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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관서지방의 공연 시공간과 향유에 관한 연구 (A Study of the Time-Space and Appreciation for the Performance Culture of Gwanseo Region in Late Joseon Period: Focusing on Analysis of Terminology)

  • 송혜진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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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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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87-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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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고는 조선후기 관서지방 공연문화의 시공간과 향유에 관한 연구이다. 관서(關西) 지방은 중국 대륙과 인접한 접경지대로 군사적 요충지이자 대외무역과 상업의 발달로 재화가 풍부한 문화의 중심지였다. 조선후기에는 중국과 조선을 오가던 수많은 사신과 역관, 상인들이 이 지역을 경유하였고, 1~2년 간격으로 관찰사가 교체되었으며, 지역 인재 선발을 위한 도과(道科)과 빈번하게 시행되면서 환영과 전송 의례, 위로, 향연에 따른 공연활동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양상은 여러 문헌자료와 읍지(邑誌), 그림 자료로 전하며, 문학, 음악, 무용, 민속학 분야의 연구를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 <관서악부>를 비롯하여 평양, 성천의 자연과 풍류를 노래한 가사문학작품, 연행록 등을 문학작품을 세밀하게 읽다보면, 기존의 연구에서 주목해 온 공연의 종목과 악기편성, 음악기구, 음악인 등 뿐 만 아니라 공연활동의 주체와 시공간, 향유방식에 대한 유용한 정보들이 매우 풍부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를 통해 공연이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언제,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공연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는지, 관객과 공연주체가 어떻게 소통하였는지를 알아볼 수 있다. 음악과 춤에 관한 단적인 정보 외에 '공연', '사람', '시간', '공간'의 관계성에 관한 연구는 지금까지 미진했던 '전통공연예술 양식' 연구의 기반이 되리라고 판단된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관서악부> 108편, 한글 가사 작품 8편, 한문연행록 9종에 표현된 공연관련 정보를 '주요어' 에 주목하여 분석한 결과 조선후기 공연문화의 시공간과 향유 양상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었다. 공연의 시기와 시간, 전체 소요시간에 대해서는 별도의 기준이 마련되어 있지는 않았다. 사신연의 경우, 국가나 개인의 상례(喪禮), 기일(忌日) 등의 '금지사유'가 없는 한, 더위나 추위를 무릅쓰고라도 진행되었다. 그 외에 계절을 선택하여 '놀음'을 벌일 경우, 계절적으로는 '삼사월 좋은 때', '춘풍' 불고 '일기 화창'한 날과 '가을 물결' 아름다운 '추강(秋江)'의 계절이 선호되었다. 공연 시간 대는 '아침밥을 먹고 나서', '포시(오후 4시경)', '석반을 물리치고~', '야심(夜深)', 의 예에서 처럼 매우 가변적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밤에 열리는 야연(夜宴)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공연의 지속시간은 '잠깐 보고'부터 '전날 오전부터 다음날 낮까지' 차이가 컸다. 공연시간대와 전체 소요시간은 사신일행의 일정에 영향을 받았다. 공연 공간은 자연, 누정이나 관아의 건축 공간, 선유놀음의 선상 공간, 영송(迎送)의 행차음악이 연주된 연도(沿道)로 구분해볼 수 있었다. 평양의 연광정, 부벽루, 성천의 백상루, 선천의 의검정, 천연정, 의주의 통군정 등의 건축공간과 강상에 배를 띄운 선유놀음의 크고 작은 선상공간은 관서지방 공연문화의 중심이었다. 공연 공간에는 공연주체와 좌상(座上)객의 필요에 따른 주물상, 다담상, 찬을 갖춘 상, 병풍, 의자, 향로 등이 구비되었으며, 야연에서는 청사초롱, 홍촉대, 횃불이 갖춰졌다. 약산동대 등, 자연 공간에서의 공연도 선호되었다. 공연 향유와 관련하여 공연주체와 관객, 공연내용, 향유자의 소감과 비평 등을 살폈다. 공연주체는 기생과 무동, 악공, 전악, 취타군, 무동, 가아(歌兒) 등 수많은 명칭이 사용되었다. 특히 공연에서 춤과 노래, 연주를 담당했던 기생에 대해서는 기생의 수, 연령, 역량, 이미지 등을 알 수 있는 아주 많은 이칭(異稱)이 조사되었다. 공연에서 향유자는 유객(遊客), 좌상(座上)으로 불렸고, 특정 작품에서는 '풍류 태수', '학탄 신선' 등의 표현도 사용되었다. 향유자들이 즐긴 공연은 정재류의 춤과 관서지방의 민속무, 이에 따른 삼현육각 편성의 음악, 12가사, 한문 낭송조, 잡가, 민요, 광대소리 등의 노래, 거문고, 가야금, 양금, 피리, 해금, 퉁소, 옥저 등의 기악 독주, 혹은 병주. 행차에 따른 연주 등이었다. 세부곡목에 주목해보면 조선후기 관서지방에서는 궁중 예술과의 교섭이 매우 활발하였고,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었던 <홍문연>, <항장무>, <선유락> 등의 레퍼토리를 탄생시켰는가 하면 고유의 민속가무도 함께 향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공연의 규모는 '대연', '크게 벌이다', '수삼 동기', '성천기 7명', '60기생', '기생 2~3명', '삼자비' 등으로 표현되거나 독주, 독창, 독무인 경우 이름으로 표기하였다. 역시 공연 계기와 장소에 따라 공연의 규모가 매우 유동적이었음을 알려준다. 공연자의 연령은 10대 초반부터 늙은 기생까지 다양하게 소개되었는데, 특히 어린 기생들의 가무에 대한 관심도가 높았다. 공연은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되었지만, 반대로 '잡악(雜樂)', '졸렬', '웃음거리'로 분류되어 외면당한 예도 있다. 그런가 하면 여러 지역에서 유사한 공연종목을 관람한 뒤, 이를 '비교(比較)' 평가한 예가 있는데, 이는 관서지방 공연문화 향유양상을 알려주는 중요한 지표라고 생각된다. 공연은 주로 사신맞이. 사신연, 순행에 따른 연회 등 공적인 성격을 띤 것이 많았고, 그밖에 사적인 향유 차원에서 이루어진 예도 적지 않게 조사되었다. 관서지역의 사신맞이는 대동강의 관선을 이용한 도강(渡江)의례가 특징적이다. 이는 관찰사, 부사, 감사 등의 관리의 이임과 부임뿐만 아니라 정례적으로 중국에 오가던 사신일행의 행차가 끊이지 않았으므로 이와 관련된 공연문화의 지속성이 탄탄하게 확보될 수 있었다. 이와같이 '주요어 추출'을 중심으로 조선후기 관서지방의 공연 시·공간과 향유양상에 관해 살핀 본 연구는 향후 관서지방의 재정과 경제, 생활문화의 측면과 관련지어 '관서지방 특유의 공연문화'를 밝히는 연구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지금까지의 연구가 미진한 전통공연예술의 시공간과 공연양식에 관한 연구의 외연을 넓히는데 풍부한 근거자료로 활용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고려재조대장목록고 (A study on the second edition of Koryo Dae-Jang-Mock-Lock)

  • 정필모
    • 한국문헌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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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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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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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
  • This study intends to examine the background and the procedure of the carving of the tablets of the second edition of Dae-Jang-Mock­Lock(재조대장목록). the time and the route of the moving of the tablets. into Haein-sa, and the contents and the system of it. This study is mainly based on the second edition of Dae-Jang-Mock-Lock. But the other closely related materials such as restored first. edition of the Dae- Jang-Mock-Lock, Koryo Sin-Jo-Dae-Jang-Byeol-Lock (고려신조대장교정별록). Kae-Won-Seok-Kyo-Lock (개원석교록). Sok-Kae­Won-Seok-Kyo-Lock (속개원석교록). Jeong-Won-Sin-Jeong-Seok-Kyo­Lock(정원신정석교록), Sok-Jeong-Won-Seok-Kyo-Lock(속정원석교록), Dea-Jung-Sang-Bu-Beob-Bo-Lock(대중상부법보록), and Kyeong-Woo-Sin-Su-Beob-Bo-Lock(경우신수법보록), are also analysed and closely examined. The results of this study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1. The second edition of Tripitaka Koreana(고려대장경) was carved for the purpose of defending the country from Mongolia with the power of Buddhism, after the tablets of the first edition in Buin-sa(부이사) was destroyed by fire. 2. In 1236. Dae-Jang-Do-Gam(대장도감) was established, and the preparation for the recarving of the tablets such as comparison between the content, of the first edition of Tripitalk Koreana, Gal-Bo-Chik-Pan-Dae­Jang-Kyeong and Kitan Dae- Jang-Kyeong, transcription of the original copy and the preparation of the wood, etc. was started. 3. In 1237 after the announcement of Dae-Jang-Gyeong-Gak-Pan-Gun­Sin-Gi-Go-Mun(대장경핵판군신석고문), the carving was started on a full scale. And seven years later (1243), Bun-Sa-Dae-Jang-Do-Gam(분사대장도감) was established in the area of the South to expand and hasten the work. And a large number of the tablets were carved in there. 4. It took 16 years to carve the main text and the supplements of the second edition of Tripitaka Koreana, the main text being carved from 1237 to 1248 and the supplement from 1244 to 1251. 5. It can be supposed that the tablets of the second edition of Tripitaka Koreana, stored in Seon-Won-Sa(선원사), Kang-Wha(강화), for about 140 years, was moved to Ji-Cheon-Sa(지천사), Yong-San(용산), and to Hae-In-Sa(해인사) again, through the west and the south sea and Jang-Gyeong-Po(장경포), Go-Ryeong(고령), in the autumn of the same year. 6. The second edition of Tripitaka Koreana was carved mainly based on the first edition, comparing with Gae-Bo-Chik-Pan-Dae-Jang-Kyeong(개보판대장경) and Kitan Dae-Jang-Kyeong(계단대장경). And the second edition of Dae-Jang-Mock-Lock also compiled mainly based on the first edition with the reference to Kae-Won-Seok-Kyo-Lock and Sok-Jeong-Won-Seok-Kyo-Lock. 7. Comparing with the first edition of Dae-Jang-Mock-Lock, in the second edition 7 items of 9 volumes of Kitan text such as Weol-Deung­Sam-Mae-Gyeong-Ron(월증삼매경론) are added and 3 items of 60 volumes such as Dae-Jong-Ji-Hyeon-Mun-Ron(대종지현문논) are substituted into others from Cheon chest(천함) to Kaeng chest(경함), and 92 items of 601 volumes such as Beob-Won-Ju-Rim-Jeon(법원주임전) are added after Kaeng chest. And 4 items of 50 volumes such as Yuk-Ja-Sin-Ju-Wang-Kyeong(육자신주왕경) are ommitted in the second edition. 8. Comparing with Kae-Won-Seok-Kyo-Lock, Cheon chest to Young chest (영함) of the second edition is compiled according to Ib-Jang-Lock(입장록) of Kae-Won-Seok-Kyo-Lock. But 15 items of 43 vol­umes such as Bul-Seol-Ban-Ju-Sam-Mae-Kyeong(불설반주삼매경) are ;added and 7 items of 35 volumes such as Dae-Bang-Deung-Dae-Jib-Il­Jang-Kyeong(대방등대집일장경) are ommitted. 9. Comparing with Sok-Jeong-Won-Seok-Kyo-Lock, 3 items of the 47 volumes (or 49 volumes) are ommitted and 4 items of 96 volumes are ;added in Caek chest(책함) to Mil chest(밀함) of the second edition. But the items are arranged in the same order. 10. Comparing with Dae- Jung-Sang-Bo-Beob-Bo-Lock, the arrangement of the second edition is entirely different from it. But 170 items of 329 volumes are also included in Doo chest(두함) to Kyeong chest(경함) of the second edition, and 53 items of 125 volumes in Jun chest(존함) to Jeong chest(정함). And 10 items of 108 volumes in the last part of Dae-Jung-Sang-Bo-Beob-Bo-Lock are ommitted and 3 items of 131 volumes such as Beob-Won-Ju-Rim-Jeon(법원주임전) are added in the second edition. 11. Comparing with Kyeong-Woo-Sin-Su-Beob-Bo-Lock, all of the items (21 items of 161 volumes) are included in the second edition without ;any classificatory system. And 22 items of 172 volumes in the Seong­Hyeon-Jib-Jeon(성현집전) part such as Myo-Gak-Bi-Cheon(묘각비전) are ommitted. 12. The last part of the second edition, Joo chest(주함) to Dong chest (동함), includes 14 items of 237 volumes. But these items cannot be found in any other former Buddhist catalog. So it might be supposed as the Kitan texts. 13. Besides including almost all items in Kae-Won-Seok-Kyo-Lock and all items in Sok-Jeong-Won-Seok-Kyo-Lock, Dae-Jung-Sang-Bo­Beob-Bo-Lock, and Kyeong-Woo-Sin-Su-Beob-Bo-Lock, the second edition of Dae-Jang-Mock-Lock includes more items, at least 20 items of about 300 volumes of Kitan Tripitaka and 15 items of 43 volumes of traditional Korean Tripitake that cannot be found any others. Therefore, Tripitaka Koreana can be said as a comprehensive Tripitaka covering all items of Tripitakas translated in Chinese charac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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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범자 진언명 상감청자의 해석과 의미 (Interpretation and Meaning of Celadon Inlaid with Sanskrit Mantras in the late Goryeo Dynasty)

  • 이준광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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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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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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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 사회 속에서 만들어진 청자에는 불교문화의 여러 단면이 담겨 있다. 그중 범자(梵字)가 새겨진 상감청자는 불교 중에서도 밀교와 밀접한 영향 관계에 있을 것이란 점은 익히 알려져 왔으나 판독을 통한 구체적인 연구는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이는 전하고 있는 자료의 수가 적은 데다 잔존 범자도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강진 사당리 23호 요지에서 이루어진 4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새로운 자료를 발견하게 되었고, 이 자료들을 판독하여 기존 자료들도 몇 가지 유형에 편입시킬 수 있었다. 범자 판독과 해석을 통해 얻은 연구 성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청자에 상감된 범자는 진언(眞言)을 이루는 글자들이었다. 범자 한 자만 남아 있는 경우 해석을 유보해야 했지만, 그 밖의 범자들은 동심원 구조인 자륜진언(字輪眞言) 방식 속에서 '정법계진언', '육자대명진언', '감로수진언', '보루각진언', '구보살원주', '무량수여래심주', '멸악취진언'을 표기하고 있었음을 판독했다. 각 진언은 실담(悉曇, Siddham) 범자로 표기되어 있었다. 둘째, 제작 시기는 범자 배치 방식과 '감로수진언'이 40수 진언에 포함되는 양상을 근거로 13~14세기에 걸친 것으로 보았다. 특히 진언이 있는 동심원 구조의 상감청자 자료들은 제작 특징을 보아 13세기 말~14세기 전반으로 편년했다. 셋째, 상감된 진언들의 해석을 통해 모두 파지옥(破地獄)과 정토왕생(淨土往生)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를 근거로 범자 진언명 상감청자들 중 일부는 시아귀회(施餓鬼會)와 같은 망자(亡者)를 위한 불교 의례에 사용했으리라 판단했다. 또한 사당리 23호 요지와 '가'구역이 왕실용 자기 생산지로 추정되기 때문에 의례 또한 왕실 혹은 그 영향력 안에 있는 사찰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넷째, 범자 진언명 상감청자들은 원대 자기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은 원의 불교문화와 고려가 이미 품고 있던 밀교적 요소가 더해져 나타난 것으로 보았다. 다섯째, 범자 진언명 상감청자들은 고려 후기 사회에 퍼져 있던 개인적 밀교 의례의 한 측면을 보여 주는 자료였다. 당장의 불안을 해소해 주길 바라는 데서 촉발된 밀교의 변화는 묘지(墓誌), 관등에서도 찾을 수 있었는데 파지옥과 극락왕생에 대한 염원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여섯째, 다른 공예품과 비교할 때 공통점으로 실담 범자를 사용했다는 점, '육자대명진언'을 중심적으로 활용했다는 점, 기와와 배치 방법이 유사하다는 점, 범종·목관·묘지의 진언과 의미상 상통한다는 점이 있었다. 차이점으로는 '멸악취진언'과 '감로수진언'은 다른 공예품에서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또한 상감청자 특유의 경제성과 제작의 용이성은 다른 공예품과 차별되는 장점으로, 바로 이 점 때문에 범자 진언을 새길 기명으로 청자가 채택되었던 것으로 보았다. 본 연구에서 판독하지 못한 자료들은 추후 잔존 상태가 양호한 자료가 보고된다면 새로운 유형을 수립하여 편입시킬 수 있을 것이다.

동해안 오구굿 중 판염불에 나타난 불교음악의 영향 - 김장길의 소리를 중심으로 - (The influence with buddhist music appearing in PanYeombul out of Ogu exorcism of East coast - focused on the song by Kim Janggil -)

  • 서정매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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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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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7-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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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 연구는 동해안 오구굿 중 김장길이 소리한 판염불의 악곡 중 6곡을 대상으로 선율을 분석하여 무가(巫歌) 판염불에 나타난 불교음악의 영향을 살펴본 것이다. 그 결과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2016년 10월 16일에 연행된 김장길의 판염불의 구성은 <창혼>, <예불>, <망자축원>, <장엄염불>, <대다라니>, <오방례>, <지장보살 정근>, <법성게>, <극락세계십종장엄>, <아미타불 정근>, <지옥가>로 구성된다. 다만 판염불은 같은 양중이 연행한다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더 추가되고 생략될 수 있으므로 그 절차구성은 매우 유동적이다. 그러나 김용택의 것과 비교했을 때 <지옥가> 외에 <대다라니>가 공통되는 것으로 보아 동해안 오구굿의 판염불에는 <대다라니>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대다라니>는 불가에서는 일반적으로 '신묘장구대다라니'라고 칭하고 있고 김용택도 이 명칭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데 반해, 김장길은 '염화장구대다라니'라고 하여 차별되는 명칭을 사용한다. 염화는 '손가락에 꽃을 집어들었다'는 뜻으로 불가적 의미이지만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명칭이 아니다. 이로보아 김장길은 불경의 '대다라니'를 수용하되 차별된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불교의례와는 구별되는, 무의례만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셋째, 동해안 오구굿의 판염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전반부의 <판염불>과 후반부의 <지옥가>이다. <판염불>은 양중이 앉아서 직접 징 반주를 하며 독송하고, <지옥가>는 양중이 꽹과리를 들고 일어서서 독송하는데 이때 악사들이 삼공잽이 장단으로 반주한다. 노래와 반주가 이중주처럼 주고받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므로 음악적으로도 가장 고조되고 강조된다. <판염불>은 판염불 지옥가로 구분해서 보기도 하지만, 한 명의 양중에 의해 독송되는 절차이므로 일반적으로 하나의 절차로 해석한다. 넷째, 김장길의 판염불에서 반주역할을 하는 징은 악구를 구분하고 악곡의 단락을 짓는 역할이다. 일자일음의 염불을 노래할 때, 숨을 고르거나 목을 가다듬는 등 호흡의 정리가 필요한데 이때 징이 그 사이를 메운다. 징은 악구를 구분하여 음악적 단락을 지어주므로, 가사의 전달을 명확하게 한다. 징의 리듬은 균등한 2소박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3소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암쇠(♩♪)보다는 숫쇠(♪♩)의 빈도가 압도적으로 많다. 또한 당김음이 자주 사용된다. 균등한 2소박의 반주에서도 엇박 또는 단장(短長) 리듬을 자주 사용하여 단조로운 균등리듬에 변화를 주어 음악적 활력을 준다. 이와 같은 엇박과 단장리듬은 긴장감을 자아내는 숫쇠리듬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양중 김장길만의 리듬특징으로 보아진다. 다섯째, 모든 악곡은 mi, sol, la, do, re의 5음구성이며, do'${\searrow}$la${\searrow}$sol${\searrow}$mi의 하행선율이 압도적으로 많다. 하행선율은 슬픈 느낌을 자아내는 것으로 망자에 대한 슬픔을 음악적으로 잘 표현한 것이므로, 김장길의 음악적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악곡은 전체적으로 la${\searrow}$sol${\searrow}$mi의 완전4도 하행에서 sol의 시가가 짧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메나리토리로 이루어져 있다. 여섯째, 김장길은 기존 염불의 가사를 수용하되 그대로 부르지 않고 그 사이사이에 '원왕생'이나 '나무아미타불' 등과 같은 가사를 삽입하였고 한문으로 구성된 예불가사에서는 '합소사~'와 같은 한글가사를 추가하였다. 또 슬픈 느낌을 표현하기위해 '이이이이이이이~'와 같은 구절을 삽입하기도 하였다. 이는 망자를 극락왕생하고자 하는 염원을 극대화함과 동시에 불교의 색채를 감소시키고 무속적인 느낌을 주고자한 것으로 보인다. 일곱째, 불교의 색채를 감소시키고자 하는 특징은 가사붙임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다게>의 끝 가사와 <칠정례>의 시작가사 사이에서는 일반적으로 휴지를 주어 단락을 구분하지만, 김장길은 오히려 휴지 없이 하나의 곡조로 진행하여 불교 독송의 색채감을 배제하였다. 선율도 일반 불교독송의 것과는 차별된다. 이는 불교의례문을 수용하되, 불가식의 염송과는 구별되는 무의례만의 특징을 부여하고자 하는 김장길의 의지로 해석된다. 여덟째, 분석한 곡목은 크게 4가지 장단으로 나눌 수 있다. 일정한 장단이 없는 <창혼> <망자축원>, 2소박의 균일한 장단의 <예불> <대다라니>, 3+2+3+2의 혼소박으로 된 10/8박자의 엇모리장단으로 된 <지장보살 정근>, 3+2+3의 혼소박으로 구성된 삼공잽이 장단의 <지옥가> 등 악곡에 따라 각기 구분되는 장단으로 이루어져있다. 이중 <지장보살 정근>은 불가에서도 자주 연행되는 의식이지만, 엇모리장단으로 되어서 무속적인 느낌을 자아내며, <지옥가> 역시 삼공잽이 장단으로 연주되어 동해안 무의례만의 특징을 이룬다.

16세기(十六世紀)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畫) 이해의 확장 : <경포대도(鏡浦臺圖)>, <총석정도(叢石亭圖)>를 중심으로 (Broadening the Understanding of Sixteenth-century Real Scenery Landscape Painting: Gyeongpodae Pavilion and Chongseokjeong Pavilion)

  • 이수미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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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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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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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이 기증을 받아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 특별전(2019년)에서 처음으로 공개한 작품인 <경포대도>와 <총석정도>는 조선시대 회화사 이해에 있어 시사하는 바가 매우 지대하다. 두 작품이 1557년의 관동 유람을 계기로 그려진 병풍의 일부였음을 알 수 있어서 16세기 산수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획기적인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요성을 밝히기 위해서 본고에서는 <경포대도>와 <총석정도>에 담긴 경물의 내용을 살펴보고 제작시기와 양식상의 특징을 분석한 후, 다른 작품과의 비교를 통해서 이 작품에 담긴 회화사적인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 작품의 제작 배경은 <총석정도>의 발문으로 알 수 있다. 본고에서 박충간(朴忠侃)(?~1601)으로 비정한 정상일로(商山逸老)가 1557년 봄에 홍연(洪淵)(?~?)과 함께 금강산(풍악산)과 관동 지역을 유람하고 유산록(遊山錄)을 작성하였으며 시간이 흐른 뒤 그중 몇몇 명승지를 그려 병풍을 만든 것을 알 수 있었다. 홍연은 자가 덕원(德遠)으로 1551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1584년까지는 생존했던 인물이다. 박충간은 호가 남애(南崖)로서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역을 고변하여, 그 공으로 형조참판으로 승진되고 평난공신(平難功臣) 1등에 책록된 후 상산군(商山君)에 봉해진 인물이다. 이 글로 작품의 제작 시기를 1557년의 유람 후이자, 발문을 쓴 박충간이 50대 이상이 되는, 1571년 이후 곧 16세기 후반경으로 보았다. 산수나 나무 표현 등의 화풍을 기준으로도 16세기 후반의 시대 양식과 부합한다. 전술한 발문의 내용으로 <경포대도>와 <총석정도>가 병풍의 일부였던 것을 알수 있으며, 발문이 써 있는 <총석정도>가 마지막 폭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경포대도>를 보면 구도면에서 조선 초기 안견파(安堅派) 산수화에서 볼 수 있는 편파(偏頗) 3단 구도의 요소를 찾을 수 있으나 실경(實景)을 대상으로 하여 그 배치와 화법이 현실화된 양상을 볼 수 있다. 시점(視點)에 있어서도 여러 경물간의 관계나 경관의 특징이 효과적으로 표현되도록 사선각(斜線角)의 부감시(俯瞰視), 정면시(正面視) 등을 활용하여 경포대의 넓은 영역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다각적(多角的)인 관점(觀點)을 보여준다. 산의 형태나 태점(苔點)의 사용은 1557년작 <의순관영조도(義順館迎詔圖)>(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와 매우 유사하다. 16세기 안견파의 특징인 짧은 선이나 점으로 질감을 내는 단선점준(短線點皴)과 구름 모양 운두준(雲頭皴)은 현장감 있게 변모되었다. 조선 초기 산수화의 전통적인 구도와 연결성을 찾을 수 있는 <경포대도>와 달리 <총석정도>는 그 구도가 매우 파격적이다. 화면에 중심축을 두고 돌기둥들이 첩첩이 도열하여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데 근경(近景)의 돌기둥, 중앙의 사선봉(四仙峯), 절벽 위의 사선정(四仙亭)을 삼단계 정도의 깊이감으로 배치하여 화면에 공간감을 조성하였다. 중앙의 사선봉이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압도적인 비중을 점하고 있으나 수직적인 돌기둥들이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분질적(分節的), 평면적(平面的)인 양상으로 그려져 아직 입체적이고 자연스러운 공간감을 조성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기둥의 아랫부분은 희게 하고 윗부분은 어둡게 하여 고원(高遠)의 상승감을 고조시키는 효과가 있는데 각 기둥을 묘사하는 준법을 보면 기둥으로 설정된 면에 담묵을 바르고 그 위에 농묵의 가는 선들을 그어 총석의 질감과 쪼개짐을 묘사하였다. 붓끝을 사선으로 누르며 수직으로 내려 긋고 있어서 부벽준(斧劈皴)의 초기적 양상을 보인다. 일관되게 보이는 이러한 흑백의 대조, 수직적 준법의 구사는 앞으로 전개될 절파계(浙派係) 화풍의 유행을 예시해준다. 한편 기둥의 윤곽 및 균열문이 각각 다 달라서 실제의 특징을 살리려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기둥 위에 올라앉은 새들의 묘사, 파도와 흰 거품의 표현 등에서 반복적인 붓질을 찾을 수가 없고 매우 생생한 묘사력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포대도>와 <총석정도>의 경물 배치는 이후 변화를 보인다. <경포대도>는 아래쪽에 죽도(竹島)를 두고 경포호를 넘어 위쪽에 위치한 경포대 건물과 오대산 일대를 올려보는 구도였다. 이러한 배치는 경포대를 화면 아래쪽에 두고 위쪽의 바다를 향하는 18세기 이래의 전형적인 구성과 차이를 보인다. 바다 쪽에서 총석을 바라보며 그린 <총석정도> 역시 이후의 작품에서는 내륙에서 바다를 향하는 것으로 관점의 변화를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정선(鄭敾)(1676~1759)과 김홍도(金弘道)(1745~1806 이후)의 작품이 제작된 이후, 두 사람의 구도를 따라 관동도의 유형이 정착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사라진 듯 했던 16세기 <경포대도>의 구도가 조선 말기 <강릉 경포대도>에서와 같이 민간 회화에서 전승된 것도 확인해 볼 수 있다. 관동 지역의 명승도는 이른 시기부터 그려져 고려 김생(金生)(711~?)의 관동도(關東圖), 조선 초 안견(安堅)(15세기 활동)의 낙산사도(洛山寺圖) 등 여러 화가가 단폭이거나 여러 폭의 관동도를 병풍이나 첩 형태로 그렸던 것을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기록은 많으나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작품이 없었는데 본고에서 고찰하는 이 두 점은 현존하는 관동도 중 연대가 가장 올라가는 예로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관동도(關東圖) 병풍(屛風)의 제작 양상을 알게 해주어 회화사적인 의미가 크다. 특히 발문의 내용에 따라 8폭 병풍일 것으로 생각되어 16세기 후반에 이미 관동팔경도(關東八景圖) 형식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성격에 있어서 현존하는 16세기 실경산수화의 예로 거론되는 작품들이 모두 실용적, 공적인 목적의 계회도나 기록화로 제작되어 실경산수화적 요소가 부분적으로 나타난 것과 달리 이 작품은 실제 경관을 대상으로 자연의 변화무쌍함과 아름다움을 담고자 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발문을 쓴 박충간은 유람할 때 지었던 감상시를 곁들여 자연의 진면목을 반추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 점은 기존에 알려진 실경산수화의 성격과 그 양상을 달리하는 것으로 순수 감상을 목적으로 한 본격적인 실경산수화의 예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높다. 이처럼 <경포대도>와 <총석정도>의 두 작품은 유람의 결과를 시화(詩畫)로 제작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현존 작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예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지대하다. 또한 그간 확인할 수 없었던 16세기 실경 산수화의 다양한 형태와 구도 및 시점의 면모를 보여주어 한국 실경산수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장한 점에서도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