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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아사바스카 오일샌드 지질특성 (Geology of Athabasca Oil Sands in Canada)

  • 권이균
    • 한국석유지질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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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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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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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오일샌드는 비재래형(unconventional) 석유자원의 하나로서 비투멘(bitumen), 물, 점토, 모래의 혼합물이다. 오일샌드 비투멘은 API 비중이 $8-14^{\circ}$이고 점도가 10,000 cP 이상인, 매우 무겁고 점성이 큰 탄화수소 자원으로서 일반적으로 지표나 천부퇴적층에서 유동성을 갖지 않는다. 오일샌드 비투멘은 주로 캐나다 앨버타주와 사스캐추완주에 분포하고 있으며, 캐나다에만 원시부존량이 1조 7천억 배럴, 확인매장량이 1천 7백억 배럴에 달한다. 대부분은 앨버타주 포트 멕머레이(Fort McMurray) 인근의 아사바스카(Athabasca), 콜드레이크(Cold Lake), 피스리버(Peace River) 지역에 매장되어 있다. 캐나다 오일샌드 저류지층은 아사바스카 지역의 멕머레이층(McMurray Fm)과 클리어워터층(Clearwater Fm), 콜드레이크 지역의 멕머레이층(McMurray Fm), 클리어워터층(Clearwater Fm), 그랜드래피드층(Grand Rapid Fm), 피스리버 지역의 블루스카이층(Bluesky Fm)과 게팅층(Gething Fm)이다. 이들 지층은 하부 백악기 지층으로서 중생대 초-중기에 발생한 북미판과 태평양판의 충돌과 그로 인한 대륙전면분지(foreland basin)의 형성과정에서 퇴적되었다. 분지의 기반암은 복잡한 지형을 갖는 고생대 탄산염암이며, 그 위에 북미대륙 북쪽의 보레알해(Boreal Sea)로부터 현재의 북미대륙 서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전기백악기내해로(Early Cretaceous Interior Seaway)를 따라 해침이 발생하면서 오일샌드 저류지층이 형성되었다. 세 개의 주요 오일샌드 분포지역 가운데 80% 이상의 오일샌드를 매장하고 있는 아사바스카 지역의 저류지층인 멕머레이층과 크리어워터층의 최하부층원인 와비스코 층원(Wabiskaw Mbr)은 전기 백악기 시기의 해침층서를 잘 반영하고 있다. 멕머레이층 하부에는 하성기원의 퇴적층이 발달하고, 상부로 가면서 점차로 조석기원의 천해 퇴적층이 우세해지며, 와비스코 층원에 와서는 의해 세립질 퇴적층이 광역적으로 분포한다. 이러한 해침기원의 상향 세립화 경향은 아사바스카 오일샌드 부존지역에서 일반적으로 관찰된다. 오일샌드 부존지층은 일반적으로 불균질 저류층이며, 주요 저류층은 하성퇴적층이나 에스츄어리(estuary) 기원의 퇴적층에 발달한 하도-포인트 바 복합체(channel-pont bar complex)이다. 이러한 하도-포인트바 복합체는 범람원 및 조수평원 세립질 퇴적층이나 만-충진(bay-fill) 퇴적층과 함께 멕머레이층을 형성한다. 멕머레이층 상부에 오는 와비스코 층원은 주로 외해 세립질 퇴적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멕머레이층을 대규모로 침식하는 하도사암층이 지역적으로 발달하기도 한다. 캐나다에서 오일샌드는 주로 노천채굴(surface mining)과 심부열회수(in-situ thermal recovery) 방식으로 생산한다. 50 m 미만의 심도에 묻혀있는 오일샌드는 노천채굴 방식으로 회수하여 비투멘 추출(extraction)과 개질(upgrading)과정을 거쳐 합성원유(synthetic crude oil)로 생산된다. 반면에 150-450 m 심도에 묻혀있는 오일샌드는 주로 심부열회수 방식으로 비투멘을 회수하여 비교적 간단한 비투멘 블렌딩(blending)과정을 통해 유동성을 증가시켜 정유시설로 운반한다. 심부열회수 방식으로 오일샌드를 개발할 경우 주로 스팀주입중력법(SAGD: Steam Assisted Gravity Drainage)이나 주기적스팀강화법(CSS: Cyclic Steam Stimulation)이 사용된다. 이러한 방법들은 저류층에 스팀을 주입하여 저류층 내의 온도를 상승시킴으로써 비투멘의 유동성을 증가시켜 회수하는 기술을 사용한다. 따라서 오일샌드 저류층 내부의 스팀전파효율을 결정하는 저류지층의 주요 지질특성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효과적인 생산설계와 효율적인 생산을 수행할 수 있다. 오일샌드 생산에 영향을 미치는 저류층의 주요 지질특성에는 (1)비투멘 샌드층의 두께(pay) 및 연결성(connectivity), (2) 비투멘 함량, (3) 저류지역 지질구조, (4) 이질배플(mud baffle)이나 이질프러그(mud plug)의 분포, (5) 비투멘 샌드층에 협재하는 이질퇴적층의 두께 및 수평연장성(lateral continuity), (6) 수포화층(water-saturated sand)의 분포, (7) 가스포화층(gas-saturated sand)의 분포, (8) 포인트바의 성장방향성, (9) 속성층(diagenetic layer)의 분포, (10) 비투멘 샌드층의 조직특성 변화 등이 있다. 이러한 지질특성에 대한 고해상의 분석을 통해 보다 효과적인 오일샌드 개발이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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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貞陵) 이장과 광통교(廣通橋) 개수를 통해 본 조선 초기 지배 이데올로기의 대립 (Collision of New and Old Control Ideologies, Witnessed through the Moving of Jeong-regun (Tomb of Queen Sindeok) and Repair of Gwangtong-gyo)

  • 남호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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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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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4-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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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정릉(신덕왕후릉)의 축조와 이장에 얽힌 논란은 조선 초기, 신구(新舊) 지배 이데올로기 사이의 충돌이 잘 드러난 사례이다. 태조의 경처였던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은 도성 안에 조성되지만 태조 사후, 태종에 의해 도성 밖으로 이장되고 그곳에 남아 있던 석물들은 청계천의 광통교를 보수하는데 쓰인다. 야사에서는 태종이 강씨를 저주하기 위해 도성 밖으로 능을 옮기고 남은 석물들로 광통교를 만들어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했다고 전한다. 태조 말년, 강씨와 태종은 대립하던 관계였으나 태조가 왕으로 옹립되기 전까지는 오히려 정치적 동반자에 가까웠다. 정릉이나 광통교와 관련된 실록의 기록은 더 담백하다. 정릉의 천장은 능묘가 도성 안에 있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는 의정부의 상언을 따른 것이다. 광통교 개수를 위해 정릉을 격하하고 이장시켰다는 주장에는 사실 관계가 반영되어 있지 않다. 논자는 광통교 개수에 정릉의 석물이 재사용된 것에 대해 당시 도성 안팎에서 건축자재소요량이 급증하여 효율적인 조달 필요성이 대두되었을 가능성을 상정하였다. 정릉이 도성 안에 조성되었다가 다시 도성 바깥으로 이장된 원인은 태조와 태종이 가졌던 사상적 배경의 이질성에서 찾았다. 태조는 유교국가의 통치자였으나 죽은 왕비를 위해 도성 내에 원찰과 무덤을 조성한다. 여기에는 불교의 힘을 빌려 죽은 신덕왕후의 권위를 위의하고 지지세력을 규합하고자 한 노림수가 있었다. 원의 다루가치 집안에서 태어나 지방군벌로 성장한 이성계는 높은 유학적 소양을 가지지는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오히려 호불적 성향을 띄는 구체제의 인물이었다. 반면 태종 이방원은 고려 말 과거시험에 급제했던 엘리트 유생이었으며 주자학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유교국가에서 도성이 가지는 상징성에 대한 이해가 더 깊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삼국시대 이후, 율령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 시스템이 정립된 이래로 도성 바깥에 무덤을 만드는 경외매장의 원칙은 거의 예외 없이 지켜져 왔다. 정릉은 태조 개인의 강한 의지로 도성 내부에 조성되지만 왕 이전에 유학자였던 태종에게 이러한 모습은 바람직하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태종은 즉위 후, 주도적으로 도성 재정비를 추진하는데 이는 '예치'를 강조하는 유교 이데올로기를 한양도성의 경관에 명확하게 구현하고자 한 의지의 발현으로 보여진다. 정릉의 이장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 아래 진행되었던 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대순사상의 인존(人尊)에 대한 화용론적(話用論的) 해석 (A Transcendental Pragmatic Interpretation on the Notion of 'Injon' in Daesoon Thought)

  • 백춘현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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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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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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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인존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대순진리회의 고유 사상이다. 지금까지 인존에 대한 종교적, 사상적 해석이 매우 다양하고 풍부하게 이루어졌음에도 기존의 해석들은 대체로 '천지'와 '인간'의 관계를 대립적 관계로 전제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이는 인존의 의미를 상대화함으로써 후천세계가 갖는 대대적 상생의 의미를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 글은 '인존'의 의미를 화용론적 관점에서 해석하고자 하는 목적을 갖는다. 화용론은 언어의 의미를 언어와 그 지시대상, 그리고 화자의 3중 구조의 맥락에서 해석하려는 담론 철학적 관점이다. 어떤 발화의 의미를 그 의미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그 발화가 이루어진 시·공간적 환경뿐만 아니라 그 발화를 구성하는 대화 참여자들의 관계, 장소, 시간, 상태 등 언어행위의 구체성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인존에 대한 기존 해석은 의미론적 관점에서 접근한 결과로 나타난다. 의미론적 관점에서는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 그 의미가 지시하는 의미대상이다. 이런 관점은 언어 의미의 필증적 이해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써, 이해의 정확을 추구하려 하는 장점은 있으나, 의미해석 범위를 지시대상에만 한정함으로써 언어 의미에 대한 일면적, 단면적 접근에 머무른다는 한계를 갖는다. 이 글에서는 의미론적 해석을 넘어 화용론적 관점에서 인존의 의미를 어떻게 볼 수 있는지 연구한다. 대순사상에 따르면, 선천세계는 포원과 상극에 따르는 참혹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서구적 물질문명과 이기심, 배타주의가 지배하는 선천의 세계는 홍수, 가뭄, 역병, 산불 등 갖가지 자연재해에 의해 인간이 고통 받는 세계이다. 이에 반해 후천세계는 선에 따르는 평화와 생명, 풍요의 세계라고 본다. 모든 생명은 죽음을 극복하고 불로불사하며 상극은 해원되고 상생과 평화, 조화의 세상이 열린다. 번뇌와 질명, 고통과 죽음이 사라지고 빈부와 신분의 차별이 없는 지상 선경의 낙원 세상이다. 대순사상의 인간관은 그 천지관에 따라 구분된다. 선천세계의 인간과 후천세계의 인간은 연속성을 갖는 동시에 구분된다. 선천세계의 인간은 인간개조를 통해 후천세계의 인간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선천세계의 인간은 특징은 포원과 상극에 지배되는 가사적 존재라는 점이다. 선천의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지 못하는 고립적이고 개별적인 존재이다. 선천의 인간은 불행하고, 고통에 빠진 죽음의 존재이다. 대순사상은 후천의 인간은 선천의 인간과 다르다고 본다. 후천의 인간은 해원을 통해 함께 살아가는 상생 존재이다. 후천의 인간은 다양한 선천 생명들의 대대적 포월을 통해 나타나는 삼계 생명의 신인격적 존재이다. 후천의 인간은 개체적 유한성을 넘어 생명적 신인격을 대표한다. 대순사상의 인존은 단지 개체적 인간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대순사상에서 선천세계는 인류와 신명계로 나누어져 있지만, 개벽을 통한 후천세계에는 이들 세계가 서로 상생한다. 대순사상에서 '인존' 의 '인'은 살아있는 인간생명뿐 아니라 명부생명, 금수생명, 귀신생명, 혼백생명 등 인류와 신명계의 모든 생명이 해원하여 함께 사는 삼계 생명의 신인격을 구상한다.

봉수당진찬(奉壽堂進饌)의 무대와 공연 요소 분석 (Analysis of the Stage and Performance Elements for Bongsudang-jinchan Banquet in Joseon Dynasty)

  • 송혜진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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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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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3-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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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고에서는 1795년 화성 행궁에서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열린 봉수당진찬의 의례와 악무를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 및 "정조실록", "홍재전서(弘齋全書)"등의 봉수당진찬 의례기록과 <화성능행도병>등의 도상자료, 일기체의 한글가사 작품인 이희평(李羲平)의 <화성일기(華城日記)>등의 자료를 중심으로 분석하여 무대와 공연요소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잔치의 주인공에게 충(忠)과 효(孝)의 의미를 담은 음악과 춤, 꽃과 음식, 술과 글을 예를 갖춰 올리는 궁중연향은 예악(禮樂)의 원리에 바탕을 둔 국가의례로서 조선왕조 500년 동안 고유한 음악문화를 형성해왔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면서 '예'라는 상징적이며 총체적인 틀 안에서 상호 유기적인 관계에 놓여있던 연례의 음악과 춤들이 개별 악곡과 춤으로 해체되어 '작품화'되었고. 궁중음악과 춤의 철학이나 원리, 시공간에 대한 이해는 현저히 축소된 채, 음악과 춤의 전통은 형식과 예술적 표현 중심으로 변화해왔다. 1990년대 이후, 궁중의례 전통의 재현(再現)을 목적에 둔 연구와 행사가 추진되면서, 이와 연관된 공연예술 활동도 점차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며, 특히 봉수당진찬은 다양한 방식으로 현대무대화 하고 있다. 그러나 원전(原典)의 재현(再現) 및 복원(復原) 문제, 완성도 및 예술성에 대한 문제는 과제로 남아있으며, 지금까지는 "원행을묘정리의궤"에 수록된 의주의 외형적 재현에 관심을 두었을 뿐, 무대조건이나 공연요소에 중점을 둔 심도있는 분석은 부족하였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본 연구에서 무대구성과 공연요소 중심으로 분석해 본 결과, 조선시대 궁중연향 중에서 유일하게 '행궁'에서 개최된 봉수당진찬은 '예악의 정치'를 의례와 악무로 구현하는 궁중연향의 기본적인 면모를 보여주면서도 '군신동락(君臣同樂)'의 친화의 비중이 높은 연향이었음을 밝혔다. 내연과 외연의 성격이 섞인 봉수당진찬에서는 가림막을 최소화하여 신분의 차서(次序)와 남녀유별(男女有別)의 원리를 충족시키면서도 삼면에 둘러친 휘장 안에 외빈의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술과 음식, 음악과 춤을 다 같이 공유하도록 배치되었다. 또한, 연향공간의 상징성을 내포한 차일을 백관들의 공간에 치고, 임금이 솔선하여 선찬(膳饌)과 산화(散華)를 명함으로써 군신동연(君臣同宴)의 의미와 범위를 확장시킨 점을 알 수 있었다. 이는 봉수당진찬이 '예악의 원리'가 강하게 드러나는 여느 궁중 연향에 비해 '정(情)'을 나누는 화친(和親)에 기반을 두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봉수당진찬에서는 여느 내연에서보다 임금의 역할과 비중이 높았으며, 특히 의주 외의 기록으로 전하는 여러 가지 상황 - 7작 이후에 정조가 신하들을 가까이 불러 나눈 대화, 신하들에게 음식과 꽃을 내림, 잔치를 주제로 직접 시를 짓고, 신하들에게도 이에 화답하게 한 일 등-은 의주에 따른 단선적인 연향의 진행에 변화를 주고, 연향의 의미를 확장시키는데 한 몫 하였다. 이밖에, 봉수당진찬의 주악과 정재의 구성을 분석해 본결과 연향에서 여러 인물들의 대화와 움직임이 매우 절제된 것은 여느 궁중연향과 비슷하지만, 춤과 음악을 통해 구현된 소리와 색채감은 매우 다채로웠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봉수당진찬에서는 정조 이전에 치러진 내연에 비해 다양한 종류의 정재를 상연하였고, 이 중에는 새롭게 초연된 레퍼토리도 있었으며, 또 기존의 공연을 새롭게 재구성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선유락>이나 <검무> 등, 지방 관아 및 민간의 레퍼토리를 궁중연향으로 수용한 점, 풍류방에서 즐겨 연주되기 시작한 생황을 <학무> 와 연계한 것은 전통적인 규범과 관습에 매이지 않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궁중연향의 '열린구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