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Buddhist 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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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동아시아 훈의(熏衣)문화와 향재의 교역 연구 (A Study on Perfuming Clothes and the Incense Trade of East Asia in Goryeo Dynasty)

  • 하수민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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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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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4-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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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훈의문화는 동아시아에서 공유한 문화이다. 해양 실크로드의 번영과 향재의 교역은 향 문화를 발달하게 해준 직접적인 요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향 문화의 발달 시기는 교역의 시작시기와 유사하게 나타난다. 훈의(熏衣)는 향을 태운 연기로 향을 입히는 용법이다. 중국은 한대(漢代)부터 합향을 제조하였으며, 훈롱(熏籠)을 사용한 기록이 있어 훈의향을 합향으로 제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당대(唐代)에 향료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천금요방』, 『향보』, 『향승』 등에 훈의향의 제조법과 훈의 기술이 나타나고 『계해우형지』와 『제번지』 등의 서적을 통해서도 향료의 교역국과 교역품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훈의향의 제조법과 용법이 기록된 문헌과 훈의에 필요한 도구들을 통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한국에는 불교의 전래와 함께 향이 소개되었다. 『매신라물해』의 기록을 통하여 일본과의 향 교역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훈의향이라는 교역품이 기록되어 있어 신라시대부터 훈의를 시행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향재의 교역이 융성하였던 고려시대에는 인삼과 함께 사향을 수출하였다. 왕실에서는 송(宋)으로부터 하사받은 향을 사용하였으며, 부인들은 향낭류의 패식향을 선호하였다. 패식향의 선호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조선시대에는 훈의의 기록을 찾기 어렵다. 조선시대에는 패식향의 사용, 향로에 피운 향의 냄새가 간접적으로 의복에 스며드는 방식, 그리고 옷장에 의향을 넣어두는 간접적인 방향을 선호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은 『매신라물해』의 기록을 통하여 신라를 통해 향을 교역한 사실을 알 수 있다. 헤이안 시대 궁정 소설 『겐지이야기』를 보면 당시 귀족들의 향 문화와 훈의문화, 향 교역을 추정 할 수 있다. 일본의 훈롱은 필수 혼수품으로 자리 잡았으며, 그에 따라 실용적인 형태로 발달하고 장식성이 가미되었다. 베트남 남부의 점성국이 훈의를 시행한 사실은 『제번지』에 직접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베트남 북부의 교지국이 훈의를 행하였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찾기 어렵다. 그러나 중국과 복식 문화가 같다는 기록과 훈의를 행하였던 국가인 중국과 점성국에 인접하였다는 점, 그리고 향료의 원산지라는 점에서 훈의문화를 공유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동아시아의 한·중·일, 그리고 베트남은 훈의를 시행하는 문화를 공유하였다. 이를 통해 훈의향의 목적과 발달 시기, 훈의향의 제작, 훈의법, 훈의 도구, 훈의를 하는 사람의 성별 그리고 사용한 향재에서 공통성을 찾을 수 있다.

<도선국사·수미선사비>의 제작 장인과 양식 연구 (A Study on Stonemason and Style of the Stele for State Preceptor Doseon and Seon Master Sumi)

  • 김민규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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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8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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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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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영암 도갑사 도선 수미비〉는 1651년 봄 비문이 완성되고, 여산(礪山)(현재 익산시 여산면)에서 석재를 채취하여 1653년 4월에 완성한 작품이다. 이 비는 당시 왕실의 지우(知遇)를 받던 벽암(碧巖) 각성(覺性), 취미(翠微) 수초(守初) 등 고승대덕이 건립을 주도하고, 인평대군 등 정치인들의 도움으로 건립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 작품은 범종(梵鐘)의 용뉴(龍?)를 모방한 '용뉴형(龍?形) 이수(?首)'라는 새로운 이수형식(?首形式)의 첫 작품이다. 더불어 이 비석의 영향을 받은 용뉴형 이수의 비석들은 이후 왕실과 사대부 비석으로 전래되어 18세기까지 제작된다. 또한 이 비석은 음기(陰記)의 내용을 통해 조말룡(曺唜龍)이라는 왕릉 석물을 제작하던 석공의 작품으로 밝혀졌다. 조말룡은 석공 중에서 유일하게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品階)를 받은 인물로 비석에는 동일한 품계인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작품을 통해 분석한 조말룡의 이수 조각 양식은 17세기 최고 수준의 작품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이를 바탕으로 17세기 능묘 비석의 장인들을 추정할 수 있다. 이처럼 <도선 수미비>는 비석의 건립 과정 및 후원세력, 제작 장인 등이 분명해 사료적 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최고의 장인들이 동원되어 제작되어 이 시기 비석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왕실 및 사대부의 후원으로 제작된 불교 석조물이 다시 왕실과 사대부의 능묘 석물로 전파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조선왕실의 낙산사(洛山寺) 중창과 후원 (The Rebuilding and Patronage of Naksansa Temple in Joseon Royal Family)

  • 이상균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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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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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6-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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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낙산사는 익조(翼祖)인 이행리(李行里)가 관음굴에서 후사점지를 기원하여 도조(度祖)를 낳게 해준 사찰이었다. "태조실록" 등에 도조는 조선개창의 예언을 직접적으로 받은 인물로 기록된다. 낙산사는 창건 이래 관음신앙의 본산으로 그 명성이 꾸준히 이어져 왔으며, 도조의 잉태로 조선의 창업과 관련있는 사찰로 주목받았다. 도조의 낙산사 관음굴 기복잉태설은 조선후기까지 왕실과 사대부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 이성계(李成桂)도 낙산사에 관심을 보였고, 세조(世祖)가 강원도 순행(巡幸) 시 예종의 원찰로 중창하였다. 낙산사는 세조가 왕권강화 등을 위해 불교적 상서(祥瑞)와 이에 따른 사찰의 중창 등을 집중적으로 시행하던 시기에 중창되었다. 이러한 정책과 달리 낙산사 중창은 세조가 자식 예종의 무병장수 기원을 위한 신앙심의 발현으로 추진한 것이었다. 세조의 낙산사 중창의지는 매우 강했다. 그러므로 낙산사는 국가의 전폭적 후원을 받으며 중창되었다. 낙산사 중창비용은 국가에서 모두 충당하는 것으로 표면화하고 추진하였으나, 워낙 큰 공역이었으므로 중창에 필요한 물자와 비용조달에 따른 지역의 피해는 매우 컸다. 조선왕실에서는 낙산사 중창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감동승(監董僧) 학열(學悅) 또한 비호해 주었다. 낙산사는 중창직후 왕실의 지원으로 사세가 더욱 번창하였다. 예종과 성종은 전지(田地)와 노비 등을 낙산사에 하사하고, 강원도에서 공납하던 소금을 사급(賜給)하는 등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낙산사 경내를 보호하기 위해 낙산사 인근 양양대로를 폐지하고, 새 길을 개설하였다. 그리고 낙산사 해안 십리의 구역에 포어(捕漁)를 금지하는 금표를 세워 민간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낙산사는 조선후기에 들어 크게 쇠락했으나 왕실의 원당보호정책 속에서 후원이 지속되었고, 원당으로서의 명맥과 사세를 유지해 나갔다.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삼세불상을 통해 본 17세기 조선시대 불상의 제작기법 연구 (On the Research of 17th Century Joseon Dynasty's Bulsang, a Buddist Statue, Manufacturing Technique by Examining the Daeungbojeon Hall Samse-bulsang, The Buddha of the Three Words, at the Haenam Daeheungsa Temple)

  • 이수예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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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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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4-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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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배치한 형식의 석가삼세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그동안 이 삼세불상은 목조불로 알려져 왔으나 X-선 촬영 결과, 본존불을 제외한 좌우불에서 나무 위에 입힌 소조층이 함께 관찰되었다. 따라서 대흥사의 삼세불상은 조선시대 목조불상 및 소조기법이 적용된 불상을 함께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접목조불상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본존 석가모니불상은 크게 5개의 목재를 접목하여 형상을 완성하고 있으며, 약사와 아미타불은 10개 이상의 목재를 접목하여 외형에 가깝도록 조각한 뒤 그 위로 점토를 발라 소조기법으로 형상을 완성하고 있다. 즉 내부의 목재가 심(芯)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는데, 목재의 접목방식이 조선시대의 목조불상보다는 소조불상의 기법에 가깝다. 그러나 목심 위에 새끼줄을 감고 그 위에 점토를 두껍게 바른 것이 아니라 나무 위에 직접 점토를 얇게 발랐으며, 얼굴 부분이 완전히 목조로만 이루어진 것이 특징적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애초 작가의 조성의도가 목불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나 복장기록에 '소성(塑成)'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불상 조성이 완료된 시점에 이들 불상을 소조상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즉 대흥사 좌우불은 조선시대식 소조기법의 한 예로 보아도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대흥사 삼세불상의 X-선 촬영을 통해 얻은 화상정보를 바탕으로 이들 불상의 내부구조와 접목방식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조선시대 불상 제작기법을 밝혀보고자 하였다.

정창원(正倉院) [쇼소인] 금속공예의 연구 현황과 과제 (The Research Status and Task of the Metalcrafts of Shoso-in Collection)

  • 최응천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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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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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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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쇼소인[정창원(正倉院)]은 일본 나라시내(내량시내(奈良市內)) 토다이지[동대사(東大寺)]의 후원 쪽에 위치하는 목조(木造)로 지어진 단독의 창고 건물을 가리킨다. 이곳에는 나라시대로부터 소장되기 시작한 약 9,000여점에 이르는 다종다양한 미술품과 문서를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정창원 유물이 주목받는 까닭은 8세기 일본의 공예, 조각, 회화는 물론 사산조 페르시아, 인도와 같이 실크로드를 통해 건너온 물품과 당시 통일신라와 중국 당대에서 유입된 유물을 동시에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수백여점에 달하는 생생한 문서가 잘 보존되어 있어 당시의 사회 제반 상황은 물론이고 문화 외교의 교류사 및 불교 교리의 변천까지 아우르는 역사적 고증 자료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정창원 소장 유물이 과연 어느 시기에 어느 곳에서 제작된 것인가에 관한 문제로서 이들 중에는 중국에서 만들어져 수입되거나 선물로 받은 것도 있겠지만 백제나 통일신라에서 만들어져 정창원에 소장된 유물이 다수 전해지고 있어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이처럼 중요성을 지닌 정창원 관련 연구가 그동안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 정리된 적이 없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국내 외 학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정창원 금속공예의 연구 현황을 살펴보고 최근 한반도에서 출토되고 있는 금속공예품을 통해 이들이 지닌 정창원 유물과의 연관성을 검토해 보았다. 나아가 정창원 조사와 연구에 대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한지 정창원 조사와 연구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 내용이다. 1, 정창원 소장 유물 조사를 위한 국가 차원의 지원 및 창구의 일원화 2. 정창원 소장 유물의 체계적인 목록화 작업 및 데이터베이스화 3. 일본과 공동 조사 연구의의 적극적인 시행 및 정창원 관련 연구자의 초청 4. 정창원 유물과 국내 보물급 유물의 교류 전시 추진 5. 정창원 관련 서적의 출판과 지원을 통한 연구 저변의 확대.

신라감은사건축의 계획이념과 설계기술 고찰 (Study on the Design Ideas and Planning Method of the Gameunsa Temple Architecture in Silla)

  • 이정민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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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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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8-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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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감은사는 문무왕대에 시창하여 신문왕 2년(682)에 완공된 신라중대의 불교사원이다. 본 연구는, 기존의 감은사지 발굴조사 성과를 기초로 하고, 역사학 분야 등에서의 문헌연구 성과를 참고로 하여, 신라감은사건축의 조영계획 양상 및 특질, 그리고 그것과 당시의 정치·사회적, 종교적 환경 간의 관계에 대한 구명을 시도한 것이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감은사 중심곽 내 당탑 및 회랑, 중문과 강당 등 모든 건축물은, 기단부를 기준하여, 방(方)216척(尺)(고구려척, 추정단 위치수 353.30mm)의 윤곽에 남거나 부족함 없이 정확하게 들어가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사실은, '만파식적설화'와 유교예악사상과의 관계, '이견대'의 명칭과 『주역』과의 관계, '감은사지출토 태극무늬장대석'과 『주역』과의 관계 등으로부터 확인되는, 동해구 유적(대왕암·이견대·감은사)에 서린 신라중대왕실의 '유교정치이념의 표방' 의지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유의미한 것으로 판단되며, 감은사가람의 설계초기단계에 있어서, 잠재하는 규모계획의 기준으로부터 이차적 조정으로서, 『주역』 계사상의 '건지책 216'으로부터 수를 취해 가람중심곽규모의 결정기준으로 삼은 결과로 추정된다. 감은사 당탑 등의 배치계획은, 방(方)216척(尺)의 윤곽 내, 가장자리로부터 중심부로, 즉 가람중축선상 중문·강당의 배치 및 금당 남북위치의 결정, (중문·강당·금당 측면에 각각) 남회랑·강당동서편건물·익랑 배치, 동서회랑의 배치, 동서 석탑 중심위치 결정의 순으로 진행되었을 것으로 추찰된다. (2) 감은사건축에 있어서의 유불공존적 양상은, 『금광명경(金光明經)』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며, 왕의 화신인 용이 용혈(龍穴)을 통해 금당기단 내에 들어 선요(旋繞) 즉, 공경·숭봉(崇奉)을 행함으로써 "음양조화시부월서(陰陽調和時不越序) 일월성숙부실상도(日月星宿不失常度) 풍우수시무제재횡(風雨隨時無諸災横)" 등의 무량공덕이 얻어지기를, 그리고 일월에 비유되는 부처의 광명이, 새로이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아 운영해 나갈 국가, 신라의 사방 천하(천(天)=건(乾), 건지책 216척(尺) 규모의 가람중심곽)에 길이 두루 비춰지기를 염원한 문무왕의 뜻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찰된다. 그리고 그 구상 및 실현에 있어서는 유불습합적 사상 경향을 가졌던, 그리고 문무왕이 유언으로서 국사로 삼기를 당부했고 신문왕 즉위 후 국로로 임명되었던, 경흥(憬興)이 깊이 관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 능비(陵碑)의 건립과 어필비(御筆碑)의 등장 (Formative Stages of Establishing Royal Tombs Steles and Kings' Calligraphic Tombstones in Joseon Dynasty)

  • 황정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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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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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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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 논문은 조선 초 중기, 조선후기, 대한제국기 세 시기로 나누어 조선왕릉에 건립된 신도비와 표석의 시기별 건립추이와 양식적 특징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그 결과 왕실 능비(신도비와 표석)는 일반 사대부가와 달리 건립한 시기와 주체, 후계왕의 의도에 따라 시기별 차이를 보이며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15~17세기는 왕릉 신도비의 건립과 재건이 이루어진 시기, 18세기는 신도비가 표석으로 대치되어 다수 건립되었고 국왕의 어필을 직접 돌에 새긴 어필비가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이며 대한제국기는 황제국으로 격상됨에 따라 조선 개국자인 태조와 왕후, 선조들에 대한 추숭(追崇) 사업이 활발해지면서 표석 중건이 이루어진 시기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본다면, 결국 우리나라 능비의 역사는 조선후기를 기점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왕릉 신도비의 형식은 삼국시대의 부정형한 석비의 초보적인 형태에서 벗어나'귀부이수'형의 당비(唐碑) 형식을 수용한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 말 탑비의 퇴화된 양식에서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15세기 건립 당시부터 선왕에 대한 숭모 예를 표현하고자 하는 국왕과 왕의 치적이 국사(國史)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므로 신도비를 별도로 세울 필요가 없다는 신료들의 입장이 대치되면서 건원릉 제릉 헌릉 구 영릉 4곳에만 건립된 채 왕릉에는 한동안 석비가 건립되지 않았다. 신도비 건립이 중단된 이후 17세기에 이르러 왕릉에 아무런 표(表)를 해 둘 수 없다는 의견이 제기됨에 따라 형식이 간소한 표석이 건립되기 시작했으며, 1682년 작 영릉(寧陵)의 표석은 최초로 왕릉에 건립된 표석이자 장대한 규모, 섬세한 조각기법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왕릉의 능표는 영조 재위 기간인 1740년대부터 대규모로 건립되었다. 열성(列聖)에 대한 추숭과 어필간행 등을 통해 자신의 왕위 계승의 전통성을 공표하고자 했던 영조는 제릉의 신도비를 재건하는 한편, 의릉(懿陵)을 비롯하여 총 20곳에 달하는 곳에 표석을 세우는 역사(役事)를 추진했고, 처음 친필 글씨를 돌에 새긴 어필비를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 어필비 제작 현상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소실된 어필을 보존하려 한 숙종의 신념을 계승한 영조에 의해 제도적으로 추진되면서 어필을 새긴 능비가 등장한 배경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시대사적으로 주목할만하다. 이러한 표석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다시 한번 다량 제작된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고종은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태조의 조선 건국에 두고 태조와 그 4대 선조에 대한 추숭과 기념물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고 전면과 후면 모두 자신의 글씨로 채움으로써 역대 어느 왕보다 통치자로서 권한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었다. 이상 언급한 왕릉의 신도비와 표석의 건립 추이는 동시대 원 묘에 건립된 신도비, 표석과 비교 고찰을 통해 시대별 특징과 왕실 조각품으로서 성격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날 것으로 생각한다.

정릉(貞陵) 이장과 광통교(廣通橋) 개수를 통해 본 조선 초기 지배 이데올로기의 대립 (Collision of New and Old Control Ideologies, Witnessed through the Moving of Jeong-regun (Tomb of Queen Sindeok) and Repair of Gwangtong-gyo)

  • 남호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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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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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4-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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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정릉(신덕왕후릉)의 축조와 이장에 얽힌 논란은 조선 초기, 신구(新舊) 지배 이데올로기 사이의 충돌이 잘 드러난 사례이다. 태조의 경처였던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은 도성 안에 조성되지만 태조 사후, 태종에 의해 도성 밖으로 이장되고 그곳에 남아 있던 석물들은 청계천의 광통교를 보수하는데 쓰인다. 야사에서는 태종이 강씨를 저주하기 위해 도성 밖으로 능을 옮기고 남은 석물들로 광통교를 만들어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했다고 전한다. 태조 말년, 강씨와 태종은 대립하던 관계였으나 태조가 왕으로 옹립되기 전까지는 오히려 정치적 동반자에 가까웠다. 정릉이나 광통교와 관련된 실록의 기록은 더 담백하다. 정릉의 천장은 능묘가 도성 안에 있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는 의정부의 상언을 따른 것이다. 광통교 개수를 위해 정릉을 격하하고 이장시켰다는 주장에는 사실 관계가 반영되어 있지 않다. 논자는 광통교 개수에 정릉의 석물이 재사용된 것에 대해 당시 도성 안팎에서 건축자재소요량이 급증하여 효율적인 조달 필요성이 대두되었을 가능성을 상정하였다. 정릉이 도성 안에 조성되었다가 다시 도성 바깥으로 이장된 원인은 태조와 태종이 가졌던 사상적 배경의 이질성에서 찾았다. 태조는 유교국가의 통치자였으나 죽은 왕비를 위해 도성 내에 원찰과 무덤을 조성한다. 여기에는 불교의 힘을 빌려 죽은 신덕왕후의 권위를 위의하고 지지세력을 규합하고자 한 노림수가 있었다. 원의 다루가치 집안에서 태어나 지방군벌로 성장한 이성계는 높은 유학적 소양을 가지지는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오히려 호불적 성향을 띄는 구체제의 인물이었다. 반면 태종 이방원은 고려 말 과거시험에 급제했던 엘리트 유생이었으며 주자학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유교국가에서 도성이 가지는 상징성에 대한 이해가 더 깊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삼국시대 이후, 율령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 시스템이 정립된 이래로 도성 바깥에 무덤을 만드는 경외매장의 원칙은 거의 예외 없이 지켜져 왔다. 정릉은 태조 개인의 강한 의지로 도성 내부에 조성되지만 왕 이전에 유학자였던 태종에게 이러한 모습은 바람직하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태종은 즉위 후, 주도적으로 도성 재정비를 추진하는데 이는 '예치'를 강조하는 유교 이데올로기를 한양도성의 경관에 명확하게 구현하고자 한 의지의 발현으로 보여진다. 정릉의 이장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 아래 진행되었던 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