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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장신구에 나타난 조형적 특징에 관한연구 (백제장신구를 중심으로) (On the Design Characteristics of Ornaments in the Three Kingdom Period (Focused on Baekje's ornaments))

  • 신미영;박승철
    • 디지털융복합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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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권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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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03-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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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한나라의 전통적 사상은 그 나라의 지리적 환경, 종교사상 등에서 그들의 의식구조를 알 수 있고 유적과 유물의 특성에서 그 나라의 문화 양상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문화역사는 5000년을 자랑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백제시대의 문화는 우리역사상 매우 뛰어난 유물들을 창출 하였다. 백제시대의 장신구는 고구려, 신라시대의 장신구와보다 백제 특유의 문양과 세공기술에 있어 부드럽고 풍만한 아름다운 곡선미를 추구해 왔다. 본 연구에서는 백제시대의 장신구중 관, 관식, 귀걸이, 목걸이, 뒤꽂이 등을 중심으로 장신구의 조형적 특징과 문양에 나타난 상징성에 대하여 연구 하였다. 고구려, 신라와 함께 삼국시대의 장신구를 비교하여 백제장신구를 부각시키기 위해 백제장신구에 대한 자료 수집과 국립부여박물관, 공주박물관, 국내외 전문 서적과 국내 참고문헌 등을 고찰 하였고 논문 등을 통하여 백제 금속공예품의 문양을 중심으로 이미지를 연구 하였다. 백제시대의 역사는 화려하고 찬란한 예술적 문화를 지니고 있었지만, 후대에 오르면서 역사적 자료나 그 내용을 뒷받침해줄 유물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 백제문화에 대한 많은 관심과 연구 개발이 필요한 실정이다. 백제시대의 장신구는 단순한 장신구로써 만의 기능이 아닌 백제인의 정서와 다양하고 창조적인 정신세계가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고 최근 과학 기술의 발달과 산업화 속에 문화컨텐츠라는 요소가 사람들의 인식을 변화시킴으로써 백제문화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만큼 백제시대 문양을 더욱 연구하여 다양하고 새로운 조형적 디자인을 개발함으로써 백제를 널리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지역농산물 공동브랜드의 스토리텔링 개발 : 안동 '그대생강'의 사례를 중심으로 (A Study on the Development of Storytelling of Co-Brand for Regional Agricultural Products : Focusing on the case of 'Geudae Ginger' in Andong)

  • 강미혜;김공숙
    • 지역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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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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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3-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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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안동은 전국 최대의 생강 주산지이다. 이 연구는 안동생강의 공동브랜드 '그대생강' 사례를 중심으로 지역농산물 공동브랜드의 스토리텔링 개발 과정을 알아보았다. 그대생강 브랜드의 스토리텔링 개발 과정은 4단계이다. 1단계 자료 조사를 통해 스토리텔링 소재를 수집하였다. 인류에게 오래 동안 약으로 사용되어온 생강은 무엇보다 역사 문화적 이야기 소재가 많다. 2단계로 스토리 자원을 추출하였다. 생강은 두루 이롭게 쓰이면서도 본연의 색과 향기를 잃지 않는 고귀함, 강직함, 정결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의 이미지와 결부시킬 수 있다. 3단계로 스토리텔링을 개발하였다. 핵심 테마를 '격(格)이 다른 안동생강'으로 설정하였고, 핵심 스토리로 ≪안동 생강선생 이야기≫ 시리즈를 기획해 시나리오 1편 <안동 생강선생을 소개 하오>, 2편 <도산십삼차(陶山十三茶)의 탄생>, 3편 <사랑을 이어주는 그대생강>을 개발하였다. 4단계에서는 스토리텔링의 활용 방안을 제안하였다. 스토리텔링 확장을 위한 지역 연계 사업화 프로그램으로 '그대' 생강의 이미지를 활용한 소비자 참여형 스토리텔링의 확산방법 및 생강'선생'의 이미지를 부각한 선생님과 함께 하는 생강 여행 및 생강 축제 등을 제시하였다. 본고는 브랜드 스토리텔링을 통해 격이 다른 안동생강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일조함으로써 그대생강 공동브랜드 활성화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했다. 브랜드 스토리텔링을 통해 안동생강의 효능과 정보, 역사적 사실 등이 널리 알려지고, 생강이 양념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나 유용하고 매력적인 지역농산물로 자리매김하며 나아가 안동생강 브랜드 스토리텔링을 문화관광 사업에 활용하여 지역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시조의 변이 양상 (The Aspects of Change of Sijo)

  • 강명혜
    • 한국시조학회지:시조학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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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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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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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시조는 발생초기부터 당대의 역사 시대적 배경에 따라 그 틀과 내용이 조금씩 변하면서 융통성 있고 유연하게 적응해 왔다. 이런 점이 당대의 시대적 배경이나 사상, 실태 등을 반영해서 당시의 독자들의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었으며, 그러면서도 시조를 시조답게 하는 시조성만은 그대로 고수해 왔기에 '시조'라는 장르가 현재까지도 생존할 수 있었다. 어느 시대나 어떤 배경에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3장이라는 정형성은 지켜졌으며, 3, 3조나 3, 4조를 유지했고, 또 종장의 첫 구 3자도 고수했다. 이러한 시조성은 시대적인 간극에도 불구하고 '시조'라는 공분모 안에 모두 수렴시킬 수 있는 동인을 마련했다. 한국시가에 있어서 시조는, 공적 기능에서 사적 기능으로 변모가 이루어진 최초의 양식으로서. 그 변이과정을 살펴본 결과. 고려말${\sim}$조선조의 평시조는 그 당시 조류에 부합해서 시조 텍스트를 재도지기(載道之器)로 보아 이중적인 의미의 채색, 상징성 부여, 다채로운 문장 수식 등은 나타나지 않지만, 명천도(明天道) 정인륜(正人倫) 지향하는 성현의 가르침을 온유돈후(溫柔敦厚)하게 나타내고자 노력했다. 주제는 주로 그 당시 상황과 부합되는, 송축, 절의, 정쟁, 훈민, 한정, 강호도가, 안빈낙도, 애정 등이었다. 조선조 후기에 오면서는 사설시조(辭說時調)가 활성화하기 시작한다. 사림파의 득세와 양란(兩亂), 실학의 도입 등으로 조선조 후기에는 인식의 변화를 겪게 되었고, 이러한 변화가 시가 양식에도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사설시조는 당대의 봉건주의 파괴, 유교적 모랄에 대한 반발, 근대적 특성 보유 남녀평등등 사상, 지배층에 대한 고발 및 저항정신 둥이 주축을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저항적 리얼리즘적 현실지향적인 성향을 띠며 특히 고발문학 저항문학의 지반을 형성하는 장르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무엇보다도 잡다한 일상사에 대한 상세한 묘사와 현실 생활에 대한 깊은 관심, 그에 대한 사실적, 구체적 표현은 사실주의 정신의 매개항이 된다는 점에서 근대성이 반영되어 있다고 보았다. 1905년 이후 신문에, 형식이나 내용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기존의 평시조나 사설시조에서 변이된 형태를 취하는 일군의 시조가 등장했다. 변이된 형태는 시조 텍스트의 형식과 내용뿐만이 아니라, 수용적 측면에서도 일어났다. 이때부터 시조는 '읊고 부르는 형태'에서 주로 '읽는 기록물'로 인식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변이 된 시조 형태란, 당대의 시대를 풍자하는 '흥, 내지 흐응'이 삽입된 것, 종장의 어미가 생략된 것 등을 말한다 이러한 형식은 긴박한 상태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특성을 지니기는 하지만, 고시조의 틀, 즉 율격이나 자수에서 많이 이탈되어서인지, 그 생명은 길지 못했다. 그러다가 192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해서 시조부흥운동이 일어나면서부터 시조 창작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되는데, 시조부흥운동은 최남선에 의해 주도되었다. 시작(詩作) 초기에는 서구지향의 시와 시조들 병행해서 쓰던 육당 최남선이, '조선국민문학(朝鮮國民文學)으로서의시조(時調)'라는 글을 통해 시조의 중요성과, 소중함을 언급하면서 시조부흥 운동을 선도한다. 그는 시조집, '백팔번뇌'도 출간하는데. 그의 전 시조집을 관통하는 것은 '조국 사랑'이라는 일 주제였다. 결국 육당은 고시조를 민족정신의 일환으로 보고, 시조양식을 채택하여 그 당시의 역사 사회적인 상황에 부합되는 주제를 표출한다. 결국 육당도 시조 텍스트를 재도지기(載道之器)로 여겼음을 알 수 있었다. 현대의 시조는 현대성(現代性)과 시조성(時調性)을 모두 만족시켜야 한다는 어려움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전자에만 치중한다면 자유시와의 변별성이 문제가 되며, 후자를 고수하려니 고루하고. 시적 묘미가 없다는 비난을 감수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많은 작가들에 의해 평시조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은 시조가 지니는 원형성에 대한 매력을 감지해서일 것이라고 보았다. 그들 중 특히 선정주의 작품에 주목했는데,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특히 근대의식, 사회비판정신, 고발의식, 사실주의 정신 구현, 서민의식, 산문체 ·일상어 지향 등, 사설시조의 특징 및 성향을 잘 구현, 반영하면서 그 맥을 잇고 있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렇듯이 현대의 시조 작가들은 우리의 고시가 형식을 다양하게 선택해서 다양한 주제를 표출하고 있었다. 여기서 추정할 수 있는 사실은 이러한 시조의 유연성은 앞으로 시조의 생명을 항구적으로 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역사 시대적 변화와 상황 하에서 다시 새로운 양상을 취할 가능성을 보인다는 것, 그리고 이 '시조'는 한국인의 '영원한 정형시 장르'로 남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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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로 본 대한지리학회 60년 (Sixty Years History of the Korean Geographical Society as a Numerical Record)

  • 형기주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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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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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48-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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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본 연구는 대한지리학회 60년의 역사를 그 체제, 예산, 간행물, 회원수, 전공, 논문 등을 통해서 그것이 어떻게 변하여 왔는지를 밝히고, 동시에 학회 60년 역사의 시기구분을 시도 한것이다. 한국에 있어서 서구식 근대지리학의 역사는 불과 60년, 대한지리학회가 창립(1945년 9월11일)되면서 비로소 시작된다. 1960년 IGU 스톡홀름 총회 때, 겨우 국제적 회원국으로 가입하였고, 1963년에 대한지리학회 학회지 창간호가 탄생하였다. 이로부터 불과 40여년 만에 한국은 제 29차 국제지리학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루면서 새천년을 시작하였으니 대한지리학회는 한국의 경제성장 만큼이나 급성장한 셈이다. 학회의 회원수는 1966년에 불과 116인이었으나 2004년 현재에 약 1000인에 이르고, 박사학위 소지자는 1960년에 단지 2인이었으나 2004년에 388인, 이중에 약$43\%$는 외국에서 받은 학위이다. 전공별 회원수는 경제${\cdot}$사회지리 분야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이 도시${\cdot}$인구지리 분야이다. 최근10년 동안에 생태지리학을 포함한 자연지리와 지리교육, GIS분야의 전공자수가 급증하고 있는데, 이것은 시대의 요구를 잘 반영하는 현상이다 학회지 창간호가 탄생한 것은 1963년이지만 이것이 정기간행물이 된 것은 1966년 부터이고, 1993년부터 영문판을 포함하여 계간 및 격월간으로 간행되고 있다. 학회지에 계재한 논문의 편수를 보면, 1960${\~}$70년대에는 연간 평균7편, 1980년대에 약 11편, 1990년대에 24편, 새천년에 와서 무려 52편으로 급성장하였다. 1990년대 이후 논문을 계재할 기회가 많아졌고, 회원들의 연구활동이 고무되고 있기 때문이다. 학회지에 실린 전공분야의 분포를 보면, 역시 경제${\cdot}$사회지리 분야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생태학을 포함한 자연지리학 분야, 그리고 도시 인구지리 분야이다. 앞에 지적한 전공 회원수와 함께 논문계재 편수에 있어서도 문화${\cdot}$역사분야, 지리교육 분야, 응용 및 GIS 분야는 최근에 급성장하는 추세이다. 대한지리학회는 회원수나 그 활동으로 보아서 급성장하고 있으며 국제화 되고있다. 그리고 지난 60년의 역사를 시기별로 나누어 성격을 부여한다면 (1)창립과 혼돈기($1945{\~}1959$), (2)재건기($1960{\~}1969$), (3)체제정비기($1970{\~}1989$), (4)약진기($1990{\~}1999$), (5)국제화시기($2000{\~}\;$)로 나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