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Japanese Colonialism

검색결과 36건 처리시간 0.021초

1960년대 한국의 뮤지컬 수용 역사와 문화제국주의 (Acceptance History of Korean Musical Theatre in 1960s and Cultural Imperialism)

  • 이계창
    • 공연문화연구
    • /
    • 제37호
    • /
    • pp.249-293
    • /
    • 2018
  • 뮤지컬은 유럽의 오페라로 대표되는 서구 음악극 전통에서 시작된 대중예술 장르로서 20세기 미국 브로드웨이를 중심으로 꽃을 피웠으며, 현재 전 세계적으로 공연예술 분야에서 대중의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상업예술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이 장르의 특성 상 드라마의 전개나 캐릭터의 표현 등은 말이나 몸짓이 아닌 음악을 주요 매개체로 사용하며, 그 음악의 스타일은 특정 계층이 아닌 대중의 기호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근대화는 곧 서양화이고 일본이 조선의 개화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일제의 식민주의 음악교육은 조선 민중에게 일본 이데올로기 및 문화를 강제적으로 주입함으로써 일본에의 협력과 순종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가 편찬한 "보통교육 창가집"을 교재로 한 식민주의 음악교육은 한민족의 음악적 정체성이 일본음악 및 서양음악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해방 이후 냉전체재 하에서 미국의 대외정책에 따른 친미적 남한 정부 수립을 위한 자본주의 경제 메커니즘과 더불어 '미8군 쇼 무대'와 '영화'로 대표되는 미국 대중문화, 이 두 가지 요소들의 유입으로 인한 비가시적인 '문화제국주의'의 영향으로 우리의 전통음악은 '국악'이라는 단어에 갇혀 '과거의 음악'이라는 의미로 한정되어지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미국 대중문화의 유입으로 뮤지컬을 접하게 되었고, 우리 전통예술의 현대화를 통한 '건전한 문화'의 보급을 지향한 당시 박정희 정권의 문화정책 기조에 따라 '한국적 뮤지컬'을 지향하는 '예그린악단'이 창단되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예술을 기반으로 현대화 된 공연예술을 만들고자 했던 계획은 1966년 <살짜기옵서예>의 성공으로 가능성을 보였으나, 이후 정권 실세의 후원 중단 등의 이유로 더 이상 주체적으로 운영할 능력을 상실한 관변단체로 전락하는 운명에 처하면서 무산되고 만다. 일제의 식민주의 음악교육과 해방 이후 미국 대중문화의 유입이라는 문화제국주의 책략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한국 뮤지컬의 태동기에 우리의 전통연희 양식이 서양 음악과의 교류, 확장을 통한 자주적인 민족예술로 자리매김하지 못한 1960년대의 상황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것이 21세기 현재 한국 뮤지컬 시장을 서구 라이센스 뮤지컬이 주도하게 된 배경이며, 아울러 서양음악을 기반으로 한 뮤지컬 창작 현실의 주요 원인으로 볼 수 있다.

1920-30년대 한국의 이상적 '신여성' 이미지와 패션 (The Ideal Image and Fashion of the 'New Woman' in Korea in the 1920s and 1930s)

  • 이재윤
    • 복식
    • /
    • 제64권7호
    • /
    • pp.172-183
    • /
    • 2014
  • The term "new woman" (신여성 [Sinyeoseong], 新女性) refers to an idealized image of contemporary women during the so-called modern period in East Asia. In Korea, these "modern girls" were also referred to as modan (毛斷), or "cut-hair", reflecting changes in appearances that rejected the traditional value system in favor of "the new" in everyday life. Although it was used to refer to the perceived educated leaders of this new period, it also had the negative connotation of referring to frivolous women only interested in the latest fashion. The popular discourse on this "new woman" was constantly changing during this early modern period in East Asia, ranging from male-driven women's movements to women-driven liberal and socialist movements. The discourse often included ideals of what constituted female impeccability in women's domestic roles and enlightened views on housekeeping, yet in most cases the "new woman" was also expected to be a good wife and mother as well as a successful career woman. The concept of the "new woman" was also accompanied by an upheaval in women's social roles and their physical boundaries, and resulted in women repositioning themselves in the new society. The new look was a way of constructing their bodies to fit their new roles, and this again was rapidly reproduced in visual media. Newspapers, magazines, and plays had gained immense popularity by this time and provided visual material for the age with covers, advertisements, and illustrations. This research will explore the fashion of the "new woman" through archival resources, specifically magazines published in the 1920s and 1930s. It will investigate how women's appearances and the images they pursued reflected the ideal image of the "new woman." Fashion information providers, trendsetters, and levels of popular acceptance will also be examined in the context of the early stage of the fashion industry in East Asia, including production and distribution. Additionally, as the idea of the "new woman" was a worldwide phenomenon throughout the 19th and early 20th century, the effect of Japanese colonialism on the structure of Korean culture and its role as a cultural mediator will also be considered in how the ideal image of beauty was sought, and whether this was a western, colonial, or national preference.

북한 청동기시대 고고학 연구 경향의 변화와 쟁점 (Changes in Research Trends and Issues Relating to North Korean Bronze Age Archaeology)

  • 이기성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53권3호
    • /
    • pp.184-201
    • /
    • 2020
  • 해방 이후 북한과 남한의 고고학은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오게 된다. 특히 1970년대 이후 급격히 정치성을 띠기 시작한 북한 고고학과 대규모 유적 발굴로 학문적 성장이 가속화된 남한 고고학은 큰 차이를 보이기 시작하며, 이러한 양상은 1990년대 대동강문화의 천명 이후 더 이상 공유되는 부분이 없을 정도의 괴리가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괴리는 '고조선'을 전후한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에 더욱 두드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선사 고고학은 지속적으로 북한 고고학에 시선을 둘 수밖에 없다. 아직도 중요한 연구 주제 중인 '문화의 기원과 계통'을 찾는데 있어 북한의 자료가 주된 연구 대상이지만 그 신뢰성에 의문을 표하는 '이중적인 시선'이 남한의 고고학이 북한 고고학을 바라보는 시선인 것이다. 북한 청동기시대 고고학과 남한 청동기시대 고고학에서 보이는 '괴리'의 많은 부분은 조사 사례의 증가, 학술적인 토론 등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정치적 차이'에 의한 것이다. 그럼에도 북한 선사 고고학의 흐름을 살펴보는 것은 북한 고고학의 정치성을 비판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북한에서 현재 청동기시대를 바라보는 인식과 남한의 인식에 어떠한 차이가 있으며, 이후 북한의 자료를 포함하여 '한반도의 선사문화', 더 나아가 동북아시아의 선사문화를 설명하는데 어떠한 문제점이 있는지를 미리 확인해 두고자 하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지금까지 북한 청동기시대 고고학의 연구 흐름을 살펴보고 동시기 남한 청동기시대 고고학과 비교하여 어떠한 쟁점들이 있는지를 검토하였다.

조선시대(朝鮮時代)의 한국적 가치 연구 (A study on the value of Korean during the Joseon Dynasty)

  • 한성구
    • 한국철학논집
    • /
    • 제39호
    • /
    • pp.85-114
    • /
    • 2013
  • 가치관이란 개인이 자신 및 타인, 사회와 세계, 자연과 우주와 끊임없이 교섭하면서 갖게 되는 태도나 관점을 말한다. 여기에는 주로 어떤 것이 옳은 것이고 바람직한 것이며, 어떤 것을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지에 관한 생각들이 포함된다. 본 논문에서는 조선시대를 주요 시간적인 배경으로 삼아 한국인들이 어떤 부분에 큰 가치를 부여하며 살아왔고, 전통적 가치관이 시대적 환경에 따라 어떤 변용을 거쳤는지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아울러 이를 근거로 현대 사회에서 계승하고 발현시켜야 할 가치 및 의미를 발견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수많은 전통가치나 윤리는 왜곡되거나 파괴되어 기존의 사회문화와 전통문화 전체가 부정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 결과로 드러난 가장 큰 문제는 자의건 타의건 간에 수백 년간 공동체를 이끌어주던 공통의 가치가 사라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공통 가치의 상실은 공동체의 분해와 상실을 초래하게 되었고, 그 결과 우리 민족은 각종 '분열'에 시달리며 개인의 영달과 입신양명, 생존에만 매달려 왔다. 역사 문화적 단절과 그로 인한 정신적 공동화(空洞化) 현상을 겪은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왜곡되거나 변용된 가치와 그것의 본뜻을 모른 채 그릇된 가치를 최선으로 여기고 그것을 향해 질주하는 경향이다. 전통적 가치가 가지고 있는 본래적 의미는 시대를 떠나 보편적인 의미를 던져주는 것이며, 목표를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들에게 삶의 이정표 역할을 할 수 있다. 현대 한국인의 가치를 새롭게 정립하고 추구함에 있어 역사를 반추해 우리 고유의 이상적인 가치의 의미를 자각하고 인식할 수 있다면 동양이냐 서양이냐, 전통이냐 근대냐 등의 해묵은 논의를 넘어서 의미 있는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호남지역(湖南地域)의 왜계자료(倭系資料)와 전방후원형고분(前方後圓形古墳) (The Relics of Wae Lineage and the Keyhole-Shaped Mounds in the Honam Area)

  • 土田純子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51권2호
    • /
    • pp.170-203
    • /
    • 2018
  • 호남지역은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한일 고고 고대사학 연구자 사이에서 항상 큰 관심을 받았던 지역이다. 근래 이 지역에서 왜계 고고자료 발견 사례가 양적 질적으로 급증하고 있기 때문에 선행 연구와 견해를 재검토할 필요가 커지고 있다. 전방후원형 고분은 기존에 13기로 알려졌지만 최근 발견 사례가 17기까지 증가했다. 한 곳에서 3기가 조영된 사실도 새롭게 밝혀졌으며, 또 일본의 고분시대(古墳時代)를 특징짓는 형상식윤(形象埴輪)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호남지역 출토 왜계 고고자료에 대한 선행연구는 특정 자료나 특정 유적 유구에 한정된 사례가 많았다. 본고에서는 호남의 모든 왜계 고고자료를 대상으로 수량 고고자료의 종류 출토 위치를 파악한 후 그 변천을 추적하였다. 시기별 특징이나 변화상 등을 바탕으로 왜와 마한세력의 관계 의도 동향을 문헌 자료 등과 관련시켜 검토하였다. 호남지역 출토 왜계 고고자료는 5세기 전엽부터 증가 및 광범위한 분포를 보여주며 7세기 초까지 이어졌다. 4세기 말~5세기 전엽에는 왜계 무구와 왜계 매장주체부, 5세기 중엽~후엽에는 수혜기(須惠器)(계(系)), 5세기 말~6세기 전엽에는 전방후원형 고분과 왜계 횡혈식석실, 6세기 중엽~7세기 초에는 왜계 무구 석침이 중심을 이루어 시기마다 양상이 변화했음을 알 수 있었다. 4세기 말~5세기 전엽의 왜계 고고자료에 대해서는 이 시기에 집중된 백제와 왜의 왕래 기사를 근거로 외교 사절단을 수행했을 무인계층과의 관련성을 상정했다. 5세기 중엽~후엽에는 수혜기(須惠器)(계(系)) 토기가 호남 내륙부로 확산되었다. 물자의 집적에 유리한 지점에서 주로 출토되는 경향이 엿보인다. 전방후원형 고분의 피장자를 북구주(北九州) 제세력에 속한 왜인을 중심으로 한 교역자 집단으로 해석했다. 전방후원형 고분은 대체로 기본적으로 기존 수장묘가 조영되지 않던 지역에서 특별한 세력 기반 없이 돌연 출현했다. 그러나 재지인의 협조 없이 전방후원형 고분을 축조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는 일본 현지와 호남지역 전방후원형 고분의 구축 기술 차이를 보아도 알 수 있다. 한편 일부 전방후원형 고분은 재지 수장묘와 동시기 아니면 직후에 조영되었다는 점에서 재지 집단과의 밀접한 관련성을 추정할 수 있다. 5세기 초 금관가야가 몰락하자 왜 제국(諸國)은 새로운 교섭 상대로 호남지역을 선택하였다. 그 배경에는 왜에서 구하기 어려운 (지하)자원이나 물자를 확보해야 할 절실한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약 200년에 걸쳐서 사용되고 매장된 호남지역의 왜계 고고자료는 왜인의 다양한 교섭 노력과 관련된 것으로 판단된다.

칠곡 심원정원림의 공간구성과 경관특성 - '심원정 25영(心遠亭 二十五詠)'과 「심원정수석기(心遠亭水石記)」를 중심으로 - (Spatial Composition and Landscape Characteristics of Shimwon-Pavilion Garden in Chilgok - Focusing on 'Shimwon-pavilion Poem of 25 Sceneries' and 「Shimwon-pavilion Soosukgi(心遠亭水石記)」 -)

  • 김화옥;박율진;노재현;신상섭;조호현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 /
    • 제34권2호
    • /
    • pp.27-34
    • /
    • 2016
  • "기헌(寄軒)집"에 실린 "심원정수석기(心遠亭水石記)"의 '심원정 25영'을 바탕으로, 일제강점기인 1937년에 기헌 조병선에 의해 조성되고 향유된 칠곡 심원정원림의 공간구성과 경관특성을 고찰한 본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심원정원림은 북쪽으로는 송림이 있는 '임수형(林藪型)'이자 원림 내부로 구야천이 흐르는 '계류형 별서원림'의 입지 특성을 공유하며 본제(本第)와는 직선거리로 약 400m 이격되어 있다. 2. 북쪽에는 가산(假山)인 학림산을, 동쪽과 서쪽에는 만경류를 올린 취병(翠屛)을, 남쪽으로는 구야천변의 석벽(隱屛)을 포치시키는 등 사방에 '가림'시설을 조성함으로써 위요공간 속에 은일을 추구한 기헌의 정신을 표출하고 있다. 3. 심성을 수양하는 선비의 소우주이자 거처로 조성되고 향유된 심원정원림은 송림사의 경역 내에 위치함으로써 불교사상을 수용하며, 도연명의 전원사상과 시선(詩仙)이라 불리는 이백의 낭만주적 감성을 통한 도가적 삶의 추구 그리고 주자의 성리학적 가치를 실현하는 통섭(統攝)의 장으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4. 심원정 25영 중 5영은 정운루 암수실 위류재 이열당 등의 용도가 다른 부속실과 이를 아우르는 정각인 '장수지소(藏修之所)' 심원정에 의탁되었으며 외원에 부여된 20영은 자연에 이름을 붙인 것 9개, 조성한 것 11개로 나뉘며, 자연에서 얻은 9영은 "석경기"에 기술된 바를 바위에 각인시켰다. 5. 현존하는 실내경물 4영은 편액으로, 원림내 경물 중 5개소는 바위글씨로 그리고 8개소는 표지석으로 각 경물이 인식되도록 의도했으나, 8개 영의 표식은 유실 및 훼철 등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6. 심원정 25영 중 '괴강(槐岡)'에는 학자수를 상징하는 회화나무, '유제(柳堤)'에는 도연명과 줄기찬 생명력을 상징하는 버드나무, '기천(杞泉)'에는 '가족의 단란함'을 상징하는 구기자나무 그리고 '동 서취병(東 西翠屛)'과 '방원(芳園)'에는 만경류와 초본류 등 다채로운 의미를 담는 식물경관이 등장한다. 또한 폭포(은폭(隱瀑)), 소(군자소(君子沼)), 못(양지(湯池)), 샘(기천(杞泉)), 바위를 가운데 두고 갈라 흐르는 물(반타석(盤陀石)) 그리고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수구암(水口巖)) 등 다채로운 수경관이 기도되었다. 7. 심원정원림은 수계 인접형 원림임에도 불구하고 11개 영을 직접 조성하는 등의 적극적인 개입이 두드러진다. 기존의 여타 정자원림이 가깝고 먼 곳에 자연 중심의 경(景)과 곡(曲)의 경물 설정에 충실한 곳이었다면, 심원정원림은 정자를 시점으로 의미 강화된 경물을 취경(聚景)하도록 유도된 적극적인 수경(修景)이 두드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