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Main hall of Royal Palace(正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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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宮闕) 정전(正殿)에서 기둥과 공포의 구조적(構造的) 비례특성(比例特性)에 관한 연구(硏究) (A study on the Characteristics of Structural Proportion of Pillar and 'Kong-po' in 'Main Hall of Royal Palace(正殿)' of the Royal Palace)

  • 박언곤;최효식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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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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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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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4 royal palaces are currently remained from capital city (Seoul) of 'Cho-Sun(朝鮮)' period. In these palaces, 'Main hall of Royal Palace(正殿)' is the center of the Royal Palaces. The 'Main hall of Royal Palace' of the Royal Palace was the best building of that time. Therefore there were many studies about the 'Main hall of Royal Palace'. But these studies were individual studies of these 'Main hall of Royal Palace'. Therefore, this study is to analyze and compare 4 'Main hall of Royal Palace' of the Royal palaces. It is to study the proportion regarding the Diameter of the pillar, the Height, the pillar and pillar Interval's Distance, and the arrangement of 'Kong-Po(bracket sets)'. With these studies, it is to prove that the 'Main hall of Royal Palace' is the building which high construction technique of this time is expressed. Result of this study is as followings; First, the proportion of pillar height(H) to its diameter(D) average from H=8.0 to 8.5D. Only the Myeong-Jeong-Jeon omitted the 'Go-Ju(高柱)' in the 'Toi-Kan (退間)' to place Ea-Jwa(御座). Second, Second, the proportion of diameter of the pillar of 'Eoi-Bu-Pyeong-Ju(外部平柱)' and 'Nae-Jin-Go-Ju(內陣高柱)' average D1(Diameter of 'Eoi-Bu-Pyeong-Ju') =0.91D2 (Diameter of 'Nae-Jin-Go-Ju'). In regards to the height, the single floor 'Main hall of Royal Palace' and double floor 'Main hall of Royal Palace' seems to be different. The height proportion of the double floor 'Main hall of royal palace' is H1(Height of 'Eoi-Bu-Pyeong-Ju')=0.34H2(Height of 'Nae-Jin-Go-Ju') and single floor 'Main hall of Royal Palace' has a proportion of H1=0.62H2. Third, in Geun-Jeong-Jeon, with the proportion of height and diameter of the pillar, interval's distance between pillars and diameter, the pillar interval distance and height, of 'Ea-kan(御間)' from the 'Toi-Kan' is different from 'Main hall of Royal Palace'. This is because the structure of 'Toi-Kan' of Geun-Jeong-Jeon is not stable. In order to reinforce this, 'Gui-Go-Ju(隅高柱)' of the Geun-Jeong-Jeon jut out $4{\sim}7%$ more compared to In-Jeong-Jeon. Fourth, when comparing double floor 'Main hall of royal palace' of Geun-Jeong-Jeon and In-Jeong-Jeon, based on distance of 'Eoi-Bu-Pyeong-Ju' and 'Nae-Jin-Go-Ju' of lower level, the 'Sang-Bu-Pyeong-Ju(上部平柱)' of Geun-Jeong-Jeon jut out $4{\sim}7%$ more compared to the In-Jeong-Jeon and also It becomes thicker. Fifth, the arrangement of 'Kong-Po' on the front row of 'Gan(間)' had to do with the change of side 'Gan'. Even though the Geun-Jeong-Jeon and the In-Jeong-Jeon were double floors, the arrangement of the 'Kong-Po' is different because the number of side bay is differ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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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궁궐 정전과 편전 지의(地衣)의 구조와 배치 방식 (The Structure and the Layout of Ji-ui on the Main and the Subsidiary Hall of the Royal Palace in the Late Joseon Dynasty)

  • 이종서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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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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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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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e floor of the royal palace was covered with grass mat called ji-ui. Ji-ui was produced by connecting several mats named seokja(席子) and trimming the edge with narrow fabric named seon(縇). The standard manufacturing technique was to connect the shorter sides of the seokjas by overstitching them. A room was covered with either single or multiple ji-uis, depending on the case. In the case of the main and the subsidiary halls (jeong-jeon and pyeon-jeon, respectively) where the king conducted official meetings with the civil servants, multiple ji-uis were laid out to signify the division of space, which reflected the ceremonial aspects of the governing acts. The most essential division was the distinction of yeong-wae(楹外) and yeong-nae(楹內), with the jeon-goju (a tall frontal pillar inside the hall) functioning as the breakpoint. Jeong-jeon was divided into four spaces each covered with one ji-ui: yeong-nae, yeong-wae, and the left and the right sides of the royal seat named jwa-tap(座榻). Pyeon-jeon was covered with three ji-uis that divided the hall into three spaces: yeong-nae, yeong-wae, and hu-twae(後退) (the hind section) where the royal seat was placed on.

조선후기 궁궐의 전각(殿閣) 월대(月臺)와 의례 - <동궐도>와 <서궐도안>을 대상으로 - (The Palaces Weoldae(月臺) structure, in the latter half period of Joseon, and related rituals)

  • 이현진;손신영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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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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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79-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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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조선시대 궁궐에 조성되어 있는 월대는 정전(正殿)과 같은 위격이 높은 건물 앞에 놓인 평평한 대(臺)이다. 법전이나 국가전례서에는 월대의 정의나 조성관련 규정이 수록되지 않았다. 조선후기 대표적인 궁궐 그림인 <동궐도(東闕圖)>와 <서궐도안(西闕圖案)>에는 외전(外殿)의 정전(正殿) 편전(便殿) 정침(正寢) 침전(寢殿) 동궁(東宮) 등에 월대가 조성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월대가 마련되어 있는 이 건물들은 왕실 구성원 중 국왕이나 왕후 세자 세손 등과 관련 있다. 이들은 법전에 규정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 법의 규정 밖에 있는 왕실의 사람들이다. 살아 있을 때 그곳에서 정무를 보거나 거처하고, 죽은 뒤에는 신주(神主)를 봉안하는 혼전(魂殿) 또는 어진(御眞)을 봉안하는 진전(眞殿)으로 활용된 공간이다. 조선은 신분제적 질서가 엄격한 유교 국가였고, 이는 궁궐의 전각에도 적용되었다. <동궐도>와 <서궐도안>에 월대가 묘사된 전각들은 월대의 존재만으로도 여타 전각과는 위상이 달랐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월대가 있는 전각 중 의례를 거행한 곳은 외전의 정전이 대부분이다. 외전의 정전에서 국왕이 직접 맹세를 한다거나, 제사를 지낼 때 향(香)을 직접 전한다거나, 명나라 세 황제를 위해 조성한 황단(皇壇)에서 망배례(望拜禮)를 올리는 등의 의례를 거행하였다. 다음은 월대와 거기에서 행한 의례를 통해 본 양궐(兩闕)의 관계이다. 조선전기에는 경복궁과 동궐(東闕)을 양궐로 보았는데, 임진왜란 이후로 경복궁이 불타면서 동궐 및 서궐(西闕)이 양궐을 형성하면서 법궁(法宮)이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바뀌었다. 일반적으로 국왕이 다른 궁궐로 옮겨가면 혼전의 신주나 진전의 어진도 함께 가기 마련이다. 따라서 옮겨간 궁궐에 있는 전각을 혼전이나 진전으로 삼아 의례를 행하였다. 그런데 영조의 경우는 경희궁으로 옮겨간 뒤에도 창덕궁에 있는 진전에 배알(拜謁)하였다. 경희궁으로 옮겨갔다고 해서 경희궁 중심으로 궁궐을 운영한 것이 아니라 창덕궁 창경궁과 유기적으로 궁궐을 운영하였다.

궁중 의례용 일월오봉도 병풍의 장황에 관한 고찰 - 초록색 회장 비단과 금박 장식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Methods of Mounting the Five Peaks Screen - With the focus on green bordering silk and gilt ornamentation)

  • 박윤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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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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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3-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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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조선 왕실에서는 영원불멸한 왕의 존재와 권위를 나타내고자 일월오봉도로 병풍을 만들어 왕의 공간마다 설치하였다. 일월오봉도는 궁궐의 가장 대표적인 의장물로 알려져 있지만, 다양한 형태로 제작했던 병풍의 실체에 대해서는 제대로 연구된 바가 없다. 이것은 현재 전하는 유물이 기록과 일치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본 글에서는 의궤를 중심으로, 왕실 의례에 사용했던 일월오봉도 병풍의 다양한 생김새와 장황 재료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일월오봉도 병풍의 원형과 변형 과정까지 함께 고찰하였다. 의례용으로 제작한 왕실의 병풍들은 예식과 법도에 따라 엄격하게 제작되었고, 각각이 갖는 위상에 따라 장황에 사용하는 재료 또한 차등을 두었다. 궁궐의 정전(正殿)과 빈전(殯殿), 혼전(魂殿), 진전(眞殿)에 설치했던 오봉병과 궁중연향을 위해 제작했던 오봉병은 생김새와 크기는 모두 다르지만, 병풍을 꾸미는 비단 회장(回粧)은 일치하였다. 대체로 초록색 비단으로 가장자리를 두르고, 그 위에 꽃문양의 금박을 장식하였다. 쪽풀로 염색한 초록색 비단은 원료를 수입해야 하는 값비싼 붉은 색 비단을 대신하였으며, 영조22년 '문단(紋緞) 금지 조치' 이후에는 무늬없는 초록색 평직 비단을 사용했다. 그나마 비단에 올린 금박 첩금으로 인해 사대부가의 병풍과 차별되는 궁중 의례용 병풍의 장식미를 더하였다. 일제강점기 동안 방치되었던 조선왕실의 병풍들은 1960년대부터 유물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보존처리가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장황이 개장(改粧)되었고, 원형의 모습을 많이 잃게 되었다. 이것은 전통의 장황 문화가 단절된 것이 가장 주된 원인이었다. 과거에는 고증의 부족으로 문화재를 온전하게 보존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면, 지금부터는 각 분야에 축적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고증을 철저히 하고, 문화재의 수리 이력에 대한 정보까지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관리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