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Book of O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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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방강(翁方綱)의 시경학(詩經學) - '한송겸채(漢宋兼采)'의 경향을 중심으로 - (Weng fang-gang(翁方綱)'s Studies on the Book of Odes - Focused on Adoption of research methods of hanxue(漢學) and songxue(宋學))

  • 양원석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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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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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85-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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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논문은 청대(淸代) 건가(乾嘉) 시기의 학자 옹방강(翁方綱)의 경학(經學) 가운데, 특히 시경학(詩經學)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그 주요 내용과 특징을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옹방강(翁方綱)은 한학(漢學)과 송학(宋學) 연구 방법의 장점을 동시에 채용한 경학 연구, 즉 '한송겸채(漢宋兼采)'의 경학 연구 방법론을 주장한 학자였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한송겸채(漢宋兼采)'의 경학 연구 방법론이 실제 그의 경학 연구에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를 고찰하기 위해 그의 시경학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 연구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옹방강(翁方綱)은 "시경(詩經)" 연구에 있어서, 시서(詩序)를 존신하고 "모전(毛傳)"의 해석을 신뢰하였으며 고훈(古訓)을 중시하였고 의경(疑經)의 풍조를 반대하는 등 한학적(漢學的) 경향을 보이면서도, 또한 정현(鄭玄)과 공영달(孔穎達)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주희(朱熹)의 "시집전(詩集傳)"에 대해서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등 송학적(宋學的) 경향도 보이고 있었다. 즉 옹방강(翁方綱)은 "시경" 연구에 있어서 한학과 송학의 연구 방법을 적절히 채택하여 이를 운용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주희(朱熹)와 대진(戴震)의 음시해석(淫詩解釋)에 관한 고찰(考察) - 15국풍(國風)을 중심으로 - (The study of Zhu-xi(朱熹) and Dai-zhen(戴震)'s filthy poetry interpretation - Centering around 15Guo-feng(國風))

  • 박순철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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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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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9-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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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주자(朱子)는 송대(宋代)의 시경학(詩經學)을 대표하고 대진(戴震)은 청대(淸代)의 환파(晥派)를 대표하는 시경연구가(詩經硏究家)이다. 본 논문에서는 주자(朱子)에 대하여 비판적 입장을 취했던 대진(戴震)을 "시경(詩經)" 전석(詮釋) 방면에서 주자(朱子)와 비교하고 특히 주자가 "음시(淫詩)"라고 본 30편의 시에 대하여 양자를 서로 비교함으로써 어떻게 서로 다르게 시를 해석했는가를 규명하였다. 그 결과 주자와 대진은 30편시에 있어서 그 견해가 같은 것은 2편 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모두 달랐다. 주자는 풍시에 나오는 정시(情詩)를 해석함에 있어 문학적(文學的) 관점(觀點)에서 제1인칭 시점(視點)으로 시를 해석하여 시의 목적과 효용이 '언정('言情)'이라고 본 반면, 대진은 정시(情詩)에 대하여 경서적(經書的) 관점(觀點)에서 제3인칭 시점(視點)으로 시를 해석하여 시의 목적과 효용이 '미척(美刺)'라고 보았다. 이는 한마디로 주자는 '언정(言情)'의 문학적해석(文學的解釋)이고, 대진(戴震)은 '사무사(思無邪)'의 경서적(經書的) 해석(解釋)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사람의 "시경(詩經)"에 대한 해석 차이는 시경학사(詩經學史)의 측면에서 적잖은 의미를 갖는다. 즉 모시(毛詩)-한대(漢代)-당(唐) 송대(宋代)-명(明) 청대(淸代)-현대(現代)로 이어지는 시대사적(時代史的) 흐름에서 "시경(詩經)"이 경서적 관점의 해석에서 문학적 관점의 해석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주자가 태동적 역할을 하였지만 일정한 한계가 있었고, 청대(淸代)의 대진(戴震)을 거쳐 현대에 와서 완성되는 과정에서 대진(戴震)는 "시경(詩經)"를 고거학(考據學) 방법(方法)으로 접근하여 객관적으로 시의(詩義)를 설명하면서도 시의(詩義)의 해석(解釋)에 있어서는 모시설(毛詩說)을 따르고 주자(朱子)의 문학적 관점을 계승하지 않고 경서적 관점에서 해석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대진(戴震)의 "시경(詩經)" 해석은 모시설(詩說)의 긴 생명력과 "시경(詩經)"의 경서적 해석으로부터 문학적 해석으로의 전환이 직선적이지 않고 그 사이에는 많은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였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자와 대진의 일련의 흐름을 볼 때 시경은 앞으로 계속 다양한 시각으로 해석되고 연구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고전콘텐츠에 나타난 공(公)개념의 재해석 (Reinterpretation of the Concept "Publicity" in Ancient Classics of Asia)

  • 박성준
    •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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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권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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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67-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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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 논문은 동양 고전에서 담고 있는 '공(公)'개념을 분석 정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고전 콘텐츠인 '시경(詩經)', '맹자(孟子)', '윤언(論語)', 晦菴集(회암집)', '日知錄(일지록)' 등을 통해 '공(公)'개념을 접근했다. 본 논문은 '시경(詩經)'에서는 통치영역으로서 '공(公)', 공자익 '윤언(論語)'를 통해서는 종법적 질서로서 '공(公)', '공자(孟子)'에서는 군주의 권위로서 공(公), 주자의 '회암집(晦菴集)'에서는 정치적 지배영역으로서 공(公),고염무의 '일지록(日知錄)'은 공사(公私)의 일원성으로서 공(公)으로 각각 나누고 '공(公)'개념을 재해석하고자 했다.

중국 고대 삼달존(三達尊) 사상의 연원 고찰 - 『시경(詩經)』에 보이는 기로의식(耆老意識)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Origin of The Triple Value(三達尊) in Ancient China-Mainly with the Aged Consciousness in the Book of Odes)

  • 노상균
    • 비교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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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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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7-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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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 논문은 미래지향적인 건강한 기로문화 건설의 일환으로 중국 고대 "삼달존(三達尊)"사상에 대해 그 형성배경과 구체적인 의미, 그리고 형성과정 속에서 창조된 상징성을 자세히 고찰함으로써, 현대사회에서 노인들이 갖추어야 할 덕성과 자존감을 회복하고 이에 따른 젊은이들의 존로(尊老)의식을 고취하고자 함에 그 목적을 두었다. 필자는 "시경(詩經)"의 "대아(大雅)" 및 "소아(小雅)"의 여러 시편들과 "상서(尙書) 주서(周書)"의 기록들로부터 덕(德)과 작(爵)(지위) 그리고 치(齒)(나이)를 삼위일체로 여기는 "삼달존(三達尊)"사상의 연원을 찾아내고, 자세한 분석을 통하여 이 사상이 주초(周初)의 정치적 효용성으로 인해 발생하였음을 밝히고, 아울러 이 사상의 상징체로 서주초의 문왕(文王)을, 그리고 구현체로 서주말의 소백호(召伯虎)를 설정하고 이 두 인물에 대한 자세한 고찰을 진행하였으며, 이를 통해 상징화와 구현화가 후대 삼달존 사상이 전형화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음을 밝혔다.

장서각 소장 『국풍』에 나타나는 물명 고찰 (Consideration of the name of a thing appearing in the Jangseogak Archives "Gugpung(국풍)")

  • 이현주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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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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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25-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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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고에서는 "국풍"에 나타나는 물명의 특징을 살펴보기 위해서 이 보다 앞서 17세기 초에 간행된 "시경언해"의 물명과 비교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본고에서는 "시경언해"와 "국풍"의 물명이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를 "두 문헌의 편찬목적의 차이"와 "국어사적 변화의 반영"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검토하였다. "시경언해"는 식물이나 동물의 총칭어나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동식물명에 대해서는 고유어 물명을 제시하지 않았지만, "국풍"에서는 이에 대해서도 고유어 물명을 제시하였다. '(麥), 모(茅), 도(稻), 서(黍), 샹(桑)'에 대해 고유어 물명 '보리, ?, 벼, 기쟝, ?'이라는 고유어 물명을 제시하였고, 동물명의 경우에도 '안(?), 어(魚), 호(狐), 셔(鼠), 고(羔), 고양(羔羊)'에 대해 '기럭이, 고기, 여이, ?, 염소, 염소와 양'과 같은 고유어 물명을 제시하였다. 본고에서는 그 이유를 "국풍"의 편찬 목적에서 찾았다. "국풍"은 여성교육을 위해 만들어진 책이다. "국풍"은 그 내용 뿐만 아니라, 내용 안에 포함된 한자를 익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시경언해"와 달리 대부분의 물명 한자에 대해 고유어 물명을 제시하였다. "국풍"과 "시경언해"의 고유어 물명은 서로 일치하는 어휘들도 보이지만,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도 다수 발견되었다. 이들은 "시경언해"가 간행된 17세기 초와 "국풍"이 필사된 19세기 초의 국어사적 변화를 반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경언해"의 '(荇)'-말암, 도악이, 번(?)-, (柏)-, 뎌(?)-열, 뎌(樗)-개듕나무, 구(?)-염규, 창경(倉庚)-아리새'에 대해 "국풍"에 나타나는 '믈나믈, ?, 삼, 가?나무, 부초, '는 19세 초의 현실언어를 반영한 것이다.

공자의 『시경』 재구성과 시론(詩論) - 『논어』를 중심으로 (Confucius's Theory of Poetics in Analects)

  • 임헌규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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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3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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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39-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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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주지하듯이 공자(孔子)는 인문주의 이념을 정립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천하를 주유하였고, 그리고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육경(六經)을 산정(刪定)하면서 제자들을 훈육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논어"에 의거하여 살펴본다면, 공자는 주로 "시(詩)" "서(書)"의 문장으로 교양을 쌓고, 례(禮)에서 자립하고, 락(樂)에서 도덕적 완성을 기하도록 제자들을 이끌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서도 그는 특히 "시(詩)"에 가장 많은 비중을 두면서 논찬(論纂)과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이 글은 공자가 가장 많은 비중을 두고 제자들을 가르친 책은 "시(詩)"라는 점에 주의하면서, "시경"이란 어떤 책이며, 공자가 "시(詩)"의 형성에 어떤 공헌을 했으며, 공자의 시론(詩論)은 어떠하였는지를 해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해명을 위해서 2장에서는 기존의 연구들을 바탕으로 중국 고전에 입각한 시(詩)에 대한 정의(定義), "시경(詩經)"의 성격 구성 형성 및 공자의 시산정설(詩刪定說)에 대한 비정(批正)을 시도하였다. 여기서 필자는 우선 사마천의 공자(孔子) 시산정설(詩刪定說)이 왜 근거가 박약한지를 살펴보고, 공자는 3,000여 편의 시(詩)를 손수 산정하여 300여 편으로 정리한 것이 아니라, 단지 시(詩)에 곡을 붙이면서(악정(樂正)) 다양한 판본들을 참고하면서 '손상되어 어질러지고 빠지거나 순서가 뒤바뀐 것'을 교정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3장에서는 "논어"에 나타난 시(詩)에 대한 공자의 언명을 분석하면서, 공자의 시론(詩論)을 설명하였다. 여기서는 우선 공자가 말한 학시칠법(學詩七法)(흥(興) 관(觀) 군(?) 원(怨) 이지사부(邇之事父)-원지사군(遠之事君) 다식어조수초목지명(多識於鳥獸草木之名):17:9)을 상세히 논구하였다. 그런 다음 공자가 말한 시교(詩敎)의 종지(宗旨)인 "시 삼백 편을 한마디 말로 포괄하면, 생각에 사특함이 없는 것이다."는 말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해석을 시도하였다.

중국 묘학 반수(泮水)의 변천과 전개양상 (Historical Studies on the Transformational and Developing Process of Bansu at the Temple-School in China)

  • 정우진;염소지;심우경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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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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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2-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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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중국의 독특한 묘학 반수의 역사적 기원과 변천과정에 대한 고찰을 통해 반수(泮水)의 특질을 규명하는데 목적을 두고 문헌고찰과 현장조사를 통해 수행되었다. 반수를 기록한 최초의 문헌인 "시경"에서는 반수가 반궁(泮宮) 곁에 흐르는 하천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후대에 반수는 제후의 학교인 반궁(泮宮) 조영에 있어 필수적인 조경시설이 되었고, 학교의 정체성을 규정짓고, 학궁 조영에 있어서 중요한 위상을 점유한 수계로 인식되었다. 묘학제도가 시작된 북송시대의 반수는 일정한 형식 없이 주로 자연수계를 이용하였으나, 명대에는 왕기(王圻)가 편찬한 "삼재도회(三才圖會)"에서 제시된 "제후반궁도(諸侯泮宮圖)"가 표준이 되어 반원형의 지당이 반지로 여겨지게 되었으며, 현재 남아 있는 반지는 이러한 전형에 의해 명대 이후에 새롭게 조성된 것이다. 민간에 나타난 반월지도 이러한 삼재도회식 표준이 근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묘학 반지가 갖는 신성성과 형식적 공간질서가 차용된 결과로 판단되며, 본 연구에서는 중국의 사당, 사찰, 주택과 마을조경에 독특하게 조성된 반월지의 변천과정을 분석 고찰하였다.

한의학과 문학의 교섭 양상 연구 -약명시(藥名詩)를 중심으로- (A Study on Reciprocal Relationship between TKM and Literature : Centering on Medicinal Name Verses(YakMyeongSi))

  • 이정현
    • 한국한의학연구원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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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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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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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In this study, YakMyeongSi were considered to define relations of Tradional Korean Medicine(TKM) and literature. In the introduction, present related studies were searched to clarify YakMyeongSi are completely different from medical property songs(YakSeongGa). Related data about YakMyeongSi and YakSeongGa were extracted for the initial findings. In chapter 2, medical name verse was defined as 'a type of free verses with one or more medical names in each verse to be interpreted ordinarily' based on records and examples of YakMyeongSi. In China, it originated from "Book of Odes" and "Songs of Chu", and it was most popular in the Song-China. Medical names actually referred to medical names in the early forms of the Warring States Period, but the complete form of YakMyeongSi started to appear in the Tang-China. In chapter 3, 34 YakMyeongSi and 5 related data were suggested in tables as the present conditions of Korean YakMyeongSi. With actual examples, better comprehension of YakMyeongSi were intended. Also, the fact that Korean YakMyeongSi were completed in forms at the end of Goryeo and beginning of Joseon dynasty. The motivations of writing YakMyeongSi were also studied. Medical names were put into verses because they well expressed landscapes and emotions. Propagation of medical knowledge was the basis of YakMyeongSi. There are limits in defining the relations of TKM and literature with some YakMyeongSi. More studies must be carried out on YakMyeongSi in various records with details and interests. Also, study to define general relations of TKM and literature must be carried out together by examining TKM in literary forms such as medical introductions or medical property songs and literature pieces that expressed principles and materials of TKM.

인체미 인식과 복식형태의 변천 - 선사~청대까지 중국 여성복식을 중심으로- (A Study on the Changes of the Form of costume related to the recognition of the beauty of the body -from prehistorical period to Ch'ing Dynasty in Chinese female costume-)

  • 김민지
    •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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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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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5-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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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
  • This study is historical research o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Changes of the Form of costume and the recognition of the beauty of the body from prehistorical period to Ch'ing Dynasty in Chinese female costume. In figure painting a significant point was to describe the spirit of the figure so Chinese painters were less interested in ideal body pro-portion or body shape than Westerns. But idealized beauty of the female body existed and changed keeping abreast with the form of costume in each period. In the prehistorical period Wemen fasten waist belt so enabled to distinguish upper part of the body from lower one. "Locust-forehead moth-eyebrows(蝗首蛾毛)" recorded in "the Book of odes(詩經)" was the canon of beaty and Wemen tried to make their forehead broad and square from Zhou Dynasty to the Wei Jin periods. From the age of Civil War to han Dynasty Slender waist was loved so waist was tightly fastened and hemline became broader. in the course of that time Plump body in big cloth with broad sleeve emerged but that was less significant than Tang Dynasty. During Wei Jin and the Southern/Northern Dynasty undergo disruption and division they admired Taoist images. Loose fitting style with handkerchief hemline and broad sash belt was prevailed while miserable life was reflected gaunt face and lean body. Suk Dynasty also preferred a slim and long body silhouette. The style was presented extremely high waist line long and narrow sleeve slim and long skirt which expressed dynamic and straight image. The culture of Tang Dynasty was open and diverse and that character enabled blod decolletate revealing body line by tight fitting and special make-up-Social background of uion and stabilization made female body extremely plump full face. full breast and hips with most erotic image. The period of Kaiyuan Tianbao fashioned mannish disguise presented androgynous image. Five Dynasty and Song Dynasty restored standard body type so upper garments concealed neck and bust high waist line lowered which represented refined and simple outfit. But another eroticism emerged as foot-binding in Song Dynasty. For the sake of covering up deformed top of the feet and ankle gaiters and arrow shaped shoes were devised. During Ming Ch'ing Dynasties body shape became more slim weak and young causing to escort instinct that reflects 'Lust' or 'Munda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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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성균관 반수(泮水)의 연원과 특성 (Characteristics of Bansu at Sunggyungwan in Joseon Dynasty)

  • 정우진;심우경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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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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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8-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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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 연구는 조선시대 성균관을 끼고 도는 물인 반수의 역사적 기원과 문화적 함의에 대한 고찰을 통해 한국 전통조경에서 학교 조경의 특질을 규명하는데 목적이 있다. 반수를 기록한 최초의 문헌인 "시경"에서 반수는 반궁 곁에 흐르는 하천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그러나 후대에 반수는 제후의 학교인 반궁(泮宮) 조영에 있어 필수적인 조경시설이 되었고, 묘학의 중요한 위상을 점유한 수계로 인식되었다. 조선시대 성균관 반수의 개념은 학교 동서로 물이 흐르고 남쪽에서 합류되는 물길을 말하며, 성균관은 국초에 개성 성균관의 공간구성을 답습하여 이러한 지세가 있는 곳에 입지되었다. 또한 고려시대의 반수제도는 송대의 반수개념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것은 묘학 내부에 반원형의 반지를 조성하는 명 청시대 이후 정형화된 중국의 전범과는 달리, 조선시대 성균관이 묘학 외부의 수계를 반수로 이용하게 된 원인으로 판단된다. 조선시대의 반수 조영관은 몇몇 향교와 서원의 택지에 있어서도 중요한 조건으로 고려되었던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조선시대 창건된 향교와 서원에서 학교 둘레를 흐르는 물길은 반수 조영관에 입각하여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