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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무 구조 분석 시론 - 문헌과 음악을 중심으로 - (The Structural Analysis and Criticism of Geommu (Korean Sword Dance) - Focusing in Literary Works and Music -)

  • 김영희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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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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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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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한국의 검무는 조선시대까지 의례, 민속예능, 궁중연향, 풍류 등에서 다양하게 추어졌다. 그 중 기생들이 민간과 궁중에서 추었던 여기(女妓) 검무가 현재까지 전승되었는데, 조선 후기 문학작품들에 기록된 검무들은 현행 검무보다 역동적이고 검기(劍氣)를 가득 담은 춤이었다. 하지만 현재 전승되고 있는 기녀 검무들은 의식(儀式)성이 강하고 단아하다. 시대적 변화를 겪으며 검무의 정조(情調)가 변한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관통하는 검무의 핵심적인 구조가 있을 것이라는 가설 하에 검무의 내적 구조를 시론적으로 분석해 보았다. 이를 위해 현행 검무와 조선 후기 검무의 구조를 교차하여 연구하였다. 조선후기 문학작품 중 박제가의 <검무기>와 정약용의 <무검편증미인>을 분석했고, 무보로 "정재무도홀기"에서 <검기무>와 "교방가요"의 <검무>를 분석하였다. 도입과정에서는 춤꾼이 등장하여 절을 하고 춤꾼의 캐릭터를 보여주고, 무진 무퇴하며 손춤이나 한삼춤을 춘다. 전개과정에서는 춤꾼과 검이 만나는데, 검을 잡을 것인지를 갈등하다가 양 손에 칼을 잡고 춤춘다. 절정과정에서 숙련된 검술과 교전(交戰)의 모습을 보여주고, 마지막에 연풍대까지 춘다. 결말과정에서는 궁중에서 추었던 경우 인사를 하고 마치지만, 교방에서 추었던 경우 칼을 던지고 춤을 마무리한다. 검무의 구조를 도입 - 전개 - 절정 - 결말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네 단계의 전개 구조에 현행 검무(진주검무, 통영검무, 해주검무, 호남검무, 국립국악원의 검기무)의 춤사위 진행을 결부시키고, 반주 장단인 염불 - 타령(또는 늦은타령) - 자진타령 - 타령 - 자진타령의 순서에 따라 검무의 전개를 분석해보았다. 도입과정은 염불이나 타령의 초입부분이다. 기생이 등장하면서 캐릭터가 제시되고, 2열로 나뉘어 상대(相對)하며 춤춘다. 염불과 타령의 도입과정은 여유롭고 우아하게 진행된다. 전개과정은 타령의 중간이나 자진타령에 해당한다. 춤꾼들이 검 앞에 앉아 있거나 앉게 되는데, 칼을 잡기(집검(執劍))까지 갈등의 과정이 보여지다가, 결국 쌍검을 잡고 춤춘다. 타령에서 자진타령 장단으로 속도를 점차 높이며 검을 잡는 과정의 갈등과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또 자진타령의 탄력 있는 장단이 춤의 전개를 조금씩 진전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속도를 갑자기 늦추어 타령장단이 3~4장단 배치되었다. 자진타령의 빠른 장단에서 타령의 느린 장단으로 전환되는데, 그 이유는 검무의 진전되는 긴장감을 잠시 끌어내 숨을 고르게 했다가, 다시 속도를 높여서, 이 춤이 절정으로 가기 전에 검무의 묘미를 높이는 효과를 만드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다시 자진타령으로 속도가 빨라지면 검무의 동작들은 더욱 폭이 크고 역동적으로 펼쳐진다. 고조된 자진타령의 빠르고 힘 있는 장단에 맞춰 추면서 절정과정의 최고조에 이르는 것이다. 마지막 결말은 잦은 타령이 고조되고, 연풍대의 여세를 몰아 일렬로 서서 검을 휘두르며 춤추다가, 인사를 하고 춤을 마친다. 여기까지 자진타령이 이어진다. 이상 검무의 전개 과정에서 염불 - 타령 - 자진타령 - 타령 - 자진타령으로 이어지는 반주음악은 검무의 도입, 전개, 절정, 결말이라는 구조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고, 각 과정을 선명히 드러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후기 문헌에 기록된 기녀들의 검무와 현행 검무가 진행상에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시대를 관통하는 검무의 핵심적인 내적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노동아카이브의 형성과 발전방향 모색 성공회대 노동사연구소의 '참여형 아카이브' 시도를 중심으로 (The Establishment of Labor Archive and Its New Development Strategy : An Attempt to Build Participatory Archive of the Institute of Labor History in SKHU)

  • 이종구;이재성
    • 기록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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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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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5-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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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성공회대 노동사연구소는 2001년 당시 전태일노동자료실의 소장 기록물이 성공회대에 기탁되는 것을 계기로 출범하게 되었다. 이후 문헌자료를 바탕으로 대규모 구술조사 연구사업을 진행하면서 노동아카이브와 노동연구의 바람직한 관계를 형성해 왔다. 하지만 노동기록이 축적되어감에 따라 새롭게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들이 발생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기록의 생산자(구술증언자)들의 불만족이었다. 기록의 이용자(연구자)들 측면에서도 연구자들이 기록을 고정된 해석의 프레임에 맞추거나, 자신의 해석에 따라 선별적으로 이용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인천지역의 동일방직, 반도상사, 대한마이크로 등 노동조합 사례와 구로동맹파업의 사례 등을 통해 살펴보았을 때 기록의 생산과 활용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은 분명하게 드러났다.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당사자들 사이에서도 역사적 기록에 '승리자'로 남는 그룹이 있는 반면에, 부당하게 '실패자'로 낙인찍히는 '중층적 주변화' 현상이 발생해 왔다. 연구자들의 적극적인 개입은 매우 제한적일 뿐이고, 시민과 노동자들 사이에서 이런 '기억투쟁'이 원활하게 해결되어 나갈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노동아카이브가 지역 속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고 있다. 본 논문은 참여형 노동아카이브의 구축을 통해서 기록 생산과 활용에 대한 대안적인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더 나아가 참여의 이론적인 부분을 보완하여 '로컬리티 기록화' 전략의 구체적 방향성을 모색하였다. 로컬과 로컬리티 연구는 비단 물리적 공간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과 정체성, 그리고 사회적 관계를 구성해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중적 스케일'(multi-scalar) 접근 방법을 요청한다. 대안적인 '로컬리티 기록화' 전략은 기존의 노동아카이브가 해결해야 하는 기록 생산과 활용 사이의 문제점을 해소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전라도지역 사찰단청(寺刹丹靑)의 비교 연구 해남 미황사(美黃寺) 대웅전(大雄殿) 단청을 중심으로 (Comparative Study on the Dancheong(丹靑) of Buddhist Temples in Jeolla Region focused on the Dancheong of the main building of Mihwangsa Buddhist Temple at Haenam(海南))

  • 이수예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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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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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2-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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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해남 미황사 대웅전 단청은 18세기에 조성되어 근래까지 이어오는 전라도지역의 단청 양식을 이끈 대표작으로서 우수성과 독창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건물 외부에는 안료의 박락과 퇴색이 심하게 진행되어 단청의 흔적만 확인될 뿐이나 내부에는 일반 단청문양 외에 다른 사찰에서는 그 실례가 드문 천불도(千佛圖)가 함께 조성되어 있으며, 독립적인 회화작품으로 손색이 없을 만큼 기량이 뛰어난 나한도를 포함하고 있다. 방법적인 측면에서도 종이에 그려 붙인 첩부식(貼付式)으로 여타 단청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내부 단청은 "달마산미황사대법당중수상량문"의 기록과 충량에 남아있는 '무등산인 단확야(無等山人丹?也)', '건륭십구(乾隆十九)'라는 묵서명, 단청문양과 천불도에서 엿보이는 양식적 특징 등을 통해 1754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재단청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점 또한 미황사 대웅전 단청의 조성연대가 1754년이라는 절대연대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이 같은 절대연대는 단청문양의 편년 설정의 기준이 될 것이며 시대별 특징과 변화를 유추하는데 있어서도 도움이 될 것이다. 단청은 시대별, 지역별로 일정한 양식적 특징이 있다. 전라도지역 단청 또한 일정한 양식을 형성하고 있는데 머리초를 먹당기 없이 2중 내지 3중의 녹색대로 마무리하는 경향, 휘골의 커다란 항아리 장식 등은 전라도 단청양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금단청이든 모로단청이든 간에 모든 부재의 뱃바닥을 색긋기로 처리하는 점도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이어져온 전라도 단청 양식 중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전라도지역에 위치한 천은사 극락보전과 내소사 대웅보전의 단청에서 이러한 특징 외에 미황사 대웅전 단청과 유사한 문양과 기법을 찾아 볼 수 있어 주목된다. '미황사 양식'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미황사 단청이 나머지 두 사찰 단청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더 넓은 시각으로 보았을 때 전라도지역 단청의 양식 중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미황사와 천은사, 내소사의 단청에서 볼 수 있는 공통된 도상과 기법 등은 화사간의 영향관계를 짐작케 하는 부분으로 동일화파 내지는 미황사 단청을 조성했던 화사들의 영향을 받은 또 다른 화사들에 의해 조성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표암 강세황의 묵란화 연구 (A Study on the Gang Sehwang's Ink Orchid Painting)

  • 강영주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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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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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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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표암 강세황(1713~1791)은 그림이나 글씨 시 제발 인장뿐만 아니라 탁월한 서화감식과 비평으로 조선 후기 회화의 큰 흐름을 주도했던 대표적인 문인서화가이다. 그는 79세의 장수를 누리며 다양한 화목(畵目)의 작품을 제작했는데 특히 말년에 천착했던 문인화류의 사군자화는 조선 말기 묵란화 유행의 바탕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는 조선시대 화가 중 처음으로 사군자화를 갖추어 그렸는데, 작품량이 많고 회화사적 연구 가치가 있는 '묵란화(墨蘭畵)'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 논문은 강세황의 묵란화에 대한 기록과 작품 연구를 통해 그의 묵란화 인식과 지향을 살피고자 시도되었다. 먼저 강세황의 묵란화 기록에는 사생(寫生)과 고화(古畵)의 연습, 화보(畵譜)의 임방을 고루 중시했던 그의 작화태도가 나타나 주목된다. 18세기 예림의 종장 강세황은 고인(古人)의 뜻과 정신이 집약된 고화의 임방(臨倣)을 중시했으며 그림을 '우의(寓意)'와 '재도(載道)' 등의 수단으로 인식했다. 즉 그의 지속적인 화보임방의 작화방식에서 수기적(修己的) 가치관과 회화관을 읽을 수 있다. 다음으로 그의 이런 회화관이 녹아 있는 묵란화는 양식적 분석을 통해 30~40대의 전반기와 절필기를 끝내고 군자화에 몰두했던 60대~79세인 후반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는 전반기에 "개자원화전"을 주로 학습하였고, 후반기에는 "십죽재서화보"나 "매죽난국사보" 등의 화보를 학화(學畵)하였다. 때문에 전체적으로 그의 묵란화는 전시기(全時期) 화보 의탁이 농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묵란화를 다작했던 70대는 화보의 의고와 임방을 주지하면서도, 그것을 능숙하게 소화해 고아하고 단아한 '표암난'을 완성하여 조선 후기 묵란화 발전에 일조하였다. 마지막으로 강세황의 묵란화풍과 관련 있는 당시(當時) 화가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서화합벽첩을 만들며 서화로 교유했던 심사정이나 최북의 묵란화풍에서 강세황의 영향이 감지되어 앞서 언급한 문인들의 상찬과 아울러 18세기 조선 화단에서의 강세황 묵란화에 대한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후기 백동의 재료 구성과 변화 (Material composition and change of baekdong alloy in the late Joseon period)

  • 공상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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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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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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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백동(白銅)은 구리에 다른 금속을 섞어 녹여 만든 합금으로, 현재 구리와 니켈의 합금으로 정의되고 있다. 그러나 학자들의 연구 대상과 시기에 따라 백동은 구리에 일정 비율 이상의 주석을 더한 금속으로 정의되기도 하고, 구리에 주석과 아연과 납을 합금한 것으로 말하기도 한다. 이렇듯 백동은 그 정의에 차이가 있어 용어의 해석과 표기에 혼란이 있어 왔다. 본 연구는 문헌 기록을 토대로 시론적으로나마 백동의 구성 재료를 정리하고 그 흐름을 살피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를 위해 먼저 백동 합금의 바탕 재료가 되는 구리의 이용과 구리 합금의 종류를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문헌의 백동 기록을 통해 그 사용과 인식을 정리해 보았다. 삼국시대 문헌에서부터 등장하기 시작하는 백동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근대기까지 꾸준히 보이는데 관직의 상징물부터 교역품, 생활기물, 화폐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양하게 쓰였다. 문헌 기록을 살펴보면 백동의 합금 재료는 현재 합금의 재료로 정의되고 있는 구리와 니켈뿐이 아닌데, 시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구리를 합금의 바탕 금속으로 이용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구리 외의 합금 재료로는 주석, 비석 및 비상, 아연, 납 등이 등장하며, 그 과정에서 합금을 의미하는 백동과, 백색의 금속을 의미하는 백동이 혼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현재 정의되고 있는 백동의 합금 재료인 니켈은 비교적 발견 시기가 정확한 금속으로 현대 공업과 산업 분야의 소재로 폭넓게 쓰이고 있다. 니켈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시기는 조선 말기에서 근대기로 추정되고 있으나 그 이용과 사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근대기 신문기사와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니켈의 수용과 그 이용을 함께 살피고, 장인들의 증험을 토대로 니켈을 이용한 백동 합금이 공예품에 사용된 시기를 추정해 보았다. 재료는 기술의 발전과 퇴보에 직접적인 요인이 되며, 기술의 발달은 문명과 문화를 변화시키는 토대가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연구는 시론적으로나마 합금의 재료를 중심으로 백동을 살펴보고자 하였으며 니켈이라는 재료의 이용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중국 하북성 마을제 연구 - 하북성조현범장이월이룡패회중룡신적여인(河北省趙縣范庄二月二龍牌會中龍神的與人) - (A Study of Local Festival for the China Hebeisheng)

  • 박광준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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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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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47-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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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China is a country with large agricultural areas and subject to frequent calamities. Drought is the top of them. It has been a key problem for development of agriculture in the country. In the long struggle against drought, Chinese have accumulated many rational and irrational experiences. The Dragon Kings Belief, which is popular in North China and discussed in a thesis, is one of their irrational experiences. The belief was passed together with Buddhism from India to China in the Tang Dynasty. After it settled down, it was incorporated with the local five dragons belief and a set of beliefs in dragon kings came into existence. The emergence of the dragon kings belief ended the history that the title of rain got was not clear in China and Dragon kings finally got the status. Irrigation is the lifeblood of agriculture in China. In a Chinese mind, Dragon kings are the most important gods who take charge of rain and thus offer the lifeblood. In understanding the nature and characteristics of Chinese traditional culture, it is important for us to make clear the origin and evolution of the belief, find out its nature, function and operation. In the every year beginning of February of the Fanzhuang calendar in the people of Hebeisheng Zhaoxian, would all hold a festival to offer sacrifices to the $^{{\circ}TM}^{\prime}longpai$. Longpai was regarded as the core of the temple fair, thus the native sons came to call this festival; "longpaihui". In this region the'Fanzhuang longpaihui'developed into a well knownand grand temple fair. It was able to attract numerous pilgrims with its special magic power, occupying a place in $China^{{\circ}TM}$ 'eryueer'festival with festive dragon activities. The dragon is a common totem among Chinese nationals. The belief worship of the dragon dates from the start time of primitive societies. Dragon oneself the ancients worship's thunder lightning. In the worship of the great universe, at first afterwards this belief with the tribe's totem worships to combine to become the animal spirit. In ancient myths legends, along with folk religion and beliefs all hold a very important position. The longpaihui is a temple fair without a temple; this characteristic is a distinction between longpaihui and other temple fairs. As for longpaihui must of the early historical records are unclear. The originator of a huitou system has a kind of organized form of the special features rather, originator of a huitou not fix constant, everything follows voluntarily principle, can become member with the freedom, also can back at any time the meeting. There is a longpaihui for 'dangjiaren', is total representative director in the originator of a huitou will. 'banghui' scope particularly for extensive, come apparently every kind of buildup that help can return into the banghui, where is the person of this village or outside village of, the general cent in banghui work is clear and definite, for longpaihui would various businesses open smoothly the exhibition provides to guarantees powerfully. Fanzhuang longpaihui from the beginning of February to beginning six proceed six days totally. The longpai is used as the ancestry absolute being to exsits with the community absolute being at the same time in fanzhuang first took civil faith, in reality is a kind of method to support social machine in native folks realize together that local community that important function, it provided a space, a kind of a view to take with a relation, rising contact, communication, solidify the community contents small village, formation with fanzhuang. The fanzhuang is used as supplies for gathering town, by luck too is this local community trade exchanges center at the same time therefore can say the faith of the longpai, in addition to its people's custom, religious meaning, still have got the important and social function. Moreover matter worthy of mentioning, Longpai would in organize process, from prepare and plan the producing of meeting every kind of meeting a longpeng of the matter do, all letting person feeling is to adjust the popular support of, get the mass approbation with positive participate. Apart from the originator of a huitou excluding, those although not originator of a huitou, however enthusiasm participate the banghui of its business, also is too much for the number.

로컬리티 기록화를 위한 참여형 아카이브 구축에 관한 연구 (Building Participatory Digital Archives for Documenting Localities)

  • 설문원
    • 기록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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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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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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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이 논문은 로컬리티 기록화를 위한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 방안을 개인과 조직의 참여라는 관점에서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우선 로컬리티 기록화에 있어서 참여의 유형을 구분하였고 각 유형별 특징과 편익을 검토하였다. 또한 선행연구를 통해 참여형 아카이브의 조건을 살펴보았다. 이 연구에서는 특히 조직의 참여를 통해 구축된 아카이브 사례들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개인의 참여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지만, 지역기록 보존에 대한 인식이 아직 광범위하게 확산되지 않은 우리의 조건에서는 우선 지역 내 공공기관이나 발굴가능한 공동체 아카이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조직 참여형의 경우, 수집기관의 소장물이 중심이 되고 다수의 수집기관들이 참여하여 구축된 디지털 아카이브, 다수의 공동체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구축된 디지털 아카이브로 구분하였다. 영국과 미국에서 구축된 아카이브들 중에서 이러한 두 가지 유형에 해당하는 사례들을 선정하여 조사하였다. 수집기관 기반의 아카이브 사례로는 캘리포니아의 OAC(Online Archives California)와 Calis phere, 캐나다의 MemoryBC, 영국의 People's Collection Wales를, 공동체 기반의 아카이브 사례로는 Connecting Histories, CAW(Community Archives Wales), Cambridgeshire community archive network(CCAN), Norfolk Community Archives Network(NORCAN) 등을 분석하였다. 이러한 사례들은 모두 다수의 수집기관이나 공동체 소장기록을 서비스하는 아카이브 포털의 성격을 가진다. 참여형 아카이브의 조건으로는 ${\Delta}$분산소장 및 통합 활용, ${\Delta}$수집기관 및 이용자의 참여, ${\Delta}$맥락의 제공과 기록의 의미 있는 재현을 설정하였고, 이러한 조건을 중심으로 각 사례 아카이브들을 비교 검토하였다. 특히 유형에 따라 어떤 측면에 강점과 취약점이 있는지도 검토하였다.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국내 환경에서 참여형 로컬리티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데에 고려해야 할 시사점을 ${\Delta}$추진주체 및 방식, ${\Delta}$수집기관 및 공동체의 협력 네트워크 구축, ${\Delta}$생산맥락의 보존과 재맥락화, ${\Delta}$평가 선별, ${\Delta}$이용자 참여를 중심으로 제시하였다.

고종 연간(1863~1907) 제작 어보(御寶) 연구 (A Study on the Production of Royal Seals during the Reign of King (Emperor) Gojong (r. 1863-1907))

  • 제지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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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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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6-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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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고종이 집권했던 1863년부터 1907년은 불안한 국내 정세와 열강의 침입으로 혼란한 시기였지만, 조선 왕실과 대한제국의 전환기로 왕(황)실의 어보(御寶) 제작에 있어 중요한 변화를 맞이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고종 연간 제작된 보인(寶印)은 대략 138과로 거북뉴(龜鈕)와 용뉴(龍鈕) 어보의 제작 장인, 조형을 분석하면 이시기 보인 전반을 이해할 수 있다. 고종 연간 활동했던 대표적인 금보장(金寶匠) 전흥길(全興吉)은 왕실에서 다양한 금속공예품을 제작하며 실력을 인정받아 활동했던 장인으로, 거북뉴 금보(金寶)와 용뉴 금보를 모두 제작할 수 있었던 뛰어난 장인이었다. 옥각수(玉刻手)·옥보장(玉寶匠)으로 활동한 김은석(金殷錫)도 전흥길과 마찬가지로 거북뉴 옥보(玉寶)와 용뉴 옥보를 모두 제작할 수 있었던 장인이었다. 또한 옥보장 이중려(李仲呂)의 활동도 주목되는데, 김은석이 활동하지 않는 동안 옥보의 새로운 양식을 창출했을 뿐 아니라 이 양식이 금보에도 적용되어 고종 연간 후반기인 1890년 이후 주요한 양식으로 자리하게 된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 제작된 용뉴의 경우 금보와 옥보가 유사한 양식을 공유하는데, 당시 『대례의궤(大禮儀軌)』에 기록된 장인들은 전흥길, 김은석 등 고종 연간 계속 활동해온 금보장, 옥보장이었다. 이들은 처음 용뉴의 어보를 제작해야 할 때 문헌이나 기록 등으로 중국의 용뉴 인장 형식을 차용하였지만, 용뉴 형태와 용 모습은 당시 조선시대부터 제작되어온 용 조각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어보는 왕실과 황실의 정통성과 권위를 상징하는 의물로, 국내외 정세에 따른 변화를 가장 많이 반영하는 공예품이다. 고종 연간은 역대 왕들의 재위 기간 중 어보가 가장 많이 만들어진 시기로 기존의 어보 제작 전통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 희랑대사상(希朗大師像)의 특징과 제작 의미 (Characteristics and Significance of the Huirang Daesa Sculpture at Haeinsa Temple in Hapcheon)

  • 정은우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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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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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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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희랑대사상은 고려시대에 제작된 상으로 높이 82.4cm, 무릎폭 66.6cm, 앞뒤 최대폭 44cm에 이르는 등신상에 가까운 크기이다. 제작 기법은 승상의 앞면과 뒷면을 건칠과 나무를 접합하여 만든 것으로 동아시아의 유일한 사례로 주목된다. 유사한 기술이 나말여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봉화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에 이미 적용된 바 있어 이 시기의 특징으로 이해된다. 희랑대사상에 대해서는 18세기에 쓰여진 가야산을 여행하면서 쓴 기행문에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즉 승상의 가슴에 있는 구멍과 힘줄과 뼈가 울퉁불퉁하다는 등의 독특한 특징은 현재의 희랑대사상과 정확하게 부합된다. 가슴에 있는 구멍은 신통력의 상징으로 3~4세기에 활동한 서역의 승려 불도징(佛圖澄)의 가슴에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에는 흑칠 상태였으며, 19세기에 현재와 같이 채색되었음도 알 수 있다. 봉안 전각은 해인사의 해행당(解行堂)과 진상전(眞常殿)이었으며, 이후 조사전과 보장전을 거치면서 현재에 이른다. 우리나라에서 승상의 제작과 봉안은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문헌 기록에 등장하지만 현존하는 작품은 매우 드문 편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승상의 초상조각은 고려시대의 희랑대사상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제작된 나옹과 의상대사상 등 모두 네 구뿐이다. 이 가운데 희랑대사상은 고려 초기 10세기경에 제작된 상으로서 최고의 제작 기술과 사실적인 재현 그리고 내면의 인품까지 표현한 점에서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작품이다. 승상을 제작하여 숭배하고 신성시하는 전통은 한국만이 아니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다만 재료와 제작 기술에 대해서는 나라마다 차이와 특이성을 보이며 발전하였다. 중국은 육신불(肉身佛)이 많은 편이며 일본은 건칠, 나무, 흙 등 시대마다 다양한 재료를 이용하여 많은 승상을 제작하였다. 저마다 다른 재료와 기법을 사용했지만 동아시아 각국의 승상 제작은 승려의 참모습과 정신성의 성공적 표현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용산 총독관저 정원의 조경사적 의의 (The Yongsan Governor General Official Residence in Korean Landscape Architectural History)

  • 김해경;유주은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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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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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8-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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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에 조영된 용산 총독관저와 그 정원에 관한 연구이다. 네오바로크풍의 건물과 정원이 계획되었는데, 이때 작성된 설계도면은 기존과는 달리 정원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용산 총독관저 정원설계도면의 해석과 신문기사 관련 문헌을 통한 분석으로 도출한 조경사적 가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용산 총독관저 정원이 근대시기에 조영된 최초의 서양식 정원으로서의 가능성이다. 건물과 함께 정원이 1909년에 완성되어 1911년 조영된 덕수궁 석조전 정원보다 시기적으로 앞선다. 둘째, 당시 근대건축과 함께 도입된 정원 양식과 정원 구성요소를 알 수 있다. 건물의 중심과 정원 진입부의 기념비가 연결된 중심축을 기준으로 정원구성요소가 배치되었는데, 시각적 중심이 되는 비스타(Vista)를 이루는 기념비, 바로크 정원에서 보이는 화단 형태, 축과 대칭으로 배치된 수공간, 화단 형태와 축을 강조한 배식 패턴이 이에 해당한다. 셋째, 서양정원문화의 전파이다. 서양식 문화인 가든파티 형식의 원유회가 열렸으며, 관저에서는 저녁시간대에 만찬과 의전 행사를 진행하였다. 넷째, 근대 조경도면으로의 사료적 가치이다. 도입 수종과 배식 패턴을 구분한 최초의 근대 조경도면으로 기존의 간략한 수목 심벌 또는 화단 형태의 표기에서 진일보한 표현이다. 부차적으로 지형 변형을 위한 현재 표고와 계획고, 수경요소의 배관, 상세 단면 등이 표기되어 있다. 향후 근대조경의 실질적인 분석을 위해서 새로운 사료의 발굴과 분석으로 근대조경에 대한 연구의 폭이 확대되길 바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