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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지역의 '성읍국가' 성에 대한 탐구 (Searching for the Remains of Walled-Town State Sites in Jinju Reg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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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지역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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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5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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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04-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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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청동기시대에 한반도에 산재하던 정치적 독립체들은 '군장사회(君長社會)'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성읍국가(城邑國家)'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이기백의 학설에 따르면, 청동기시대의 '성읍국가' 지배자들은 나지막한 구릉 위에 토성이나 목책을 만들고 스스로 방위하면서 그 바깥 평야의 농민들을 다스렸다. 이 연구에서는 진주지역에 산재하는 21개의 성 중에서 "나지막한 구릉 위에 입지하면서 그 바깥 평야를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성"을 선택해서 '성읍국가'의 성으로 간주하고 그 성들의 특성을 고찰하였다. 진주지역에서 '성읍국가'의 성으로 간주되는 다섯 성은 모두 산정식 산성(山頂式 山城)에 속하고, 그 성내에는 우물터가 없다. 다섯 성의 평균 해발고도는 189.4m이고 평균 둘레는 250m이다. '성읍국가'의 성은 대체적으로는 토축성 목책성이었지만, 부분적으로는 석축의 성벽을 갖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이러한 성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조사가 수행되어 '성읍국가'의 성에 대한 좀 더 과학적인 결론을 도출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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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청동기시대 '사회' 고고학의 문제 (The Problems of the Archaeological Approaches to the Bronze Age Society)

  • 이성주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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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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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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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이 논문은 한반도 청동기시대 '사회' 고고학을 어떠한 관점과 방법으로 연구할 것인가를 검토해 보고자 작성되었다. 먼저 한국의 '사회' 고고학 접근을 연구사적으로 검토하였는데 1970년대까지는 민족사의 흐름과 같이 모호한 실체와 과정으로 사회진화의 단계를 서술하는데 그쳤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념에서 벗어나 단위사회의 규모와 지배권력의 성격 등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였고, 고고학 자료의 위계와 분포를 분석하여 사회단위와 그 조직을 복원해 보려는 노력은 1990년대 들어와서야 가능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영미와 일본 고고학에서 이루어진 사회에 대한 접근의 틀을 참고하여 청동기시대 취락을 분석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년 전의 일이다. 다음으로, 어떤 고고학적 실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정착된 'OO유형' 이라는 개념과 종족집단의 존재가 전제된 문화단위에 대한 관념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청동기시대 고고학자들은 한편으로 취락 내부와 취락 간의 유물분포를 분석하여 사회적인 특성들은 정의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OO유형' 이라는 문화적 실체의 생성과 확장, 및 소멸에 관한 논의를 하고 있는데 이것은 생산적인 '사회' 고고학 연구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보았다. 비파형동검과 같이 광역으로 분포하는 물질문화의 요소들을 고대 종족명과 관련시키는 연구관점에 대해 비판하였다. 이와 같이 광역으로 분포하는 물질문화의 존재는 지역집단들 사이에 형성된 모종의 관계망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으며 나아가 이러한 관계망을 통해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의 성격과 함께 그 물질문화의 상징적 의미가 지역에 따라 어떻게 변용되는지에 대해서 검토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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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샘유적 신라고분 분포양상과 목곽묘의 성격 (The Distributional Patterns of Silla Burial Grounds and the Character of Outer Coffin Tombs in Jjoksaem Site, Gyeongju)

  • 윤형준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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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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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8-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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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쪽샘유적은 사적 제512호 대릉원 일원에 속하는 신라고분군으로 학계에서는 월성북고분군의 일부로 여기고 있다. 2007년부터 실시한 발굴조사는 마을이 들어서며 파괴된 신라고분의 현황을 파악하여 고분공원정비를 위한 기초자료를 제공하기 위하여 이루어 졌다. 조사결과 일제강점기에 확인한 155기 고총고분 외에 700여기 이상의 새로운 고분들이 확인되었으며, 적석목곽묘 이외에 목곽묘, 석곽묘, 옹관묘 등의 소형묘 출토 비율이 70%에 달한다. 쪽샘유적 출토 목곽묘를 분석한 결과 묘광의 모양은 대체로 세장방형에 가까워 기존의 경주식목곽묘의 특징은 인정된다. 또한 묘광의 평면면적을 분석하여 대형, 중형, 소형의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는데, 동일 묘제 내에서의 무덤간 위계 차이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목곽묘 중 가장 이른 것은 후기 와질토기가 출토되어 3세기 대까지 올라가는 등 적석목곽묘 축조 이전에 쪽샘유적 곳곳에 목곽묘가 이미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립간 시기가 되면 선대 무덤들의 정체성은 존중받지 못한 채 파괴되기도 하는데, 이후의 목곽묘들은 적석목곽묘의 등장과 소멸과 궤를 같이 한다. 이들 후대의 목곽묘들은 적석목곽묘의 묘역에 의해 입지가 제한되는데, 죽은이의 신분에 따른 묘역 선정의 차등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적석목곽묘는 미고지에, 목곽묘는 저지대에 입지한다는 기존 견해는 쪽샘유적 발굴조사 결과 선입견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적석목곽묘 호석 최하단석과 목곽묘 등의 굴광 어깨선은 유의미한 레벨 차이가 없으며, 44호 적석목곽묘와 같이 해발이 낮은 곳에 입지하는 적석목곽묘나 B지구 목곽묘와 같이 미고지에 위치한 목곽묘등도 다수 확인된다. 목곽묘는 사로국에서 국가단계의 신라로의 발전과정에 대한 필수 연구자료로서 향후 쪽샘유적에서의 발굴조사 성과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