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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탕침지법과 석회유황합제 처리가 유기농 밀 종자의 발아와 소독효과 미치는 영향 평가 (Assessment of Hot Water Treatment and Lime Sulfur Mixture on Germination and Disinfection Efficacy of Organic Wheat Seeds)

  • 김민정;박원성;심창기;이재형
    • 한국작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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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8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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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71-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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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본 연구는 온탕침지법과 석회유황합제 처리가 유기농 조경밀, 금강밀, 새금강밀 및 백강밀 종자의 발아와 소독에 미치는 영향을 구명하고자 수행하였다. 4종의 밀 품종은 소독 전 종자의 발아율이 평균 86.3±2.5~87.5±2.9%이었으나 곰팡이와 세균에 의한 감염 정도는 각각 평균 22.5±2.9~38.3±2.5%, 18.8±4.8~23.8±2.5%로 나타났다. 4종의 밀 품종에 대한 온탕침지 조건에 따른 종자의 발아율은 무처리에 비해 동일하거나 높았으며 온탕침지 온도와 처리 시간이 증가할수록 곰팡이와 세균의 오염도가 감소하였다. 밀 종자에 대한 최적 온탕침지 조건 55℃에서 10분간 처리하는 것이 무처리에 비해 발아율이 평균 90.0±0.0~97.5±2.9%로 동일하거나 높았고 곰팡이와 세균의 소독효과는 각각 평균 83.3~93.5%와 100%로 높았다. 또한, 0.2%와 0.4% 석회유황합제의 처리시간에 따른 밀품종별 발아율과 곰팡이, 세균의 소독효과를 조사하였더니, 처리 시간의 경과에 따라 밀 품종 간에 발아율의 차이를 보이지 않았으나 무처리(86.3~87.5%)에 비해 발아율이 높았고 최적 처리 시간은 7분 또는 10분으로 곰팡이와 세균의 오염도를 평균 90.0~96.0% 감소시켰다. 따라서 4종의 유기농 밀 종자 소독을 위해 적용한 온탕침지와 석회유황합제의 처리 조건에 따라 발아율과 소독효과의 차이는 있으나 55℃, 10분 온탕침지 처리를 하거나 0.2% 또는 0.4% 석회유황합제를 10분간 처리하는 것이 무처리에 비해 발아율을 증진하고 종자에 오염된 곰팡이와 세균의 밀도를 감소시켜 친환경적인 밀 종자 소독기술로 농업현장에서 활용도가 높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국 구곡원림(九曲園林)의 하천 유로 및 수계별 분포 특성 (A Study on the Characteristics of Stream Flow Path and Water System Distribution in Gugok Garden, Korea)

  • 노재현;최영현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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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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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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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본 연구는 실존이 확인된 국내 구곡원림을 대상으로 문헌조사, 현장조사 그리고 도상작업 등을 통해 구곡을 구성하는 유수 방식과 유로 연장거리를 측정하는 한편 유역 및 하천차수 그리고 하천등급을 조사 분석함으로써 수계 상 구곡원림의 유역분포 및 하천형태학적 특성을 밝혀 향후 구곡원림의 보전관리 및 활용을 위한 기초자료로 삼고자 한 것이다.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실존이 확인된 총 93개소 구곡원림 중 계류를 따라 내려가면서 전개되는 내림식(하향식) 형태의 구곡은 서울의 이계구곡을 비롯하여 총 11개소(11.8%)로 나타났다. 둘째, 구곡별 유하거리 분석 결과, 경북 김천의 옥류동구곡(일명 남산구곡)이 최단길이인 0.44km로 나타난 반면, 경북 성주군과 김천시에 소재한 무흘구곡의 유하거리는 31.1km로 나타나 가장 최장으로 드러났다. 한국 구곡원림의 평균 유하거리는 6.24km였으며 표준편차는 4.63km로 나타나 곡류형과 계곡형 간의 편차가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14개소(15.1%) 구곡원림은 댐 건설로 인해 일부가 수몰된 상태로 밝혀졌다. 셋째, 구곡원림의 수계역 분석 결과, 낙동강수계가 52개소(55.9%)로 압도적이었으며, 다음으로 한강수계 27개소(29.0%), 금강수계 9개소(9.7%) 그리고 영산강·섬진강수계 5개소(5.4%) 순으로 확인되었다. 한강권역에 입지한 구곡원림은 모두 한강수계로 분류되었으며 낙동강에 입지한 구곡원림은 낙동강남해권수계 5개소와 낙동강동해수권수계 2개소 등 7개소를 제외한 하천은 모두 본류인 낙동강수계로 분류되었다. 넷째, 구곡원림이 입지한 유로의 하천차수를 종합한 결과, 본류 구간을 구곡의 거점 유수로 삼은 구곡은 한강수계의 3개소, 낙동강수계의 5개소, 금강수계의 2개소 그리고 영산감/섬진강수계의 1개소 등 총 11개소(11.8%)였으며 제1지류에는 35개소(37.6%), 제2지류에는 28개소(30.1%), 제3지류에는 17개소(18.3%)로 나타났다. 그리고 제4지류에 입지한 구곡원림은 한강수계의 철원 용화천에 설정된 태화오곡과 낙동강수계인 영천 횡계천에 설정된 횡계구곡으로 분석되었다. 다섯째, 구곡원림이 입지한 하천의 하천등급 분석 결과, 전체 구곡원림이 입지한 하천의 등급은 국가하천 13개소(14.0%), 지방1급하천 7개소(7.5%), 지방2급하천 73개소(78.5%)로 밝혀졌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산률(山律) 선우영(鮮于英) 필(筆) <금강산 묘길상도> (The First North Korean Painting in the Collection of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Myogilsang on Diamond Mountain by Seon-u Yeong)

  • 이성미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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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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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7-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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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산률(山律) 선우영(鮮于英)(1946~2009) 필(筆) <금강산 묘길상도>(2000)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게 된 최초의 북한 화가 작품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묘길상도> 가운데 가장 큰 종축(縱軸) 형식으로 크기가 세로 130.2cm, 가로 56.2cm에 이르는 지본수묵진채(紙本水墨眞彩) 그림이다. 선우영에 관하여는 최근 우리나라에도 수차례 개최된 전시회에서 비교적 잘 알려졌다. 그는 1989년 공훈예술가, 1992년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는 등 이른바 '진채세화(眞彩細畫)'의 대가로서 북한을 대표하는 화가가 되었고, 60여 점의 작품이 북한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그림의 주제인 <묘길상> 마애불은 금강산 내금강 지역에 있는 만폭동 골짜기의 높이 40m 벼랑 아래에 15m 정도 크기로 새겨진 고려시대의 마애불이다. 이 마애불의 명칭은 마사연(摩詞衍) 동쪽에 있었던 묘길상암(妙吉祥庵)에서 유래한다. 마애불의 오른쪽 옆 바위에는 직암(直庵) 윤사국(尹師國)(1728~1709)이 쓴 '묘길상(妙吉祥)'이라는 큼직한 음각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필자는 불상의 수인(手印)을 오른손과 왼손이 모두 엄지와 약지(藥指)가 만나는 하품하생인(下品下生印)과 비슷하지만 왼손이 아래를 향하고 있지 않고 오른손과 거의 직각을 이루며 복부에 놓여있으므로 설법인(說法印)으로 보았다. 즉 이 불상은 설법인을 결하고 있는 석가상(釋迦像)이라고 결론지었다. 선우영의 <금강산 묘길상도>는 조선시대 같은 주제의 그림들과 비교하면 불상의 자연 환경, 즉 벼랑 아래 감실에 새겨진 불상이라는 점과 불상이 인간의 모습이 아닌 암각상임을 수묵진채로 표현한 유일한 그림이다. 구도와 색감이 자아내는 초현실주의적 분위기 또한 이 <금강산 묘길상도>의 특징이라 하겠다. 이 그림을 포함한 선우영의 대부분 작품이 진채로 바위 질감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그림이지만 그의 만년작 <파도>(2008)와 같이 전통적의 수묵화에 가까운 그림도 그렸던 폭넓은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화가이다.

1788년 김응환의 봉명사경과 《해악전도첩(海嶽全圖帖)》 (Kim Eung-hwan's Official Excursion for Drawing Scenic Spots in 1788 and his Album of Complete Views of Seas and Mountains)

  • 오다연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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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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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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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해악전도첩(海嶽全圖帖)》은 금강산과 해금강, 관동팔경을 그린 60점의 실경산수화와 51편의 기문(記文)으로 이루어진 화첩으로 규모와 화풍에 있어 보기 드문 작품이다. 그림의 특징은 화면을 가득 채운 구성과 남종화풍을 따르면서도 거칠고 파격적인 화법, 산석(山石)의 기하학적이고 입체적인 표현 등이다. 1973년의 특별전, '한국미술이천년(韓國美術二千年)'을 처음으로 화첩의 일부만 공개되었던 작품은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에서 그 전모가 공개되었다. 《해악전도첩》이 김응환(金應煥)(1742~1789)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은 화첩의 마지막 장에 쓰여진 관지(款識)와 현재 행방이 묘연한 <칠보대>에 찍힌 '복헌'이라는 도장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응환을 지시하는 관지와 도장은 모두 후대에 더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본 연구는 화첩을 둘러싼 여러 요소를 고찰하여 제작자를 재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해악전도첩》 제작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18세기 금강산 기행사경도의 전통과 봉명사경을 살펴보았다. 정선(鄭敾)(1676~1759)의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1711)을 비롯하여 심사정(沈師正)(1707~1769), 김윤겸(金允謙)(1711~1775), 최북(崔北)(1712~1786 이후), 강세황(姜世晃)(1713~1791) 등은 조선 후기 최고의 여행지였던 금강산을 유람하고 기행사경도를 제작하였다. 화가들은 이전의 전통을 계승하여 내금강의 명승명소를 주로 그렸고, 자신들이 경험한 장소를 새롭게 시각화하였다. 이러한 기행사경도는 여행을 기념하며 동행자나 후원자를 위해 여러 장면을 담을 수 있는 화첩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개별적인 금강산 기행사 경도의 제작이 증가하는 가운데 1788년에 정조(正祖)(재위 1776~1800)가 도화서 화원인 김응환과 김홍도(金弘道)(1745~1806 이후)에게 영동9군과 금강산의 명승(名勝)을 그려오도록 명한 일은 공적 업무였다. 정조는 이들의 관계 및 지방관으로서의 경력, 서로 다른 화풍 등을 고려해 봉명사경의 화원으로 선발하였다. 김응환과 김홍도는 영조(英祖)(재위 1724~1776)조부터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하며 선후배이자 동료로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나아가 이들은 영남 지역의 찰방(察訪)으로서 지방관의 업무를 수행한 경험이 있었다. 두 화원의 화풍은 서로 달라 김홍도는 부드럽고도 섬세하게 필선을 운용한 반면, 김응환은 굳세면서도 울창한 풍치를 잘 표현했다. 두 명의 화원은 각자의 개성으로 봉명사경 기간 동안 100여 폭의 초본을 그렸고, 이를 선별하여 60~70여 폭의 화첩 혹은 두루마리를 완성하였다. 이들의 그림은 18세기 전중반에 내금강과 관동팔경 위주로 제작된 금강산 기행사경도의 전통을 더욱 풍부하게 했고 영동과 외금강의 명승명소를 새롭게 발견하며 소재를 확장시켰다. 현재 《해악전도첩》은 원(元), 형(亨), 이(利), 정(貞) 4책으로 이루어졌는데, 원(元), 형(亨)책은 내금강의 그림 29점이며 이(利)책은 외금강의 장면 17점, 정(貞)책은 해금강과 관동팔경 14점으로 구성되었다. 비단 위에 그려진 각 그림은 기하학적으로 산석을 표현했으며, 연백으로 금강산의 암봉을 흰색 혹은 회청색으로 표현했다. 《해악전도첩》의 구도와 화법은 정선, 강세황, 심사정, 정충엽(鄭忠燁)(1725~1800 이후), 김응환, 김홍도의 화법과 비교할 수 있어 18세기 후반의 시대 양식을 갖는다. 특히 화첩의 일부 그림은 김홍도의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1788)과 구성 및 회화적 모티프가 매우 유사하여 두 화첩간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반면에 <영랑호>, <해산정>, <월송정> 등은 김홍도의 그림과는 구별된다. 이를 통해 화가가 김홍도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도 자신만의 개성적인 화첩을 제작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해악전도첩》에는 다른 화첩에는 등장하지 않는 <자운담>, <백운대>, <안문점망비로봉>, <백정봉>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각 장면마다 경물의 특징을 구체적이고 참신하게 묘사하였다. 특히, 화가는 산석을 기하학적으로 표현하고 선과 면을 도드라지게 하여 입체감을 강조하였다. 그는 남종화풍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화법을 확립했고 이를 자유자재로 운용하면서 화면에 동적인 리듬감을 부여했다. 이처럼 60점의 그림은 거칠고 파격적으로 보이지만 나름의 질서 안에서 일관성을 견지하고 있다. 본고는 화법과 봉명사경의 정황을 종합해 《해악전도첩》의 제작자를 김응환으로 추론하였다. 나아가 김하종(金夏鍾)(1793~1878 이후)의 《풍악권(楓嶽卷)》(1865년 이후)과의 친연성은 《해악전도첩》의 화가를 김응환으로 추정한 또 하나의 이유였다. 《해악전도첩》은 김홍도의 《해산첩》과는 달리 후대에 미친 영향력이 미비한데 김하종의 《풍악권》만이 《해악전도첩》의 소재와 화법을 따르고 있다. 김하종은 《풍악권》에서 50년 전, 춘천부사 이광문(李光文)(1778~1838)을 위해 제작한 《해산도첩》(1816)과는 전혀 다른 화법을 구사했다. 그는 김응환의 《해악전도첩》과 유사한 구성과 회화적 요소, 화보식 인물표현을 따르면서 사의적인 분위기를 강조하였다. 개성김씨의 일원이자 김응환의 종손인 김하종은 가문에 전해지는 《해악전도첩》류의 그림을 감상했고 이를 새롭게 번안했다고 추측된다. 화첩에 포함된 51편의 기문은 그림 다음 장에서 그려진 장소를 설명하고 있어 각 그림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도움을 준다. 기문은 그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앞의 장소로부터의 이동 정보, 이름의 유래, 지형적 특징, 관련 정보 등이 서술되었다. 이와 같은 백과사전식 혹은 지리지와 같은 기문은 19세기 전반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금강산 화첩류에 더해졌다. 《해악전도첩》의 백화암 기문에는 1845년의 암자에 대한 중건 내용이 기록되어, 기문의 연대를 추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김하종에게 《풍악권》을 주문한 이유원(李裕元)(1814~1888)도 각 그림에 글을 붙였는데 이 글들은 김응환의 화첩에 포함된 기문 51편과 내용 및 서술방식이 흡사하다. 이유원의 기문은 《해악전도첩》의 기문이나 그 초고(원본)와 관련성이 높지만 두 화첩의 기문 필사의 선후관계를 판정하는 데에는 좀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해악전도첩》은 김홍도의 봉명사경 초본 및 김홍도의 영향으로 제작된 19세기의 금강산 화첩과는 구별된다. 이 화첩은 화원 김응환의 회화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지평을 넓히고 18세기 후반 실경산수화의 또 다른 층위를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