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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고려대장경 보각판(補刻板) 연구 -『대반야바라밀다경』 보각판을 중심으로- (Supplementary Woodblocks of the Tripitaka Koreana at Haeinsa Temple: Focus on Supplementary Woodblocks of the Maha Prajnaparamita Sutra)

  • 신은제;박혜인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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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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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4-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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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해인사 소장 고려대장경판은 현전하는 유일한 완질의 한역 대장경판이다. 국보이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고려대장경판은 총 81,352판으로 알려져 있다. 이 경판 가운데에는 동일 경판이 두 개 이상 존재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중복판'이라 명명하기도 했다. 두 개 이상의 경판이 존재하게 된 원인은 후대 보각판(補刻版)이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보각판은 총 118판으로 전체 경판의 0.14%에 불과하다. 따라서 고려대장경판은 기본적으로 원판이 현재까지 온전히 잘 보전되어 오고 있다. 그럼에도 보각판에 대한 연구는 고려대장경판의 보존과 관리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보각판은 인경 과정에서 마모되기도 했고 때때로 인경이 불가능할 정도의 손상이 있었기 때문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보각은 크게 일제강점기와 조선 시기에 이루어졌다. 일제강점기 보각판의 특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정리된 바 있으나 조선 시기 보각판의 특징과 제작 시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본 연구는 고려대장경판 보각판의 특징과 제작 시기를 분석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전체 대장경 가운데 보각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경전은 『대반야바라밀다경』이다. 『대반야바라밀다경』의 보각판은 총 76판으로 전체 보각판 118판의 64.4%를 차지하므로 『대반야바라밀다경』의 인경본을 잘 분석하면 고려대장경판 보각의 추이와 그 시대적 특징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판단된다. 『대반야바라밀다경』 보각판 76판을 분석한 결과, 일제강점기인 1915년(12판)과 1937년(11판)에 보각한 23판을 제외하면 53판은 조선시대 보각판이다. 조선시대 보각은 세 시기에 걸쳐 이루어졌다. 첫 번째 시기는 무진년(1448년, 세종 30) 경으로 총 14판이 보각되었다. 이를 무진년 보각판이라 명명했다. 무진년 보각판은 상하 광곽 단면의 길이가 21cm 내외로 초각판보다 1cm가량 짧으며 광곽 외부에 음각으로 각수명이 기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조맹부체로 제작된 경판이 있었으며, 옅은 계선이 확인되고, 판면부 바닥이 거칠게 마감되었다. 이 형식의 경판 가운데 '무진년경각해지(戊辰年更刻海志)'라는 각수명이 확인되었고 또 다른 각수 가운데 한 명인 성견(性見)이 1446년에 활동하였으므로 무진년은 1448년(세종 30)으로 편년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두 번째 시기는 1865년 인경 직후이다. 1865년 남호(南湖) 영기(永奇)와 해명(海冥) 장웅(壯雄)은 고려대장경 두 부를 인경하였는데 이때는 손상된 경판이 다수 확인되어 인경하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 이는 현재 전하는 월정사 인경본의 결락장에서 잘 확인된다. 이에 인경 직후 일부 경판의 보각이 실시된 것으로 생각된다. 1865년 보각판은 계선이 있으며 붉은 칠이 도포되어 있지 않고 발원자의 서원이 판각되어 있다. 그러나 1865년 보각판은 6판 8면에 불과해 당시 보각은 여러 사정에 의해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세 번째 시기는 1899년 인경 직전이다. 1899년 인경은 대한제국 황실의 후원 하에 이루어졌으며,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체계적으로 실시되었다. 때문에 인경 전에 경판에 대한 조사가 실시되었고 손상으로 인경이 불가능한 경판의 보각이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1899년 보각판은 붉은 칠이 도포되어 있으며 판수의 앞, 판미의 뒤에 한 행을 띄워 놓았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33판 56면이고, 전체 『대반야바라밀다경』 보각판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 1899년 판이 가장 다수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1899년 즈음 고려대장경판에 대한 관리와 보수가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영화 <모란봉>(1958)과 음반 (1960) 수록 <춘향전>을 통해 본 1950년대 북한 창극의 실제적 양상 (The actual aspects of North Korea's 1950s Changgeuk through the Chunhyangjeon in the film Moranbong(1958) and the album Corée Moranbong(1960))

  • 송미경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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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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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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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영화 <모란봉>은 1958년, 아르망 가티, 크리스 마커, 클로드 란츠만, 프랑시스 르마르크, 장 클로드 보나르도가 조선필름의 초청으로 떠났던 북한 여행의 산물이다. 그러나 여러 정치적인 이유로 영화는 바로 개봉되지 못했고, 2010년에야 다시 발굴되어 주목을 받았다. 영화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란과 동일의 서사가 저 멀리 조선의 고전 춘향전 속 춘향과 몽룡의 서사와 포개어지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이때 조선의 고전은 두 주인공의 서사와 시간대를 공유하는 극중극 <춘향전>의 형태로 재현되며, 두 서사는 총 6개 장면에서 포개어진다. 영화에는 두 겹의 중층적인 액자가 존재하는데, 1950년대의 북한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란과 동일의 서사가 가장 바깥에 있다면, 그 안에 창극 <춘향전>의 제작진과 배우들이 만들어 가는 서사가 있고, 가장 안쪽에 온전한 작품으로서의 창극 <춘향전>이 배치된다. 영화 가장 바깥의 액자에서는 동일이 주인공이지만, 안쪽 두 겹의 액자에서는 창극 <춘향전>과 함께 성장하는 배우이자 창극 <춘향전>의 등장인물인 영란이 중심이다. 다음 이 영화의 OST 음반으로는 프랑스에서 1960년 발매된 , 1970년 발매된 , 그리고 일본에서 1968년 발매된 <朝鮮の伝統音樂-唱劇 「春香伝」と伝統樂器-> 3종이 있다. 은 영화 <모란봉>의 음악으로만 구성된 반면, 이후 나온 두 음반은 평양국립방송을 통해 수집 및 녹음한 곡을 추가로 포함하였다. 다만 일본에서 발매된 음반에는 영화 <모란봉>에 관한 정보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정황상 음반사나 음반 해설지의 필자도 영화 <모란봉>의 존재를 미처 확인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며, 영화의 개봉 자체가 금지되었던 배경 때문에 의도적으로 관련 내용을 배제한 것일 수도 있다. 본고에서 영화 <모란봉> 또는 OST 음반에 수록된 창극 <춘향전>의 세부 장면 <이별가>, <십장가>, <춘당시과>, <박석티>, <옥중가>를 분석한 결과를 1950년대 북한 창극계의 변화와 관련해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50년대 북한 창극 <춘향전>의 정립 과정을 확인하였다. 1955년에 『조선창극집』을 통해 정리된 희곡이 1956년~1958년 사이 『조선민족음악전집(창극 및 민족가극편)1: 창극 <춘향전>(초고)』에 이르러 실연 가능한 창극 형태로 정착하였고, 영화와 음반에 수록된 부분은 1950년대 말 그 완성판의 한 예시에 해당한다. 1960년대 이후 <춘향전>은 더 이상 기존의 판소리식 창극으로 공연되지 않았기에, 영화 <모란봉>과 음반 은 창극 <춘향전>과 그 음악을 오롯이 담아낸 거의 마지막 기록물이 된다. 둘째, 1950년대 북한 창극계의 탁성 논쟁과 관련한 창극 배우들의 대응 양상을 확인하였다. 1959년까지도 북한에서는 탁성을 둘러싼 비판의 목소리와 이것도 민족적 특징이라는 옹호의 목소리가 어느 정도 공존했다. 맑고 높은 성음의 구사로 탁성 제거에 일정한 성과를 보인 신우선, 분명한 변화를 보이지만 상황에 따라 발성을 달리한 공기남, 탁성을 적극적으로 제거하지는 않았으나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배역을 선택한 조상선, 당이 요구하는 발성법을 일부 수용하면서도 자기 원 음색을 유지하고자 하였던 임소향, 이들의 판단과 대처는 영화 <모란봉>과 음반 속 소리에도 오롯이 반영되어 있었다. 한편 조상선과 임소향은 그들의 소리를 계속 해 나갈 수 있는 배역을 보장받았지만, 영화 <모란봉>에 나타난 선택/배제의 양상은 이와 별개로 1950년대 월북국악인들에게 요구되었던 탁성 제거 지침과 그대로 연결된다.

체통환자(體痛患者)의 사상의학적(四象醫學的) 사초(四焦)와 이목구비(耳目口鼻)를 중심(中心)으로 한 체열(體熱) 분석(分析) (Sasang Herb medicine, IRCT (InfraRed Computer Thermography), Yakchim (Korean herb-acupuncture) remedy)

  • 김수범;송일병
    • 사상체질의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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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8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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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77-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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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6
  • 요통(腰痛)은 다른 어느 질병(疾病)보다도 많은 사람이 경험(經驗)을 하였던 질환(疾患)중의 하나로써 요통(腰痛)의 治療法(치료법)에는 전통적으로 침요법(鍼療法), 구요법(灸療法), 한약요법(韓藥療法)이 주(主)가 되어 왔으며, 최근에는 물리치료(物理治療), 약침요법(藥鍼療法), 추나요법(推拏療法) 등이 쓰이고 있다. 여기서는 1994년 9월 14일부터 1996년 5월 25일까지 "우리한의원"에서 고통(顧痛)으로 진료 받은 73명의 환자들을 중심으로 이름, 성별, 나이, 발병원인, 주증(主證), X-ray, CT, MRI 등의 소견, IRCT(InfraRed Computer Thermography) 소견(所見), 체질(體質), 사상처방(四象處方), 약침요법(樂鍼療法), 치료기간(治療期間), 경과(經過) 등을 분석(分析)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기존의 증치의학(證治醫學)과는 다른 사상의학적(四象醫學的)인 방법으로 요통(腰痛)을 접근하는 방법을 알아보고자 하였으며 아울러 X-ray, CT, MRI 등의 소견(所見)과 한의학적(韓醫學的)으로 이용할 수 있는 적외선체열진단(赤外線體熱診斷)과 비교하여 보며, 또 악침(樂鍼)에서의 사상의학적(四象醫學的)인 접근 방법도 알아보았다. 조사방법(調査方法)은 체질별(體質別) 분포, 사상처방(四象處方)의 사용, 치료경과(治療經過), 치료기간(治療期間)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체질(體質) 감별(鑑別)의 방법은 체형기상(體形氣像), 용모사기(容貌詞氣), 성질재간(性質材幹), 체질증(體質證), 체질병증(體質病證), 음식물의 반응 등을 중심으로 하여 임상적인 감별을 하였고, X-ray는 추나요법(推拿療法)을 위하여 Open mouth, C-spine AP&Lat, TH-spine AP&Lat, L-spine AP&Lat을 의뢰하였으며, 적외선체열진단(赤外線體熱診斷)은 피판(皮板)(Dermatomes)을 중심으로하여 각각의 디스크가 피판(皮板)에 미치는 부분을 관찰하여 양쪽의 체열(體熱)의 차이가 섭씨 1도 이상 차이가 나는 것으로 진단을 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1. 전체 환자 73명중 태음인(太陰人)이 47명(66.4%)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은 소음인(少陰人)이 16명(21.9%)이었고, 소양인(少陽人)은 10명(13.7%)으로 가장 적었으며 이것은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에서의 태음인(太陰人) 오천인(五千人), 소양인(少陽人) 사천인(三千人), 소음인(少陰人) 이천인(二千人), 태양인(太陽人)은 드물다는 구성 비율과는 달리 소양인(少陽人)과 소음인(少陰人)의 구성 비율이 바뀌었으며, 전체적으로는 소양인(少陽人)이 적게 나오고 태음인(太陰人)이 많이 나왔음을 알 수 있다. 2. 각 체질별(體質別) 치료의 경과에 대한 만족도는 전체적으로 60.3%였으며 태음인(太陰人)에서 만족도(66.0%)가 높았고 소음인(少陰人)에서 만족도(56.3%)가 가장 낮았으며 소양인(少陽人)의 만족도 (60%)는 평균과 비슷하였다. 3. 각 체질별(體質別) 치료에 만족하는 환자(患者)에게 보인 사상처방(四象處方)을 분석하여 보면 소양인(少陽人)에 있어서는 표병약형방지황탕(表病藥荊防地黃湯)과 리병약(裡病藥)인 육미지황탕(六味地黃湯)이 고르게 썼으며, 소음인(少陰人)은 리병약(裡病藥)인 십이미관중탕(十二味寬中湯)이 가장 많이 쓰였으며, 태음인(太陰人)은 리병약(裡病藥)인 청심연자탕(淸心蓮子湯), 청폐사간탕(淸肺瀉肝湯), 열다한소탕(熱多寒少湯)이 많이 쓰였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소음인(少陰人)과 태음인(太陰人)은 리병약(裡病藥)이 치료 경과가 좋았으며 소양인(少陽人)은 표병약(表病藥)과 리병약(裡病藥)에서 고르게 쓰였음을 알 수 있다. 4. 치료에 만족하는 환자의 평균 치료기간은 약 6주였으며, 각 체질별(體質別)로는 소양인(少陽人)에서 4.2주로 가장 낮았고, 다음은 태음인(太陰人)이 5.7주 였으며, 소음인(少陰人)에서 6.8주로 가장 오래 걸림을 알 수 있다. 5. 사상의학(四象醫學)적인 요통(腰痛)의 치료방법은 외상성에 의한 요통(腰痛) 따른 치료와 그 외의 체질적(體質的) 소인에 따라 소음인(少陰人)의 표병(表病)온 승양익기(升陽益氣)를 하고, 리병(裡病)은 이음강기(裡陰降氣)를 하며, 소양인(少陽人)의 표병(表病)은 표음강기(表陰降氣)를 하고, 리병(裡病)은 청양상승(淸陽上升)을 시키며, 태음인(太陰人)의 표병(表病)은 폐양승기(肺陽升氣)시키고 리병(裡病)은 청간조열(淸肝操熱)을 하며, 태양인(太陽人)은 보간생음(補肝生陰)의 치법(治法)을을 쓸 수 있다. 6. 사상처방(四象處方)외의 방법으로 약침요법(藥鍼療法)은 체질적(體質的)으로 적용하는 방법은 약침(藥鍼)의 선별 방법과 약침(藥鍼)을 치료하는 부위의 선별방법으로 나눌 수 있다. 약침(藥鍼)의 선별에서 소음인(少陰人)은 蜂藥鍼(B.V.)을, 소양인(少陽人)은 홍화(紅花)(H.O)를 태음인(太陰人)은 호도(胡挑)(I), 웅담(熊膽), 우황(牛黃), 사향(麝香)(V,O.K.) 등을 써 볼 수 있고, 팔망약침법(八網樂鍼法)도 기존에 쓰는 체질별(體質別) 사상처방(四象處方)을 그대로 약침(藥鍼)으로 만들어 쓸 수 있다. 약침(藥鍼)을 치료하는 부위의 선별방법은 사상의학(四象意學)의 체질증(體質證), 체질병증(體質病證)을 충분히 응용할 수 있는 태극침법(太極鍼法)의 혈위(穴位)와 사초부위(四焦部位)에 따라 생리(生理), 병리(病理)를 적용시켜 쓰는 방법올 활용하여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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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촌지도사업(韓國農村指導事業)의 변동(變動) (Changes in Agricultural Extension Services in Korea)

  • 후지타야스키;이용환;김성수
    • 농촌지도와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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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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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5-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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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 1994년 가을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놀란 것 온 도시 근교에 숲과 같이 세워진 고층 아파트 단지와 그 수요의 배경이 된 서울, 수원을 비롯한 수도권의 인구 집중이었다. 이러한 인구 집중을 가져온 것은 바로 제2차, 3차 산업의 발달이었다. 그 이후 6년만인 2000년 3월에 다시 농촌과 농촌지도사업의 변화 동향을 살펴보기 위하여 농가 방문, 도 농업기술원 및 시 ${\cdot}$ 군농업 기술센터를 방문하면서 더욱 진전된 아파트군과 도시 근교의 비닐 하우스 단지였으며, 이는 한국이 지속적인 경제 발전을 하고 있다는 한 증거였다. 한국은 1997년에 내습한 통화위기로 IMF의 구제 금융을 받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한국 경제는 IMF의 관리하에 있었으나 1년만에 회복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1999에는 GDP 성장률이 10.7%에 달하였다. 한국 정부는 이 시기에 구조개혁을 단행하여 금융, 기업, 노동, 공공의 각 부분에 개혁을 단행하였다. 특히 정부로서는 정부 조직을 개편하여 지방화, 행정 조직 인원의 삭감, 농업 예산의 축소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공기업을 민영화하여 농업 단체의 통합, 각종 규제를 철폐하였다. 중앙 정부의 권력이 지방으로 많이 이양되어 시장, 군수 등의 권한이 크게 늘어났다. 농촌지도사업도 IMF 관리하의 정부 조직 개편 및 규제 완화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까지 중앙 정부 소속이었던 농촌지도 사업이 지방화의 영향으로 시 ${\cdot}$ 군으로 이관되었다. 이것에 동반하여 농촌지도소 수의 축소(64%), 지도 직원의 감원(24%), 사업 예산의 감소 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개편 과정에서 농촌지도사업의 기본적인 방향을 정하는 것은 중앙의 농촌진흥청이 맡고 인사와 기술 개발, 지원은 도농업기술원, 사업운영 책임은 시 ${\cdot}$ 군에서 맡는 체제로 개편되었다. 시 ${\cdot}$ 군 단계의 농촌지도사업은 담당 기구가 농촌지도소에서 농업기술센터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고, 설치권자가 군수로 되었으며, 그 기능에 기술 개발 업무가 더해졌으며, 농촌지도사 및 생활지도사의 수가 크게 감소되었다. 최근에 한국의 농촌 및 농촌지도사업을 관찰한 결과, 이러한 중앙, 도 시 군의 지도 기능 분담이 그렇게 잘 인식되어 있는 것만은 아닌 면도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구조 개선을 계기로 해서 농촌의 현실을 반영한 실효성 있는 농촌진흥에 기여할 수 있는 농촌지도사업으로 재출발한다는 의의를 살릴 수 있도록 농촌진흥청은 농업기술센터의 동태를 철저하게 살피고 이와 관련한 도농업기술원의 대응을 파악하여 이를 기초로 기능을 발휘하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국가에서 이관된 현지의 농촌지도 거점인 농업기술센터에 관하여 농촌지도소가 개칭되어 농업기술센터가 되었고 조직적인 면에서도 기술개발과가 설치되었다. 이는 현지에서의 기술 개발이 가능하게 된 점과 현지에서 원하는 과제를 신속하게 대응하여 도와 국가의 시험연구 과제로 삼을 수 있게 된 것은 시험 연구 사업에서 크게 평가받을 만한 발전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농촌지도 직원이 다른 행정 업무도 겸무하여 될 경우 영농 환경을 좋게 하는 직접적인 행정에 관한 업무에서는 겸무하므로서 농가도 편리해지고, 보급지도의 효과도 촉진되는 경우가 있으나 검사, 취체 업무는 반드시 피해야 할 일이다. 동일인이 이것을 담당하게 되면 농가에게 안심감을 잃어버리고 보급 효과는 기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한국의 농촌지도사업의 보급 내용은 농업자재의 절약, 첨단농업기술의 개발, 이를 기반으로 수출농업의 촉진과 생산성 향상, 시장에 강한 농업의 구축 등에 힘을 쏟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농업의 추구는 약탈농업을 추구하는 등 지속적 농업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앞으로 지속적인 농업에 관하여 보다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선진농가들은 기술이나 경영 혁신을 위하여 연구 개발을 위한 정보의 수집과 연구회의 필요성을 크게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진 농가 이외에 소규모의 농업소득이 낮은 농가도 있었다. 이러한 농가에게는 농업경영에 대한 방향 설정과 추진 방법에 대한 적절한 상담 상대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농가들에 대한 시의적절한 정보의 전달, 자력으로 기술과 경영 방책을 만들어내는 힘을 길러주는 지도가 필요하다. 이를 위한 방책으로 그룹의 육성과 가입 촉진이 유효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에 있어서 농촌지도 방법은 크게 두 가지 대상을 의식하여 대 선진농가의 경우에 는 상담 기능, 대 소규모 농가의 청우에는 전달 ${\cdot}$ 교육 기능의 발휘에 있을 것이다. 상담 기능은 정보의 제공과 과도하지 않은 방책을 선택 할 수 있도록 지도 조언하는 것이, 전달 ${\cdot}$ 교육 기능은 과제해결 과정을 체득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인터넷의 활용 방법, e-메일에 의한 정보교환 시스템화 등의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인원의 감소나 겸무화의 진행에 따라 이러한 업무의 수행이 쉬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고, 일 대 일의 지도는 어려울 것이나 집단 지도로는 가능한 측면도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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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동악산 청류구곡(淸流九曲)의 형태 및 의미론적 특성 (Characteristic on the Layout and Semantic Interpretation of Chungryu-Gugok, Dongaksan Mountain, Gokseong)

  • 노재현;신상섭;허준;이정한;한상엽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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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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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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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동악산 청류구곡 일원은 아름다운 계류를 따라 와폭(臥瀑)과 담(潭), 소(沼), 대(臺) 등의 암반경관과 성리문화의 전형으로 향유되어온 구곡문화가 실증적으로 대입된 사례로, 1872년 곡성현 지방도에서 "삼남제일암반계류 청류동(三南第一巖盤溪流 淸流洞)"으로 명기된 바와 같이 풍치가 탁월한 승경처임을 보여준다. 경물(景物)과 경구(警句)가 육로와 수로에 쌍으로 설정되어 차별성을 갖는 청류구곡은 일제강점기인 1916년 이전, 정순태와 조병순의 주도로 설정된 것으로 판단되지만 성리학자들은 물론 불교지도자, 독립운동가 등 선현들의 장구처 등이 다수 발견되는 것으로 볼 때 오래전부터 명인(名人)들의 산수탐방과 은일처로 활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림사계곡의 기반암 암상에 구성된 청류구곡은 산지형 하천으로 총 길이 약 1.2km, 평균 곡거리 149m로 국내 여타 구곡에 비해 짧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남지역에서 유일하게 확증된 동악산 3개 구곡의 바위글씨는 총 165건으로 국내에서 가장 많은 바위글씨의 집결지로 판단된다. 특히 112개소로 집계된 청류구곡 바위글씨의 내용 분석결과, '수신(修身)'의 의미가 49점(43.8%)으로 가장 많았으며 다음으로 '인명' 21건(18.8%), '경물' 16건(14.2%), 장구처 등 장구지소' 12건(10.6%) 등이었고 '시구(詩句)'가 차지하는 비율은 6건(3.6%)으로 나타났다. 육로상의 제1곡 쇄연문과 수로상의 제9곡 제시인간별유천(除是人間別有天)은 박세화(朴世和)가 충북 제천에 설정한 용하구곡(用夏九曲)의 제1곡 홍단연쇄(虹斷烟鎖) 및 제9곡 제시인간별유천과 일치하는 것으로 동일한 시원(始原)을 갖는 구곡명으로 유추된다. 또한 육로상 제6곡 대은병(大隱屛)은 주자 무이구곡의 제7곡과 일치하는 것으로 구곡원림의 거점으로 인식되며, 7곡과 8곡 사이의 '암서재(巖棲齋)'와 '포경재(抱經齋)' 바위글씨와 석축 흔적 등은 무이구곡 은병봉 아래 무이정사와 비견되는 것으로, 기호사림의 청류동 활동거점으로 파악된다. 선사어제(鮮史御帝), 보가효우(保家孝友, 고종), 사무사(思無邪, 명나라 의종), 백세청풍(百世淸風, 주자), 청류수석 동악풍경(흥선 대원군) 등 명인들의 명구들이 망라된 동악산 구곡은 높은 유가미학적 가치를 표출함은 물론 의미론적 상징문화경관의 보고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청류구곡은 수심양성을 위한 유가적 가치체계와 불교 및 도교적 관념 등이 공존하는 유불선(儒彿仙) 3교 문화경관의 결집체로 특성이 부각된다. 청류구곡은 최익현(崔益鉉), 전우(田愚), 기우만(奇宇萬), 송병선(宋秉璿), 황현(黃玹) 등으로 대변되는 조선 후기 사림계층이 성리학의 도통의식을 계승하고 '위정척사'와 '존왕양이(尊王攘夷)', '항일의지 고취' 등의 수단으로 설정되고 활용하는 과정에서 배태(胚胎)된 항일 역사문화 항쟁의 거점으로서 장소성과 의미론적 특성에 충일하다.

입지와 장소 특성으로 본 암각바둑판의 의미와 문화재적 가치 (A Study on the Meaning and Cultural Properties Value of Rock-Go-Board from the Viewpoint of Site and Location Characteristics)

  • 박주성;노재현;심우경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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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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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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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종합적인 현황 조사 분석을 통해 국내 돌바둑판의 위치 및 형태 그리고 입지 유형을 파악하는 한편 주변 경물과 각자 그리고 인근의 전래지명과의 관련성 분석과 해석을 통해 암각바둑판의 본질적 특성 및 장소적 의미 그리고 문화재로서의 가치 등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바둑판에 나타난 '네모난 바둑판과 둥근 바둑돌'의 천원지방적(天圓地方的) 형상, 흑백 바둑돌로 표상되는 음양조화 그리고 하늘 회전을 표현한 361로 등은 '우주적 질서가 투사(投射)된 상징체'이다. 또한 영원성을 바탕으로 바둑 삼매경에 빠진 '귤중지락(橘中之樂)'과 '상산사호(商山四皓)' 그리고 '난가(爛柯)' 모티프는 속세를 벗어난 망우청락(忘憂淸樂)의 '위기선미(圍棋仙味)'를 통해 '인생과 자연'의 관계를 시공간적으로 일치하고자 했던 천인합일의 표상이자 우미와 소요를 추구한 고아한 풍류였다. 본 연구를 통해 확인된 돌바둑판은 총본 연구는 종합적인 현황 조사 분석을 통해 국내 돌바둑판의 위치 및 형태 그리고 입지 유형을 파악하는 한편 주변 경물과 각자 그리고 인근의 전래지명과의 관련성 분석과 해석을 통해 암각바둑판의 본질적 특성 및 장소적 의미 그리고 문화재로서의 가치 등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바둑판에 나타난 '네모난 바둑판과 둥근 바둑돌'의 천원지방적(天圓地方的) 형상, 흑백 바둑돌로 표상되는 음양조화 그리고 하늘 회전을 표현한 361로 등은 '우주적 질서가 투사(投射)된 상징체'이다. 또한 영원성을 바탕으로 바둑 삼매경에 빠진 '귤중지락(橘中之樂)'과 '상산사호(商山四皓)' 그리고 '난가(爛柯)' 모티프는 속세를 벗어난 망우청락(忘憂淸樂)의 '위기선미(圍棋仙味)'를 통해 '인생과 자연'의 관계를 시공간적으로 일치하고자 했던 천인합일의 표상이자 우미와 소요를 추구한 고아한 풍류였다. 본 연구를 통해 확인된 돌바둑판은 총 18개로 이중 강진 월남사지 돌바둑판, 양산 소한정 돌바둑판, 반룡대 돌바둑판 등 3개소(16.1%)는 이동이 가능한 석국으로 분류된 반면 방학동 돌바둑판을 비롯한 15개소(83.9%)는 자연 암반에 새긴, 원래 장소를 이탈하지 않은 암각바둑판으로 밝혀졌다. 돌바둑판의 입지조건을 유형화한 결과, 계류형 15개소(83.9%), 암봉형 3개소(16.1%)로 나타났으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것은 소백산 신선봉 암각바둑판(1,389m)이었다. 총 15개 돌바둑판은 모두 500m 이하의 저산지에 입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바둑판이 새겨진 입지는 속세와 멀지 않은 생활권의 일부였으며 모두 경관성이 탁월한 계곡 및 산봉에 입지하였다. 돌바둑판은 옛 선비들의 풍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찰되는바 특히 암각바둑판은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조화를 추구하며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아 함께 노니는 풍류도의 정신을 전승한 것으로 파악된다. 즉 궁극적으로 바둑의 전통적인 상징성인 '은일의 매개체이자 자연귀의의 도에 다다를 수 있는 선비문화의 정수'인 동시에 유선적 취향의 도구로서 자리매김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징적으로 암각바둑판이 새겨진 단양 소백산 신선봉을 비롯하여 괴산 선국암, 무주 사선암, 장수 신선바위 등은 신선과 관련된 지명의 일체감이 매우 높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신선' 바위와 암각바둑판이야말로 선계에 대한 숭배와 동경의 소통방식이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된 경관대상이자 조망처로 판단된다. 한편 암각바둑판이 입지하는 장소의 입지유형 등 물리적 환경과 팔경 및 동천구곡의 설정 여부, 유학자 등의 관련 여부를 중심으로 한 '인간활동' 그리고 '상산사호' 모티프 및 '난가고사' 상징의미 등 3가지를 '장소정체성 판단을 위한 해석 틀'을 기준으로 하여 고찰한 결과, 암각바둑판 주변에 각자 되어있는 동천, 동문 등의 모티프는 주자학적 '구곡팔경'의 개념 보다는 선취적 '선유동천' 개념의 공간성 모색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계류형 암각바둑판이 조성된 공간은 유가의 은둔지향적 공간이나 선도적 은일지향적 공간으로 시대추이에 따라 습합되어 온 것으로 판단되며 산봉형의 암각바둑판은 별도로 신선 강림의 숭엄지향성이 장소정체성 지배의 중요 요인으로 평가된다. 아울러 암각바둑판이 조성된 곳을 포함하여 그 주변은 동천구곡이나 팔경의 일부로 널리 알려진 승경의 요처임이 확인되었다. 또한 선비 및 사대부 계층이 주체인 주변 각자들 중에도 신선 관련 표현어가 다수 발견됨에 따라 바둑판 조영의식의 이면에는 신선경 동경을 바탕으로 한 선도적 취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와 같은 결과를 총합할 때 암각바둑판은 조선조 선비들의 은일과 운둔을 통한 자연경영의 문화 현상이 집약적으로 함축된 유산이자 전래 승경의 요처로, 명승과 같은 자연문화재로서의 가치가 탁월한 대상임이 확인되었다. 현재 남한내 17개의 돌바둑판 중에서 소백산 신선봉 암각바둑판을 비롯하여 방학동 암각바둑판, 충주 사로암 암각바둑판, 무주 사선암 암각바둑판, 양산 어곡동 반룡대 석국 등은 세월의 풍파와 사람들의 접촉으로 마모되면서 바위가 깨어지거나 바둑판 줄이 희미해지고 있다. 또한 언양 반구대 집청정 암각바둑판은 토사 매몰로 그 형체를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암각바둑판은 자연과 바람의 흐름을 그대로 투영한 예술적, 문화재적 가치가 탁월한 조형물이자 선인들의 자연 사랑의 마음과 선계동경의 문화가 만나 이루어진 문화유적으로, 이에 대한 국내 분포 현황에 대한 체계적인 정밀조사와 보존관리가 시급하다고 사료된다. 18개로 이중 강진 월남사지 돌바둑판, 양산 소한정 돌바둑판, 반룡대 돌바둑판 등 3개소(16.1%)는 이동이 가능한 석국으로 분류된 반면 방학동 돌바둑판을 비롯한 15개소(83.9%)는 자연 암반에 새긴, 원래 장소를 이탈하지 않은 암각바둑판으로 밝혀졌다. 돌바둑판의 입지조건을 유형화한 결과, 계류형 15개소(83.9%), 암봉형 3개소(16.1%)로 나타났으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것은 소백산 신선봉 암각바둑판(1,389m)이었다. 총 15개 돌바둑판은 모두 500m 이하의 저산지에 입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바둑판이 새겨진 입지는 속세와 멀지 않은 생활권의 일부였으며 모두 경관성이 탁월한 계곡 및 산봉에 입지하였다. 돌바둑판은 옛 선비들의 풍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찰되는바 특히 암각바둑판은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조화를 추구하며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아 함께 노니는 풍류도의 정신을 전승한 것으로 파악된다. 즉 궁극적으로 바둑의 전통적인 상징성인 '은일의 매개체이자 자연귀의의 도에 다다를 수 있는 선비문화의 정수'인 동시에 유선적 취향의 도구로서 자리매김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징적으로 암각바둑판이 새겨진 단양 소백산 신선봉을 비롯하여 괴산 선국암, 무주 사선암, 장수 신선바위 등은 신선과 관련된 지명의 일체감이 매우 높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신선' 바위와 암각바둑판이야말로 선계에 대한 숭배와 동경의 소통방식이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된 경관대상이자 조망처로 판단된다. 한편 암각바둑판이 입지하는 장소의 입지유형 등 물리적 환경과 팔경 및 동천구곡의 설정 여부, 유학자 등의 관련 여부를 중심으로 한 '인간활동' 그리고 '상산사호' 모티프 및 '난가고사' 상징의미 등 3가지를 '장소정체성 판단을 위한 해석 틀'을 기준으로 하여 고찰한 결과, 암각바둑판 주변에 각자 되어있는 동천, 동문 등의 모티프는 주자학적 '구곡팔경'의 개념 보다는 선취적 '선유동천' 개념의 공간성 모색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계류형 암각바둑판이 조성된 공간은 유가의 은둔지향적 공간이나 선도적 은일지향적 공간으로 시대추이에 따라 습합되어 온 것으로 판단되며 산봉형의 암각바둑판은 별도로 신선 강림의 숭엄지향성이 장소정체성 지배의 중요 요인으로 평가된다. 아울러 암각바둑판이 조성된 곳을 포함하여 그 주변은 동천구곡이나 팔경의 일부로 널리 알려진 승경의 요처임이 확인되었다. 또한 선비 및 사대부 계층이 주체인 주변 각자들 중에도 신선 관련 표현어가 다수 발견됨에 따라 바둑판 조영의식의 이면에는 신선경 동경을 바탕으로 한 선도적 취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와 같은 결과를 총합할 때 암각바둑판은 조선조 선비들의 은일과 운둔을 통한 자연경영의 문화 현상이 집약적으로 함축된 유산이자 전래 승경의 요처로, 명승과 같은 자연문화재로서의 가치가 탁월한 대상임이 확인되었다. 현재 남한내 17개의 돌바둑판 중에서 소백산 신선봉 암각바둑판을 비롯하여 방학동 암각바둑판, 충주 사로암 암각바둑판, 무주 사선암 암각바둑판, 양산 어곡동 반룡대 석국 등은 세월의 풍파와 사람들의 접촉으로 마모되면서 바위가 깨어지거나 바둑판 줄이 희미해지고 있다. 또한 언양 반구대 집청정 암각바둑판은 토사 매몰로 그 형체를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암각바둑판은 자연과 바람의 흐름을 그대로 투영한 예술적, 문화재적 가치가 탁월한 조형물이자 선인들의 자연 사랑의 마음과 선계동경의 문화가 만나 이루어진 문화유적으로, 이에 대한 국내 분포 현황에 대한 체계적인 정밀조사와 보존관리가 시급하다고 사료된다.

조선말기 백선도(百扇圖)의 새로운 제작경향 - 독일 로텐바움세계문화예술박물관 소장 <백선도(百扇圖)>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선도(百扇圖) 초본(草本)>을 중심으로 - (New Trends in the Production of One Hundred Fans Paintings in the Late Joseon Period: The One Hundred Fans Painting in the Museum am Rothenbaum Kulturen und Künste der Welt in Germany and Its Original Drawings at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 권혜은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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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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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9-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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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 논고는 19세기 이후 형성된 서화(書畫)의 유통과 확산의 양상을 당시 활발히 제작된 장식병풍 중 하나인 <백선도(百扇圖)>의 예를 통해 살펴본 글이다. 백선도는 화면에 다양한 형태의 부채를 겹쳐서 배치하고 각각의 선면(扇面) 안에 여러 종류의 화제(畫題)를 그린 것을 말한다. 부채와 선면화(扇面畫)라는 소재는 이전부터 존재하였지만 장식용 회화의 소재로 등장한 것은 19세기 이후로, 호사취미 경향을 반영하여 주로 병풍(屛風)으로 활발히 제작되었다. 지난 2016년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미술 속 도시, 도시 속 미술'에서 독일로텐바움세계문화예술박물관 소장 <백선도>가 새로이 소개된 바 있다. 6폭으로 구성된 이 병풍에는 한 폭 당 5개 이상의 다양한 종류의 부채들이 등장하고 각 부채 면에는 단순히 채색한 것 뿐 아니라 다양한 화목(畫目)의 그림들이 남아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을 주목해야 하는 것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동일한 초본(草本)이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이전의 왕실이나 사대부들이 사적인 공간에서 향유하였던 서화(書畫)는 민간으로 확산되었고 시장을 통한 유통의 단계로 넓어졌다. 집안을 꾸미고 장식하는 풍조에 따라 화려한 장식그림들이 선호되었고, 한 폭에 다양한 형태의 화면과 다채로운 畫目(화목)의 그림을 그려 완성하는 백납도병풍 제작이 성행하였다. 로텐바움박물관 소장 한국 컬렉션의 상당수는 독일 주재 조선국 총영사이자 독일의 사업가였던 하인리히 콘스탄틴 에두아르 마이어(Heinrich Constantin Eduard Meyer, 1841~1926)의 수집품이다. 그는 1890년대 후반부터 1905년까지 조선과 독일을 오가며 다양한 유물들을 수집하여 독일에 돌아가 1909년까지 순차적으로 수집품을 로텐바움박물관에 전달하였으며, <백선도>도 그 중 하나이다. 새롭고 장식미가 돋보이는 <백선도>는 조선에 들어와 있던 외국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로텐바움박물관 소장 <백납도>는 제2폭의 뒷면에 "동현(銅峴)"이라는 지명이 적힌 종이조각이 거꾸로 붙어있어 흥미를 끈다. 동현은 지금의 서울 을지로 1가와 을지로2가 사이에 위치했던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도화서(圖畫署)를 비롯한 혜민서(惠民署)·장악원(掌樂院) 등의 관청과 시전(市廛)이 있어 가내수공업이 성하던 지역이었다. 실제로 1900년대 초 이곳에는 서화를 유통하는 상점들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마이어가 수집했던 서화들의 구입처가 동현에 위치했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하겠다. 로텐바움박물관 소장 <백선도>는 총 6폭의 병풍으로, 1980년대에 한국 서화 소장품들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선도 초본>은 1945년부터 1950년 사이 국립민족박물관에 입수된 작품이다. <백선도 초본>은 총 7점으로, 7점 중 6면 화면의 여백에 화면의 순서까지 정해져 있어 본래 총 8폭 병풍용 초본임을 알 수 있다. 한 화면에는 5개 이상의 다양한 접선(摺扇)과 단선(團扇)들이 배열해있는데, 작은 장식에서부터 부챗살의 문양까지 초본부터 사실적으로 묘사되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 '석간주(石間朱)', '홍(紅)', '묵(墨)', '청(靑)' 등과 같이 부채에 들어갈 색 대부분을 지정하고, 빈 부채에는 '유(油)'라고 적거나 비워두었으며 이 중 10개의 부채에는 화훼초충도(花卉草蟲圖)나 고사인물도의 밑그림이 남아있다. 이를 실제 로텐바움박물관 소장 <백선도>와 비교하면 화면의 크기와 비례까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어, 초본의 매뉴얼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펼쳐진 부채 면에는 산수, 고사인물, 화조, 영모, 초충, 어해 등 다양한 장르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화접도(花蝶圖)나 어해도(魚蟹圖) 등은 19세기 유행하였던 소재로 당시 화단의 경향을 잘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 것은 김홍도(金弘道)의 전형적인 화풍을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지금까지 알려진 백선도나 백납도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특징이다.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는 상대적으로 제한된 작은 화면에 그려야 하는 백납도나 백선도의 특성상 잘 다루지 않는 소재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홍도의 <서원아집도>병풍과 화면의 구성이나 화풍 모두 매우 흡사하다. 더구나 <백선도>병풍의 몇몇 장면은 김홍도의 작품 중에서도 1796년작 《병진년화첩(丙辰年畫帖)》과 유사한 화면들을 다수 발견할 수 있어 흥미롭다. <사인암(舍人巖)>과 흡사한 산수도(山水圖)를 비롯하여 <서원아집도>, <쌍치도(雙雉圖)> 등에서 김홍도 화풍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부채 속 그림을 그린 인물은 김홍도 화풍의 영향을 받은 직업화가일 것으로 보이며, 작가는 《병진년화첩》을 직접 감상한 적이 있거나, 서화시장에 《병진년화첩》을 베껴 그린 부본(副本)이 유통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현재까지 알려진 병풍으로 된 백선도는 10점 내외인 것으로 파악되며, 이 작품들을 비교해보면 화면의 구성이 부채 1개 정도 차이가 있거나 비례와 좌우가 바뀌었을 뿐 화면구성이 매우 유사함을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일정한 패턴의 화면구성은 같은 시기 민간에서 성행한 책가도(冊架圖)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특징으로, 19세기 서화의 수요층이 넓어짐에 따라 세밀한 표현과 화려한 장식성이 요구되는 회화들의 대량 제작을 위한 초본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도안이 복잡하여 범본이 필요한 곽분양행락도나 요지연도, 백동자도, 해학반도도 등의 규모가 큰 장식병풍에서 적극 활용되었으며, 실제 남아있는 작품에서 몇 가지의 도상들이 반복하여 등장하고 있어 초본을 참고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시장의 수요에 맞추어 대량 제작할 수 있는 초본 활용이 성행했던 당시의 경향은 화면을 다채로운 부채들로 채우고 그 부채 면에 각기 다른 그림을 그려야하는 백선도 제작에 있어서도, 초본을 요긴하게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더구나 테두리를 그은 후 다양한 화목의 그림을 담는 백납도에 비해 백선도는 다양한 형태의 부채들을 먼저 그려야하는 공정을 거쳐야 했기 때문에, 대량 제작이 어렵고 그만큼 남아있는 작품이 상대적으로 적은 원인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로텐바움박물관 소장 <백선도> 병풍과 국립중앙박물관 <백선도 초본>은 새로운 화풍이 수용되어 시도되었던 조선 말기 화단의 경향을 잘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다수의 백선도들이 박기준의 작품과 유사한 화풍과 화면 구성 보이는 것에 비해, 김홍도의 영향이 분명히 드러나는 매우 이례적인 예라는 점에서 앞으로도 더욱 심층적인 분석이 요구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