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Gaining Knowledge by the Study of Things

검색결과 8건 처리시간 0.023초

주자 격물치지를 통한 인성교육적 요소와 원리 고찰 (An Implication of Moral Education in Zhu-zi's doctrines- Focused on the 'gaining knowledge by the study of things(格物致知)')

  • 이연정
    • 한국철학논집
    • /
    • 제52호
    • /
    • pp.365-392
    • /
    • 2017
  •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본질적으로 당면한 과제는 실상 인간의 자질, 인성에 관한 문제이다. 이는 현 교육의 실상과 현행법을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인성'에 대한 동양철학에서의 연구는 양명학의 입장에서 이루어져 왔으나, 사실 주자학에서 그 실제적인 교육원리를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바로 육왕이 비판하는 주자의 '격물치지' 공부이다. 본 연구는 지(知)공부로 알려져 있는 격물치지가 인성교육에 있어 적용되는 실제적인 원리를 모색할 수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본 연구는 주자학의 수양공부특성인 존덕성(尊德性)과 도문학(道問學)의 관계를 고찰하고, 도문학의 주요 방법인 격물과 치지를 검토함으로써 주희공부의 특성을 살펴보도록 한다. 그리고는 격물과 치지의 과정과 원리를 통해 인성 교육적 요소와 교육현장에서 적용될 수 있는 원리를 탐색함으로써 이 시대에 적합한 인성 교육적 측면에서 격물치지 공부의 의의를 드러내고자 한다.

개항기 격물치지학(格物致知學)(science)에 관한 연구 (A Study of the Science on Gaining Knowledge of the Study of Things (格物致知學))

  • 박정심
    • 한국철학논집
    • /
    • 제30호
    • /
    • pp.59-86
    • /
    • 2010
  • 본 논문은 '격물치지'란 개념의 의미변화를 분석함으로써 '근대'를 인식하는 사상적 전환을 고찰하고자 하였다. 격물치지란 성리학의 사유를 해명하는 주요개념어였다. 그러나 근대공간에서 격물치지는 science의 번역어로서 자리잡았다. 성리학의 격물치지는 천리를 체인하는 방법으로서 인간의 도리(道理) 및 가치판단의 영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근대적 함의를 지닌 격물치지학(格物致知學)은 객관사물에 대한 과학적 탐구에 국한된 것으로서, 결과적으로 성리학적 사유를 해체하는 중요한 기제였다. 넓게는 자연과학을 좁게는 물리학(物理學)의 의미로 사용된 격물치지학은 서구 근대 자연과학 및 기술 적극 수용해야하는 주장을 뒷받침하였다. 개화파는 서구의 격물치지학이 바로 그들의 문명과 부국강병의 근본적인 원동력이라고 파악했기 때문에, 서구처럼 문명국이 되기 위해서는 격물치지학을 적극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격물치지학을 수용한다는 것은 곧 그들의 앞선 문명성을 새로운 전범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였다. 성리학의 해체와 문명의 수용은 곧 근대(近代)와 전근대(前近代)를 가르는 기준이기도 하였다. 격물치지학은 자원화된 만물에 대한 과학기술적 탐구였다. 이것은 성리학의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유기적 연관성을 탈각함으로써 가치판단영역과 분리된 기술적 발전을 추구하였다. 서구열강이 앞선 과학기술의 물리력을 앞세워 제국주의침략을 자행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과학기술을 수용하는 것이 절박한 시대문제이긴 했다. 그러나 문명화에 함몰되어 서구 근대문명에 대한 도덕적 성찰을 도외시함으로써 근대문명이 지닌 야만적 침략성을 비판할 수 있는 근거를 상실했다. 더 나아가 서구근대를 진보적 전범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이 야만적 근대 너머를 상상할 수 있는 여지마저 봉쇄함으로써 스스로 '결핍된 타자'로 전락하였다. 개화파가 결과적으로 친일파가 되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몰주체적(沒主體的)인 문명관(文明觀)에 기인한 것이다.

근대 '격물치지학(格物致知學)[science]'에 대한 유학적 성찰 (Neo-Confucian Study of Modern 'Science of gaining knowledge by the study of things[格物致知學])

  • 박정심
    • 한국철학논집
    • /
    • 제43호
    • /
    • pp.141-170
    • /
    • 2014
  • 근대 science를 '격물치지학'으로 번역한 것은 객관사물[만물(萬物)]에 내재한 보편적 천리[리일(理一)]를 과학적 자연법칙으로 국한시켜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근대적 문명국이 신학의 효력 때문이라고 판단한다면, 신학(新學)을 수용하는 것이야말로 근대적 문명에 이르는 지름길일 수밖에 없었다. 신학의 정수(精髓)였던 격물치지학[science]은 전근대적인 유학의 도덕(道德)문명에서 서구적 근대문명[civilization]으로 '보편문명의 전이(轉移)'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서구근대적 문명인식과 과학적 사유방식은 인간 역시 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여기게 하였다. 몸에 관한 과학적 탐구는 해부학에서 생리학 및 인종학 등으로 발전하였다. 인간에 관한 과학적 탐구는 사회다윈주의 수용과 맞물려 더욱 공고화되었다. 사회다윈주의적 현실인식은 그들처럼 되는 것[문명화]만이 가장 시의적절한 선택인 것처럼 오도(誤導)하였으며, 더 나아가 강자의 침략을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제하였다. 그러나 과학적 보편주의는 곧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침략을 정당화했다는 점에서 폭력적 야만이었다. 격물치지학의 근대적 폭력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가능하게 했던 사유가 바로 유학이었다. 당시 서구적 문명과 삶이 곧 진보요 발전이 되면서 유학은 전근대적 삶의 양식으로서 낡고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문명성과 폭력성을 동시에 지닌 야누스적 타자에 대한 주체적 대응을 가능하게 하는 이념으로 작동하기도 하였다. 이항로가 성리학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서양의 과학기술을 양화론(洋禍論)으로 규정하였다면, 박은식은 과학기술이 군국주의의 도구로 전락했던 측면을 비판하였다. 그동안 우리는 서구적 근대성을 전범으로 삼아 전통철학의 의미를 해석하는데 치중하였다. 한국 근대를 서구문명에 대한 모방과 번역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은 식민주의를 재생산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 근대 유럽중심주의의 폐해를 넘어서 한국 근대를 제대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유학적 자산은 재음미할 필요가 있다. '무성무물(無誠無物)'은 과학기술이 삶을 도리어 황폐화시키는 기술만능주의시대에 문명다움 즉 이시대의 바람직한 인간다움과 기술다움을 성찰할 수 있는 도덕성의 기반을 제공할 것이다. '바른 몸-사람다움[성신(誠身)]'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이해와 인간이 마주하고 선 '참된 자연'에 대한 인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성(誠)] 때문이다. 삶의 맥락에서의 바른 몸은 성(誠)하고자 함[성지(誠之)]을 통해 시중(時中)을 실현하는 주체로 거듭나야, 비로소 물(物)과도 바른 관계맺음이 가능할 것이다.

「양화소록(養花小錄)」과 『장물지(長物志)』 화목류에 나타난 문인원림 취미 비교 (A Comparative Study on 「Yanghwasorok」 and 『Zhangwuzhi』 - Focused on the Taste of Plants in Scholar's Garden, Korea and China -)

  • 박희성;윈쟈옌
    • 한국조경학회지
    • /
    • 제44권3호
    • /
    • pp.79-93
    • /
    • 2016
  • 본 연구는 한국과 중국의 대표 원림서(園林書) 가운데 하나인 "양화소록(養花小錄)"과 "장물지(長物志)"를 비교하여 한중 원림에 나타난 문인의 취향을 이해하고자 했다. 주요 비교 대상은 화목류이며,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강희안은 화목을 기르고 감상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자신의 완성에 두었지만, 문진형(文震亨)은 은일의 삶을 실천하는 수단으로 화목을 이용하였다. 둘째, 강희안이 화목을 기르는 것은 성리학적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바탕으로 한 인간의 덕성 함양이지만, 문진형은 화목의 형태나 배식방법을 통해 '아(아취(雅趣))'를 구현하였다. 셋째, 양국 문인의 화목 선호도는 많은 부분에서 유사하지만, 화목을 화분에 두고 감상하는데 있어서는 어느 정도 차이를 보인다. 일례로 화분을 선택하거나 배치하는데 있어서만 하더라도 강희안에게는 소박함과 담백함이, 문진형에게는 화려함과 세련됨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문인 정신의 표본이 되었던 송대(宋代) 문인의 완상(玩賞) 취미에 비춰볼 때, 강희안은 내면의 정신세계를 계승한 반면, 문진형은 '문인다움'을 시각적 이미지로 표출시켰다.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의 대학인식(大學認識)과 사회적 반향(反響) (Seogye Park Se-dang's the understanding of Daehak(大學) and its social reflection)

  • 김세봉
    • 동양고전연구
    • /
    • 제34호
    • /
    • pp.89-112
    • /
    • 2009
  • 본 논문는 기왕(旣往)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의 "사변록(思辨錄)" 중 "대학(大學)"에 대한 인식과 그에 따른 사회적 반향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서계 박세당은 조선 중기에 해당하는 17세기 중후반에 주로 활동한 인물로 그의 독창적인 경학관으로 인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배척받았다. 그러나 그가 사문난적으로 지탄을 받은 것은 "사변록"을 둘러싸고 이루어지지만 본질은 그가 <이경석신도비문>을 짓는 과정에서 송시열을 비판한 것이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는 주자가 대학을 3강령 체제로 보았던 것과 달리 2강령 체제를 주장하였으며, 격물치지에 있어서도 주자의 설을 수용하지 않고 양명과 유사한 해석을 가하였는가 하면 대학의 장구도 자의대로 개정하였다. 그가 지은 "사변록"이 쟁점화된 것은 그것이 발표된 뒤 수십 년을 지난 뒤, 그것도 이경석비문이 나온 후라는 점에서 다분히 정치적 의도 하에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대청관(對淸觀)이나 예송(禮訟) 따위에서 현실적인 입장을 견지하여 송시열계와 대척적인 입장에 섰던 점도 그에 대한 공격의 빌미가 될 수 있었다. 경문의 해석상 서계의 견해가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는 나름대로 학문 본래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그는 당시 경직화된 주자성리학에 매몰되지 않은 채 독자적 노선을 걸으며 실질적 학문에 정진하고 후학을 양성함으로써 영정(英 正)시기에 만개되는 실학의 가교적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명재 윤증의 율곡성리학의 수용과 변전(變轉) (A Study on Acceptance and Modification in Yulgok Neo-Confucianism by Myungjae Yoon Jeung)

  • 이영자
    • 한국철학논집
    • /
    • 제42호
    • /
    • pp.39-70
    • /
    • 2014
  • 명재 윤증의 성리학은 율곡의 성리학을 그대로 계승하거나 변형하는 형태로 전개된다. 본고에서는 이를 율곡성리학의 수용과 변전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율곡성리학의 수용에서는 율곡성리학의 특징인 '이기지묘(理氣之妙)', '이통기국(理通氣局)', '기발이승일도(氣發理乘一途)'의 측면에서 명재가 이러한 논리를 철저히 계승하고 있음을 밝히었다. 하지만 명재는 율곡성리학을 자신만의 독창적인 설법을 제시하며, 율곡의 학설을 변전 계승하고 있다. 첫째, 명재는 리의 주재성을 강조한다. 이것은 '이용사(理用事)'라는 용어를 통해 도심, 인심, 인욕을 세 단계로 이해하는 데서 분명히 드러난다. 둘째, 명재의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은 주자나 율곡의 격물치지의 큰 틀 안에서 말하고는 있지만, 그 논법에 있어서는 양명학적 요소를 엿볼 수 있다. 셋째, 명재는 도심의 '기발'이나 인심의 '기발', '기용사'를 모두 부정적인 의미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그것은 그가 리의 주재성을 고려하여 '기용사(氣用事)'를 이해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결국 명재는 기호유학자로서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와 '이기지묘'적 입장에서 성리설을 더욱 정합화하고자 하였던 의도로 율곡성리학을 변전하여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사변적인 성리논변 자체를 꺼리고, 실심에 기반하여 실공을 추구하고자 한 인생철학과, 선현들의 학설은 이미 풍부하므로 그 책들을 읽고 진지를 실천할 일이지, 그와 관계없이 저술에 힘쓰는 것은 무실의 학문이 아니라고 말했던 학문관과 일치한다. 다만 그 성향이 율곡학파 내에서도 '리'의 주재성을 가장 많이 강조한 학자군으로 분류되면서, 기호 소론이라는 새로운 학맥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것이 기호성리학에서 명재성리학이 갖는 가장 중요한 의의이다.

별업(別業) '유회당' 원림 하거원(何去園)의 의미경관 해석과 환경설계기법 (A Study on the Meaning Landscape and Environmental Design Techniques of Yoohoedang Garden(Hageowon : 何去園) of Byulup(別業) Type Byulseo(別墅))

  • 신상섭;김현욱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46권2호
    • /
    • pp.46-69
    • /
    • 2013
  • 권이진(1668~1734)의 문집(유회당집)에 수록된 기문에 근거하여 별업형 별서 유회당 원림(하거원)의 의미경관과 환경설계기법을 추적하였는바, 첫째, 유회당 권이진은 대전 보문산 남쪽 무수동 마을 뒷동산 일대에 20여 년 동안 3단계에 걸쳐 선묘, 별업, 원림, 강학처 등 별업형 별서원림을 조성했다. 즉, 초창기 마을 뒷동산에 부친의 묘를 자리 잡아 별업(유회당)을 조성했고, 중반기에 연못(납오지), 원림(반환원), 선묘를 보호하고 후손의 강학을 위한 여경암과 거업재 등을 조성했으며, 후반기에 유회당을 증축하고, 동쪽 영역을 확충하여 하거원 원림을 완성했다. 둘째, 풍수적 입지 체계하의 무수동 마을에 자리 잡은 유회당 별업은 본제 살림집(안동 권씨 종가), 별업(유회당), 선묘소, 하거원(원림), 여경암(강학처) 등 별업형 별서가 갖추어야 할 공간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셋째, 유불선(儒佛仙)에 기반한 의미경관 요소가 작용되었는데, (1) 부모님 추모, (2) 가문 화합, (3) 절개, (4) 덕, (5) 고매한 인간 염원, (6) 상서로움, (7) 은일자의 삶, (8) 가문 번영과 학문 발전, (9) 선조의 은혜, (10) 선경세계, (11) 묘역보존, (12) 불로장생의 염원 등을 들 수 있다. 넷째, 선영 묘역을 조성한 후 13년에 걸쳐 조성한 하거원은 계류를 따라 3개의 연못이 어우러진 수경원을 조성했으며, 5개의 대(臺)와 3곳의 대숲, 그리고 석가산 등을 갖추어 선경의 이상세계를 구축하였다. 다섯째, 소나무, 단풍, 철쭉, 진달래, 감나무, 대나무, 버드나무, 석류, 사계화, 산당화, 왜철쭉, 복숭아, 연꽃, 국화, 작약, 모란, 장미, 벽오동, 무궁화, 배롱나무, 자두와 살구, 매화, 반송, 잣나무, 회양목, 단내 등 수 많은 조경식물종을 도입하여 시정(詩情)을 통한 낭만성, 의인화를 통한 상징성과 이상향 표출, 사계절 경색을 고려한 다양성 등을 꾀하였다. 여섯째, 경관석의 활용은 자연암석을 그대로 이용하는 진경(眞景)기법, 수경요소와 연계, 석연지와 화계 등을 이용한 점경물 기법, 의미경관의 진수를 보여주는 축경형 석가산기법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수경관의 특징은 자연계류와 지형조건(동쪽계곡)을 고려한 물의 적극적 활용, 계류를 따라 원림의 각 공간을 리듬감 있게 물길로 연계하는 생태적 코리도 역할, 활수담, 몽정, 호수와 복수 등 철학적 가치를 연계시킨 의미경관의 대입, 물성을 이용한 청각과 시각 등 이목구비(耳目口鼻)의 오감만족 체험 공간화 등을 들 수 있다.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회화심미(繪畵審美) 고찰 (A Study on the Painting's Aesthetic of Gongjae Yoon Duseo)

  • 김도영
    • 문화기술의 융합
    • /
    • 제7권1호
    • /
    • pp.175-183
    • /
    • 2021
  • 조선 후기 해남(海南) 출신의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는 숙종년간 활동한 선비화가로서 조선 중기에서 후기로 교체되는 전환기에 조선 후기 사실주의 회화의 선구자로서 그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 그는 남인(南人)의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당쟁에 휘말려 출세길을 접고 서화와 학문에 몰두하였다. 조선 후기가 시작되는 18C는 실학(實學)이 대두되고 민족주의에 대한 자각으로 진경(眞景)시대가 열린 시기였다. 이러한 때 실학사상을 예술세계에 접목하여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이며 현실개혁적(現實改革的) 심미의식을 발휘하여 서민풍속화 개척, 서양화법의 적용, 사실주의적 기법 추구, 남종문인 화풍 도입 등을 도모하였다. 철저한 학고(學古)를 통해 변통(變通)을 도모했던 그의 회화관은 학(學)·식(識)의 학문과 공(工)·재(才) 기예적 요소를 두루 갖추어야 화도(畵道)를 이룰 수 있다는 형신(形神) 겸용을 강조하였다. 그는 다양한 화목을 두루 섭렵하였는데, 특히 인물화는 이형사신(以形寫神)의 사실주의 표현을 심미 특징으로 한다. 대표작인 「자화상(自畵像)」은 극사실적 묘사력과 구도의 혁신성이 탁월하며, 자신의 울분을 비장감있게 전신사조(傳神寫照)한 파격적 실험정신이 돋보인다. 그의 산수화는 형사적 진경과 신사적 관념을 융합하여 형상으로써 도를 아름답게 구현한 망적지적(忘適之適)한 이형미도(以形媚道)를 이루었다. 한편 개방적 사고로써 다양한 서민 생활을 소재로 삼은 서민풍속화는 이형사진(以形寫眞)의 실득(實得)으로 파격을 도모하였는데, 이는 부패한 권력에 대한 소극적 항거이자 애민정신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후 그의 화풍은 장남 윤덕희(尹德熙), 손자 윤용(尹愹)에게 가전되어 전해져 조선 후기 서화예술의 변화와 부흥을 선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