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Research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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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반도국립공원 내 새로운 미선나무 자생지의 식물학적 연구 (A Study on the Botany of New Natural Habitats of Abeliophyllum distichum Nakai in the Byeonsanbando National Park)

  • 오현경;소민석;노재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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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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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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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대상지인 미선나무 자생지는 2010년도에 새롭게 확인된 곳으로, 일반인의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 지역에 입지하고 있다. 이 자생지는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 청림 소재 미선나무 군락지(천연기념물 제370호)에 비해 개체수가 많고 생육상태가 양호한 편으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향후 천연기념물로써의 가치여부 및 모니터링자료로 활용하고자 식생 및 토양환경을 면밀히 조사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변산반도국립공원 내 새로운 미선나무 자생지의 식물상은 45과 82속 93종 4변종 3품종으로 총 100분류군이 확인되었다. 이중 IUCN 평가기준에 따른 희귀식물에는 미선나무(멸종위기종), 개족도리(약관심종), 이팝나무(약관심종)가 발견되며, 특산식물에는 고광나무, 미선나무, 병꽃나무, 청괴불나무 등 4분류군이 확인되었다. 본 미선나무 자생지는 부안호로 유입되는 백천유역의 북서사면 낮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풍화토인 전석지에서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미선나무 자생지는 밤나무군락 3개소, 느티나무군락 3개소, 졸참나무군락 1개소 등 7개 군집구조로 구분되었다. 이중 층위별 중요치는 밤나무군락에서 말채나무, 굴피나무, 은사시나무, 느티나무, 까마귀베개, 팽나무 순으로, 느티나무군락에서 팽나무, 갈참나무, 때죽나무, 굴피나무, 당단풍, 복자기 순으로 나타난 반면 졸참나무군락에서는 굴참나무, 밤나무, 산벚나무 순으로 분석되었다. 한편 미선나무의 중요치는 밤나무군락에서 6.6%, 느티나무군락에서 5.6% 그리고 졸참나무군락에서 5.1%로 분석되었다. 또한 7개의 조사구에서 토양시료를 채취하여 토양산도, 전기전도도, 유효인산, 유기물함량, 치환성양이온(칼륨, 칼슘, 마그네슘)을 분석한 결과, 조사구 3번인 느티나무군락에서 다른 조사구나 군락에 비해 토양의 화학적 특성이 상대적으로 높게 분석되었다.

발해 도성의 구조와 형성과정에 대한 고찰 (An Investigation into the Structure and Formation Process of the Capital of Balhae)

  • 김진광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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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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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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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바둑판식 좌우대칭구조로서 궁성 - 황성 - 외성의 3중성 구조를 지닌 상경성은 발해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가장 전범적인 도성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발해 도성제도의 변천과정은 발해 중앙행정체제의 완비로 발해정체제도 보편화과정의 단계적 표지라고 할 수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대상은 상경성으로, 그 구조는 중원의 수당장안성(隋唐長安城)과 그 형식면에서 많은 유사점을 지니고 있음에도, 상경천도 당시 수당장안성과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었을까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상경성 발굴결과와 선학들의 연구결과를 검토해 보면, 상경성은 수당장안성의 외적 구조만이 아니라 그 내면에 투영되어 있는 조영원리도 수용했음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당시 발해의 국력수준에서 현재와 같은 조영이 불가능함을 주장했던 단계별축조설은 궁성의 중심점인 2호 궁전과 3~5호 궁전 사이에서 조영시기의 차이를 발견할 만한 층위가 확인되지 않은 점, 상경성 전체가 동일한 영조척에 의해서 계획되었다는 점, 그리고 3조제를 수용했을 가능성이 농후한 점 등의 측면에서 좀 더 깊이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결국 상경성 조영은 치밀한 계획에 의한 문왕 치세 당시 국가의 운영원리가 반영되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따라서 상경성의 조영과 그 원리는 초축 당시 상당한 정도로 중원문화를 이해하고 있었음을 전제하는 것이며, 상경성이 지니는 위상과 구체적인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더 나아가 이것은 국가의 통치체제가 마련되고 사회전반으로 투영되었으며, 그가 구상하는 천하관(天下觀)이 발해국 전체로 확대되어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산만지역(牙山灣地域)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집자리의 시공적(時空的) 위치(位置) (Temporal-Spatial Location of Dwelling Site in Asan Bay in the Neolithic Age)

  • 구자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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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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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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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아산만지역에서 조사된 신석기시대 유적 중 집자리(마을)를 중심으로 구조와 특징을 살펴본 후, 이 지역 신석기시대 집자리(마을)의 시 공간적 위치와 의미에 대해 고찰해보았다. 아산만지역의 신석기시대 집자리는 방형이 주류를 이루며, 일부 장방형 집자리와 공존하는 예가 확인되고 있어 주목된다. 아산만지역의 신석기시대 집자리는 대부분 구릉지역에 위치하나, 세부적으로는 완만하고 낮은 구릉지역과 상대적으로 높게 형성된 구릉지역으로 구분된다. 먼저 후자 유적들은 차령산맥의 영향으로 해발고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아산 천안지역의 구릉지역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부분 해발고도 50~80m 정도에 해당한다. 반면 전자 유적들은 삽교천과 예당평야가 넓게 펼쳐진 당진과 예산지역을 중심으로 확인되고 있어 비교적 해발고도가 낮고 완만한 구릉지역(해발고도 20~50m)에 위치하고 있는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입지선택은 문화내적으로는 이들 집단의 생계경제 및 기술수준과 관련되지만, 외적으로는 이들 집단이 처한 자연환경(지형)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결과이다. 아산만지역의 신석기시대 집자리 유적은 방사성탄소연대측정값과 출토유물을 통해 보면, 동시기 유적으로 필자의 신석기시대 집자리 상대편년 중 II기(기원전 3,500~3,000년)에 해당한다. 이들 신석기시대 집자리(마을)는 경기(인천) 해안지역과 금강유역(충청내륙지역)의 신석기시대 집자리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이는 대규모 마을을 이루던 경기 해안지역 집단들과 금강유역(충청내륙지역)의 대표적인 '대천리식 집자리'의 확산 및 교류에 의해 동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결국 아산만지역은 기원전 3,5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두 유형의 집자리가 공존하는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당시의 환경(기후) 및 생태적 사회적 변화 등 여러 요인들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초보적인 농경의 도입에 따른 유적의 확산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제도의 우리나라 문화재 정책에의 수용과 발전방안에 대한 시론적 연구 (A Preliminary Study on Domestic Embracement and Development Plan Regarding UNESCO World Heritage Programme)

  • 강경환;김정동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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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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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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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유네스코 세계유산(World Heritage) 보호 제도는 인류 공동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 및 자연유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197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보호협약 채택에 따라 도입된 제도이다. 40여 년이 채 안된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890건의 세계유산이 등재된 가장 성공적인 유네스코 문화 분야 사업 중의 하나이다. 유네스코는 세계유산의 체계적 보호관리를 위하여 등재기준의 체계화, 보존관리계획의 중요성 강조, 모니터링의 제도화, 세계유산기금의 운영 등을 통하여 세계유산을 단순히 뛰어난 문화재의 목록화 작업의 수단이 아니라 보존계획 도구(preservation planning tool)로 활용함으로써 유산 보호관리 시스템의 체계화, 선진화에 기여하였고, 이러한 세계유산 정책은 각국의 문화재 보호제도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도 2009년 조선 왕릉이 등재됨으로써 총 9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되었다. 세계유산 등재가 우리 문화재의 독창성과 우수성의 홍보, 문화국가로서의 위상 증진 등에 기여하였지만 이제는 세계유산의 등재전략을 다시 점검하고 체계적인 보존관리 시스템의 확립을 위한 다양한 법적, 제도적 개선방안을 강구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 그동안 문화재보호법을 개정하여 세계유산의 등재 및 보호에 관한 근거규정을 마련하고,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세계유산 관리 전담기구를 설립하는 등 노력을 하였으나, 보다 근본적이고 거시적인 세계유산 정책 개선방향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1) 세계유산 보존관리 특별법 제정, 2) 각 지자체별로 세계유산 보호를 위한 조례 제정, 3) 문화재청과 지방자치단체의 세계유산 정책 및 관리기능 강화, 4) 세계유산 보호재원의 획기적 증대, 5) 세계유산 보존관리 계획 수립 의무화, 6) 세계유산 활용을 위한 지원 확대, 7) 세계유산 등재 내실화, 다양화, 8) 지자체 간 세계유산 관리정보 및 경험의 공유, 9) 세계유산 종합 아카이브 설치, 10) 시민협력과 주민참여 활성화, 11) 세계유산 보호를 위한 전문인력 배출 12) 지속가능한 세계유산 관광 활성화 등 세계유산 정책역량 강화를 위한 분야별 사업과 프로그램을 선정하고 이를 위한 체계적인 추진이 필요하다. 세계유산 정책이 국내적으로 어떻게 수용되고 앞으로의 변화와 발전방향에 대하여 분야별로 유형화하여 세계유산 정책이 보다 체계화, 과학화, 전문화할 수 있는 방안들을 제안하였다. 앞으로 세부 분야별로 보다 심도 있고, 전문적인 조사와 연구가 진전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 궁궐 입지 선정의 기준과 지형에 대한 연구 - 경복궁과 창덕궁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Topography and the Criteria of Choosing the Location-Allocation of Palaces - Focusing on Gyeongbokgung Palace and Changdeokgung Palace -)

  • 김규순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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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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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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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조선의 궁궐은 크게 법궁(法宮)과 이궁(離宮)으로 분류된다. 이와는 별개로 정궁(正宮)의 개념이 있다. 법궁은 정궁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지만, 이궁이 정궁으로 활용되는 것은 정치적인 상황에 따른다. 한양 최초의 궁궐은 경복궁이며 법궁으로 지어졌다. 경복궁의 자연 지형은 왕권을 상징하는 백악산을 배경으로 하였으며 사신사가 뚜렷하다. 궁궐의 입지도 왕의 위엄과 권위를 나타내도록 궁궐 밖에서 잘 보이는 장소를 선정하였으며, 백악산의 능선을 따라 하나의 축선을 기준으로 일직선상에 삼문삼조를 배치하여 왕권의 정통성과 위계질서와 통일성을 추구하였다. 이궁(離宮)은 왕의 요구나 왕실의 수요 또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건축되었으며, 왕실의 일상생활 공간으로서 복수의 축선에 의해서 독립적이고 다양한 공간으로 조성되었다. 법궁은 양(陽)의 지형을, 이궁은 음(陰)의 지형을 선택하였으므로 전각을 배치하는 준거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 궁궐의 조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왕기(王氣)였다. 궁궐 건설의 중요 요소는 풍수기맥과 금천이다. 풍수기맥은 왕기를 수용하는 통로였고, 금천은 왕기가 궁궐 밖으로 퍼져나가지 않게 하는 방법론이었다. 전형적인 풍수 지형을 선택한 법궁(法宮)인 경복궁의 경우 풍수 요소를 적재적소에 적용하고 있어서 풍수 원리를 충실하게 반영하였다. 반면에 이궁(離宮)은 비정형적이고 온전하지 않은 풍수 지형에 지어졌다. 풍수는 조선시대 지배계층의 자연관이며 지리관이었다. 이들의 지리관을 살펴봄으로써 전통문화 계승과 복원에 완성도를 높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조선후기 강원감영의 후원조영(造營)과 신선세계 (The Back Garden Structure and the Symbolism of Immortal World of Gangwon Provincial Office in Late Joseon Dynasty)

  • 이상균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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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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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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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사적 제439호인 강원감영은 1395년 원주에 처음 설치된 이래 1895년 23부제의 실시로 폐지되기까지 500년 동안 존속하였다. 강원감영은 관찰사의 겸목제(兼牧制) 시행으로 17세기 이후 본격적 영건이 시작되어 폐지 직전까지 약 50동 670칸 규모로 존속되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전각이 훼철되어 2005년 시설 일부를 수리 복원하였고, 현재는 (구)원주우체국 철거 후 감영 후원(後園)에 해당되는 시설을 복원 중에 있다. 강원감영 후원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원주수비대 운동장이 조성되면서 전부 없어졌다. 후원 조성을 위한 발굴조사 결과 연못 일부와 건물지가 확인되긴 했으나, 그 전모를 밝히기에는 유구의 교란과 훼손이 심하였다. 그러나 문헌과 그림 등을 통해 후원 전각들을 고찰해본 결과 연못 안에는 봉래각(蓬萊閣) 영주사(瀛洲?:관풍각) 채약오(採藥塢) 조오정(釣鰲亭) 홍교가 건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연못 밖에는 환선정(喚仙亭)과 방장대(方丈臺)가 건립되어 있었다. 후원 전각의 조성경위와 명칭을 살펴보면 모두 신선과 관련되어 있다. 연못 안에는 전설의 신선세계인 삼신산(三神山)을 의미하는 삼도(三島)를 만들고, 그 위에 전각을 지었다. 봉래각을 시작으로 후원에 건립되는 전각들에 영주 방장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머지 전각들에도 선가(仙家)의 이름을 부여했다. 후원뿐 아니라 그 주변의 전각들에도 신선과 관련된 이름을 붙였다. '봉래산'인 금강산을 관할했던 강원감영 후원에 이와 걸맞는 신선세계를 조영하였던 것이다. 강원도관찰사들은 여가에 수시로 후원에 나가 신선이 되어 탈속하는 풍류를 즐겼고, '봉래주인', 즉 신선세계의 주인이라 자처하였다. 강원감영은 금강산이 소재해 있던 강원도의 특징이 잘 반영된 신선세계가 구현되어 있었다는 매우 독특한 역사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19~20세기 갓끈 재질 조사: 호박, 대모, 플라스틱, 유리를 중심으로 (Investigation of the 19th~20th century Hat String Materials at the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Amber, Tortoise Shell, Plastics, Glass)

  • 오준석;이새롬;황민영;노수정;이영민;박성희;임성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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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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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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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갓끈은 조선시대 남성용 모자인 갓을 고정하는 실용적인 면과 함께 사용하는 재료의 다양화에 따라 신분을 나타내는 장식적인 구실도 하여, 금, 은, 옥, 마노, 호박, 명박, 산호, 청금석, 수정 등 다양한 고급 재료가 사용되어 왔다. 19세기 말 개항과 함께 근현대로 넘어오면서 갓끈의 재질이 어떻게 변천되었는지, 국립민속박물관 소장품 중 19~20세기 갓끈에 대해 재질을 조사하였다. 갓끈의 재질을 분석한 결과, 전통적인 재질로는 호박, 대모, 나무, 대나무가 사용되었으며, 상아, 유리(소다유리, 납유리, 알칼리혼합유리)와 19세기 이후 발명된 신소재인 플라스틱(셀룰로오스 나이트레이트, 페놀-포름알데히드, 폴리스티렌, 아크릴)이 갓끈 장식에 새롭게 사용되었다. 갓끈의 중앙 장식, 구슬, 대롱에 사용된 재료는 대모가 가장 많이 차지하며, 대나무, 나무, 호박 순으로 전통 재료의 사용 빈도가 높았다. 대나무는 대롱으로 사용하여 다른 재질의 중앙 장식과 구슬을 조합한 갓끈이 많아, 흥선대원군 집정시 의관과 문물의 간소화시책에 따른 죽영이 유행을 보여주고 있다. 호박은 갓끈의 중앙 장식과 구슬에 사용되었으며, 산지는 한국에서 발견되고 있는 호박 유물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발틱 호박으로 동정되었다. 갓끈에 사용된 유리는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국에서 출토되거나 전승되어온 소다유리나 알칼리혼합유리도 사용되었지만, 납유리에서는 Na2O가 검출되어 한국에서 발견되는 납유리 성분에서 벗어난 특징을 보여주어, 개항 후 해외에서 들어온 새로운 공예용 유리로 추정된다. 셀룰로오스 나이트레이트나 페놀-포름알데히드 등과 같은 플라스틱은 서구에서와 마찬가지로 전통재료인 대모, 호박, 산호 등을 대체하는 새로운 합성재료로써 도입되어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셀룰로오스 나이트레이트는 열화에 의해 균열과 미세 균열, 부서짐과 황변이 관찰되고 있었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19~20세기 갓끈 재질에 대한 조사를 통해, 개항이후 전통적인 재료의 사용과 함께, 대모나 호박과 같은 천연재료를 대체하기 위해 유리와 플라스틱과 같은 신소재의 도입이 확인되었다.

조선전기 관경십육관변상도에 보이는 고려 전통의 계승과 변용 -정토인식과 왕생관의 변화를 통해- (Study on the Inheritance and Transformation of the Goryeo Tradition in the Illustrations of the Sixteen Contemplations of the Amitayurdhyana Sutra of the Early Joseon Dynasty -with the Focus on the Concept of Rebirth in the Pure Land-)

  • 이승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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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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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6-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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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조선전기 제작된 관경변상도는 전환기 조선사회의 시대상 뿐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정토인식이 화면의 구성과 도상에 잘 투영되어 미술사적, 문화사적 가치가 높다. 조선 15세기 관경변상도는 모두 3점으로 이중 1435년 <지온지 관경변상도>와 1465년 <지온인 관경변상도>는 왕실인물과 고위승려의 발원으로 조성되었다. 이 두 작품은 1323년 <지온인 관경변상도>의 구성과 도상을 계승하면서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고려후기에 융성했던 천태종(天台宗)의 정토신앙경향을 계승하고 있다. 이는 고려 왕실과 귀족사회에서 선호했던 자력적(自力的)인 정토신앙의 경향이 조선의 왕실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천태사상의 영향을 받은 정토신앙은 조선전기까지 계승되어 천태종이 불교의 통폐합과정에서 선종에 흡수되기 전까지 유지되었다. 천태정토신앙의 경향은 이 두 작품이 각각 천태승 행호와 행호를 진불(眞佛)로 모셨던 왕실의 어른 효령대군이 발원하였다는 사실로도 뒷받침된다. 한편 유교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사회가 안정화되어 감에 따라 관경변상도를 포함한 정토불화들은 점차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교학적이고 자력적인 정토인식보다는 아미타불의 힘에 의해 구원받고자 했던 타력적인 정토신앙이 확산되는 시기와 맞물린다. 변화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도상이 용선접인도상이다. 자력적인 정토왕생을 좀더 가치있다고 여겼던 시기에 제작된 <묘만지 미륵하생경변상도>의 용선접인 도상에서는 부처님의 인도를 받고 있지 않다. 이에 비해 조선전기의 용선접인 도상에서는 아미타부처님이 관음, 지장, 혹은 인로왕보살등과 함께 왕생자를 이끌고 배를 타고 있는 형상으로 묘사된다. 이는 아미타불의 원력으로 극락왕생한다는 타력왕생관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조선전기 제작된 3점의 관경변상도는 유교주의 사회에서 타력적인 신앙을 선호하는 정토신앙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불화로서 매우 의미가 크다.

중국 하북성 마을제 연구 - 하북성조현범장이월이룡패회중룡신적여인(河北省趙縣范庄二月二龍牌會中龍神的與人) - (A Study of Local Festival for the China Hebeisheng)

  • 박광준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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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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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47-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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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China is a country with large agricultural areas and subject to frequent calamities. Drought is the top of them. It has been a key problem for development of agriculture in the country. In the long struggle against drought, Chinese have accumulated many rational and irrational experiences. The Dragon Kings Belief, which is popular in North China and discussed in a thesis, is one of their irrational experiences. The belief was passed together with Buddhism from India to China in the Tang Dynasty. After it settled down, it was incorporated with the local five dragons belief and a set of beliefs in dragon kings came into existence. The emergence of the dragon kings belief ended the history that the title of rain got was not clear in China and Dragon kings finally got the status. Irrigation is the lifeblood of agriculture in China. In a Chinese mind, Dragon kings are the most important gods who take charge of rain and thus offer the lifeblood. In understanding the nature and characteristics of Chinese traditional culture, it is important for us to make clear the origin and evolution of the belief, find out its nature, function and operation. In the every year beginning of February of the Fanzhuang calendar in the people of Hebeisheng Zhaoxian, would all hold a festival to offer sacrifices to the $^{{\circ}TM}^{\prime}longpai$. Longpai was regarded as the core of the temple fair, thus the native sons came to call this festival; "longpaihui". In this region the'Fanzhuang longpaihui'developed into a well knownand grand temple fair. It was able to attract numerous pilgrims with its special magic power, occupying a place in $China^{{\circ}TM}$ 'eryueer'festival with festive dragon activities. The dragon is a common totem among Chinese nationals. The belief worship of the dragon dates from the start time of primitive societies. Dragon oneself the ancients worship's thunder lightning. In the worship of the great universe, at first afterwards this belief with the tribe's totem worships to combine to become the animal spirit. In ancient myths legends, along with folk religion and beliefs all hold a very important position. The longpaihui is a temple fair without a temple; this characteristic is a distinction between longpaihui and other temple fairs. As for longpaihui must of the early historical records are unclear. The originator of a huitou system has a kind of organized form of the special features rather, originator of a huitou not fix constant, everything follows voluntarily principle, can become member with the freedom, also can back at any time the meeting. There is a longpaihui for 'dangjiaren', is total representative director in the originator of a huitou will. 'banghui' scope particularly for extensive, come apparently every kind of buildup that help can return into the banghui, where is the person of this village or outside village of, the general cent in banghui work is clear and definite, for longpaihui would various businesses open smoothly the exhibition provides to guarantees powerfully. Fanzhuang longpaihui from the beginning of February to beginning six proceed six days totally. The longpai is used as the ancestry absolute being to exsits with the community absolute being at the same time in fanzhuang first took civil faith, in reality is a kind of method to support social machine in native folks realize together that local community that important function, it provided a space, a kind of a view to take with a relation, rising contact, communication, solidify the community contents small village, formation with fanzhuang. The fanzhuang is used as supplies for gathering town, by luck too is this local community trade exchanges center at the same time therefore can say the faith of the longpai, in addition to its people's custom, religious meaning, still have got the important and social function. Moreover matter worthy of mentioning, Longpai would in organize process, from prepare and plan the producing of meeting every kind of meeting a longpeng of the matter do, all letting person feeling is to adjust the popular support of, get the mass approbation with positive participate. Apart from the originator of a huitou excluding, those although not originator of a huitou, however enthusiasm participate the banghui of its business, also is too much for the number.

백제 지하저장시설(地下貯藏施設)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검토 (A Study on the Structure and Function of the Underground Storage Facility in Baekje)

  • 신종국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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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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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9-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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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최근 백제유적에 대한 발굴조사에서는 토광형태 또는 목재나 석재를 이용하여 축조한 지하식의 저장시설이 발견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본고는 이러한 백제시대 지하저장시설을 형태 및 축조방법별로 복주머니형(플라스크형), 목곽형, 석곽형 시설로 구분하고 각각의 구조와 기능에 대해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복주머니형 저장공은 백제 한성시기~사비시기의 금강 및 한강유역의 많은 유적에서 현재까지 600기 이상 조사된 백제의 가장 대표적인 지하저장시설로 3~7세기대 한강유역과 금강유역의 백제의 독특한 저장문화를 구성하는 유구로서 그 구조나 중국의 예를 통해 볼 때 곡물의 장기저장을 위한 시설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 외에도 토기의 저장 등 다양한 물품이 저장되었다고 보인다. 목곽형과 석곽형의 저장시설은 사비시기의 유적에서 주로 확인되고 있어 6세기 이후 복주머니형 저장공의 축조가 줄어들면서 그 기능을 일부 대체했을 것으로 보이며, 특히 그 축조방법이나 구조상 공력이 많이 소모되는 것으로 도성이나 성곽유적에서 공적인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목곽형 저장시설은 평면 장방형인 것과 방형인 것, 축조방식에 따라 가구식(架構式)과 주혈식(柱穴式)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는 축조하고자 하는 지점의 지형이나 지질에 의해 결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목곽형 저장시설은 관북리유적과 월평동유적의 예를 통해 볼 때 과일과 같은 식품류의 저장과 군사주둔지에서의 중요물품 저장 등 필요에 따라 다양한 품목의 물건이 저장된 것으로 보인다. 지하 저장시설의 기능적 특성상 식품류의 장기저장과 일본의 예를 통해 볼 때 화재시 중요물품의 안전한 보관과 관련하여 목곽이나 석곽의 저장시설이 채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