생자 추모 및 전쟁 자체에 대한 해석은 소홀히 하였다. 본 연구에서 밝혀진 한국에 있는 베트남전쟁 메모리얼의 기념문화적 특성을 종합해 보면, 양식적으로는 관습적이고 표준화된 전근대적 메모리얼의 만연하고 있고, 정치사회적으로 국가의 공식적 기억과 지역 및 부대의 집단성이 강조되었으며, 이념적으로는 반공주의적 애국주의가 강하게 나타났다. 향후 전쟁메모리얼에서 기본적으로 담아야 하는 전쟁, 죽음, 참전군인의 경험 등 숭고한 기념성에 대하여 재사유가 필요하고,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메모리얼을 만들고, 바람직한 기념문화를 세우기 위한 학문적 연구 및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에 분포하는 지의류상 연구 (A Study on Lichen Diversity in the Placenta Chamber of Prince King Sejong's Sons, Seongju)

  • 박정신;우정재;오승환;오순옥
    • 보존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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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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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3-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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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지의류는 효모를 포함하는 곰팡이와 조류의 공생체로 복합미생물이다. 지의류의 다양한 종들은 문화재에서 흔히 발견되며 풍화작용과도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되어 유럽에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문화재에서 지의류에 관한 연구 보고는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본 연구는 국립수목원에서 진행하는 생활권 및 특수지역에 서식하는 버섯·지의류 탐색 및 분류 연구 조사의 일환으로 수행되었으며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의 지의류상 조사에서 밝혀진 내용을 보고한다. 총 19기의 태실로부터 총 65점의 지의류를 채집하였으며, 채집된 지의류를 형태학 및 분자생물학적으로 동정한 결과 3강 10목 17과 23속 40종이 밝혀졌다. 형태학적 분류 결과 잎의 형태를 띠는 엽상지의류(24점, 36.9%)와 딱지 형태를 띠는 가상지의류(24점, 36.9%)가 나뭇가지 형태를 띠는 수지상지의류(17점, 26.2%)에 비해 높은 비율로 분포하였다. 이들 중 엽상지의류에 속하는 Xanthoparmelia coreana가 가장 많이 채집되었으며, 가상지의류인 Lepraria sp.가 19기 태실 모두에 분포하였다. 또한 수지상 지의류인 Cladonia속이 8종으로 종 다양성이 가장 높았다. 계양군 태실에서 16종의 지의류가 채집되어 가장 높은 종 다양성을 보인 반면, 금성대군 태실의 경우 5종의 지의류가 채집되어 가장 낮은 종 다양성을 보였다. 본 연구는 우리나라 문화재에 분포하는 지의류 종 다양성 연구에 기초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시문과 바위글씨로 본 함양 대고대(大孤臺)의 경관 향유자와 장소패권(場所覇權) (A Study on the Persons Enjoying the Landscape of Daegodea in Hamyang and Space Hegemony through Analysis of Poetry and Letters Carved on the Rocks)

  • 노재현;이정한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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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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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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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본 연구는 함양 남계천변에 돌출한 바위 대고대의 경관성과 향유 주체에 주목하였다. 옛 시문과 석벽에 의탁(依託)된 인명 등 바위글씨의 분석과 해석을 통해 이곳의 장소 특성을 밝히고, 대고대에서 벌어졌던 경관 향유와 장소 패권 양상을 조명한 본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고지도에서 나타난 대고대는 지근거리에 5개소의 서원이 집중 포치(布置)되고 있으며, 대(臺) 자체의 입체적 볼륨감과 기괴함이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16C 옥계(玉溪) 노진(1518~1578)에 의해 최초로 명명된, 대고대(大孤臺)의 쓰임새를 고대(孤臺) 정경운(鄭慶雲: 1556~?)의 고대일록(孤臺日錄)에 근거해 분석한 결과, 남계서원 등의 임원과 유생의 조망 놀이 휴양 회의 계회 등 다양한 용도의 정치 사회적 소통의 장으로 활용된 것으로 확인된다. 대고대의 공간구성을 살펴보면 구졸암(九拙菴) 양희(梁喜: 1515~1581)의 신도비를 중심으로 상단 암벽에는 청근정(淸近亭)이, 그 서측에는 산앙재(山仰齋)가 위치한다. 동서로 펼쳐진 높이 11m, 넓이 약 $350m^2$의 대고대 반석 상부는 강론과 음영을 위한 장소로 널리 활용되었다. 반석 북서측에 '석송(石松) 추사(秋史)'라고 음각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서체의 바위글씨와 그 옆의 일명 '석송'이라 불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사목의 잔해는 이곳의 역사성과 진정성을 한층 강화시켜 주는 경관요소이다. '대고대(大高臺) 개은서(介隱書)'와 '묵헌(默軒)' '정근상('鄭近相)' 바위글씨는 각각 개은(介隱) 정재기(鄭在箕: 1811~1879)와 그의 증손(曾孫) 정근상(鄭近相: 1893~1934)에 의해 기록된 배타적 공간 향유와 장소패권의 산물이자 조선 말기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그들이 이곳 대고대의 향유 주체였음을 알리는 낙관(落款)이다. 요컨대 대고대는 조선 중기 이후 '구졸양선생장구소'로서 장소 선점의 묵시적 의미를 지녀왔으며, 조선말기와 일제강점기에는 정재기와 정근상의 연이은 장소패권 과정을 거치면서도 '동북강회소 천령제선현장구소'라는 범함양(凡咸陽)의 다자(多者) 강회 및 추념공간으로 변형 계승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벽에 쓰여진 다수의 인명 바위글씨는 '하동정씨(河東鄭氏)'와 '풍천노씨(豊川盧氏)'가 대고대의 경관 향유 및 장소패권의 주체였음을 묵언한다. 대고대에서 새긴 '바위글씨'는 경관향유 의지의 표상이자 장소 주도권 쟁탈을 보여주는 또 다른 형태의 문화경관이자 정원 경영의 사례이다.

근대 부산에서 고관공원의 성립과 설계 사상 (A Study on the Establishment Process and Design Conception of KoKwan Park in Modern Busan)

  • 강영조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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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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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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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 연구는 근대 부산에서 발간된 釜山日報와 부산부(釜山府)에서 발간한 <釜山>을 분석하여 근대 부산의 삼대 공원으로 꼽는 고관공원의 성립과정을 밝히고 설계도면을 발굴하여 설계 사상을 분석한 연구다. 고관이라는 장소는 두모포 왜관이 설치되어 있던 곳이다. 부산의 개항과 함께 일본인 거류민의 고토의식을 고양하기 위하여 두모포 왜관의 이전에 진력하다가 급사한 대마도 사신 쓰노에 효고의 묘역과 초혼비를 고관 언덕에 세웠다. 1916년 그 장소를 모금으로 정비한 뒤 부산부(釜山府)에 기부하고, 그곳을 고관공원으로 부르면서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한편, 개항 전 해 부산에 와서 상공업에 종사하면서 거부가 된 오이케 츄스케의 수상기념동상이 부산 개항 50주년을 기념해서 고관공원 부근에 건설한다. 그 동상이 건설된 장소를 부산부에 기부하고, 이를 부산부는 고관공원으로 정비한다. 고관공원의 설계를 의뢰 받은 일본 오사카부 기사 오야 레죠는 고관공원의 설계하기 위하여 부산을 방문하고, 설계도를 부산부에 제출한다. 고관공원의 시설은 신사와 동상, 수목원과 온실, 아동유원 등이었다. 오야의 설계에 나타난 설계 사상은 성과 속의 병치, 산수 컨텍스트의 계승, 공원 컨텐츠의 보완, 국민국가 형성의 도구로 분석되었다. 고관공원은 설계자의 예산에 못 미치는 공사비 2만 원으로 완성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시설 정비에 대해서는 본 연구에서 밝히지 못했다. 1945년 해방 이후 이 장소는 동구청, 주택 등이 들어 서 예전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고관 공원의 소멸 과정을 밝히는 것도 추후의 연구 과제다.

타이산(泰山) 홍문궁(紅門宮) 패방(牌坊)의 공간 기능 분석 (Analysis of Space Functions of the Archway in the Red Gate Palace in the Mount Tai Scenic Area)

  • 장멍;강태호;탕샨샨;위동밍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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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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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0-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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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현관식 기념 건축물로 축조하는 패방은 정표와 장려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시대의 발전에 따라 더 많은 역사 문화적인 내용 및 사회 기능이 부여된다. 본 연구는 타이산 명승지 중부에 위치한 홍문궁의 4기 패방을 대상으로 문헌연구와 현장조사 및 시각적 분석 방법을 통해 기본 속성, 공간 척도와 공간 느낌, 기능 등 3가지 측면을 연구하였다. 연구 구간 안에 있는 패방의 재료는 모두 석조이며, 건조 위치에 따라 명승지 및 사찰의 패방 등의 2종과 기능에 따라 표지, 기념, 문형 등 3종이 있다. 형태와 크기를 보면 '공자등림처방(孔子登臨處坊)'이라는 패방의 수준이 가장 높아 유교 문화의 지위를 중요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패방의 입지 공간은 실체와 감성 등 2가지 측면으로 상호 작용을 통해 이해하면 전체 경관의 공간적 의미를 완전하게 파악할 수 있다. 공간 척도로 볼 때 패방은 다른 경관요소와 서로 조화를 이루고, 한정된 선형 공간 중 사물 간 또는 사물과 사람 간 상호 비교를 통해 패방의 시선 초점 기능을 강조하고, 관광객들이 패방 아래를 통과할 때의 느낌을 증진시킬 수 있다. 홍문궁 패방은 공간을 합치고 규정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배열방식이 시선을 더욱 뻗어 나갈 수 있게 한다. 패방 위에 있는 대련과 글씨는 등산 전의 기대감을 증가시키고, 공간의 안내 기능을 강화시킨다.

효(孝) 윤리를 통해 본 유가(儒家)의 연속적 사유 (The Concept of Continuity in Confucianism through filial piety(孝) Ethics)

  • 이천승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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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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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9-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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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일상에서 효 윤리의 강조와 그 연장선상에서 조상숭배의식이 강했던 유가에서 부모에 대한 효의 의미는 더욱 각별했다. 이 논문에서는 유가에서 강조해오던 효의 의미를 단절 없는 이어짐의 연속적 사유의 작동기제라는 측면에서, 특히 그 기반으로 농경문화와 긴밀히 연관되면서 더욱 진작되었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쉽게 옮길 수 없는 정착적 생활은 상대적으로 친밀감을 형성했고 부모에 대한 효는 그러한 정감의 현실적 표출이었다. 그러나 유가에서의 효는 부모에 대한 물질적 정신적 봉양을 넘어 제사를 통해 앞선 조상으로, 다시 자손을 통해 무한히 후대로 이어진다는 관점에서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였다.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기점에 효를 설정한 유가의 인식에서 볼 때, 현존하는 나의 존재는 더 이상 단절된 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혈연적 유대감에 기초한 효가 가족주의에 차원에 그치지 않고 타자에 대한 배려의 정신으로 확장가능하다는 점에서 유가의 또 다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농경을 통한 오랜 경험과 지혜는 순환하면서 연계된다는 자연에 대한 통찰력을 낳았다. 이는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가 동심원 모양의 파장으로 외연을 넓혀가듯이 부모에 대한 친밀한 정감을 보편적 인간애로 확충하는 관계망을 형성하였다. 효를 통해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통시적 사유와 주변의 모든 관계를 연계시키려는 맞물림의 정점에서 자신의 도덕적 수양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처럼 유가에서 효란 삶과 죽음을 관통하고 나와 타자를 연계시키는 도덕 주체의 정립에서 중요한 매개고리였다. 그 속에는 시공간을 관통하여 바람직한 인간다움의 전형을 모색하는 유가의 연속적 사유가 내재되어 있다. 아울러 그러한 연속의 의미에는 나와 타자의 바람직한 관계를 통해 자연과 인간의 소통[天人合一]을 지향하는 유가철학의 주요 개념을 함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