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척족이 특권세력으로 발호하던 영조대 후반의 탕평정치에서 아버지를 여읜 피해자였다. 노론의 거센 방해공작을 뚫고 왕위에 오른 정조의 목표는 왕권 강화였다. 정조는 탕평정책을 영조 50여년 치세의 대업적으로 칭송하고 척신과 탕평당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신하들에게 왕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국변인(國邊人)'이 되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정조가 즉위 직후부터 설치 운영한 규장각(奎章閣)은 겉으로는 어제(御製)의 봉안 등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정조의 우군을 양성하기 위한 기구였다. 그만큼 정조가 외척들을 누르고 어떻게 사대부들을 포섭하는가 하는 문제는 정권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본고에서는 정조가 사대부들을 어떻게 굴복시키고 포섭하려 했는가라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조명하였다. 그것을 통해서 정조가 시도한 왕권강화책의 논리와 방법을 확인해 보고자 하였다. 정조는 경학(經學)의 본질은 성리학이 아니라 실생활과 절실하게 관련된 학문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사대부들의 이념적 근거를 붕괴시키고자 하였다. 정조가 사대부들의 풍기와 세도를 비판하고 그들의 학문인 주자성리학의 의미를 축소했던 것은 사대부들을 왕권에 복속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붕당론이나 성학론을 기본으로 하는 사대부들의 정치 이념과 학문적 근거를 반박함으로써 공론(公論)의 주체로서 국왕의 권위를 강조하려고 하였다. 정조가 영조의 '군사(君師)' 개념을 계승하고 왕호도 '홍재(弘齋)'에서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으로 바꾼 것은 그의 사대부 비판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자 했던 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Objectives : To examine the progression and presentation of King Jeongjo's Gyeok-ki(膈氣) symptoms during his reign. Methods : Based on recordings in the The Daily Records of Royal Secretariat of Joseon Dynasty related to Gyeok-ki(膈氣), characteristics of King Jeongjo's case was analyzed, then compared and examined against the political situation he was in. Results : During the 24 years of reign, King Jeongjo's Gyeok-ki(膈氣) developed in four stages; beginning stage with mild symptoms, intrinsic stage where it became the King's main disease, peak stage where symptoms intensified, and chronic stage where symptoms became rather manageable but the disease occurred regularly. Conclusions : From the year of accession to the year of death, King Jeongjo consistently complained of Gyeok-ki(膈氣), which seems to be strongly related to his family history and political situation.
본 논문은 "홍재전서(弘齋全書)"에 수록된 정조(正祖)의 "책문(策文):춘추(春秋)" 20여 조목의 분석을 통해, 정조의 "춘추"에 대한 시각과 조선조 춘추학의 문제의식을 밝힌 것이다. "책문"에서는 크게 "춘추"의 구성이나 내용과 관련된 문제, "춘추" 및 삼전(三傳)의 평가와 관련된 문제 등 춘추학 전반에 관한 폭넓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정조는 이 "책문"을 통해 '경세(經世)의 대전(大典)'으로서 "춘추" 경전이 지닌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춘추"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이해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 자료는 "경사강의(經史講義)"에 수록된 1793년과 1796년의 "춘추(春秋)" 조문(條問)과 함께, 정조의 "춘추"에 대한 관점과 학문적 특징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춘추학의 현황과 주요 관심사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상사적 가치를 지닌다.
Hyeunryungwon is a tomb for Crown Prince Sado, who was the father of King Jeongjo, the twenty second king of Joseon dynasty. The tomb had been originally in the Eastern part of Seoul, but was relocated in 1789 to the downtown Suwon, which was renowned as a good tomb site among the Royal family at that time. King Jeongjo looked through the records from the previous generations for the ideal location and direction for the tomb. He personally studied Feng Shui theory and designated its location and direction. He ordered for lavish decorations for the stone adornments of the surroundings of the grave mound, which was against the regulations of the royal family. He found his reasons in the precedent that allowed sumptuous decoration. However, for the arrangements of Jeongjagahk(T shaped building) and other attached facilities, he made unusual choice that other precedent royal tombs did not have. Instead of following the conventions that Jeongjagak should be facing south of a grave mound, he put it on the right side of grave mound. Also conventionally, Subokbang(a place where guards can stay) and Suragan(a kitchen that prepares food for sacrificial rites) should be facing symmetrically, but they too, were on the same side with Jeongjagak. It was a measurement that the grave mound of Hyeunryungwon can have a full view without being obstructed by other facilities and it was also personally ordered by King Jeongjo. The distinguishing features of Hyeunryuwon was motivated by King Jeongjo's filial affection, and his academic pursuit of precedent royal tombs initiated the unconventional and innovative challenges.
본 연구는 정조가 초본 『사부수권』을 편찬한 목적이 선본 시리즈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밝히고, 편찬 과정과 구성상의 특징을 검토한 뒤, 실제 절록 양상을 정리하여 『삼례수권』의 편찬 의도를 규명하였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삼례수권』은 약 20일 간의 짧은 시간 동안에 편찬되었으며, 특히 『예기수권』의 편찬의 경우 절록 과정이 다소 세밀하지 못하다. 둘째, 그 구성은 목차나 초록된 구절의 출처와 같은 정보를 생략하거나 간단하게 표기하여 절록된 구절을 강조하고 있으며, 『의례』, 『주례』, 『예기』세 문헌마다 강목 설정을 다르게 하고 있다. 셋째, 정조는 삼례에 대해 『의례』와 『주례』를 존숭하였으며, 『예기』에 대해서는 앞의 두 문헌보다 부차적인 문헌으로 수용하고 있다. 넷째, 정조 특유의 섬세한 절록 양상이 나타나지 않고, 삼례 각 문헌마다 상이한 절록 규칙을 보인다.
창덕궁 후원의 부용정(芙蓉亭)은 독특한 평면형태, 공간구성, 건물의 장식 등이 뛰어난 비례와 대비를 이루고 있는 점을 인정받아 2012년 3월 2일에 보물 제1763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지정사유가 형이하학적으로 평가되었고, 그마저도 왜 지금과 같이 독특한 형태로 조영되었는지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자연철학 및 사상에 관한 형이상학적 접근을 시도하였고, 조영의도와 공간구조의 특징을 규명하여 부용정의 정체성을 찾는데 주력하였다. 요약된 결과는 아래와 같다. 첫째, 부용정의 조영배경 및 특징: 정조는 즉위와 함께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奎章閣)을 창설하고 개혁정치의 일환으로 초계문신(抄啓文臣)을 양성하였다. 또한 각신(閣臣)들을 가인(家人)처럼 우대해주며 친정체계를 구축하였다. 정조의 적극적인 개혁정치는 신하들에게 후원을 구경시켜주기는 계기가 되었으며, 정조 16년(1792)에 각신을 중심으로 한 내각상조회(內閣賞釣會)를 공식적으로 발족하고 후원유람을 정례화하게 되었다. 후원유람은 꽃을 보고 낚시를 하는 상화조어연(賞花釣魚宴), 난정수계의 활동 등으로 이루어졌고, 이후 국가의 대신들이 참석하게 되면서 큰 행사로 발전하게 되었다. 정조는 대신, 중신, 각신들과 이러한 문화 활동을 함께하고 나아가 자신의 왕도정치를 실현할 장소로써 부용정을 조영한 것이었다. 둘째, 부용정의 입지와 공간적 특성: 정조는 즉위(1776)와 함께 택수재를 새롭게 개축하였다. 무엇보다 개유와-택수재-원도-어수문-규장각을 축선에 맞춰 연계한 점은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현재의 규장각 일원을 계획-설계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정조 17년(1793)에는 기존의 사우정(四隅亭) 형태였던 택수재를 군신(君臣)이 함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하기 위해 위계를 두어 증축하고 부용정이라 칭하였다. 지당 위에 위치한 부용정의 북쪽공간은 임금의 공간으로 다른 곳보다 한 단 높게 조성하였고 창호도아자살로 차별화한 특징을 보인다. 서쪽과 동쪽은 신하들의 공간이다. 중앙공간은 양측의 신하들이 북쪽공간에 입어한 임금을 배알하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며, 서쪽과 동쪽의 신하들은 부용정의 귀퉁이 공간을 돌아 남쪽공간에서 중앙공간으로 입실하게 되는 구조로 조영되었다. 결국 부용정은 최소한의 공간으로 편전(便殿)의 기능까지 수행할 수 있도록 설계된 정원건축물인 것이다. 셋째, 부용정의 문화적 가치: 부용정 일원은 세조, 인조, 현종, 숙종, 정조 등 왕들의 사유적인 정원문화가 복합적으로 존재하며 꾸준히 발전된 특징을 보인다. 특히 정조는 선왕들이 조성해놓은 다양한 물리적, 사회적, 상상적 환경 등을 계승하였고 더불어 자신의 왕도정치를 위해 신하들을 후원에 불러들였으며 그 중추적 장소로 부용정을 완성한 것이다. 곧 부용정은 조선왕조의 영속성이 반영된 정원건축물로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할 수 있으며, 공간적으로도 유교사상이 정자에 반영되어 위계가 구분된 독특한 사례로써 왕의 정원에서만 나타나는 특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상정조대 장용영(壯勇營)은 정조 즉위 후에 신변안전(身邊安全)과 왕권강화(王權强化)를 이룩할 수 있도록 뒷받침한 친위부대(親衛部隊)였다. 이는 경호학적 관점에서 볼 때 경호제도 발전과 호위(扈衛) 성과, 경호환경(警護環境)조성의 문화적 가치가 있다. 장용영은 조선 후기의 호위제도의 변화 속에서 정조의 정치적 개혁을 실천해 나가는 데 있어서 합당한 제도로 거듭났다. 인조반정 이후에 역 쿠데타를 방지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호위청(扈衛廳)과 어영청(御營廳) 발족, 그리고 효종 때의 군사력 증강을 목표로 금군을 발전 시켰던 제도들은 임시변통적인 것이다. 그러나 장용영은 숙위소${\blacktriangleright}$장용위${\blacktriangleright}$장용영의 과정을 거치면서 보다 지속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제도로 거듭나 자신의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지키면서 왕권강화와 민생안정에 대한 정치적 포부를 실현하는 데 실질적으로 뒷받침 할 수 있는 친위부대로 발전하였다. 장용영의 제도에는 효율적인 조직과 운영이 내포되어 있다. 장용영 조직의 특성은 통합성, 전문성, 대규모성을 지닌 것으로서 현대경호의 특성을 드러냈다. 장용영의 군사훈련(軍事訓鍊)과 호위(扈衛)는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호위 작용에서도 정적인 신변보호(身邊保護)와 숙소경비(宿所警備)의 임무에 충실했으며, 이에 머무르지 않고 보다 폭넓은 활동의 범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돌발 사태에도 충분히 대비하였다. 그리하여 잦은 능행과 대규모의 화성행차 및 병사들의 훈련 참관 등의 폭넓고 자유로운 활동을 뒷받침할 수 있었다. 장용영은 단순히 군사적 기능만을 발휘한 부대가 아니고 문화적 기능을 발휘하여 왕실과 백성들이 위기를 극복하고 하나가 되어 왕의 행차(行次)에 참여하고 왕과 직접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왕과 병사가 하나가 된 장용영은 정조의 개혁정책을 뒷받침하는 핵심부대로서의 위용(偉容)을 보여줌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국왕과 신하와 백성들이 하나가 되는 경호문화행사(警護文化行事)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King Jeong-jo (正祖) was the 22nd king of Joseon dynasty (朝鮮王朝), who led the golden age of Korean culture during his ruling. This study is on the burial dressing of King Jeong-jo based on the publications during his ruling; such as "Gukjo Sangrye Bopyeon (國朝喪禮補編)", "Chungwan Tonggo (春官通考)", Jeong-jo "Gukjang Dogam Euigwe (國葬都監儀軌)", "Jeongjo Binjeon Honjeon Dogam Euigwe (正祖殯殿魂殿都監儀軌)" and "Jeong-jo Sillok (正祖實錄)", "Gukjo Sangrye Bopyeon (國朝喪禮補編)" was published in 1758. It compiled the funeral protocols of royal court, complementing the shortcomings of protocol documents published till then. "Chungwan Tonggo" was published in 1788, compiling all the protocols and customs practiced during Joseon dynasty in an organized manner. "Jeong-jo Gukjang Dogam Euigwe" and "Jeongjo Binjeon Honjeon Dogam Euigwe", record the burial dressing and the state funeral of King Jeong-jo in detail based on the contents of above protocol publications. In addition, the 'Daeryeom Euidae ', 'Soryeom Euidae', 'Seup Euidae' and 'Mokyok Euidae' that had been actually practiced were studied in detail based on the records in June/July, 1800 in Book 54 'Jeong-jo' of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The timing of King Jeong-jo's state funeral was when the most elaborated and complete protocol books of Joseon dynasty had been published. Therefore, it was possible to explore the solemn and magnificent funeral culture and King's burial dressing in late Joseon dynasty by way of King Jeong-jo's burial dressing.
이 연구는 정조대왕 초장지에서 출토된 석물(박석과 난간석)의 암석광물학적 분석을 통해 채석산지를 해석하고 건릉 석물과의 관계를 과학적으로 검토한 것이다. 정조대왕 초장지에서 출토된 석물은 모두 담회색 세립질 흑운모화강암이고, 석영, 장석, 흑운모를 주성분광물로 함유한다. 이들의 전암대자율은 5.55~12.10(평균 7.00)(SI unit)에 분포한다. 고문헌에 채석산지는 앵봉과 여기산(수원시 고등동)으로 기록되었고, 지표 지질조사에서 앵봉(현 영광아파트) 뒤 노두에서 석물과 유사한 세립질 흑운모화강암을 확인하였다. 노두암석의 대자율은 5.15~7.24(SI unit)이고 암석광물학적 및 지구화학적 특성이 초장지 출토 석물 및 건릉 석물과 동일하였다. 기록상 초장지의 석물은 대부분 건릉 천릉 시 재사용된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박석과 난간석은 다시 사용되지 않고 초장지에 그대로 폐기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효의왕후(정조 비) 승하 후 합장릉 조성 시 봉분의 크기가 커지면서 초장지의 난간석이 크기에 맞지 않아 재사용이 어려웠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연구결과를 통해 18세기 능묘 석물조성에 대한 문헌기록과 과학적 분석 결과를 비교검토할 수 있었으며 관련 연구분야에 기초자료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한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analyze educational functions of Kyujanggak(奎章閣) during King Jeongjo(正祖) and reflect its significance Kyujanggak was established by King Jeongjo in 1776. The main function of Kyujanggak was keeping and managing Eopil(御筆) and it continued to perform what Jiphyeonjeon(集賢殿) had done. Among the functions of Kyujanggak, there found several critical ones that today's educational institution needs to do: 1) library function including collecting, keeping, and utilizing books 2) education of elites like Chogyemoonsin(抄啓文臣) 3) writing and publishing to encourage writing customs(文風振作) 4) the classic-mat lectures(經筵) to facilitate King's learning. Across the ages and in all countries of the world, education is the dynamic force and bulwark, Also, library is the treasure house and center of traditional culture. Especially, Kyujanggak has been estimated to perform the functions of both education and library successfully. The results indicated that the practice of Kyujanggak reminds us that the educational mind and leadership of the top leader of nation is the primary and decisive factor in building a strong culture-nation.
본 웹사이트에 게시된 이메일 주소가 전자우편 수집 프로그램이나
그 밖의 기술적 장치를 이용하여 무단으로 수집되는 것을 거부하며,
이를 위반시 정보통신망법에 의해 형사 처벌됨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게시일 2004년 10월 1일]
이용약관
제 1 장 총칙
제 1 조 (목적)
이 이용약관은 KoreaScience 홈페이지(이하 “당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인터넷 서비스(이하 '서비스')의 가입조건 및 이용에 관한 제반 사항과 기타 필요한 사항을 구체적으로 규정함을 목적으로 합니다.
제 2 조 (용어의 정의)
① "이용자"라 함은 당 사이트에 접속하여 이 약관에 따라 당 사이트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받는 회원 및 비회원을
말합니다.
② "회원"이라 함은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하여 당 사이트에 개인정보를 제공하여 아이디(ID)와 비밀번호를 부여
받은 자를 말합니다.
③ "회원 아이디(ID)"라 함은 회원의 식별 및 서비스 이용을 위하여 자신이 선정한 문자 및 숫자의 조합을
말합니다.
④ "비밀번호(패스워드)"라 함은 회원이 자신의 비밀보호를 위하여 선정한 문자 및 숫자의 조합을 말합니다.
제 3 조 (이용약관의 효력 및 변경)
① 이 약관은 당 사이트에 게시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회원에게 공지함으로써 효력이 발생합니다.
② 당 사이트는 이 약관을 개정할 경우에 적용일자 및 개정사유를 명시하여 현행 약관과 함께 당 사이트의
초기화면에 그 적용일자 7일 이전부터 적용일자 전일까지 공지합니다. 다만, 회원에게 불리하게 약관내용을
변경하는 경우에는 최소한 30일 이상의 사전 유예기간을 두고 공지합니다. 이 경우 당 사이트는 개정 전
내용과 개정 후 내용을 명확하게 비교하여 이용자가 알기 쉽도록 표시합니다.
제 4 조(약관 외 준칙)
① 이 약관은 당 사이트가 제공하는 서비스에 관한 이용안내와 함께 적용됩니다.
② 이 약관에 명시되지 아니한 사항은 관계법령의 규정이 적용됩니다.
제 2 장 이용계약의 체결
제 5 조 (이용계약의 성립 등)
① 이용계약은 이용고객이 당 사이트가 정한 약관에 「동의합니다」를 선택하고, 당 사이트가 정한
온라인신청양식을 작성하여 서비스 이용을 신청한 후, 당 사이트가 이를 승낙함으로써 성립합니다.
② 제1항의 승낙은 당 사이트가 제공하는 과학기술정보검색, 맞춤정보, 서지정보 등 다른 서비스의 이용승낙을
포함합니다.
제 6 조 (회원가입)
서비스를 이용하고자 하는 고객은 당 사이트에서 정한 회원가입양식에 개인정보를 기재하여 가입을 하여야 합니다.
제 7 조 (개인정보의 보호 및 사용)
당 사이트는 관계법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회원 등록정보를 포함한 회원의 개인정보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회원 개인정보의 보호 및 사용에 대해서는 관련법령 및 당 사이트의 개인정보 보호정책이 적용됩니다.
제 8 조 (이용 신청의 승낙과 제한)
① 당 사이트는 제6조의 규정에 의한 이용신청고객에 대하여 서비스 이용을 승낙합니다.
② 당 사이트는 아래사항에 해당하는 경우에 대해서 승낙하지 아니 합니다.
- 이용계약 신청서의 내용을 허위로 기재한 경우
- 기타 규정한 제반사항을 위반하며 신청하는 경우
제 9 조 (회원 ID 부여 및 변경 등)
① 당 사이트는 이용고객에 대하여 약관에 정하는 바에 따라 자신이 선정한 회원 ID를 부여합니다.
② 회원 ID는 원칙적으로 변경이 불가하며 부득이한 사유로 인하여 변경 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해당 ID를
해지하고 재가입해야 합니다.
③ 기타 회원 개인정보 관리 및 변경 등에 관한 사항은 서비스별 안내에 정하는 바에 의합니다.
제 3 장 계약 당사자의 의무
제 10 조 (KISTI의 의무)
① 당 사이트는 이용고객이 희망한 서비스 제공 개시일에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② 당 사이트는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보안시스템을 구축하며 개인정보 보호정책을 공시하고 준수합니다.
③ 당 사이트는 회원으로부터 제기되는 의견이나 불만이 정당하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될 경우에는 적절한 절차를
거쳐 즉시 처리하여야 합니다. 다만, 즉시 처리가 곤란한 경우는 회원에게 그 사유와 처리일정을 통보하여야
합니다.
제 11 조 (회원의 의무)
① 이용자는 회원가입 신청 또는 회원정보 변경 시 실명으로 모든 사항을 사실에 근거하여 작성하여야 하며,
허위 또는 타인의 정보를 등록할 경우 일체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② 당 사이트가 관계법령 및 개인정보 보호정책에 의거하여 그 책임을 지는 경우를 제외하고 회원에게 부여된
ID의 비밀번호 관리소홀, 부정사용에 의하여 발생하는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은 회원에게 있습니다.
③ 회원은 당 사이트 및 제 3자의 지적 재산권을 침해해서는 안 됩니다.
제 4 장 서비스의 이용
제 12 조 (서비스 이용 시간)
① 서비스 이용은 당 사이트의 업무상 또는 기술상 특별한 지장이 없는 한 연중무휴, 1일 24시간 운영을
원칙으로 합니다. 단, 당 사이트는 시스템 정기점검, 증설 및 교체를 위해 당 사이트가 정한 날이나 시간에
서비스를 일시 중단할 수 있으며, 예정되어 있는 작업으로 인한 서비스 일시중단은 당 사이트 홈페이지를
통해 사전에 공지합니다.
② 당 사이트는 서비스를 특정범위로 분할하여 각 범위별로 이용가능시간을 별도로 지정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경우 그 내용을 공지합니다.
제 13 조 (홈페이지 저작권)
① NDSL에서 제공하는 모든 저작물의 저작권은 원저작자에게 있으며, KISTI는 복제/배포/전송권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② NDSL에서 제공하는 콘텐츠를 상업적 및 기타 영리목적으로 복제/배포/전송할 경우 사전에 KISTI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③ NDSL에서 제공하는 콘텐츠를 보도, 비평, 교육, 연구 등을 위하여 정당한 범위 안에서 공정한 관행에
합치되게 인용할 수 있습니다.
④ NDSL에서 제공하는 콘텐츠를 무단 복제, 전송, 배포 기타 저작권법에 위반되는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
저작권법 제136조에 따라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
제 14 조 (유료서비스)
① 당 사이트 및 협력기관이 정한 유료서비스(원문복사 등)는 별도로 정해진 바에 따르며, 변경사항은 시행 전에
당 사이트 홈페이지를 통하여 회원에게 공지합니다.
② 유료서비스를 이용하려는 회원은 정해진 요금체계에 따라 요금을 납부해야 합니다.
제 5 장 계약 해지 및 이용 제한
제 15 조 (계약 해지)
회원이 이용계약을 해지하고자 하는 때에는 [가입해지] 메뉴를 이용해 직접 해지해야 합니다.
제 16 조 (서비스 이용제한)
① 당 사이트는 회원이 서비스 이용내용에 있어서 본 약관 제 11조 내용을 위반하거나, 다음 각 호에 해당하는
경우 서비스 이용을 제한할 수 있습니다.
- 2년 이상 서비스를 이용한 적이 없는 경우
- 기타 정상적인 서비스 운영에 방해가 될 경우
② 상기 이용제한 규정에 따라 서비스를 이용하는 회원에게 서비스 이용에 대하여 별도 공지 없이 서비스 이용의
일시정지, 이용계약 해지 할 수 있습니다.
제 17 조 (전자우편주소 수집 금지)
회원은 전자우편주소 추출기 등을 이용하여 전자우편주소를 수집 또는 제3자에게 제공할 수 없습니다.
제 6 장 손해배상 및 기타사항
제 18 조 (손해배상)
당 사이트는 무료로 제공되는 서비스와 관련하여 회원에게 어떠한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당 사이트가 고의 또는 과실로 인한 손해발생을 제외하고는 이에 대하여 책임을 부담하지 아니합니다.
제 19 조 (관할 법원)
서비스 이용으로 발생한 분쟁에 대해 소송이 제기되는 경우 민사 소송법상의 관할 법원에 제기합니다.
[부 칙]
1. (시행일) 이 약관은 2016년 9월 5일부터 적용되며, 종전 약관은 본 약관으로 대체되며, 개정된 약관의 적용일 이전 가입자도 개정된 약관의 적용을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