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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자료를 중심으로 한 상주백자 연구 (A study on the white porcelain in Sangju focus on the literature data)

  • 김종태
    • 디자인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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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9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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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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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경북 상주지역은 조선초기에 왕실에 소용되는 상품자기의 절반을 차지하였던 곳임에도 불구하고 타 지역에 비해 연구가 대단히 미비한 실정이었다. 이에 상주지역에 관련된 여러 사료들을 살펴보고 상주지역의 한국도자사적의 위치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전기(前期)는 청자(靑磁), 분청사기(粉靑沙器), 백자(白磁), 상감백자(象嵌白磁), 청화자기(靑畵白磁)가 생산되었다. 세종의 명에 의하여 1424$\sim$1432년 $\ulcorner$세종실록$\lrcorner$(世宗實錄) $\ulcorner$지리지$\lrcorner$(地理志)가 편찬되었고 성종대(成宗代)에는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이 설치되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더욱이 조선왕조로 교체되는 격변의 상황까지 겹쳐 강진의 요업(窯業)은 폐요되었고, 강진에서 종사하던 장인들은 보다 안전한 곳을 찾아 전국으로 흩어졌다. 이러한 지역의 하나가 상주의 중모현 기미외리와 추현리(湫縣里)(세종 당시의 지명, 현 모동면)이다. 또한 성리학(性理學)을 근간으로 하는 조선시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백자제작에 필요한 원료의 조건을 갖춘 곳의 한 곳이 경상북도 상주지역이었으므로 강진의 장인들이 이곳으로 이동했으리라 사료된다. $\ulcorner$태종실록$\lrcorner$(太宗實錄)에는 경상도 상주의 중모, 화령 등의 특정지역을 열거하면서 왕실소용기명 제작을 위해 중앙에서 감독관이 파견된 기록으로 보아 15세기 초의 상주의 자기 제작상황을 알 수 있다. $\ulcorner$태종실록$\lrcorner$(太宗實錄) $\ulcorner$지리지$\ulcorner$ (地理志)에는 추현리와 이미 외리를 언급하면서 상주의 자기제작의 위상을 짐작하는 기록이 언급되면서 전국의 상품의 절반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ulcorner$경상도지리지$\lrcorner$(慶尙道地理志)에는 상주가 8곳으로 1/3의 자기 생산을 담당하고 있었다. $\ulcorner$경상도지리지$\lrcorner$(慶尙道地理志)에는 $\ulcorner$세종실록$\lrcorner$(世宗實錄) $\ulcorner$지리지$\lrcorner$(地理志)와 동년대에 동일한 목적으로 찬술되었음을 알 수 있다. $\ulcorner$경상도실록지리지$\lrcorner$(慶尙道實錄地理志)에는 $\ulcorner$세종실록$\lrcorner$(世宗實錄) $\ulcorner$지리지$\lrcorner$(地理志)와의 비교를 해보면 상 중 하품의 통합 9개소가 삭제되어 있고, $\ulcorner$동국여지승람$\lrcorner$(東國與地勝覽) 에서는 자기소와 도기소의 위치가 완전히 삭제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첫째, 15세기 중엽 경제적 태평과 함께 백자의 수요 생산이 증가하자 군신의 변별(辨別)과 사치를 이유로 강력하게 규제하여 백자의 확대와 발전에 걸림돌이 되었다. 둘째, 동기(銅器)의 대체품으로 자기를 만들어 충당해야할 강제성 당위성 상실로 인한 자기수요 감소를 초래하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셋째, 경기도 광주에서 백자관요가 운영되었으므로 지방인 상주지역에도 더 이상 백자를 조달받을 필요가 없이, 일반 지방관아와 서민들의 일상용기 생산으로 전락하여 소규모화 되었을 것이라고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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