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D-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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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 시지(試紙)의 가공 사례 연구 - 이만기(李晩耆) 시권(試卷)을 중심으로 - (A Case Study on the Processing of Siji(試紙) in the Mid-19th Century - Focusing on Lee Mangi's Sigwon(試卷) -)

  • 전지연;오준석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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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7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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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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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조선시대 과거 응시자들이 제출한 답안지 혹은 채점지를 시권(試卷)이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시지(試紙)는 응시자 본인이 마련했다. 당시 종이는 규격 제품으로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크기 면에서나 가공 면에서 시지의 통일성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조선의 닥지는 낮은 불투명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시권의 특성상 지면이 부족할 경우 뒷면까지 작성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종이 가공법이 필요했다. 먹선이 매끄럽게 그어지도록 도침(搗砧)을 하거나 종이 표면에 가공을 하기도 했는데, 이와 다른 특이한 가공법을 적용한 19세기 시지가 있어 이번 연구를 진행하였다. 특이한 시권은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1848년 이만기(李晩耆) 시권으로, 시지의 종이 사이에서 두껍게 도포된 불투명한 백색 물질이 발견되었다. 적외선분광광도계, 형광X-선분광기, 광학 및 편광현미경, 전자현미경 등 성분 분석을 통해 이 백색 물질은 쌀 전분으로 판단되었다. 이러한 분석 결과로부터, 이만기 시지는 쌀가루를 물에 수침하여 단백질을 상당량 제거한 후, 미량의 단백질이 포함된 습전분을 종이 사이에 도포하여 시지를 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시지 재현 실험을 통해 이러한 가공법으로 재현한 시지는 두껍고 백색도 및 불투명도가 높음을 확인하였다. 이는 당시 구하기 힘든 종이를 여러 장 사용하지 않아도 양면 사용이 가능한 양질의 종이를 얻을 수 있게 고안된 제작법으로 추정된다. 본 연구에서는 <이만기 시권(민속 71745)>만으로 시지 사이의 가공 물질을 밝혔으나, 이는 조선시대 시지 가공의 여러 가지 가공법 중의 하나로 보인다. 추후 유사 가공의 시지가 더 발견되어 시지 가공법에 대한 폭넓은 연구가 진행되길 기대한다.

Shoes from Pinet to the Present

  • June, Swann
    • 한국복식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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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복식학회 2001년도 19th International Costume Association Cong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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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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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
  • For those unfamiliar with the shoe world, Pinet (1817-1897) was a contemporary of Worth, the great Parisian couturier. So I look at the glamour shoes and the world of haute couture, and indeed the development of the named designer. That is a concept we are all familiar with now. So it is not easy to comprehend the lack of names for the exquisite work before 1850. Straightway I have to say that the number of noted shoe designers is far fewer than famous dress designers, but I will introduce you to some of them, against the background of contemporary shoe fashions. Franc;ois Pinet was born in the provinces (probably Touraine) in 1817, two years after the end of the Napoleonic Wars. His father, an ex-soldier, settled to shoemaking, a comparatively clean and quiet trade. It had a tradition of literacy, interest in politics, and was known as the gentle craft, which attracted intelligent people. We should presume father would be helped by the family. It was usual for a child to begin by the age of 5-6, tying knots, sweeping up, running errands and gradually learning the job. His mother died 1827, and father 1830 when he was 13, and at the time when exports of French shoes were flooding world markets. He went to live with a master shoemaker, was not well treated, and three years later set out on the tour-de- France. He worked with masters in Tours and Nantes, where he was received as Compagnon Cordonnier Bottier du Devoir as Tourangeau-Ia rose dAmour (a name to prove most appropriate). He went on to Bordeaux, where at 19 he became president of the local branch. In 1841 he went to Paris, and in 1848, revolution year, as delegate for his corporation, he managed to persuade them not to go on strike. By now the shoemakers either ran or worked for huge warehouses, and boots had replaced shoes as the main fashion. In 1855 Pinet at the age of 38 set up his own factory, as the first machines (for sewing just the uppers) were appearing. In 1863 he moved to new ateliers and shop at Rue ParadisPoissoniere 44, employing 120 people on the premises and 700 outworkers. The English Womans Domestic Magazine in 1867 records changes in the boots: the soles are now wider, so that it is no longer necessary to walk on the uppers. There is interest in eastern Europe, the Polonaise boots with rosette of cord and tassels and Bottines Hongroises withtwo rows of buttons, much ornamented. It comments on short dresses, and recommends that the chaussure should correspond to the rest of the toilet. This could already be seen in Pinets boots: tassels and superb flower embroidery on the higher bootleg, which he showed in the Paris Exposition that year. I think his more slender and elegant Pinet heel was also patented then or 1868. I found little evidence for colour-matching: an English fashion plate of 1860 shows emerald green boots with a violetcoloured d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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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Barcode of Life Database System (KBOL)

  • Kim, Sung-Min;Kim, Chang-Bae;Min, Gi-Sik;Suh, Young-Bae;Bhak, Jong;Woo, Tae-Ha;Koo, Hye-Young;Choi, Jun-Kil;Shin, Mann-Kyoon;Jung, Jong-Woo;Song, Kyo-Hong;Ree, Han-Il;Hwang, Ui-Wook;Park, Yung-Chul;Eo, Hae-Seok;Kim, Joo-Pil;Yoon, Seong-Myeong;Rho, Hyun-Soo;Kim, Sa-Heung;Lee, Hang;Min, Mi-Sook
    • Animal cells and syste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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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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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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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A major concern regarding the collection and storage of biodiversity information is the inefficiency of conventional taxonomic approaches in dealing with a large number of species. This inefficiency has increased the demand for automated, rapid, and reliable molecular identification systems and large-scale biological databases. DNA-based taxonomic approaches are now arguably a necessity in biodiversity studies. In particular, DNA barcoding using short DNA sequences provides an effective molecular tool for species identification. We constructed a large-scale database system that holds a collection of 5531 barcode sequences from 2429 Korean species. The Korea Barcode of Life database (KBOL, http://koreabarcode.org) is a web-based database system that is used for compiling a high volume of DNA barcode data and identifying unknown biological specimens. With the KBOL system, users can not only link DNA barcodes and biological information but can also undertake conservation activities, including environmental management, monitoring, and detecting significant organisms.

입암산과 백암산의 식물상 (Floristic study of Ibamsan Mt. and Baekamsan Mt.)

  • 선은미;손현덕;박성배;김우남;임형탁
    • 식물분류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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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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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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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전라남도 장성군과 전라북도 정읍시, 순창군에 위치한 입암산과 백암산의 관속식물상을 조사하고 분포가 확인된 주요식물에 대해 논의하였다. 1990년 이후 채집되어 전남대 생물학과 표본실(CNU)에 수장된 표본에 근거하여 관속식물목록을 작성하였다. 입암산과 백암산에서는 116과 403속 687종 16아종 58변종 8품종의 총 769분류군이 조사되었다. 한국특산식물로는 매미꽃, 변산바람꽃 등 총 24분류군이었으며, 산림청 지정 희귀식물로는 애기천마, 노랑붓꽃 등 15분류군이 확인되었다.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II급 식물인 진노랑상사화, 대흥란, 노랑붓꽃을 포함하여 14종의 적색목록 식물이 확인되었으며, 이 중에는 멸종위기(endangered species, EN) 범주의 진노랑상사화, 대흥란, 애기천마와 취약(vulnerable, VU) 범주의 백양꽃, 노랑붓꽃, 꼬마은난초, 꼬리말발도리가 있다. 환경부지정 식물구계학적 특정식물종으로는 V등급종인 노랑붓꽃 등 4분류군, IV등급종인 털조장나무 등 9분류군, III등급종인 산꽃고사리삼 등 28분류군, II등급종인 피나물 등 22분류군, I등급종인 홍지네고사리 등 69분류군이 확인되었다. 귀화식물로는 생태계교란식물인 애기수영과 미국쑥부쟁이를 포함하여 총 14과 35속 37분류군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즉흥과 환상: 보베 제작소의 《그로테스크》 태피스트리 (Improvisation and Fantasy: Beauvais Grotesque Tapestry)

  • 정은진
    • 미술사와시각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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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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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6-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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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논문은 수수께끼처럼 여겨진 보베 제작소의 ${\ll}$그로테스크${\gg}$ 태피스트리의 주제와 의미를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연구의 대상은 게티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판에게 봉헌함>, <악사와 무희>, <낙타>로 이를 그로테스크(grotesque) 장식, 시누아즈리(Chinoiserie) 모티브, 그리고 배경이 되는 세노그라피(scenography)로나누어 분석했다. <판에게 봉헌함>은 라파엘로의 ${\ll}$신들의 승리${\gg}$의 영향이 나타나지만 아라베스크와 공존하는 선적인 특징이 강조된 베렝의 <그로테스크>의 디자인을 따른 점에서 특징적이다. 또 <악사와 무희>의 경우 중국풍의 자기, 직물, 그리고 태피스트리 가장자리에 위치한 중국인이 주목된다. 특히 황색 피부로 묘사된 중국인은 당시 유럽인이 바라본 중국에 대한 시선을 드러낸다. 18세기 중국풍의 유행은 책보다 무대예술을 통해 유행하게 되는데, 배우 브리겔라가 등장하는 <낙타>는 이 태피스트리가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무대임을 분명하게 한다.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특징은 대본이 없는 '즉흥성'과 음악과 춤과 같은 장르의 혼합에 있다. 따라서 ${\ll}$그로테스크${\gg}$ 태피스트리는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무대를 태피스트리라는 평면에 옮긴 것이다. 아울러 원근법적 소실점을 탈피한 수평적인 무대장식은 섭정기라는 시대상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그로테스크, 시누아즈리, 세노그라피는 모두 현실과 분리된 '환상'이다. 따라서 ${\ll}$그로테스크${\gg}$ 태피스트리는 마치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대본이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특별한 내러티브적인 주제나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 무대 위의 즉흥과 환상을 재현한 것이다.

6·25전쟁 전사자 유품의 과학적 보존: 지상작전사령부 소장 지역유품 중심으로 (Scientific Preservation of the Relics left by the Fallen Heroes of the Korean War: Focusing on the Local Relics Kept by the Ground Operations Command)

  • 박민선;오승준;이호연;위광철
    • 보존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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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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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4-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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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국방부 유해발굴단을 통해 발굴된 지역 유품 중 지상작전 사령부 전시관에 소장된 7건(정화제병, 독수리문양 단추, 계급장, 반합, M1 Grand-총기손질도구, 카빈완탄, 탄통)의 6·25 전사자 유품에 대하여 과학적 분석 및 보존처리를 진행하였다. FT-IR 분석 결과 정화제병 내부 잔존물이 Trisodium phosphate와 유사 스펙트럼으로 확인되어 전쟁 시 식수 및 식품 정화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었으며, 3차원 디지털 촬영기법을 통해 육안으로 관찰이 어려운 탄통의 각인된 명문을 확인하였다. 또한 현미경 및 육안 관찰 등을 기초로 한 상태조사를 진행하여 각각의 유품에 대한 보존처리 방향성을 수립하고 안정적인 처리를 진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는 향후 다양한 전쟁 유품에 대한 보존처리 방향성 정립을 위한 기초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분할주조법을 이용한 고대 철불의 재현실험 및 주조법 연구 (A Study on the Recreated Experiment and Casting Method of Ancient Iron Seated Buddha by Spilt Casting Method)

  • 박준영;정다연;한민수;이주완;조남철
    • 보존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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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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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4-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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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국립춘천박물관 소장 철조석가불좌상(본관 1971)을 기초로 재현실험을 시행하여 분할 주조법을 연구하였다. 불상의 3D 스캔 데이터를 활용해 1/2 모형으로 축소 제작한 후 기존 연구 결과를 토대로 거푸집제작, 주조 등을 실시하여 불상을 제작하였다. 거푸집의 외부는 친모래와 산청토를 3:4의 비율로, 내부는 친모래와 산청토를 1:3의 비율로 배합하여 제작한 다음 불상을 주조하였다. 주조된 철불을 통해 다양한 주조결함을 관찰할 수 있었으며, 원불상과 유사한 형태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재현된 철불의 표면 관찰 결과 베이닝, 유동불량, 외부수축공, 피하기공, 표면핀홀, 형 어긋남 등의 주조결함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는 철조석가불좌상에서 보이는 주조결함의 특징과 유사하다. 미세조직은 나뭇가지 모양의 Dendrite 조직과 Pearlite 조직이 확인되었으며, Cementite 조직 사이에서 검은색의 Graphite가 관찰되었다. 본 연구는 철불의 전통주조기술과 제작기법을 위한 실험연구로서 고대 대형 주조기술을 알아볼 수 있는 기초데이터로 활용될 것으로 본다.

원각사종(圓覺寺鐘)에서 보신각종(普信閣鍾)으로 -조선시대 탈불교화의 일례- (Transforming the Wongaksa Bell[Buddhist Bell] to the Bosingak Bell[Court Bell]: An Example of the Debuddhismization during the Joseon Dynasty)

  • 남동신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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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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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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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보신각종은 호불군주 세조가 즉위 10년을 맞이하여 한양 도성 한복판에 원각사를 건립하면서 그곳에 봉안하고자 1468년에 조성한 범종(梵鐘)이었다. 현재 보신각종은 타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손상되었는데, 그것은 원각사종에서 보신각종으로의 역사적 변천을 잘 보여준다. 필자는 본고에서 보신각종에 가해진 인위적 훼손에 주목하여, 누가, 언제, 왜 훼손하였으며, 그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를 살펴보았다. 먼저 제1장에서는 관련되는 선행 연구성과를 검토하여 필자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점 및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특히 가장 주된 논점인 보신각종과 원각사종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학설사를 검토하여, '보신각종=원각사종'의 관점에서 필자가 논의를 전개함을 밝혔다. 이어서 제2장에서는 세조가 원각사종을 조성하게 된 배경을 검토하였다. 구체적으로 조선 초에 왕명으로 조성한 종들을 조종(朝鍾)과 범종(梵鐘)으로 나눈 다음, 조종 4구-태조의 종루종, 태종의 돈화문종, 세종의 광화문종, 세조의 사정전종-와, 범종 3구-세조의 용문사종, 흥천사종(또는 정릉사종) 및 원각사종-를 만든 시기순으로 정리하였다. 요컨대, 세조는 만년에 원각사종을 조성하면서, 거기에 한 마음으로 임금과 부처가 소리로써 백성을 교화하겠다는 의미를 부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제3장에서는 보신각종에 보이는 인위적 훼손의 흔적을 면밀하게 고찰하였다. 먼저 보신 각종의 현상을 관찰한 다음, 이를 보신각종을 전후하여 조성한 흥천사종(1462) 및 봉선사종(1469)과 비교하여, 범종의 구성 요소 가운데 무엇이 얼마나 훼손되었는가를 추적하였다. 훼손된 구성 요소는 다시 불교적 요소-견대(肩帶)의 복련(伏蓮), 보살입상 4구, 최항(崔恒)이 지은 종명(鐘銘)-와, 비(非)불교적 요소-주종 관계자 가운데 도제조(都提調) 명단-로 나누어진다. 전자는 원각사종에서 불교 문자와 상징이 지워졌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를 '불교지우기'라 명명하고 그 이념적 요인으로 동시대 유자(儒者)들의 맹렬한 벽불론(闢佛論)을 주목하였으며, 후자는 정치적 요인으로 연산군의 갑자사화를 지목하였다. 그리고 보신각종의 인위적 훼손에는 이념적 요인과 정치적 요인이 동시에 작용하였다는 점에서, 그 시기를 갑자사화(1504년)부터 연산군 퇴위까지로 추정하였다. 마지막으로 제4장에서는 범종으로서의 원각사종이 조종으로서의 보신각종으로 바뀌는 과정을 추적하고, 그 변신의 의미를 종소리의 상징성에 초점을 맞추어 음미하였다. 1468년 최종적으로 완성된 원각사종은 1504년까지 36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만 예불(禮佛)을 위한 범종으로서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1504년 원각사가 폐사되면서 그 역할도 끝났다. 1536년에는 원각사지에서 남대문으로 옮겨졌으며, 1594년 11월 다시 타종할 때까지 전후 90년 동안 침묵 속에 방치되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의 병화로 종루종이 파괴되면서 원각사종은 조종으로 재탄생하였으며, 명동 고개를 거쳐 1619년 종루로 이전되었다. 이때부터 명실상부한 종루종[보신각종]으로서 1908년 일제가 타종을 중단시킬 때까지 300년 가까이 매일 새벽[파루(罷漏)]과 저녁[인정(人定)]마다 규칙적으로 타종되었다. 원각사종[범종]에서 보신각종[조종]으로의 변신은, 종소리가 상징하는 바가 부처의 소리에서 임금의 소리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원각사종이 보신각종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단적으로 드러난 '불교지우기'는, 조선 전시기에 걸쳐 불교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요컨대, 보신각종에서 확인되는 불교지우기야말로 조선시대 한국 사회의 탈불교화를 역설한다 하겠다.

동아시아 주변해역에서의 TOPEX/POSEIDON 고도 자료와 현장 해수면 자료의 비교 (Comparison of Sea Level Data from TOPEX/POSEIDON Altimeter and in-situ Tide Gauges in the East Asian Marginal Seas)

  • 윤용훈;김기현;박용향;오임상
    • 한국해양학회지: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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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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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7-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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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 동아시아 해역에서 TOPEX/POSEIDON(T/P) 위성 고도계로부터 관측된 해수면 자료의 객관성을 검증하기 위하여 위성궤적에 시 ${\cdot}$ 공간적으로 가장 상응하는 10개소 조위관측소 자료(tide gauge data: TG)를 택하여 비교분석을 시행하였다. 이를 위해, 1992년 10월부터 1998년 12월까지 관측된 T/P의 고도자료(2${\sim}$230번 사이클)를 비교분석에 활용하였다. 연구대상지역인 동아시아 주변 해상의 강한 조석현상으로 인해, T/P자료를 이용한 역학 고도의 산출에서 조석오차의 처리가 대단히 중요하다. 이러한 문제점을 감안하여, T/P자료의 처리는 Park and Gamberoni(1995)가 제시한 방법을 이용하였다. T/P자료를 처리한 결과, M$_2$, S$_2$, K$_1$ 분조에 의한 주기가 각각 62.1, 58.7, 173일 주기의 조석변형 오차로 나타났다. 이러한 오차의 영향들을 감소시키기 위해, Gaussian 방식을 이용하여 다양한 주기별로 저주파 필터를 적용하였다. 필터주기별로 처리된 결과를 비교하면, 최소 200일 이상의 저주파 필터를 적용할 때 T/P자료의 거짓 신호를 이상적으로 제거할 수 있음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200일을 기준으로 모든 조위관측점들에 대해 RMS값을 구한 결과 2.8${\sim}$6.7 cm의 범위로 나타났고, 두 측정방식간에서 통계적으로 유의한(P <0.0001)상관성이 일관성있게 확인되었다. 이러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조석오차가 큰 동아시아 주변 해역에서 해수면 변화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조석 오차의 영향을 최대한 억제할 수 있는 장주기 (최소한 200일)를 기준으로 해수면자료를 비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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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김응환의 봉명사경과 《해악전도첩(海嶽全圖帖)》 (Kim Eung-hwan's Official Excursion for Drawing Scenic Spots in 1788 and his Album of Complete Views of Seas and Mountains)

  • 오다연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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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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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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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해악전도첩(海嶽全圖帖)》은 금강산과 해금강, 관동팔경을 그린 60점의 실경산수화와 51편의 기문(記文)으로 이루어진 화첩으로 규모와 화풍에 있어 보기 드문 작품이다. 그림의 특징은 화면을 가득 채운 구성과 남종화풍을 따르면서도 거칠고 파격적인 화법, 산석(山石)의 기하학적이고 입체적인 표현 등이다. 1973년의 특별전, '한국미술이천년(韓國美術二千年)'을 처음으로 화첩의 일부만 공개되었던 작품은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에서 그 전모가 공개되었다. 《해악전도첩》이 김응환(金應煥)(1742~1789)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은 화첩의 마지막 장에 쓰여진 관지(款識)와 현재 행방이 묘연한 <칠보대>에 찍힌 '복헌'이라는 도장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응환을 지시하는 관지와 도장은 모두 후대에 더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본 연구는 화첩을 둘러싼 여러 요소를 고찰하여 제작자를 재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해악전도첩》 제작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18세기 금강산 기행사경도의 전통과 봉명사경을 살펴보았다. 정선(鄭敾)(1676~1759)의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1711)을 비롯하여 심사정(沈師正)(1707~1769), 김윤겸(金允謙)(1711~1775), 최북(崔北)(1712~1786 이후), 강세황(姜世晃)(1713~1791) 등은 조선 후기 최고의 여행지였던 금강산을 유람하고 기행사경도를 제작하였다. 화가들은 이전의 전통을 계승하여 내금강의 명승명소를 주로 그렸고, 자신들이 경험한 장소를 새롭게 시각화하였다. 이러한 기행사경도는 여행을 기념하며 동행자나 후원자를 위해 여러 장면을 담을 수 있는 화첩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개별적인 금강산 기행사 경도의 제작이 증가하는 가운데 1788년에 정조(正祖)(재위 1776~1800)가 도화서 화원인 김응환과 김홍도(金弘道)(1745~1806 이후)에게 영동9군과 금강산의 명승(名勝)을 그려오도록 명한 일은 공적 업무였다. 정조는 이들의 관계 및 지방관으로서의 경력, 서로 다른 화풍 등을 고려해 봉명사경의 화원으로 선발하였다. 김응환과 김홍도는 영조(英祖)(재위 1724~1776)조부터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하며 선후배이자 동료로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나아가 이들은 영남 지역의 찰방(察訪)으로서 지방관의 업무를 수행한 경험이 있었다. 두 화원의 화풍은 서로 달라 김홍도는 부드럽고도 섬세하게 필선을 운용한 반면, 김응환은 굳세면서도 울창한 풍치를 잘 표현했다. 두 명의 화원은 각자의 개성으로 봉명사경 기간 동안 100여 폭의 초본을 그렸고, 이를 선별하여 60~70여 폭의 화첩 혹은 두루마리를 완성하였다. 이들의 그림은 18세기 전중반에 내금강과 관동팔경 위주로 제작된 금강산 기행사경도의 전통을 더욱 풍부하게 했고 영동과 외금강의 명승명소를 새롭게 발견하며 소재를 확장시켰다. 현재 《해악전도첩》은 원(元), 형(亨), 이(利), 정(貞) 4책으로 이루어졌는데, 원(元), 형(亨)책은 내금강의 그림 29점이며 이(利)책은 외금강의 장면 17점, 정(貞)책은 해금강과 관동팔경 14점으로 구성되었다. 비단 위에 그려진 각 그림은 기하학적으로 산석을 표현했으며, 연백으로 금강산의 암봉을 흰색 혹은 회청색으로 표현했다. 《해악전도첩》의 구도와 화법은 정선, 강세황, 심사정, 정충엽(鄭忠燁)(1725~1800 이후), 김응환, 김홍도의 화법과 비교할 수 있어 18세기 후반의 시대 양식을 갖는다. 특히 화첩의 일부 그림은 김홍도의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1788)과 구성 및 회화적 모티프가 매우 유사하여 두 화첩간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반면에 <영랑호>, <해산정>, <월송정> 등은 김홍도의 그림과는 구별된다. 이를 통해 화가가 김홍도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도 자신만의 개성적인 화첩을 제작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해악전도첩》에는 다른 화첩에는 등장하지 않는 <자운담>, <백운대>, <안문점망비로봉>, <백정봉>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각 장면마다 경물의 특징을 구체적이고 참신하게 묘사하였다. 특히, 화가는 산석을 기하학적으로 표현하고 선과 면을 도드라지게 하여 입체감을 강조하였다. 그는 남종화풍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화법을 확립했고 이를 자유자재로 운용하면서 화면에 동적인 리듬감을 부여했다. 이처럼 60점의 그림은 거칠고 파격적으로 보이지만 나름의 질서 안에서 일관성을 견지하고 있다. 본고는 화법과 봉명사경의 정황을 종합해 《해악전도첩》의 제작자를 김응환으로 추론하였다. 나아가 김하종(金夏鍾)(1793~1878 이후)의 《풍악권(楓嶽卷)》(1865년 이후)과의 친연성은 《해악전도첩》의 화가를 김응환으로 추정한 또 하나의 이유였다. 《해악전도첩》은 김홍도의 《해산첩》과는 달리 후대에 미친 영향력이 미비한데 김하종의 《풍악권》만이 《해악전도첩》의 소재와 화법을 따르고 있다. 김하종은 《풍악권》에서 50년 전, 춘천부사 이광문(李光文)(1778~1838)을 위해 제작한 《해산도첩》(1816)과는 전혀 다른 화법을 구사했다. 그는 김응환의 《해악전도첩》과 유사한 구성과 회화적 요소, 화보식 인물표현을 따르면서 사의적인 분위기를 강조하였다. 개성김씨의 일원이자 김응환의 종손인 김하종은 가문에 전해지는 《해악전도첩》류의 그림을 감상했고 이를 새롭게 번안했다고 추측된다. 화첩에 포함된 51편의 기문은 그림 다음 장에서 그려진 장소를 설명하고 있어 각 그림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도움을 준다. 기문은 그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앞의 장소로부터의 이동 정보, 이름의 유래, 지형적 특징, 관련 정보 등이 서술되었다. 이와 같은 백과사전식 혹은 지리지와 같은 기문은 19세기 전반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금강산 화첩류에 더해졌다. 《해악전도첩》의 백화암 기문에는 1845년의 암자에 대한 중건 내용이 기록되어, 기문의 연대를 추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김하종에게 《풍악권》을 주문한 이유원(李裕元)(1814~1888)도 각 그림에 글을 붙였는데 이 글들은 김응환의 화첩에 포함된 기문 51편과 내용 및 서술방식이 흡사하다. 이유원의 기문은 《해악전도첩》의 기문이나 그 초고(원본)와 관련성이 높지만 두 화첩의 기문 필사의 선후관계를 판정하는 데에는 좀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해악전도첩》은 김홍도의 봉명사경 초본 및 김홍도의 영향으로 제작된 19세기의 금강산 화첩과는 구별된다. 이 화첩은 화원 김응환의 회화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지평을 넓히고 18세기 후반 실경산수화의 또 다른 층위를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