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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교 전례복에 관한 연구-독일 Paderborn 과 kevelaer의 전례복 회사를 중심으로 (A Study on the Liturgical Vestments of Catholic-With reference to the Liturgical Vestments Firm of Paderborn and kevelaer in Germany)

  • 양리나
    • 자연과학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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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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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3-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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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5
  • 전례복의 전통을 고수하며 최상의 예술적 가치를 지닌 제의를 생산하는 Paderborn의 Wameling과 Cassau, 그리고 성모마리아 성지 순례지인 Kevelaer에 위치한 Kevelaerer Fahnen + Paramenten GmbH는 "Hidden Company"로 전유럽과 아프리카, 미국과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까지 널리 알려진 독일의 전례복기업으로 수 세기동안 종교적인 중심이 서 있던곳, 교회의 예식의 삶이 발전되어온 곳, 바로 그곳에서 계속해서 오늘날까지 예술의 수호자와 격려자로서의 모습을 굳건이 지켜나가고 있다. 이러한 3개 회사를 통하여 알아본 카톨릭 전례복은 다양한 모양과 색채, 형태와 기법을 사용하여 단순한 종교적 상징성을 넘어 미적인 화려함과 조형적인 조화로 현대직물예술, 미술의상, 그리고 디자인 전반에 활용이 기대되며, 신자들에게는 전례복에 대한 상징의 미와 조화에 대한 이해를 돕고, 비신자들로 하여금은 종교예술에 대한 의식과 관심이 정식적인 사고나 신앙심을 유발시키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치리라 본다. 전례복은 성직자가 미사. 성사. 집행. 행렬. 강복등의 모든 의식때 교회규정에 따라 입는 예복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이러한 전례복은 무언의 언어로써 신성의 표현을 겉으로 드러낸것으로 세속인과 성직자를 구별해준다. 또 예식을 집행하는 사제의 몸짓과 동작, 언어를 뒷받침하여 전례의 뜻을 더욱 시각적으로 강하게 나타내 주고, 성직자로 하여금 성직의 직무에 더욱 충실할수 있도록 심리적영향도 준다. 이뿐만 아니라 전례복은 성직자의 지위와 권위를 나타내며 신자들로 하여금 성직자에 대한 위엄과 존경심을 불러 일으키고 전례복의 상징과 색체를 통해 전례의식의 기쁨과 슬픔을 심리적으로 공감하여 예식의 아름답고 신비스런 분위기를 창출하게 하므로 더 한층 신앙의 깊이를 부과시켜 준다. 전례복은 그리이스, 로마의 초상기 세속복이 종교적 경향을 띄면서 기독교 복식으로 자리 잡은 것으로, 313년 로마 Constantinus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까지는 세속인과 구별되는 특별한 제복은 없었다. 인간의 심리를 가장 잘 표현한 제의의 색채도 원래는 순수 흰색이었던 것이 12C 교황 Innocentius 3세에 의해 전례축일과 각 시기에 따라 특수한 색채를 사용하도록 규정되었으며, 현재의 전례복 색채의 상징적 의미는 교황 St. Pius (재위1566-1572)에 의해서 지니게 되었다. 장식과 소재도 초창기에는 대부분 모, 아마등이 사용되다가 4C부터 비단과 같은 특별한 소재가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12C에는 금실로 직조된 화려한 소재가 사용되었다. 장식으로는 상징 문양의 자수, 직조, 아프리케의 견고하고 아름다운 장식이 널리 사용된다. 또 형태는 전통적으로 가장 널리 사용되어온 반원형의 풍성한 제의가 죄를 덮어주는 자비의 상징으로 오늘날 다시 유행하고 있다. 미래의 제의 형태도 결정적인 큰 변화는 없을 것으로 예측된다. 전례복의 발전은 계속해서 보수적인 교회의 명령에 의해 움직여질것이며 오늘날까지 변화해온 그 방식 그대로 각 시대의 문화와 시대정신, 복식의 유행에 따라 조금씩 변화의 과정을 거쳐 시대감각에 적합하도록 단순하고, 간편하게 변해갈 것이다. 사제의 수가 줄고 전례용품의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지도 모르는 판매 부진의 시기가 곧 닥쳐오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속에서도 전례복기업들은 각기업의 전례복 차별화와 예술적 진보를 위해 끊임없이 다양한 문양, 자수기술 개발, 창조적인 형태의 디자인 실현을 통하여 세계속에서 초 일류기업으로 당당하게 경쟁할 능력을 준비하고 있다. 또 각기업은 예술가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의식을 유도하고, 전시회와 전속예술가를 위한 Atelier를 마련하며, 다른 회사의 전례복과 구별되는 직물의 생산을 위해 자가 직물공장을 세우거나, 한 회사만을 위하여 직물을 생산토록 독점계약을 맺는등 소재의 독창화와 예술적 가치에 심혈을 쏟고 있다. 또한 외국신문에 기업광고를 내고, 영업사원을 활성화하며, 고객의 철저한 사후 A.S를 실시하여 기업의 발전에 노력하고 있다. 또 각 교회에서는 전례복 자수협회를 창단하여 취미 자수가나 재봉인의 교류에도 힘쓰며 전례복 생산과 자수공예를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지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이와 같은 기업, 예술가, 교회의 노력은 3회사의 미래가 밝을 것임을 충분히 알려준다. 우리나라에서도 기업의 다양한 기술개발과 연구, 예술가의 종교미술의 참여, 교회의 관심을 통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례복 생산지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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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폐지인(朝鮮通幣之印) 연구 (A Study on ChoSonT'ongPaeJiIn)

  • 문상련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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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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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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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조선통폐지인은 "경국대전" "국폐조(國幣條)"의 예에 따라, 1필 내지 반 필의 포(布) 양단에 찍은 인신(印信)으로 포를 포폐(布幣)로 유통키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때 발행된 포폐는 매매를 위한 화폐 내지, 죄를 면제받기 위한 수속(收贖)과 노역을 대신한 신공(身貢) 등의 용도로 사용되었으며, 포에 조선통폐지인을 찍어 그중 20분의 1의 세(稅)를 수납한 조세 용도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조선통폐지인은 조선 초 화폐사 및 인신(印信) 자료 중 하나이며, 조선통폐지인 압인(押印)이 조세 수단이었던 까닭에 조세제도 연구자료 중 하나임에도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지 않았다. 이에 이전 연구자에 의해 언급된 자료뿐만이 아닌, "전록통고"와 "대전후속록", "정헌쇄록", 몇몇 지리지(地理志)에 등장하는 관련 내용을 바탕으로 포괄적인 연구를 행하였다.조선 태종 1년(1401) 정5승포에 인(印)을 찍어 "조선포화"를 유통하자는 유관의 상소를 착안해 조선통폐지인이 제작된 것임을 말하였으며, 매매를 위한 화폐 내지 수속(收贖)과 신공(身貢), 조세 수단뿐만이 아닌, 선척의 화매가 용도로 조선통폐지인을 찍은 포폐가 사용되었음을 기술하였다. 또한 중종 10년(1515) "저화행용절목" 방침에따라 1516년 3월 이후 포폐 사용이 금지된 후에도 만력 26년(1598) 지방 공문서의 관인으로 조선통폐지인이 사용된 예와, 영조 당시 포보가포(砲保價布)라는 명칭으로 군포(軍布) 제작의 예로 사용되었으며, 1779년 기록을 통해 무역에 따른 납세수단으로 조선통폐지인이 사용된 예가 있음을 서술하였다. "정헌쇄록"기록을 통해 대략 330여과의 조선통폐지인이 유통되었을 것이며, 1940년 간행된 "조선화폐고"에 조선통폐지인 인영(印影)이 실려 있음에도 조선통폐지인이 답인(踏印)된 포폐 내지 조선통폐지인 실물은 발견된 바가 없다. 그런데 최근 원각사 소장 유물 중 조선통폐지인이 발견되었으며, 1775년 작성된 직지사 소장 고문서에 압인(押印)된 조선통폐지인 인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에 직지사 고문서 및 "탑좌종정지"에 첨부된 인영, "조선화폐고"에 실린 인영과 원각사 소장 조선통폐지인을 비교해 보았던바, 위 문서에 압인된 인영은 원각사 소장 조선 통폐지인과 동일한 형태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전체적인 형태 역시 "대록지"내지 "이재난고"에 묘사된 모습과 비견되는 형태를 보임을 알 수 있었다.이에 원각사 소장 조선통폐지인은 15세기에 주조된 인신(印信)의 실물로, 조선의 화폐사 및 조세제도와 인신(印信) 연구의 중요 유물로 추후 다양한 측면의 연구가 필요할 것이라 하겠다.

우리나라 다목적 공연장의 탄생배경에 관한 소고 (A Brief Review of Backgrounds behind "Multi-Purpose Performance Halls" in South Korea)

  • 김경아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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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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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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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이 연구는 군사정권의 권력 전개양상에서 드러나는 문화정책이념이 '다목적 공연장'의 개념형성으로 발현되는 과정을 살펴보는데 있다. 한국의 공연장 현황은 우리나라 공연문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 각 지방자치단체마다 그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예술회관(문예회관)을 중심으로 한국의 공연문화와 향유문화가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문예회관들은 다목적홀로 운영되고 있으며 운영주체는 절대다수 정부와 지방정부 또는 출자출연기관의 재단법인 등 공공영역에서 운영한다. 따라서 정부와 지방정부의 문화예술정책의 대상이며 제도적 측면과 긴밀한 상관관계를 가지게 된다. 박정희 정권은 초헌법적인 유신을 공포하고 우리나라 문화예술법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문화예술진흥법」(1972.9)을 제정한다. 이법을 근거로 「문예중흥5개년계획」(1973)을 수립하고 문화시설들을 짓기 시작했다. 전국의 '문화예술'회관, 또는 '문화'회관이 다목적홀로 지어진 데에는 문화예술진흥법의 "문화예술"에 대한 정의를 "문학, 미술, 음악, 연예 및 출판에 관한 사항"으로 명시함으로써 지금의 '다목적'개념의 근거가 된다. 한편, 문화공보부의 조직직제는 "문화와 예술"을 관장함을 명시하고 대중문화와 예술진흥을 구분 짓는 문화행정체계를 갖춘다. 그러나 이시기 대통령의 연설에 나타난 박정희의 화법은 '문화예술=예술'로 인식하고 있다. 예술은 문화에 포함되는 개념이지만 문화예술=예술로 인식함으로써 정치적 시국이나 시행부서에 따라 그 해석을 달리하였고, 이러한 모호성은 예술이 이데올로기적 활용에 정책적으로 동원되는 기제가 된다. 이러한 배경에서 문화예술진흥법에 근거하고 문화공보부의 관장 하에 1978년 다목적 공연장인 세종문화회관이 개관한다. 그러나 제도상의 문화예술=다목적과 설립을 추진했던 정부조직의 문화≠예술, 권력이 인식했던 문화예술=예술은 대중음악의 대관문제를 두고 가치충돌로 표출된다. 1979년 12·12사태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민족문화를 앞세운 국풍81을 통해 저항세력을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정권의 의도는 실패하였고, 저항과 지지의 양축에서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는 방안으로 국민의 문화향유 기회확대 정책에 방점을 둔다. 이는 앞 정권의 문화예술에 관한 인식의 전환이며 박정희 정권과의 차별화를 추구한 것이다. 전두환 정권에 있어 앞 정권과의 차별성은 곧 정권의 정당성 확보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향유기회의 확대는 문화영역의 분배 차원에서 추진되었다. 따라서 장기적인 안목의 예술발전으로 자리매김 되지 못했고 하드웨어의 상징성으로 정권의 정당성 확보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오늘날 다목적 공연장의 개념은 유신체제하에 만들어진 법체계의 "문화예술"의 정의에 기인한 것이며 이를 근거하여 공공 공연장의 운영목적으로 '다목적'의 개념이 탄생한다. 군사정권을 이은 전두환 정권은 프로시니엄 구조의 다목적 공연장을 정권의 정당성 확보의 수단으로 표출하였고, 전국적으로 재생산 되어 오늘날 한국의 공연문화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조선시대 녹각성과 수중목책의 조성 및 활용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Creation and Use of Nokgakseong and Underwater Wooden Fence)

  • 심순희;김충식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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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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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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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방어시설로 추정되고 있는 목책(木柵)은 조선시대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까지 군사적인 방어기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城)이나 병영(兵營) 외부에 설치되는 성책(城柵), 영책(營柵)의 개념으로 정립되면서 방어를 위한 필수시설로서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본 연구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 문헌조사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관방시설로 이용되었던 목책을 연구한 결과로, 녹각성(鹿角城)과 수중목책(水中木柵)의 용도와 기능 그리고 설치 방법 그리고 목책의 소재 등을 집중적으로 고찰하였다. 본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여말선초 외적의 침략이 빈번해짐에 따라 목책은 주요 성외 방어시설(防禦施設)로써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목책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나 관방정책, 입지 환경에 따라 목책성, 녹각성 그리고 수중목책 등 다양한 유형으로 변용(變容)되어 설치되었다. 둘째, 목책은 요충지(要衝地)의 산성(山城)이나 영(營), 진(鎭), 보(堡), 성(城) 등 군사적 목적의 관방시설(關防施設)에 설치되었으며, 유사시 방어의 시급성에 따라 농번기(農繁期)를 피해 인력의 동원이 수월한 농한기(農閑期)에 맞춰 설치되었다. 문헌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 조선시대 목책의 규모는 포백척(布帛尺)으로 환산한 결과 그 둘레가 4,428척(2,066m)부터 55척(25m)까지 매우 다양한 규모였다. 또한, 목책의 재료는 소나무와 참나무류가 주로 사용되었다. 셋째, 녹각성은 일반적인 목책보다 공격성을 겸비한 효율적인 전투 지원시설로,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녹각성기록은 세종대에 20회로 가장 많은 기록이 나타났다. 지역별로는 4군 6진 지역인 평안·함길도(12) 등 변방(邊防) 험지(險地)에 주로 설치된 것으로 나타났다. 넷째, 15세기 초반 조정에서 남해안 연해지역(沿海地域)의 해상 방어 전략을 수립하게 되면서부터 1510년 삼포왜란(三浦倭亂) 이후 본격적으로 읍성(邑城)을 비롯한 주요 치소(治所)나 진, 보 등 여러 관방시설 주변에 왜적의 병선(兵船)을 저지하기 위한 방어시설로서 수중목책의 설치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다섯째, 삼포왜란을 전후한 15세기부터 17세기 사이 남해안과 강화도에 수중목책이 설치되었다. 특히 15세기에 제포와 같은 경남 해안 요해처(要害處)에 수중목책이 집중적으로 설치되었다. 수중목책의 재료는 소나무와 참나무류가 주종을 이루지만 이 밖에도 합다리나무, 서어나무류, 칠덩굴도 목책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잣나무 종자(種字) 성숙과정(成熟過程)에 있어서의 내적변화(內的變化)와 발아력(發芽力)에 대(對)한 연구(硏究) (Studies on the Internal Changes and Germinability during the Period of Seed Maturation of Pinus koraiensis Sieb. et Zucc.)

  • 민경현
    • 한국산림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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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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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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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4
  • 1970~1971년(年)에 걸쳐 잣나무의 자웅화(雌雄花)가 개화(開花)하여 구과(毬果)가 성숙(成熟)하기까지 임업시험장(林業試驗場) 서울시험임내(試驗林內)에 고정모수(固定母樹) 2본(本)과 보조모수(補助母樹) 3본(本)을 선정(選定)하여 7~10일간격(日間隔)으로 구과(毬果)를 채취(採取)하여 외부형태(外部形態)와 내부조직(內部組織)의 변화상(變化相)을 밝히고 구과(毬果)의 종자(種子)의 함수량(含水量)을 비롯하여 유지(油脂), 당(糖), 단백질(蛋白質) 등(等) 함유물질(含有物質)의 변화(變化)와 발아력(發芽力)을 갖게되는 시기등(時期等)을 종합적(綜合的)으로 연구(硏究)하였으며 그 결과(結果)를 요약(要約)하면 다음과 같다. 1. 웅화(雄花) 1) 4월하순(月下旬)~5월상순(月上旬) 화분모세포군(花粉母細胞群)이 형성(形成)되고 다시 5월상순(月上旬)~5월중순(月中旬)에 환원분열(還元分裂)을 하여 사분자(四分子)가 되고 단핵상(單核狀)의 화분(花粉)은 그후분열(後分裂)하여 5월하순(月下旬) 성숙비산(成熟飛散)하였다. 2) 한 개의 웅화수(雄花穗)의 웅예수(雄蘂數)는 구과(毬果)의 유효인편수(有效鱗片數)와 거의 비슷한 69~102개(個)로서 1개(個)의 웅예내(雄蘂內)에는 5800~7300립(粒)의 화분(花粉)이 들어있다. 3) 성숙화분(成熟花粉)의 형태(形態)는 원형(圓形) 또는 타원형(楕圓形)으로 좌우(左右)에 기낭(氣囊)이 달렸으며 화분(花粉)의 길이는 $80{\sim}91{\mu}$로서 cuticula로 된 외피(外皮)와 cellulose로 된 엷은 내피(內皮)로 둘러 쌓여있다. 4) 성숙화분(成熟花粉)은 pH6.0의 증류수(蒸溜水)에 2%의 자당(蔗糖)을 넣은 0.8% 한천배지(寒天培地)를 사용(使用)하여 $25^{\circ}C$에서 68시간(時間) 경과후(經過後)에 발아(發芽)하였다. 2. 자화(雌花) 1) 인편(鱗片)은 4월하순(月下旬)부터 빨리 자라기 시작(始作)하여 5월상순(月上旬)에 배주(胚珠)의 분화(分化)가 시작(始作)된다. 5월중순(月中旬)에 배낭모세포(培囊母細胞)가 환원분열(還元分裂)을 하여 사분자(四分子)를 만들고 웅화(雄花)의 개화(開花) 직전(直前)인 5월하순(月下旬)~6월상순(月上旬)에 자화(雌花)의 생식기관(生殖器官)이 완성(完成)되었다. 2) 수분후(授粉後) 자화(雌花)의 배낭모세포핵(培囊母細胞核)은 계속(繼續) 분열(分裂)하여 다수(多數)의 유리핵(遊離核)이 밀집상태(密集狀態)로 익춘(翌春)까지 월동(越冬)한다. 3월중순(月中旬)부터 핵분열(核分裂)과 더불어 격막(膈膜)이 형성(形成)되어 5월상순(月上旬) 봉와조직상(蜂窩組織狀)의 배유체(胚乳體)가 형성(形成)되었다. 3. 수정(受精) 및 배(胚)의 형성(形成) 1) 장란기(藏卵器)는 4월중순(月中旬)~하순(下旬)에 형성(形成)되고 4월하순(月下旬)~5월초순(初旬) 사이에 수정(受精)하였다. 2) 배(胚)의 형성(形成)은 수정후(受精後) 5월하순(月下旬)에 난핵(卵核)이 분열(分裂)하여 일차(一次) suspensor 층(層)을 이루고 6월초순(月初旬)에 격막(膈膜)이 발생(發生)하였으며 6월중순(月中旬)에 4개(四個)의 유배(幼胚)가 발생(發生)하나 그중 1개(個)가 신장(伸長)하여 6월하순(月下旬)에는 배(胚)의 기관(器官)이 분화(分化)하기 시작(始作)하였으며 8월하순(月下旬)~9월초순(月初旬)에 배(胚)가 성숙(成熟)하였다. 4. 구과(毬果)의 생장(生長) 1) 개화당년(開花當年)의 6월중순(月中旬)~7월중순(月中旬)에 걸쳐 유구과(幼毬果)가 크게 생장(生長)하고 8월중순이후(月中旬以後) 정지(停止)되였는데 개화시(開花時)의 자화(雌花)에 비(比)하여 길이 1.6배(倍) 폭 3.3배(倍) 중량(重量)이 약(約) 22배(倍)에 달(達)하였다. 2) 개화익년(開花翌年)에는 3월상순(月上旬)부터 생장(生長)이 시작(始作)되어 4월중순(月中旬)~7월상순(月上旬)에 걸쳐 크게 생장(生長)하였으며 성숙기(成熟期)의 구과(毬果)는 개화직후(開花直後)의 유구과(幼毬果)에 비(比)하면 길이 7배(倍) 폭 12~15배(倍)에 달(達)하였다. 3) 구과중(毬果重)은 장란기(藏卵器) 형성기(形成期)에 65% 증가(增加)되고 수정후(受精後)에는 점진적(漸進的)으로 증가(增加)되어 7월하순(月下旬)에는 자화중(雌花重)의 660배(倍)로서 정점(頂點)을 이루고 그 후점차(後漸次) 감소(減少)되었다. 4) 구과(毬果)는 96~133개(個)의 인편(鱗片)으로 되어있고 종자(種子)가든 유효인편율(有效鱗片率)은 69~80%이며 성숙기(成熟期)의 구과장(毬果長)이 11~13cm 구과내종자수(毬果內種子數)는 90~150립(粒)이며 비립율(粃粒率)은 8~15%이었다. 5. 종피(種皮)의 형성(形成) 1) 자화(雌花)의 주피층분화(珠皮層分化)는 5월중순(月中旬)부터 시작(始作)되고 개화익춘(開花翌春)부터 활발(活潑)히 이루어져 외종피층(外種皮層)은 7월중순(月中旬)의 $703{\mu}$을 정점(頂點)으로하여 그후(後) 함수율(含水率)의 감소(減少)와 각질화(角質化)에 의(依)해 성숙기(成熟期)에는 $550{\sim}580{\mu}$로 감소(減少)되고 이때 외종피(外種皮)의 표피조직(表皮組織)이 분화(分化)하였다. 2) 성숙종자(成熟種子)의 외종피구조(外種皮構造)는 3~4층(層)의 표피세포층(表皮細胞層)과 16~21층(層)의 석세포(石細胞)로 되어 있고 그 내측(內側)에 1~2열(列)의 유조직층(柔組織層)을 이루고 있다. 3) 내종피(內種皮)는 외종피(外種皮)보다는 50~60일(日) 빠른 5월중순경(月中旬頃)에 최대층폭(最大層幅)($667{\mu}$)을 이루고 성숙종자(成熟種子)의 경우(境遇) 그 폭(幅)이 $80{\sim}90{\mu}$으로 감소(減少)되었다. 6. 함수율(含水率)의 변화(變化) 1) 수정후점차(受精後漸次) 증가(增加)되어 6월상순(月上旬)~중순경(中旬頃) 정점(頂點)에 달(達)하고 그후(後) 점감(漸減)되어 성숙기(成熟期)에는 구과(毬果) 43~48% 외종피(外種皮) 23~25% 내종피(內種皮) 32~37% 내종피(內種皮)와 배유(胚乳) 및 배(胚)는 23~26%배(胚)와 배유(胚乳)는 21~24% 배(胚)는 36~40%이었다. 2) 구과(毬果)의 발육(發育)과 함수율(含水率)의 증감관계(增減關係)를 종합(綜合)하면 다음과 같다. 제1기(第一期)(구과생장왕성기(毬果生長旺盛期) 수정후(受精後) 구과(毬果)의 발육왕성기(發育旺盛期))로서 최대함수량(最大含水量)을 나타내는 시기(時期)(4월하순(月下旬)--6월중순(月中旬)). 제2기(第二期)(배(胚) 및 영양조직형성기(營養組織形成期)) 유배(幼胚)가 발생(發生)되고 배유(胚乳)의 영양조직(營養組織)이 형성(形成)되며 함수율(含水率)이 점진적(漸進的)으로 고정(固定)되는 시기(時期)(6월중순(月中旬)~7월중순(月中旬)). 제3기(第三期)(성숙기(成熟期)) 내종피층폭(內種皮層幅)의 감소(減少)와 배(胚)의 성숙(成熟)으로 함수율(含水率)이 점차(漸次) 감소(減少)되고 실편(實片)이 황록색(黃綠色)으로 변색(變色)되는 시기(時期)(7월하순(月下旬)~8월하순(月下旬)). 제4기(第四期)(건조기(乾燥期)) 종자(種子)가 성숙(成熟)하여 함수율(含水率)이 급감(急減)되고 실편(實片)이 건조(乾燥) 위축(萎縮)하는 시기(時期)(9월초순이후(9月初旬以後)). 7. 함유물질(含有物質)의 변화(變化) 1) 종자내(種子內)의 유지(油脂)는 수정후(受精後) suspensor 층(層)이 형성(形成)되는 5월상순(月上旬)부터 점차(漸次) 증가(增加)되고 배(胚)의 기관(器官)이 분화(分化)되는 시기(時期)부터 급감(急減)되어 성숙종자(成熟種子)의 함유율(含油率)이 65~68%로서 호도와 참깨 야자수 열매등(等) 유지작물(油脂作物)보다 많았으며 배유(胚乳)보다 배(胚)의 함유율(含油率)이 높았다. 2) 수정후구과(受精後毬果)의 생장(生長) 왕성기(旺盛期)에 환원당(還元糖)의 함량(含量)이 일시증가(一時增加)하였으나 6월상순(月上旬)부터 점감(漸減)되고 비환원당(非還元糖)이 증가(增加)하였다. 배(胚)의 전당함량(全糖含量)은 7월하순(月下旬)부터 점차적(漸次的)으로 증가(增加)하였는데 그 대부분(大部分)이 비환원당(非還元糖)이였으며 환원당(還元糖)은 비환원당(非還元糖)의 약(約) 1/10에 불과(不過)하였다. 3) 단백질(蛋白質)의 함량(含量)은 5월하순(月下旬)부터 점차(漸次) 증가(增加)하였으며 성숙종자(成熟種子)의 경우(境遇) 48.8%였으며 배(胚)보다 배유(胚乳)쪽이 많았다. 8. 종자(種子)의 형질(形質) 성숙(成熟)한 종자(種子)는 외관상(外觀上) 다갈색(茶褐色)이고 길이는 1.3~1.9cm 폭(幅) 0.8~1.4cm 중량(重量) 0.43~0.48g이였으며 외종피(外種皮)는 종자중량(種子重量)의 61~65% 배(胚)는 2.3~3.5% 내종피(內種皮)와 배(胚) 및 배유(胚乳)는 33~36%이였다. 9. 발아력(發芽力)의 검정(檢定) 7월하순(月下旬)부터 9월중순(月中旬)까지 7일간격(日間隔)으로 채종(採種)하여 환원법(還元法)과 배적출(胚摘出) 배양(培養) 및 일반발아시험등(一般發芽試驗等) 세가지 방법(方法)으로 발아력(發芽力)을 검토(檢討)한 결과(結果) 수정(受精) 4개월후(個月後)인 8월하순(月下旬)부터 정상적(正常的)인 발아력(發芽力)을 갖게 되었고 이때 종자(種子)의 함수량(含水量)이 22~25%이었다. 이로 미루어 잣나무의 채종적기(採種適期)는 9월상순(月上旬)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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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천연집단(天然集團)의 변이(變異)에 관(關)한 연구(硏究)(III) -주왕산(周王山), 안면도(安眠島), 오대산(五臺山) 소나무집단(集團)의 차대(次代)의 유전변이(遺傳變異)- (The Variation of Natural Population of Pinus densiflora S. et Z. in Korea (III) -Genetic Variation of the Progeny Originated from Mt. Chu-wang, An-Myon Island and Mt. O-Dae Populations-)

  • 임경빈;권기원
    • 한국산림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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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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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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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6
  • 1974년(年) 천연(天然)소나무집단(集團)에 대한 유전적변이(遺傳的變異)를 분석(分析)하고져 먼저 경북(慶北) 청송군(靑松郡) 소재(所在) 주왕산(周王山)소나무림(林), 충남(忠南) 서산군(瑞山郡) 소재(所在) 안면도(安眠島) 소나무림(林), 그리고 강원도(江原道) 평창군(平昌郡) 소재(所在) 소나무림(林)을 대상(對象)으로하여 각(各) 집단(集團)에서 되도록 소면적(小面積)의 범위내(範圍內)에 서있는 소나무 개체(個體)를 각(各) 20주(株)씩 총 60주(株)를 택(擇)하여 그 모수(母樹)에 대한 형태학적(形態學的) 특성(特性)등을 조사측정(調査測定)하고 집단간(集團間)에 보이는 차이(差異) 그리고 한 집단내(集團內)에 있는 각개체수목(各個體樹木)의 형질(形質)을 조사보고(調査報告)한바 있다(제일보고문(第一報論文). 1974년(年) 가을에 가계별(家系別)로 종자(種字)을 채취(採取)하여서 가계별(家系別) 및 산지별(産地別)의 차이(差異)를 분석(分析)하고 동시(同時)에 그 종자(種字)를 파종하여서 1-0묘(苗) 및 1-1묘(苗)를 대상(對象)으로 생장인자(生長因子)에 대한 측정(測定)을 하고 그 유전력(遺傳力)을 계산(計算)해 보았다. 그밖에 엽록소함량(葉綠素含量) 또는 monoterpene등의 함량(含量)의 차이(差異)를 분석(分析)해 보았다. 종자(種字)의 형태학적(形態學的) 특성(特性)에 있어서는 집단간(集團間) 또 가계간(家系間)에 유의차(有意差)를 보이지 않는 것도 있었으나 대체(大體)로 유의차(有意差)가 인정(認定)되었다. 그리고 각형질간(各形質間)의 상관(相關)을 보았는데 구과폭(毬果幅)과 종자익(種字翼)의 폭(幅), 구과장(毬果長)과 종자익(種字翼)의 길이간(間), 그리고 구과(毬果) 생중량(生重量)과 종자중량간(種字重量間)에는 정(正)의 상관(相關)이 보였다. 묘고(苗高)와 근원경(根元徑)의 성장(成長)에 있어서는 가계간(家系間) 그리고 집단간(集團間)에 차이(差異)가 인정되었다. 묘고(苗高)의 유전력(遺傳力)은 집단(集團)의 평균치(平均値)를 가지고 분석(分析)하였다. 즉 집단(集團)에 관계(關係)되는 분산(分散)을 유전분산(遺傳分散)으로 보고서 유전력(遺傳力)을 계산(計算)해 보았는데 1-0묘(苗)의 묘고(苗高)에서는 0.29, 1-1묘(苗)에서는 0.14가 그리고 근원경(根元徑)에 있어서는 1-0묘(苗)는 0.15, 1-1묘(苗)에서는 0.06이였다. 기공열수(氣孔列數)에 있어서는 집단간차이(集團間差異)가 있었으나 거치밀도(鋸齒密度)에는 차이(差異)가 없었다. 침엽(針葉)의 특성(特性)에 관(關)해서는 모수(母樹)와 차대간(次代間)에 상관(相關)이 없었다. 엽록소함량(葉綠素含量)은 집단간차이(集團間差異)는 보였으나 가계간차이(家系間差異)는 없었다. monoterpene의 성분(成分)에 있어서는 myrcene과 ${\beta}$-phellandrene의 함량(含量)으로 집단차(集團差)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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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오소경과 명주(하서주) - 그 도시구조를 중심으로 - (9 Provinces and 5 Secondary Capitals, Myeong-ju(Haseo-ju) - Revolve Around Urban Structure -)

  • 야마다 타카후미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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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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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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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신라는 문무왕 18년(678) 당나라군이 철수함에 따라 명실공히 한반도를 통일한 뒤, 그 판도를 중국 지방행정구획 제도를 모방하여 아홉 개의 주로 구분하고, 거기에 소경 군 현을 배치한 지방행정 조직을 정비하였다. 이른바 9주5소경(九州五小京)이라 불리는 지방행정제도이다. 주는 현재의 대한민국(이하 한국)의 도(道)에 해당하며, 소경은 광역시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 수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덕왕 16년(757) 겨울 12월조에 의하면 5소경, 117군, 293현에 이른다 통일신라시대의 지방도시인 9주5소경(九州五小京)의 연구는 문헌사학 중심으로 이루어져, 주성(州城)과 소경성(小京城)의 위치와 그 도시구조에 대해서는 지금껏 크게 논의되었던 적이 없어 명확치 않은 점이 많다. 고고학적 도시구조의 복원연구는 박태우의 논고("통일신라시대의 지방도시에 대한 연구" 1987년)와 필자의 논고("新の九州五小京城郭の構造と實態について-統一新による計畵都市の復元硏究-"2009년) 정도이다. 강원도 강릉시는 원래 예(濊)의 고국(古國)으로 고구려의 하서량(河西良)이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선덕왕 8년(639)에 북소경 하서양주(北小京; 河西良州))으로 되었는데, 무열왕 5년(658)에 하서주(河西州)로 소경에서 주로 바뀌었다. 이후 경덕왕 16년(757)에는 명주로 개칭되었고 그 뒤, 고려시대 이후로도 명칭은 여러 가지로 변하였다. 박태우는 나성 흔적이 남은 도시로 분류하여 명주동에 있었던 성지로 비정하고 있는데, 현재는 시가지화로 인하여 확인할 수가 없다고 한다. 또한 관동대학교에서는 강릉시 중심부로부터 서남서 약 3km에 위치하는 명주산성을 주치(州治)로 보는 설을 제시하고 있다. 필자는 일제시대의 측량도에서 볼 수 있는 유존(遺存) 토지구획로 보아 경주시의 신라금경이나 다른 많은 도시와 같이 방격의 가구, 즉 방리(坊里)를 갖춘 도시로 복원하였다. 다음은 그 구조에 대해 서술하였다. 강릉의 시가지는 시내를 남서에서 북동으로 흐르는 남대천의 왼쪽 기슭 평탄지에 위치하고 있다. 부근에 그다지 높은 산은 없으나 시가지의 북측에는 산이 동서로 이어져 있으며, 남대천으로부터의 평지부분 너비는 최대가 1km 정도로 그다지 넓지는 않다. 현재는 강릉시의 중심부로 시가지화가 진행되어 강릉역을 중심으로 한 방사상의 구획정리 등도 이루어져 옛 토지구획이 거의 소멸된 상태이다. 그러나 일제시대의 지형도 등을 보면 시가지 중심부인 옥천동, 임당동, 금학동, 명주동 등의 일대에 한 변 약 190m를 기본으로 하는 방격의 토지구획이 북서-남동에 약 0. 8km, 북동-남서에 약 1. 7km의 범위로 잔존하고 있는 것이 확인 가능하다. 방격의 유존 토지구획은 다른 9주5소경(九州五小京)의 사례를 통해 보면 통일신라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생각된다. 단, 방격 한 변의 길이가 190m로 신라의 금경이나 다른 도시유적에서 볼 수 있는 한 변 160m나 140m의 규격과는 다르다는 점이 앞으로의 검토과제이다. 토지구획의 방위는 지형에 준하여 북서-남동 축에서 북쪽으로부터 약 $37.5^{\circ}$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는 남대천의 방위와 북측의 산지에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보여 진다. 방격의 유존 토지구획이 잔존하는 범위로부터, 최소로 보더라도 북서-남동 4방${\times}$북동-남서 7방 크기라는 장방형으로 복원하였다. 단, 방격의 유존 토지구획이 퍼지는 정도로 보아, 남서측과 북서측에 각각 1방 씩 늘어난 북서-남동 5방${\times}$북동-남서 8방(북서-남동 약 $950m{\times}$북동-남서 약 1520m)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전체의 형상은 장방형으로, 당의 장안성(長安城)이나 일본의 평성경(平城城)과 같은 중축대로(주작대로)가 상정 가능한 토지구획은 확인되지 않는다. 명주의 도시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는 이제껏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도시유적 추정지 내부에 위치하는 조선시대의 강릉읍성이나 관아지의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기와류, 토기류 중에는 통일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갈만한 것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또한, 관아지에서 검출된 조선시대의 건물지는 모두 정방위가 아닌 크게 기울어진 방위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강릉에서 볼 수 있는 방격 유존 토지구획이 예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사실을 보여주는 방증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명주성"의 명문 막새기와가 출토된 명주산성의 역할로, 이것이 주치였던 것을 필자는 부정하지 않는다. 한국의 고대도성은 평지성과 산성의 세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통일신라가 되어도 방리제 도성인 금경 주위로 명활산성, 남산산성, 서형산성의 산성군이 계속되어 유지되고 있었다. 구주오소경 이외의 다른 도시에서도 도시유적 부근에 산성이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명주도 평지의 도시와 산성이 세트가 되어 주치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