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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 최고(最古)의 매향비(埋香碑): 영암 정원명(貞元銘) 석비(石碑) (The oldest Maehyang-bi (埋香碑) of Memorial Inscriptions existing on record; Yeong-am's 'Jeongwon (貞元)' Stone Monument)

  • 성윤길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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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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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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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영암 정원명(貞元銘) 석비(石碑)는 전남지역 소재 금석문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발견 직후부터 매향비의 가능성이 언급되어 더욱 주목되었다. 하지만 정원(貞元) 2년(786)이라는 절대 연대가 있어 비교적 이른 시기의 금석문임에도 불구하고 이 석비를 주제로 한 단독 논고는 많지 않다. 필자는 이 석비에 대한 기존 연구 성과를 검토하면서 3D 스캔 자료, 1995년 탁본 자료, 국립광주박물관 소장 탁본을 기초로 하여 4행 42자의 명문을 다시 판독하였다. 검토 결과 이 석비는 매향비임이 확인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 문헌인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에 매향(埋香) 입석(立石)이나 글자를 알아볼 수 없다고 기록되어 이 석비가 매향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고려 말~조선 초의 현존 매향비에 자주 산견되는 '매(埋)' 혹은 '매향(埋香)'이라는 표현은 없으나, '탄장(呑藏)'과 '합향십속(合香十束)'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는 점에서 매향비임을 알 수 있었다. 즉 '매(埋)'의 의미를 '탄장(呑藏)'으로 대신 표현하였다고 생각된다. 이에 대한 방증 자료는 남북국시대 금석문인 888년 건립의 진감선사 대공탑비이다. 여기에는 '해안식향(海岸植香)'이라는 표현이 있어 '매(埋)'자를 쓰지 않아도 그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따라서 정원명 석비에 '매(埋)'자가 확인되지 않는다고 하여 매향비가 될 수 없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정원명 석비가 매향비라는 방증 자료는 도갑사 어귀에 있는 국장생(國長生) 주변 금표석(禁標石)의 명문에도 있다. 금표석의 명문은 조선 후기 중흥의 군주였던 정조의 능, 즉 건릉(健陵)에 사용되는 향탄(香炭)을 월출산 도갑사 주변에서 마련하였을 가능성도 시사하고 있다. 금표석에 새겨진 '향탄(香炭)'은 당연히 향(香)과도 관련 있기 때문에 예전부터 도갑사가 있는 월출산 주변 지역이 향(香)과 관련되어 오래된 역사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석비에 보이는 명문, 조선후기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의 기록, 금표석의 명문 등, 이 모든 것이 정원명 석비가 매향비임을 알려주고 있다. 실물로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매향비가 고려 말 1371년과 조선 초 1410년 두 개의 연대를 보이고 있는 영암 입암리 매향비임을 고려할 때, 786년 건립의 정원명 석비는 조선 후기 문헌과 그 문헌을 증명하는 실물로서, 우리나라 최고(最古) 매향비라는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오삼연약신학비용(五杉練若新學備用)』이 다비법 『석문상의초(釋門喪儀抄)』 성립에 미친 영향 (An Inquiry on the effect of the formation Jhāpeti-Rites 『Seongmunsanguicho (釋門喪儀抄)』 in 『Osamnanyasinhakbiyoung(五杉練若新學備用)』)

  • 이선이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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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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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59-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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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2006년 고마자와대학에서 발견된 간경도감본 "오삼난야신학비용"의 출현은 답보상태에 있던 다비법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오삼난야신학비용"은 상권은 일부 낙질이 있고 하권은 가의 일반의례를 담고 있다. 중권은 동아시아 불교상장례의 시원을 담은 내용으로 편집되어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본 논고에서 중권의 내용을 분석하였다. 속례를 따르던 불교의 상례를 수방비니(隨方毗尼)에 따라 새로이 만들었으며, 오복(五服)은 법의(法衣)의 뜻을 따라 오삼(五衫)이라고 한다. 감구효당(龕柩孝堂)은 자체불(自體佛)을 밝히는 일향일등(一香一燈)을 시설하고, 사리(śarīra)인 골신(骨身)의 전신 사리를 모시는 곳이다. 조위문(吊慰文)은 슬픈 마음과 비통한 용모를 지켜야하고 그 마음을 하얀 종이 위에 글로서 나타내야한다. 제문(祭文)은 죽은 이를 위한 글로서 반드시 고제(告祭)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성과 내용은 "석문상의초" 상하권에 반영되었다. 특히 "오삼난야신학비용"의 저술 의도는 "석문상의초" 서문에 반영되고, 이후에 조선시대의 다비법 성립에 영향을 끼친다. 불교상장례의 의미와 절차는 "오삼난야신학비용"의 상례에 "석씨요람"의 장례법을 통합하여 "석문상의초"라는 다비의례서로 완성하게 된다. 다비를 한 후에 탑을 세우는 것은 원적(圓寂)을 이룬 상징이며 깨달음의 한 종류이다. "석문상의초"에서 상례와 장례를 하나로 묶는 편집은 한국불교다비법의 원형을 만들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그리고 다비 후에 사리를 탑에 안치하는 것은 불교적 삶의 완성을 보이는 것이다. 특히 불서를 만들던 간경도감에서 다비법의 원형인 "오삼난야신학비용"을 판각하여 제작?보급하였다는데 또 다른 의의를 두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