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Megalithic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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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숲 구성요소인 돌탑의 기원 유래 고찰 - 안동 서지리 성황당 돌탑을 중심으로 - (Study on the Origin of Stone Tower as a Component of Dangsan Forest - Focus on Village Shrine at Seoji-ri, Andong -)

  • 최재웅;김동엽;권진량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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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8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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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8-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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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 논문의 목적은 삼첩석, 이첩석 및 돌탑으로 이루어져 있는 '안동 서지리 성황당'을 사례로 하여 당산숲의 구성요소인 돌탑의 조형 양식에 대한 유래와 특징을 고찰한 것이다. 세개의 돌탑은 옛당산숲으로 보이는 마을 안쪽의 개천변 소나무 동산 정상에 있다. 세 돌은 일직선상으로 9m 거리에 걸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을 바라보며 왼쪽에 삼첩석, 가운데에 이첩석, 오른쪽에 돌탑이 있다. 삼첩석의 제일 아래 쪽은 길이 2.5m, 폭 1.8m, 높이 1.3m이고, 이첩석의 아래 자연석은 길이 1.3m, 폭 1.5m, 높이 0.9m이다. 돌탑은 지름 3m의 원추형에 높이 1.8m로서 작은 돌을 쌓은 것인데, 일명 '모관석'은 현재 이첩석의 맨 위에 있던 것이 떨어져 나간 것으로서, 현재의 이첩석은 원래 삼첩석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 까닭은 우리나라 고대 조형 방식의 원리인 삼재사상(三才思想)에 비추어 볼 때, 짝수로 이루어진 조형물은 예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안동 서지리 성황당'이 청동기시대의 거석문화와 후대의 민간신앙이 이어져 오는 과정을 보여 주는 예가 되는 것과 같이, 시기적으로 볼 때 돌탑은 청동기시대의 거대석인 왼쪽의 삼첩석을 기원으로 하고, 가운데에 위치한 좀 더 작은 크기의 삼첩석(현재는 이첩석)을 거쳐, 후대에 오른편에 있는 작은 크기의 보통 돌탑으로 그 조형 양식이 변화되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안동 서지리 성황당'은 돌탑의 기원이 청동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귀중한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장소성 강화를 위한 자웅암 관광스토리텔링 방안 연구 (A Study on the Zhaungam Tourism Storytelling Method for Enhance the Placeness)

  • 이경숙;권기창
    • 지역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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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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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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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오늘날 성은 흥미의 도구로 전락되어 각종 성범죄가 끊이지 않고, 저출산 문제로 인구 절벽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우리선조의 삶의 방식이었던 기자신앙을 새로운 인식으로 생명탄생의 신비를 간직한 성스러운 문화로 정착시켜야 한다. 이에 따라 자웅암 일원을 재미와 흥미를 주는 해학적인 장소가 아니라 생명탄생의 고귀함과 무병장수, 부귀영화를 기원하는 성스러운 장소로 재탄생 시키고자 하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전통문화의 현재적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자연사랑, 생명존중의 정신을 기반으로 소원, 만남, 치유, 사랑의 정신가치를 기획방향으로 정하고 단동 10훈 중 도리도리(道理道理)를 핵심 테마로 선정하여 "도리도리(道理道理) 시크릿 가든"이라는 명칭을 부여하여 관광스토리텔링 하였다. 문화콘텐츠는 지역의 마케팅 수단이 되고, 관광객이 지역을 방문하게 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이런 맥락에서 "도리도리(道理道理) 시크릿 가든"의 조성은 안동의 브랜드가치를 높이고 새로운 명소가 되기에 충분한 의미와 있음을 알 수 있어 지역의 상징공간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관광객을 유입하는 고부가가치산업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본 연구는 현재까지도 자웅암과 자궁암에 사람들이 찾아와 자식을 낳기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자웅암 일원을 생명탄생의 고귀함과 무병장수와 부귀영화를 기원하는 성스러운 장소로 재탄생 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한국 청동기시대 '사회' 고고학의 문제 (The Problems of the Archaeological Approaches to the Bronze Age Society)

  • 이성주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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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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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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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이 논문은 한반도 청동기시대 '사회' 고고학을 어떠한 관점과 방법으로 연구할 것인가를 검토해 보고자 작성되었다. 먼저 한국의 '사회' 고고학 접근을 연구사적으로 검토하였는데 1970년대까지는 민족사의 흐름과 같이 모호한 실체와 과정으로 사회진화의 단계를 서술하는데 그쳤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념에서 벗어나 단위사회의 규모와 지배권력의 성격 등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였고, 고고학 자료의 위계와 분포를 분석하여 사회단위와 그 조직을 복원해 보려는 노력은 1990년대 들어와서야 가능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영미와 일본 고고학에서 이루어진 사회에 대한 접근의 틀을 참고하여 청동기시대 취락을 분석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년 전의 일이다. 다음으로, 어떤 고고학적 실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정착된 'OO유형' 이라는 개념과 종족집단의 존재가 전제된 문화단위에 대한 관념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청동기시대 고고학자들은 한편으로 취락 내부와 취락 간의 유물분포를 분석하여 사회적인 특성들은 정의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OO유형' 이라는 문화적 실체의 생성과 확장, 및 소멸에 관한 논의를 하고 있는데 이것은 생산적인 '사회' 고고학 연구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보았다. 비파형동검과 같이 광역으로 분포하는 물질문화의 요소들을 고대 종족명과 관련시키는 연구관점에 대해 비판하였다. 이와 같이 광역으로 분포하는 물질문화의 존재는 지역집단들 사이에 형성된 모종의 관계망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으며 나아가 이러한 관계망을 통해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의 성격과 함께 그 물질문화의 상징적 의미가 지역에 따라 어떻게 변용되는지에 대해서 검토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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