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Percival Lo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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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트남자료관에 소장된 로웰의 조선관련 사진 아카이브에 대한 고찰 (A Study of Lowerll's Photographic Materials of Chosön Archived in Putnam Collection Center)

  • 정영진
    • 기록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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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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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9-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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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미국인 퍼시발 로웰은 최초로 사진기를 가지고 1883년에 조선에 정식으로 입국한 외국인으로서 고종의 사진을 비롯한 80여장의 사진자료를 남겼다. 이 사진자료들은 모두가 한국의 사진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귀중한 역사적 정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연구가 수행된 적이 없다. 이 사진에 관련된 자료들은 대부분 미국에 소장되어 있는데, 사진과 관련된 정보는 많은 오류와 함께 웹사이트에 게시되고 있기 때문에 일부 책자와 연구자들에 의해서 오 인용되고 있다. 이에 필자는 로웰이 조선에서 촬영한 사진을 분석하여 그 내용을 파악하고, 사진자료의 대부분을 소장하고 있는 미국의 퍼트남자료관의 로웰의 조선관련 사진 아카이브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오류에 대한 수정안을 제시했다.

미국 보스턴미술관 소재 로웰의 조선 사진 설명문의 오류와 정정 방안 (Explanatory Correction Notes for Lowell's Chosön Photographs in the Boston Museum of Fine Art)

  • 정영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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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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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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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퍼시발 로웰이 1883년-1884년에 조선에서 촬영한 사진들은 최초의 고종의 사진을 비롯하여 모두가 서울에서 촬영된 최초이자 유일한 사진들이기 때문에 19세기 말의 조선에 대한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이용될 수 있다. 이러한 로웰의 사진 자료들 중 인화된 사진 61장은 미국의 보스턴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 간단한 목록은 한국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서 정리된 바도 있다. 이 사진들은 보스턴미술관의 웹페이지를 통해서 게시되고 있는데 사진 설명문들에는 적지 않은 문제점들이 있다. 이 사진 설명문들은 로웰의 사진 설명과 로웰의 저서의 내용 그리고 아키비스트들의 한국 관련 지식에 근거하여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오·탈자와 함께 사진의 내용과 상응하지 않는 설명도 포함하고 있는 등 문제가 적지 않음이 확인되었다. 로웰의 사진 설명문에 근거했을 사진 설명문은 4번 이상 개정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의 사진 설명문은 로웰의 설명문과 아키비스트의 설명문이 구별되지 않는 방식으로 게시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로웰의 사진들은 지난 130여 년 동안 조선의 옛 모습에 대한 여러 연구와 책자에서 잘못된 설명과 함께 인용·수록되어왔다. 공공기관의 온라인 아카이브를 이용하는 연구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현시점에서, 사료로 이용되는 해외 문화재의 오·인용을 방지하고자 필자는 로웰의 저서와 문서 및 외교 사료 등을 분석하여 로웰의 사진이 품고 있는 내용과 사진의 촬영지 및 촬영 대상을 비정하여 보스턴미술관이 게시하고 있는 사진 설명문의 정정 및 추가 설명을 제시했다. 로웰이 조선에서 촬영한 80여장의 사진 자료들은 해상도가 높고 풍부한 내용을 품고 있기 때문에 사료로서의 가치와 활용성이 매우 높은 것들이지만 모두가 미국에 소장되어 있고 관리 또한 매우 부실한 상태이다. 그러므로 인화된 사진과 유리건판을 고해상도 디지털 스캔 및 대형 사진 인화 작업 등을 수행하여 그 결과물들을 국내에 소장할 것을 제안한다.

원각사(圓覺寺)13층탑(層塔)에 대한 근대적 인식과 오해 (The Modern Understanding and Misunderstanding about the Thirteen-story Stone Pagoda of Wongaksa Temple)

  • 남동신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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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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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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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본고는 원각사탑에 대한 지난 백 년간의 근대 학설사를 층수에 초점을 맞추어 비판적으로 성찰하였다. 먼저 제II장에서는 근대 개항기에 조선을 여행한 서양인들이 종래 한성의 '비미(非美)'내지는 흉물로 간주되던 원각사탑을 한성의 '기관(奇觀)'내지 '위관(偉觀)'으로 재발견하는 역동적인 과정을 추적하였다. 이들은 불탑에 관한 예비지식이 거의 없는 서양 출신이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원각사탑에 대하여 객관적인 견문기를 남길 수 있었는바, 그들이 접촉한 조선 지식인들을 통하여 대체로 13층설을 받아들였다. 이어서 제III장에서는 대한제국 선포 이후 일인 관변학자들이 원각사탑을 본격적으로 학술 조사하고, 일제식민기 동안 조선총독부가 원각사탑을 문화재로서 관리하는 과정 및 그 문제점을 언급하였다. 특히 지난 100여 년 동안 원각사탑 층수 문제에 관하여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세키노 타다시(關野 貞)의 학설이 10층설에서 13층설로, 다시 다층설로 변하는 문제를 집중 조명하였다. 마지막으로 제IV장에서는 해방 이후부터 1962년까지 원각사탑에 대한 인식이 다층설에서 10층설로 바뀐 경과를 정리하되, 선행하는 일제식민기 조선 지식인들의 인식이 13층설 일변도였음을 특기해두었다. 다만 1962년 이후 지금까지 원각사탑에 관련하여 중요한 연구성과가 적지않이 발표되었지만, 층수에 관한 한 대부분 1962년에 확정된 10층설을 전제로 하였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따로 정리하지 않았다. 학설사 검토의 결과, 원각사탑이 13층탑으로서 건립되었다는 근거가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일제시기는 물론 해방 이후 지금까지 백 년이 넘도록 13층설은 단 한 번도 공인받지 못하였으며, 학계에서 층수 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도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원각사탑과 경천사탑이 10층탑이라는 현재의 통설은, 백 년 전에 세키노 타다시(關野 貞)가 최초로 주창하였다. 세키노는 원각사에 남아있는 「원각사비」가 글자를 거의 판독할 수 없을 정도로 마멸이 심하였기 때문에 원각사탑의 현상만 건축학의 관점에서 고찰하고 10층탑이라고 주장하였다. 공교롭게도 그 직후에 발견된 『속동문선』에 실린 「원각사비」에서 '탑 13층을 세웠다.'라는 구절이 확인되었다. 또한 15세기 후반 왕명으로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한 편찬자들도 원각사탑의 모범인 경천사탑 또한 '13층탑'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원각사탑 건립 직후 왕명으로 건립된 「원각사비」는 세키노의 10층설이 전제에 오류가 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세키노는, '3층의 기단 위에 탑신 10층이 올려져 있어서, 세상 사람들이 13층탑이라고 불렀다.'라고 하였는데, 「원각사비」는 세조가 처음부터 13층탑으로서 원각사탑을 건립하였음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다만 이례적이게도 13층탑을 3층의 기단 위에 탑신 10층을 올린 형태로 조성하였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세조는 왜 13층탑을 세웠으며, 왜 그것을 3층의 기단 위에 탑신 10층이라는 이례적인 형태로 구현하였는가? 세조가 원각사13층탑을 건립한 의도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먼저 원각사탑의 정체를 파악해야 하는바, 그 첫 단추는 원래의 명칭을 회복하는 데 있다. 필자는 전제의 오류 위에 구축된 세키노의 10층설-나아가 절충적인 다층설-은 이제 폐기하고, 「원각사비」에서 말하는 13층설을 복원할 것을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