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Confucian Schol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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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 3대문화권 문화·생태·관광 기반조성 사업'의 지역경제 파급효과 및 발전 방안 연구 (A Study on the Economic Impacts and the Development Strategies of the Regional Development Plan by the City of Andong in Establishing the Foundation for Cultural Eco-tourism in 3 Cultural Areas)

  • 권기창;안건미
    • 지역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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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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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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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3대 문화권 문화·생태·관광 기반조성 사업' 중 안동시 사업(2010-2020)은 선도사업 2개(세계 유교선비문화공원, 한국문화테마파크)와 전략사업 3개(유림문학유토피아, 선성현 문화단지. 전통 빛타래 길쌈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지역간 투입산출모형을 이용하여 사업 예산 4,432억 원이 경북지역 내 창출한 생산유발액은 6,068억 원(유발계수 1.37), 부가가치유발액은 1,965억 원(유발계수 0.44), 소득유발액은 1,331억 원(유발계수 0.30), 고용유발인수는 2,851명(유발계수 10억 원당 6.43명)이었고 경북을 제외한 타 지역에 창출시킨 생산유발액은 3,834억 원(유발계수 0.877), 부가가치유발액은 1,617억 원(유발계수 0.27), 소득유발액은 546억 원(유발계수 0.12), 고용유발인수는 1,849명(유발계수 10억 원당 4.17명)이었으며 전국에서 유발된 경제적 파급효과는 생산 9,902억 원(유발계수 2.23), 부가가치 3,182억 원(유발계수 0.72), 소득 1,877억 원(유발계수 0.42), 고용 4,701명(유발 계수 10억 원당 10.6명)이었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업은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사업이 지연되고 있고 당초 목적인 유교문화의 생활화·산업화·세계화를 달성하기에 많은 한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기존 사업과 연계한 한문화 ICT융합 체험단지, 전통문화와 ICT융합 콘텐츠 개발, 안동호 주변연계관광지 조성, 안동호 관광인프라 구축, 전통문화체험단지 조성 등을 신성장 동력 사업으로 제안하였다.

1817년 효명세자 입학례의 왕세자 복식 고증 (A Study on the Costumes for the Crown Prince Based on the Picture for School Entrance Ceremony in 1817)

  • 손윤혜;이은주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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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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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8-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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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 연구에서는 1817년에 거행된 효명세자의 입학례 의주(儀註)와 절차별 장면을 담은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본 ${\ll}$왕세자입학도${\gg}$를 중심으로, 입학례 절차에 따라 왕세자가 착용하는 복식의 종류와 구성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입학례를 구성하는 첫 번째 절차인 <출궁의(出宮儀)>는 산선시위를 비롯하여 세자시강원과 세자익위사 관원들, 그리고 의장군들이 왕세자와 함께 동궁을 출발하여 성균관을 향하는 절차이다. 산선시위를 비롯하여 세자시강원과 세자익위사 관원들이 동행하고, 이 대열 앞에 의장군이 앞장서 출궁을 알린다. 이때 왕세자는 서연복(書筵服)을 착용하였다. 서연복은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 독옥대(禿玉帶), 흑화(黑靴)로 구성된다. 그러나 입학례 당시 효명세자는 아직 관례를 치르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익선관 대신 쌍동계(雙童?)라는 머리모양에 쌍옥도(雙玉導)를 꽂는 공정책(空頂?)을 썼다. 곤룡포는 다홍색 안감을 넣은 아청색 혹은 자적색 곤룡포를 착용하고, 허리에는 청정(靑?) 독옥대를 띠며 청색 또는 흑색 깃 장식의 흑피화를 신었다. 성균관에 이르면 <작헌의(酌獻儀)>, <왕복의(往復儀)>, <수폐의(脩弊儀)>, <입학의(入學儀)>를 치르게 되는데, 그동안 줄곧 학생복인 청금복(靑衿服)을 착용하였다. 왕세자는 학생복으로 연두건(軟頭巾)을 머리에 쓰고 아청색 도포를 입고 자적색 세조대, 흑화를 착용하였다. 도포 안에는 대창의와 중치막을 받쳐 입었다. 왕세자가 성균관에서 학생복을 착용하는 것은 왕세자가 왕위 계승자로서의 서열을 내세우는 자리가 아니라, 학문의 스승을 맞이하고 유학의 학맥을 잇는 자임을 표방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성균관에서 의식을 마치고 궁으로 돌아온 후, 효명세자는 창경궁의 시민당(時敏堂)에서 입학례의 마지막 절차인 <수하의(受賀儀)>를 거행하였다. 이때 원유관복(遠遊冠服)을 착용한다고 하였으나 관례를 치르기 전이므로 원유관 대신 공정책을 사용하였다.

조선후기 독서궁리론과 지식의 변화 (The Change of the Theory of Reading in the Later Joseon Period)

  • 김문용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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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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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9-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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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이 글은 조선후기 독서론의 변화 양상과 그것의 사상사적 의미를 추적하는 데 목표를 둔다. 이를 위해 사상 경향이 서로 다른 박세채, 정약용, 홍길주 세 사람을 선정하여 그들의 독서론을 주요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박세채는 전적으로 주자학의 범위 안에서 학문을 전개한 인물이다. 그의 독서궁리론은 독서의 범위가 주자학적 교학체계를 벗어나지 않고, 독서법이 경서의 도덕적 함의를 완미하고 체득하는 데 집중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였다. 그는 경세에 대한 관심에서 예학을 중시하고 양명학 비판과정에서 지식 탐구의 중요성을 인정하였지만, 이 모두 도덕적 실천에 필요한 지식 즉 도학적 지식을 강조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의미의 독서궁리론은 이미 이황 이이 단계에서부터 확립되어 왔던 것으로서 박세채의 경우는 물론, 19세기 말까지 조선의 대다수 학자들을 통해 주자학적 세계관을 확산 강화해 가는 장치로 작동하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후기에는 다른 한편에서 주자학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 여러 각도에서 시도되었다. 이러한 주자학 비판은 당연히 종래의 독서궁리론에 대한 재검토를 수반하기 마련인데, 우리는 그 예를 정약용과 홍길주 등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경학을 최고의 사상적 원천으로 삼았던 정약용은 학문방법론상에서 박람의 특징을 보였다. 그에게서 박람은 학문의 실용성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이면서, 동시에 경학의 탈주자학적 성격을 강화해 가는 통로였다. 문장가인 홍길주는 독서에서 특별히 깨우침을 강조하였다. 그는 한편에서 주자학적 형이상학의 주요 개념과 이론을 조목조목 비판 부정하고 있는데, 결국 그가 말하는 깨우침은 통체로서의 천리에 대한 깨우침이 아니라 개체 하나하나의 이치에 대한 깨우침이었다. 이상을 통해 우리는 조선후기 사상사가 주자학으로부터 탈주자학으로,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서애 류성룡의 학문과 경국제세, 그리고 전쟁관리 (Scholarship, Statecraft, and War Management of Ryu Seongryong)

  • 최연식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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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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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27-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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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유교 지식인 류성룡과 정치가 류성룡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동전의 양면이다. 유교 지식인의 학문은 경국제세(經國濟世)의 실천을 지향하고, 역사의 선례와 현장에 대한 치밀한 연구는 정치가의 성패를 좌우한다. 류성룡이 위기에 처한 조선의 실질적인 구원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이론과 현장을 구분하지 않고 양자를 변증법적으로 종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류성룡에 관한 기존의 연구들은 이러한 점들에 주목하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먼저 류성룡이 주자 성리학에 안주하지 않고 양명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그가 정통 주자학자들과는 다른 실용주의적 경세관을 지니고 있었고, 그 결과 임진왜란이라는 사상 초유의 국란을 맞았을 때도 현실주의적 위기 대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요컨대 이 글은 학문과 실천의 균형을 추구한 류성룡의 삶을 실용주의와 현실주의라는 관점에서 재조명하고자 한다.

옹방강(翁方綱)의 시경학(詩經學) - '한송겸채(漢宋兼采)'의 경향을 중심으로 - (Weng fang-gang(翁方綱)'s Studies on the Book of Odes - Focused on Adoption of research methods of hanxue(漢學) and songxue(宋學))

  • 양원석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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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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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85-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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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논문은 청대(淸代) 건가(乾嘉) 시기의 학자 옹방강(翁方綱)의 경학(經學) 가운데, 특히 시경학(詩經學)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그 주요 내용과 특징을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옹방강(翁方綱)은 한학(漢學)과 송학(宋學) 연구 방법의 장점을 동시에 채용한 경학 연구, 즉 '한송겸채(漢宋兼采)'의 경학 연구 방법론을 주장한 학자였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한송겸채(漢宋兼采)'의 경학 연구 방법론이 실제 그의 경학 연구에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를 고찰하기 위해 그의 시경학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 연구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옹방강(翁方綱)은 "시경(詩經)" 연구에 있어서, 시서(詩序)를 존신하고 "모전(毛傳)"의 해석을 신뢰하였으며 고훈(古訓)을 중시하였고 의경(疑經)의 풍조를 반대하는 등 한학적(漢學的) 경향을 보이면서도, 또한 정현(鄭玄)과 공영달(孔穎達)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주희(朱熹)의 "시집전(詩集傳)"에 대해서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등 송학적(宋學的) 경향도 보이고 있었다. 즉 옹방강(翁方綱)은 "시경" 연구에 있어서 한학과 송학의 연구 방법을 적절히 채택하여 이를 운용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성재 유중교의 가평 옥계구곡 위치추정 연구 (A Study on an Estimated Location of Seongjae Ryu, Junggyo's Okgye Gugok in GaPyeong-Gun)

  • 강기래;이해주;이현채;김희채;김동필;하성근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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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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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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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조선건국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던 성리학의 도입과 그 모태가 되었던 유학은 우리의 생활과 학문, 사상의 근원이 되었다. 또한 이들 학문의 주창자인 공자(孔子), 맹자(孟子), 자사(子思), 주자(朱子) 등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 여기었다. 그들 중 자기 수행의 길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이는 주자이며, 이(理)와 기(氣)의 발현과 그 관찰을 통한 심성(心性)의 체득을 목표로 하였다. 그는 진리의 체득을 위한 수신의 장소와 도구로서 산과 물이 있는 자연을 택하였고, 이러한 존주자(尊朱子), 학주자(學朱子)의 신념이 조선유학자들의 기본적 사상과 실천 철학이 되었고, 위정척사파의 유중교도 옥계구곡을 명명하고 경영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바탕으로 조선후기 유학자인 유중교가 설정한 옥계구곡의 위치를 비정하기 위한 본 연구는 옥계구곡의 위치 비정을 위한 기본적인 텍스트인 성재 유중교의 "가릉군옥계산수기(嘉陵郡玉溪山水記)"를 기본으로 하여 그 장소 추정을 위한 기본자료를 수집하였다. 그리고 옥계구곡 현장을 10회 답사하여 그 위치를 추정하였으며, 검증을 위해 옥계구곡에서 태어나고 자란 원주민 3인에게각각 그 위치를 탐문 하여 추정하였다. 연구로 비정된 각 곡의 위치는 공간정보자료로서 좌표와 사진을 취득하였으며, 이러한 자료는 향후 옥계구곡의 스토리텔링이나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경우 기초적이고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의 성과는 옥계구곡의 곡(曲)을 지정하는데 기초적 자료가 되었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권상하(權尙夏)의 황강(黃江) 이주를 계기로 한 재지사족(在地士族)의 형성과 발전 (Forming and Developing Rural Neo-Confucian Literati after Gweon, Sangha's Move to Hwang-gang)

  • 구완회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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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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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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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조선 시대의 재지사족은 핵심적인 지배집단이었다. 그들은 전국적으로 분포한 중소 규모의 지주였으며, 유교적 소양을 보유한 지식인 집단이었다. 17세기 이후로는 곳곳에 동성마을을 형성하고, 현조(顯祖)를 내세우면서 지역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 결과 지역에서의 실질적 주도권을 재지사족이 행사하는 예가 많았다. 이런 면에서 제천 지역의 황강(黃江) 신동(新洞)에 정착한 안동 권씨 화천군파(花川君派) 문중은 대표적인 재지사족이었다. 이 집단은 1675년에 이뤄진 권상하 형제가 이주하면서 형성되었다. 노론 정파의 지도자였던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는 과거를 외면하고 황강에서 강학에 힘썼으며, 결국은 산림(山林)으로 초빙되어 좌의정으로 제수되기까지 하였다. 권상하의 사후에 그가 가르치던 곳에는 황강서원을 비롯한 기념 시설과 제사 공간이 설치되었다. 이러한 시설들은 권상하가 중시했던 삶의 가치를 후손들이 받아들이는데 이바지했고, 지역 사회에 숭명의리(崇明義理)에 토대를 둔 척사적(斥邪的)인 정서가 자리 잡도록 하는데 이바지했다. 화천군파가 제천 지역에서 재지사족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또 다른 인물은 권상하의 조카인 권섭(權燮)이었다. 그는 권상하를 위한 여러 기념시설을 건립하고, 문중의 발전을 위하여 여러 규칙을 제정하였다. 아울러 황강을 넘어서 제천의 신동에 새로운 거주공간을 확보하고, 청풍 단양 문경 등지에 별서(別墅)를 장만하며 거주공간을 넓혀 나갔다. 각각의 공간에는 조상을 모시기 위한 제사 시설도 설치했다. 그 결과 권상하와 권섭의 자손들은 제천 일대에서 대표적인 성씨 집단으로 수백 년간 위세를 누릴 수 있었다. 비록 그들은 서울에 남았던 이들에 비하여 많은 엘리트 관료를 배출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재지사족의 성장은 지역 사회의 문화적 성장, 나아가 전 조선 사회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

다산의 『서경(書經)』인식 (Dasan Cheong Yagyong's perspectives on The Shoo King(『書經』))

  • 임헌규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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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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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7-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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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이 논문은 한국의 대표적인 경학자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서경" 인식을 고찰,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다산의 과제는 요순(堯舜)-주공(周公)-공자지도(孔子之道)라고 하는 본원유학의 원형과 정신을 복명(復命)하고, 그를 통해 질곡된 현실을 극복하는 데에 있었고, 그의 "서경"에 대한 관심과 해석 역시 여기에서 유래한다고 할 수 있다. 육서오경에 대한 방대한 식견과 청나라의 고증학적 경향, 심지어 일본의 유학연구에도 정통했던 다산은 "서경"에 대한 단순한 의문제기를 넘어, 체계 전반을 문제로 삼았다. 그래서 그는 후대 위작으로 간주된 고문(古文)의 유출경위를 증명하고, 방대한 자료를 검토하여 원 자료의 수집과 채록을 통해 "서경"의 본모습을 회복하려고 시도했다. 이 글은 다산의 이러한 시도에서 드러난 "서경"에 대한 인식과 그 특징을 제시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우선 "서경"이란 어떤 책이며, 왜 다른 어떤 경전보다 유독 판본과 진위 문제가 항상 발생하였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 다음 다산의 "서경" 연구과정을 서술하고, 거기서 나타난 다산의 관점과 특징을 대표작인 "매씨서평" 및 그 뒤의 저술들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다산은 "서경"을 정치의 표준이 제시되어 있는 옛 성인의 정사를 알려주는 역사책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표준을 제대로 알아 소통하기만 하면 곧바로 현실에 응용하여,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그는 "서경"을 알기 위해서는 당연히 자구에 대한 훈고(訓?)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구에 대한 훈고를 이루려 하면 우선 경문(經文)이 정립되어 있어야 하는데, "서경"은 잔결(殘缺)이 가장 많은 경전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당시 통행되고 있던 "상서" 중에서 후대에 위조된 부분을 변별한 다음, 그 본 모습을 회복하려고 시도한다. 다산이 회복하려고 했던 원형 "상서"란 공자가 직접 산정하고 서(序)를 썼다고 말한 100편("우서(虞書)" 20편, "하서(夏書)" 40편, "주서(周書)" 40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공자가 편집했던 "상서" 100편의 원형회복이란 진본이 망실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우선 방대한 문헌적 지식을 원용하여 한대 이전의 경전 가운데 신뢰할 수 있는 것을 채록 배열한 다음 여러 학설을 모으고("상서고훈수략(尙書古訓蒐略)"), 수집된 고훈들의 동이(同異)를 대비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합본한다("상서고훈(尙書古訓)") 다산은 이런 시도의 목표는 "상서"를 해석하기 보다는 옛 원형을 보존하여(존고(存古)), "상서"의 본래 모습 혹은 대체(大體)을 알게 해 주는 단서를 제시하려는 것이었다.

구암(龜巖) 김경장(金慶長)의 생애(生涯)와 학문(學問) (Gu-am Kim Kyung Jang's Life and Learning)

  • 유권종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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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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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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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구암(龜巖) 김경장(金慶長)(1597~1653)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으로서 매우 덕행이 뛰어난 학자였지만, 그의 문집과 저술은 최근에 이르러 간행되었다. 이 글은 구암의 행적과 학문의 내용이 아직까지도 고찰되고 발표된 바가 없다는 점을 고려하여 일차적으로 그의 문집을 근거로 생애와 학문의 대강을 정리하여 설명하는 데 목적을 둔다. 고찰 내용은 그의 가계와 생애, 및 저술 등을 먼저 살피고, 이어서 그의 위기지학적 지향성과 그 구체적 내용을 재구성해보고, 아울러 그가 남긴 저술들 가운데 역학과 예학과 관련된 학문적 내용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특히 역학에 관해서는 그가 남긴 도상들을 그의 전후로 등장한 타 유학자들의 도상들과 비교함으로써 그의 역학 도상의 표현적 특징을 살펴본다. 본고에서 특히 초점을 맞춘 것은 그의 학문적 과정을 위기지학으로 규정하고, 그 성취과정을 단계별로 나누어서 소개하는 일이다. 이는 지금까지 시도되지 않았던 방법이지만, 앞으로 유학자들의 학문세계를 더 진실에 근접하여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독서관에 관한 연구 - "하서전집"의 인용문헌 분석을 중심으로 - (A Study on Kim Inhue's View of Reading: Through the Analysis of Reference Books in Haseo-Chunjib)

  • 안현주
    •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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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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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79-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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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이 연구는 "하서전집"의 인용문헌 분석을 통해 김인후의 독서관을 고찰하였다. 그 결과 최소한 123종의 책을 독서했으며, "사서삼경", "사기", "한서", "장자", "고문진보", "초사", "문선"을 가장 많이 인용하였다. 김인후는 16세기 선비들이 보여주는 공통적인 독서범주를 뛰어넘은 다양한 독서, 시대상에 구애받지 않은 자유로운 독서를 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독서관은 성리학의 경서를 중요시 여겼으며 또한 다양한 독서를 통하여 실생활에 유익한 지식을 얻음과 동시에 방대한 저술의 바탕을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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