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main Budd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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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성불사 마애석가삼존과 16나한상의 손상도 및 안정성 평가 (Stability and Damage Evaluation of the Buddha Triad and 16 Rock-Carved Arhat Statues at Seongbulsa Temple in Cheonan, Korea)

  • 양혜리;이찬희;조영훈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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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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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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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천안 성불사 마애불은 16나한이 모두 남아있는 국내의 유일한 예로 학술적 가치가 아주 높으나 심하게 손상되어 있어, 보존 방안을 검토하기 위해 디지털 기록화와 정밀 진단을 바탕으로 안정성을 평가하였다. 이 결과, 삼존불은 비슷한 규모이나 나한상은 매우 다양한 크기를 보였으며, 권속 2구는 나한상에 비해 크다. 추정공양상은 나한상과 유사하며, 대부분의 존상은 형상과 제작기법이 잘 드러난다. 마애불이 새겨진 암반은 편리 구조가 뚜렷한 호상편마암으로, 석영과 장석으로 이루어진 우백대와 흑운모로 구성된 우흑대가 교호하며 미량의 백운모를 포함한다. 이 마애불에는 물리적 풍화와 변색 및 생물 오염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주암면에는 미세 균열 1,131cm, 박리상 균열 1,061cm, 구조상 균열 1,456cm, 절리 1,277cm로 나타났다. 손상도 평가 결과, 절리 3.6(균열지수), 박리 5.2%, 박락 1.7%, 탈락 0.1%로 산출되었다. 특히 생물학적 풍화가 심하여 주암면의 생물피도는 9단계와 10단계가 전체 면적의 57.5%를 차지하였고, 5~8단계도 22.3%로 아주 높았다. 표면 변색 요인은 Fe과 Ca 및 S로 암갈색과 백색으로 나타나고 흑화 오염물에서는 다량의 C가 검출되며, 모든 영역에서 손상 가중치가 매우 높다. 마애불 암반에서는 서로 다른 방향을 갖는 불연속면이 확인되었다. 암반의 파괴유형 분석 결과, 평면 파괴와 전도 파괴의 가능성이 있으며 쐐기 파괴는 발생하기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다. 주암면의 초음파 속도는 평균 2,463m/s이며, 절리대가 많은 좌측면 하부가 상대적으로 낮아 상당히 풍화된 단계(HW)와 완전히 풍화된 단계(CW)가 집중 분포하는 취약한 물성을 보였다. 이 마애불에서는 미세 균열의 14.9%와 박리상 균열의 58.9% 정도에서 보존처리가 요구된다. 또한 마애불의 보존 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수목 정비와 암반의 구배를 고려한 배수 시설 및 지반 정비가 필요하며, 장기적인 보존 관리를 위해 보호 시설도 검토해야 할 것이다.

성주사 창건과 철불 조성 연구 (The Establishment of Seongjusa Temple and the Production of Iron Buddhas)

  • 강건우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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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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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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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충청남도 보령에 위치한 성주사(聖住寺)는 낭혜화상(朗慧和尙) 무염(無染, 800~888)이 창건한 사찰이다. 무염은 중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잠시 수도 경주에 머물다 김인문(金仁問, 629~694)의 후손들이 관리하던 사찰에 주석하였다. 이곳에서 무염은 불타고 남은 사찰을 중수하여, 847년에 선종사찰 성주사로 개창하였다. 이후 성주사는 사세가 번창하였고, 사역 내 여러 전각이 들어서며 대규모 가람의 모습을 갖추었다. 지역 내 성주사의 영향력은 「숭암산성주사사적(崇巖山聖住寺事蹟)」에서 살펴볼 수 있다. 「숭암산성주사사적」을 보면 성주사에 건립된 불전은 모두 73간으로 전한다. 이 중에서 주목되는 기록은 '전단림구간(栴檀林九間)'이다. 전단림구간은 '전단으로 지어진 건물이 9간' 혹은 '전단을 보관한 곳이 9간'이라는 의미가 될 수 있다. 해석의 차이는 있지만, 성주사에 전단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전단은 유향목재(有香木材)로 동남아시아 자바나 수마트라에서 생산되었다. 장보고 사후, 서남해안일대를 장악한 군소 해상세력이 동남아시아 전단을 대량으로 입수하여 성주사에 시주한 것으로 보인다. 문성왕대 김양(金陽, 808~857)은 무열왕계인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지역 내 명망이 높았던 무염의 성주사를 후원하여 왕실과 성주산문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였다. 원성왕계 왕실에서는 성주사를 지방 거점사찰로 삼아 반왕실적인 기운이 남아있는 지역에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무염은 사찰을 수호하고, 민심을 교화하고, 나아가 지역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철불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주사 문도가 2,0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사세가 확장되었다는 점에서, 성주산문의 중심사찰인 성주사에 봉안된 철불은 지역의 민심을 결집하는 하나의 존상(尊像)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성주사 철불은 모두 2구로 확인되며, 현재 전하는 철불편과 대좌의 크기로 볼 때 각각 금당과 삼천불전에 봉안된 것으로 보인다. 금당에 봉안된 철불1은 2m가 넘는 대형 철불이고, 삼천불전에 봉안된 철불2는 1m가 넘는 중형 철불로 판단된다. 「숭암산성주사사적」을 보면 '개창선법당오층중각(改創選法堂五層重閣)'이라는 기록이 전하는데, 이를 통해 성주사 개창시 철불1과 같은 대형 불상을 봉안하기 위해 중층식 금당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철불1은 「성주사비(聖住寺碑)」와 손가락편의 모양을 통해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을 결한 불상으로 추정된다. 성주산문은 동시기의 실상사(實相寺), 보림사(寶林寺), 삼화사(三和寺)와 같이 노사나불(盧舍那佛)을 주존불로 조성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무염이 초년에 화엄을 수학하였고 귀국 후 왕실의 후원을 받았다는 점에서, 신라하대 왕실을 중심으로 한 화엄종의 복고적인 경향이 선종사찰 성주사에도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보성선원(寶成禪院) 삼존불(三尊佛)의 복장전적(腹藏典籍) 연구(硏究) (A Study on the bibliographical characteristics of relics inside of Buddhist triad Samantabhadra in the Boseong Temple)

  • 송일기
    •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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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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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1-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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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이 연구는 보성선원의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석가불 문수상 보현상 등 삼존불에서 수습된 복장전적에 대해 서지학적 측면에서 분석한 글이다. 보성선원의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삼존불은 1647년 이전에 경상도 거창의 견암사(見巖寺)에서 조성되어 현재의 보성선원으로 이관된 불상이다. 삼존불 중 석가불에서 37책이, 문수상과 보현상에서는 각각 18책이 수습되어 전체 13종 73책에 달하는 복장전적이 수습되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중에는 새로운 3종(화엄경, 금강경, 천태사교의집해)의 불교전적은 처음으로 나타난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리고 보성선원의 복장본의 특성을 분석한 결과, 전체 13종 73책 중 경전류가 6종 65책으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이 중에는 조선시대에 우리나라에서 독자적으로 간행된 5계통의 법화경 46책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 판본은 불상이 조성된 이전에 주로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에서 개판된 사실을 분석하였다.

지상실체사진기를 이용한 구조물의 측정과 해석 (Measurement and Analysis of the Structure by Using the Terrestrial Camera)

  • 안철호
    • 한국측량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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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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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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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4
  • 본 연구는 지상사진기에 의한 구조물(석탑)측정에 관한 것으로서 석탑중 통일신라의 석탑인 감은사지 삼층석탑, 고선사지 삼층석탑,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 및 불상인 석굴암 본존상, 광주철조여내좌상을 대상으로 조형비를 분석하여, 조형원리에 접근하는데 의의를 갖고 있다. 등고선도와 실측치를 정밀하게 얻을 수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조형비를 분석한 결과, 3재의 석탑과 2개의 불상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선 석탑의 경우 옥개석폭들은 8 : 7 : 6의 비예관계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상대갑석을 밑변으로 정삼각형과 이등변 삼각형을 긋고, 그 정점사이의 거리를 반경으로 하여 정삼각형의 정점에서 원을 그리면 삼층 옥신 윗면과 일치하였고, 또 기준면으로부터 $70^{\circ}$의 2등변 삼각형을 그러는 경우 상대갑석의 끝점들을 거의 통과하며, 삼층 옥개석의 낙수면과 일치함을 알 수 있었다. 불상의 경우 양 눈사이의 중점을 중심으로 원이 성립되고, 어깨와 명치를 연장하면 무릎에 접함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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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능산리 사지 출토 목재 수종식별(1) (Identification of Wood Species excavated at the Temple site in Neungsanri, Buyeo(1))

  • 이화형;이종신
    • 한국가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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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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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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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
  • This study was carried out to identify wood species excavated at the temple site of Backjae dynasty in Neungsanri, Buyeo. At the temple site, there were great excavations such as Backjae Incense Burner(National Treasure No.287) and Stone Reliquary(National Treasure No.288). The King Chang 13 Year carved on Stone Reliquary indicated that this temple was completed in A.D 567. Identification of wood species were as follows: The Temple building was constructed by Pinus densiflora Sieb. et Zucc. The species of the main pillar of Wooden Pagoda which preserved relics of the Buddha was Zelkova serrate Mak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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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찰건축에서 봉불(奉佛)과 강설(講說)공간의 변화과정 (The Transition Process of Ritual(Worship)(奉佛) and Lecture(講說) Space in a Korean Buddhist Temple)

  • 홍병화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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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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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9-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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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The main functions of a Buddhist temples are as a place for Buddhist services and a place for sermons and each ancient Buddhist temple was equipped with a main and separate building. After Zen Buddhism was first introduced, there was a tendency to change the terms to Buddhist sanctuary and altar, as set forth in the Zen Buddhism code of conduct called 'Cheonggyu(淸規)'. As such, it was thought that the division between Buddhist service space and preaching space were relatively firm until the Goryeo Dynasty. However in the period from the end of the Goryeo to the beginning of the Joseon Dynasty there was an increasing tendency of integration of the two buildings. It can be seen that, in cases where both buildings remained, statues of Buddha were enshrined in these buildings without any distinction. Eventually it is led to the tradition of duo-Buddhist sanctums.

일제강점기 경주 남산 삼릉계 약사여래좌상 반출 경위에 대한 고찰 (A Study of the Removal of the Seated Medicine Buddha from the Samneung Valley at Namsan, Gyeongju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 아라키 준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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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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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0-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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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경주 남산의 불적에 대한 본격적 조사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경주 남산 불적조사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 경주 남산 불적을 심도 있게 고찰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선행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경주 남산의 불적조사는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한일병합을 전후한 초기 조사는 예비 조사 정도로 간주되어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초 조사로 후속 조사의 발판이 되었고, 1910년대에 남산이 불적의 보고로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특히 1915년 경주에서 반출되어 경성 경복궁에서 개최된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에 출품된 삼릉계 약사여래좌상은 관람객의 눈길을 가장 끄는 미술관 중앙홀에 전시되어 세간에 불적으로서의 경주 남산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약사여래좌상은 남산 불상 중에서 가장 원상태를 잘 유지하고 있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공진회에 출품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그 반출은 한일병합을 전후하여 구상된 석굴암 경성 이전계획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진행되었다. 석굴암 경성 이전계획은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중심이 되어 구상된 식민 이데올로기인 '일선동조론'과 '조선정체성론'을 바탕으로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을 해체하고 그 한복판에 과거의 영광을 상징하는 석굴암을 안치시킴으로써 일본 제국에 의한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을 시각적으로 선언하려는 기획이었다. 그러나 그 구상이 무산되자 석굴암 본존불 대신에 경성으로 반출된 것이 다름 아닌 삼릉계 약사여래좌상이었다. 약사여래좌상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1911년 세키노 다다시가 실시했으나 그 위치를 세키노에게 알린 것은 모로가 히데오나 고다이라 료조와 같은 경주 거주 일본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 현지인은 총독부로부터 요청을 받아 공진회에 출품할 만한 불상을 찾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약사여래좌상은 총독부와 세키노 다다시, 그리고 경주 거주 일본인들 사이의 긴밀한 연계 속에서 경성으로 반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경주 남산의 불적이 그 신비의 베일을 벗기는 과정이기도 했다. 요컨대 초기 남산 불적조사는 기초 조사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석굴암 경성 이전계획과 1915년 공진회의 성공적 개최라는 데라우치 총독의 제국주의적 야망과 깊은 관계 속에서 진행되어 순수한 학문적 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하기 어렵다. 한편 석굴암 경성 이전계획이 좌절되고 경성으로 반출될 가능성이 컸던 미륵곡 석조여래좌상이 현지에서 보존될 수 있었던 것에는 경주 조선인의 저항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본고에서는 자세히 논할 수 없었으나 그들을 단순한 방관자가 아니라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로 부각시킬 연구가 요구된다.

『삼국유사』를 통해 본 분황사(芬皇寺)의 중대신라 불교미술 (Mid-Silla Buddhist Art of Bunhwangsa Temple Seen through the Record of Samgukyusa)

  • 최성은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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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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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6-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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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본고에서는 선덕여왕대에 창건되어 신라 왕실불교의 중심사찰이었던 분황사에 봉안되었던 중대신라기 불교조각과 벽화의 성격을 "삼국유사"의 기록을 바탕으로 유추해 보았다. "삼국유사"에는 분황사 관련하여 원효의 소조초상조각, 좌전 북벽의 천수대비상 벽화, 금동약사여래상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 가운데 아들인 설총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고 전하는 원효의 '고상(顧像)'은 설총이 만들었다는 초상조각으로 중국 남북조시대 이래 유행했던 유마거사상의 이미지를 모델로 하여 조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본적으로 문수보살을 향해 고개를 옆으로 돌린 자세로 앉은 초당기 유마거사상의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나아가 석굴암 감실 유마거사상에서 보이는 이미지와 유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분황사 좌전 북벽에 그려져 있던 천수대비상은 솔거(率去)의 작품으로 생각되고 있는데, 경덕왕대에 한기리에 사는 여인 희명의 눈먼 아이의 눈을 뜨게 했다는 영험함이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들이 불렀다는 "도천수대비가"의 내용을 보면, 이 그림 속의 천수대비상은 눈이 그려져 있는 손을 천 개 가지고 있는 천수천안관음보살상이었다. 이 분황사 천수관음상을 '천수대비'로 불렀던 점에서 볼 때, 이 상은 당초(唐初)에 가범달마(伽梵達摩)가 번역한 "천수경"의 경궤에 따른 것으로 생각되며, 마찬가지로 '천수대비'로 불렸던 중생사와 백률사의 천수관음상 역시 같은 경궤에 의거한 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경덕왕대에 조성된 분황사 약사여래상의 주조에는 30만 6700근의 동(銅)이 사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많은 동이 사용된 것은 약사여래상 뿐 아니라 "약사경"에 언급된 약사여래의 권속 및 상징물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동본이역(同本異譯)의 여러 "약사경"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약사신앙의 행법(行法)에는 7구의 약사불상을 조성하고 등명대를 설치하여 등(燈)을 밝히는 내용이 보인다. 또한 수대(隋代) 이래 나타났던 <약사여래변상>에 등장하는 약사여래의 협시(脇侍)로서는 일광 월광보살을 비롯해서 8대보살, 십이신장이 배치될 수 있다. 나라(奈良)시대에 창건된 신야쿠시지(新藥師寺)에는 7불 약사상과 그 권속의 여러 상들이 조성되었는데, 거의 비슷한 시기에 신라에서 이루어진 분황사의 불사(佛事)에서도 본존 약사불상 외에 관련된 여러 도상이 함께 조형화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머리카락에서 물을 짜내는 지모신 형상의 기원과 변모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origin and transformation of the image of earth goddess wring her hair)

  • 노장서
    • 동남아시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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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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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3-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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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This paper has been written to find facts about the image of earth goddess broadly found in the Southeast Asia. The research findings are as follows: Firstly, the image of earth goddess wringing her hair is phenomenally discovered in both Buddhist temple murals and independent shrines in Thailand. This phenomenon is common in other Indochinese Buddhist countries such as Myanmar, Laos and Cambodia. Secondly, the life of Buddha including the story of the victory over Mara is found in such Buddhist canons as Mahavastu, Buddhacarita, Lalitavistara, Nidanakatha and Patamasambodhi. Among the canons, the story of the victory over Mara is described in differently ways. Earth becomes personified as the goddess in later version. The main cause to expel Mara's army also changes from sound to water. Patamasambodhi is most closely associated with the iconography of the earth goddess of Southeast Asia. Thirdly, Vessantara Jataka and Indian ancient customs tell us that a merit maker performs a rite of pouring water on the earth as an evidence for merit-making. This rite is a key to understanding the meaning of the scene where the earth goddess expels Mara's army into the flood by wringing her hair. The earth goddess is personified from the earth upon which the merit water is poured. Water soaked in her hair is the very holy water poured by the Buddha whenever he made a merit in his former lives. The amount of water flowed from the hair of the earth goddess representing the amount of his merit making was so huge and enough to defeat the Mara's army and for the Buddha to reach the Enlightenment. This legend explains the significance of the notion of merit in the Theravada Buddhist countries such as Thailand and Myanmar where the water pouring rites still take place and the images of the hair wringing earth goddess are commonly discovered. Fourthly, the first image of the earth goddess as the witness of merits for the Buddha appeared in some Gandharan Buddhist sculptures in the form of devotional gesture with her both hands pressed together and the upper half of her body above the ground. The appearance is in accordance with the description of her in the Lalitavistara canon. In later periods, the form changed into various types and finally the image of the earth goddess wringing her hair appeared in Southeast Asia around 11 century C.E. Some researchers argue this image form of the earth goddess shows the influence from China or India. However, the arguments are considered to be hypothetical as they have no strong evidence to prove. Finally, the modern image of earth goddess shows richer and more dynamic expression compared with its predecessors. Especially, outstanding is the standing earth goddess images found in the scene of the victory over Mara in many temple murals of central region of Thailand. The earth goddess in her voluptuous body shape is usually depicted as wringing her hair with her arms wide open in a posture of S curve. This appearance strongly reminds us of the postures of Salabhanjika and Tribhanga originated from Indian art. The adoption presumably has been made to signify her fertile and affluent characteristics.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부석사 괘불>의 바탕직물과 채색 특성 (Characteristies of the background fabric and coloring of "Buseoksa Temple Gwaebul" in the possession of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 박승원;유혜선;박진호;천주현
    • 박물관보존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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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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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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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부석사 괘불(浮石寺 掛佛, 1684년, K969)은 사찰의 야외 행사에 사용하기 위해 제작한 대형 불화이다. 하단에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비로자나불, 약사불, 아미타불의 부처가 그려져 있으며 현존하는 괘불 중에서 가장 복잡한 구성을 보여준다. 본 연구는 부석사 괘불에 대해 바탕직물의 특성과 괘불 제작방법을 조사하고 채색에 사용된 재료를 판별하기 위한 비파괴 조사 결과를 종합하여 채색기법의 특징을 연구한 것이다. 부석사 괘불은 좌·우로 11폭, 상·하단으로 각 1폭씩 연결되어 총 13폭이며 중심 부분의 9폭은 생초(生綃), 사면을 두르는 4폭은 주(紬)를 사용하여 그림의 바탕을 만들었다. 그림을 그리는 데 사용된 채색 재료는 엑스선형광분석 방법으로 조사하였고 적색, 황색, 녹색, 청색, 흰색의 무기안료이며 황색과 청색의 일부에서는 연백을 먼저 칠하고 그 위에 유기안료로 색상을 표현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검은 선은 먹, 가사의 문양에는 금박이 사용되었다. 엑스선조사는 안료의 주성분과 안료층의 두께에 따라 밝고 어둡게 보이는 차이를 판독하는 것으로 안료의 색상에 따른 채색 위치와 기법을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