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1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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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Jane Eyre to Eliza Doolittle: Women as Teachers

  • Noh, Aegyung
    • 영어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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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4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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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65-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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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The pedagogical dynamic dramatized in Shaw's Pygmalion, which sets man as a distinct pedagogical authority and woman his subject spawning similarly patterned plays many decades later, has been relatively overlooked in the play's criticism clouded by its predominantly mythical theme. Shaw stages Eliza's pedagogical subordination to Higgins followed by her Nora-esque exit with the declaration, "I'll go and be a teacher." The central premise of this article is that the pioneering modern playwright and feminist's pedagogical rewriting of A Doll's House sets out a historical dialogue between Eliza, a new woman who repositions herself as a teacher renouncing her earlier subordinate pedagogical position that is culturally ascribed to women while threatening to replace her paternal teacher, and her immediate precursors, that is, Victorian women teachers whose professional career was socially "anathematized." Through a historical probe into the social status of Victorian women teachers, the article attempts to align their abortive career with Eliza's new womanly re-appropriation of the profession of teaching. With Pygmalion as the starting point of its query, this article conducts a historical survey on the literary representation of pedagogical women from the mid to late Victorian era to the turn of the century. Reading a wide selection of novels and plays alongside of Pygmalion (1912), such as Jane Eyre (1847), A Doll's House (1879), An Enemy of the People (1882), The Odd Women (1893), and 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 (1895), it contextualizes Eliza's resolution to be a teacher within the history of female pedagogy. This historical contextualization of the career choice of one of the earliest new women characters in modern drama helps appraise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such choice.

Change and Continuity in Traditional Timugon Rice Cultivation Beliefs and Practices

  • On, Low Kok;Pugh-Kitingan, Jacqueline;Ibrahim, Ismail
    • 수완나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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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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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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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Before the start of the North Borneo Company administration in North Borneo (now Sabah, Malaysia) in 1882, the Timugon Murut of today's interior Tenom District lived in longhouses, and practiced head-hunting during wars with other Murutic ethnic groups. Their economy revolved around swidden agriculture of hill rice, sago, and cassava. Wet rice cultivation and water buffaloes were introduced just before 1885. Wet rice was planted on the alluvial plains around the Pegalan and Padas Rivers, while dry rice was planted on hillside swiddens that had been cleared by slash-and-burn methods. Today, wet rice cultivation and cash-cropping on the plains are the main Timugon socioeconomic activities, while some families also plant dry rice on the hills as a back-up. The Timugon believe that the physical world is surrounded by the spiritual world, and everything was made by the creator Aki Kapuuno'. The focus of this field research paper is on the beliefs and ritual practices of the Timugon connected to their traditional rice agriculture. This study found that for generations, the Timugon believed that since animals were created by Aki Kapuuno' for the wellbeing of humans, various types of animals and birds convey omens to guide people. Thus, the older Timugon rice cultivation is strongly influenced by good and bad omens and taboos, and also involves symbolic practices and ritual offerings to guardian spirits of the rice. After the 1930s and especially since the 1960s, most Timugon became Roman Catholic Christians. Hence, this paper also examines changes in the traditional Timugon rice cultivation related beliefs and practices due to religious conversion and other fac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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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관덕정(觀德亭) 벽화의 도상과 표상 (Iconography and Symbols of the Gwandeokjeong Pavilion Murals in Jeju)

  • 강영주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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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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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8-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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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제주의 관덕정은 군병들의 활터로 '활쏘기'는 물론 '말 타면서 활쏘기', '전쟁의 진법'까지 훈련하여 상무 정신을 고취시키고, 전쟁 대비를 위해 무예를 연마할 목적으로 1448년에 건립되었다. 또한 제주에서 유일하게 대규모 인원이 운집할 수 있는 넓은 공간으로 각종 연회나 관아의 공식적인 업무를 수행하였으며, '관덕풍림'과 같이 계절의 정취와 자연의 운치를 향유하는 장소였다. 이러한 장소성과 건축적 의미가 큰 관덕정이 17세기 건물의 형태를 보존하고 있기에 건물 상인방 4면의 5가지 그림이 조선 후기의 그림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관덕정은 10여 차례 이상의 수리와 중수를 거쳤기에 벽화가 구체적으로 언제 처음 그려졌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현재의 벽화원형은(1976년 모사본 기준) 벽화의 도상과 양식으로 추정해보면 1850년(철종1) 재건, 1882년(고종19) 중수, 1924년 도사(島司) 전전선차(前田善次)의 보수, 1969년 10번째 중수 때로 요약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먼저 벽화 도상을 분석하여 제작 시기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즉, 최초 <호렵도>가 18세기 이후 그려지기 시작한 점을 비롯하여 삼국지의 유명 화제인 <적벽대전>이나 한나라 때의 은일자를 그린 <상산사호>, 당나라 시인 두목의 이야기인 <취과양주귤만거>와 같은 고사인물도의 유행과 민화풍의 <십장생도> 등의 주제는 물론 그림의 구성, 인물의 무기와 복식, 산수 표현과 채색, 필법 같은 세부적인 사항도 관덕정의 벽화가 19세기 말경에서 20세기 전반기에 그려진 작품임을 방증한다. 또한 당시 화단에서 유행하던 회화 주제나 양식과 관련이 깊어 1850년이나 1882년에 제작된 벽화가 1924년 보수와 1969년 중수를 거치면서도 벽화의 기존 내용과 형태를 보존·유지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다음으로 관덕정의 벽화 주제나 구성 방식은 군사훈련이라는 건물의 목적과 기능에 적합하게 건물 중앙 좌우에 파노라마 형식으로 <적벽대전>, <호렵도>를 구성하고, 바깥쪽으로는 감계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으로 제주의 관리가 지녀야 할 덕목인 은일과 입조 등 유교의 이상적 인간상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상산사호도>나 <취과양주귤만거>의 고사 인물도를 구성했다는 것이다. 또한 신선 사상과 장수를 상징하며, 궁중 행사나 장식화로 쓰이던 주제가 민간으로 확장되어 길상·벽사 기능이 강화된 <십장생도>를 표현하였는데, 이는 당인들의 지향을 반영하기 위해 전체적인 벽화 주제와 구성을 선택적으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벽화의 산수가 제주의 명산인 '한라산'이라는 점, 높고 낮은 오름, 현무암 자연석 돌담 표현, 수많은 고사 중에 제주의 진상품이자 특산품인 '귤'을 주제로 한 두목의 고사를 채택하여 시각화한 점, 백록담의 흰 사슴 전설의 응용, 제사를 중시하는 유가적 관습이 남병산의 제사 장면으로 표현된 것 등은 모두 제주의 풍속과 자연환경, 생활상의 일부를 반영하는 그림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의 항암 유지요법 중 vincristine과 관련된 혈소판수의 변화 (Platelet count change by vincristine in maintenance phase of acute lymphoblastic leukemia chemotherapy)

  • 이성문;함순식;전인상
    • Clinical and Experimental Pediatr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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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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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1-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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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목 적 : ALL 치료 중의 혈액학적 변화는 예후인자로써 뿐만 아니라 항암제의 용량을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이다. ALL의 유지요법 기간 중에 투여되는 vincristine의 용량은 저용량으로 혈소판수를 증가시키기에는 충분하다. ALL의 유지요법 기간 중에 vincristine 투여에 따른 혈소판의 변화를 알아보기 위하여 연구를 시행하였다. 방 법 : 가천의과대학교 길병원 소아과에서 고위험군 ALL로 진단받고 CCG-1882에 기초한 항암치료를 모두 마친 11명의 환아를 대상으로 유지요법 기간을 처음 6개월간의 초기, 마지막 6개월간의 후기로 나누어, vincristine 투여(0.05 mg/kg) 전과 투여 1, 2, 3주 후의 혈소판수를 비교 분석하였다. Vincristine 투여 전의 혈소판수를 100%로 하여 투여 후의 혈소판수를 percent로 환산하여 비교 분석하였으며, 투여 전에 비해 20% 이상 혈소판수가 증가한 경우를 의미 있는 증가로 하여 총례 및 각 개인별로 혈소판수를 비교 분석하였다. 결 과 : 유지요법 기간별로 혈소판수를 비교한 결과 유지요법 후기로 갈수록 전체 혈소판수는 증가하였으나 통계학적으로 의미 있는 차이는 없었다. 초기와 후기 모두 vincristine 투여 1주후 혈소판수는 최고가 되었다. 초기 6개월 유지요법 기간 중 vincristine 투여 전에 비해 투여 1, 2주 후에 통계학적으로 의미 있게 혈소판수가 증가하였으며 3주 후에는 투여 전 수준으로 되었다. Vincristine 투여 전에 비해 투여 1주 후에 혈소판수가 20% 이상 증가한 경우가 전체 11명 중 10명(90.9%)으로 통계학적으로 의미 있게 많았다. 후기 6개월 유지요법 기간 중 vincristine 투여 전에 비해 투여 1주 후에 통계학적으로 의미 있게 혈소판수가 증가하였으며 2주 후에는 투여 전과 비교해 통계학적으로 의미 있는 차이는 없었다. 후기에도 vincristine 투여 전에 비해 투여 후 혈소판수가 20% 이상 증가한 경우가 전체 11명 중 10명(90.9%)으로 통계학적으로 의미 있게 많았다. 결 론 : ALL의 유지요법에 사용되는 저용량의 vincristine은 투여 1주 후에 혈소판수를 최고로 증가시키며, 2-3주 후에 혈소판수는 투여 전 수준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혈소판수의 증가는 혈전증을 일으킬 정도는 되지 않으며, vincristine에 의해 혈소판의 기능저하로 ALL의 항암요법의 유지요법 중 혈액 응고가 발생할 위험성은 낮아 보인다.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경(聞慶)에서의 강학활동 (Ganjae's lecture activities in Mungyeong)

  • 임옥균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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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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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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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이 글에서는 간재가 문경지역에 거주할 때의 강학활동을 살펴봄으로써 40대 중반 왕성하게 학문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정립해가던 젊은 간재의 모습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문경의 심원사에서 강학활동을 하면서 간재는 "강규"를 세워, 선생과 제자 사이의 예를 엄격히 하였고, 부부 사이에는 반드시 서로 공경히 대할 것을 가르쳤다. 이를 통해서 자신의 학단 안에서라도 옛 예를 회복할 것을 기대하였다. 1884년에는 청화산 시동에서 강학활동을 하였는데, "시동서사의"를 지어, 뜻을 크게 세울 것, "소학"을 행동준칙으로 삼을 것, 공부하는 과정에서 성(性)을 위주로 삼을 것을 주장하였다. 성(性)을 위주로 삼을 것을 주장한 것은 성사심제설의 단초를 보여주는 것이다. 문경 지역에서 간재는 송병화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학문을 논하기도 하였고, 문경 지역과 관련 있는 학자들과 교류하기도 하였다. 송병화와 예를 논하면서 간재는 할아버지 상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를 대신하여 할아버지의 삼년상을 마치는 것이 인정상 맞는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송병화가 심이 체용을 갖추고 있다는 설을 주장한 것에 대해 그것을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심의 주재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고 보고, 성체심용(性體心用)이라고 하여 어디까지 성을 앞세워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간재는 문경 지역에 거주하면서 문경 지역과 관련이 있는 학자들과도 교류하였는데, 의당 박세화와 지암 김재경이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박세화는 홍직필의 재전제자라는 점에서 간재와 공통점이 있었다. 박세화는 문경에서 의병활동을 도모하다가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였고,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여 단식으로 순국하였다. 간재와 의당은 당시 기울어져가던 나라의 운명, 중화와 이적, 거의(擧義)와 자정(自靖)에 대해 논의하였다. 김재경은 의성 사람으로 간재가 문경에 머물 때 교류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에도 상호 방문하고 서신을 교류하는 등 관계를 지속하였다. 간재가 문경에 머무르던 시기에 국가적으로 큰 사건들도 몇 가지 있었다. 간재가 심원사에서 강학을 시작하기 1년 전인 1882년에는 임오군란이 있었고, 1884년에는 의복제도를 좁은 소매로 바꾼다는 조정의 명령이 있었다. 간재는 이러한 조정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옛 제도를 고수하도록 제자들에게 지시하였다.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도 되느냐는 의문에 대해서 간재는 의리상 불가한 것은 임금의 명령이라도 따르지 않을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1884년에는 또한 갑신정변이 있었는데, 간재는 외세를 배격하고 예를 지킴으로써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상으로 볼 때, 간재가 문경에서 강학하던 시기는 개인적으로는 간재의 핵심적인 사상인 성사심제설을 정립할 단초를 마련하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국가적으로는 외세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나라를 지킬 것이냐가 문제가 되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는데, 간재는 이에 대해서 문화의 표지인 예를 굳건히 지킴으로써 나라도 지킬 수 있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고, 그에 따라 행동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 근대의 고미술품 수장가 1: 장택상 (A Series of Biographies of The Collectors of Modern Archaic Art Objects of Korea 1: Jang, Taek Sang)

  • 김상엽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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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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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5-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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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최근 들어 한국 근대의 미술시장과 고미술품 수장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연구의 스펙트럼이 넓어지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이 방면에 대한 연구는 조선 후기의 서화 애호풍조에 의해 성행했던 수집과 감평의 수준을 알 수 있게 해주고 수장 형태의 근대적 변화를 알 수 있게 해주며 근대 동아시아 미술품 유통사를 재구성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기 때문이다. 한국 근대의 수장가에 대해서는 전형필(1906-1962)을 제외하면 수장경위나 수장내역 등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형필 외에도 근대의 중요한 한국인 수장가로는 박영철(1879-1939), 김용진(1882-1968), 함석태(1889-?), 김성수(1891-1955), 최창학(1891-?), 장택상(1893-1969), 김찬영(1893-?), 이한복(1897-1940), 박창훈(1898-1951), 백인제(1898-?), 이병직(-1973), 손재형(1903-1981) 등이 꼽힌다. 이 연재는 우리나라의 근대기 특히 일제시기를 중심으로 고미술품을 많이 수장한 한국인 수장가들의 생애와 수장품, 수장내역 등을 추적하고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연재에서 다룰 첫 번째 인물은 한국정치사의 거물 장택상이다. 장택상은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국무총리까지 오른 인물로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냈다. 천재적 능변가인 장택상은 그림과 글씨, 도자기 등의 감식가, 수집가로도 유명하다. 장택상은 일제시기 주요한 수집가의 하나로 뛰어난 유물을 무수히 수장하였지만 그의 수장유물은 6 25사변으로 인하여 상당수 없어졌고 이후 이승만과 맞서기 위한 대통령입후보로 인하여 주요 유물을 판매하는 바람에 거의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장택상은 한국 근대의 고미술품 수장가를 꼽을 때 수위로 꼽을 만한 인물이다. 특히 다른 수장가들과 함께 일종의 품평회와 같은 모임을 만들어 이 방면 문화의 심화와 확산에 기여한 점은 특기할 만하다.

석재 서병오(1862-1936)의 1889년작 난죽석도 연구 (A Study on the 1889 'Nanjukseok' (Orchid, Bamboo and Rock) Paintings of Seo Byeong-o)

  • 최경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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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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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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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서병오(徐丙五, 1862-1936)는 서구적 '미술' 개념의 도입으로 일본화 내지 서양화로 기울던 일제강점기 시서화일치의 대구 문인화단이 형성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1879년 이하응(李昰應, 1820-1898)과의 만남을 계기로 서화계에 입문하였으나, 문인화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부터이다. 그의 예술세계는 세 시기로 구분되며, 학습기인 1879년부터 1897년까지는 관직 진출을 목표로 하였던 때문인지 중국 화보를 임모하거나 이하응의 영향 아래 사군자화를 여가에 그리는 정도였다. 발전기는 1898년부터 1920년까지로 그는 애국계몽운동 등 사회적 지도자로 활동하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삶의 방향을 문인화가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중국 여행에서 다시 만난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의 운미란과 포화(蒲華, 1830-1911)의 묵죽법을 근간으로 새로운 화풍을 적극 모색함과 동시에 산수, 화훼, 기명절지 등의 화목도 다루었다. 완숙기인 1921년부터 1936년까지는 대구와 한양을 오가며 근대 한국 화단의 서화가로 왕성하게 활동하였으며, 묵란과 묵죽에서 윤묵의 호방한 필법을 특징으로 하는 개성적 화풍을 완성하였다. 특히 학습기의 경우 관련 기록이나 현전작품이 드물어 서병오의 창작활동이나 화풍 등에 관한 것은 추론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본고에서 집중적으로 분석한 서병오의 1889년작 난석죽도 11점은 학습기의 화풍 연원이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1889년작 난죽석도 가운데 묵란도는, 이하응이 1882년 7월 청군에 의해 체포되기 이전에 그린 초기 군란도와 석란도에서 영향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묵죽도는 한양에 널리 알려진 양주화파 정섭(鄭燮, 1693-1765)과 김정희의 제자 허련(許鍊, 1809-1892)의 화법을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이하응의 석란도 형식을 응용하여 변화를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괴석도의 경우 직접적인 관련성은 찾지 못하였으나, 19세기 후반 청나라의 괴석화가 주당(周棠, 1806-1876)과 여항화가 정학교(丁學敎, 1832-1914) 등에게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결론적으로 서병오의 1889년작 난죽석도는 학습기에 그려진 것으로 운현궁을 찾았던 허련과 정학교 같은 동시기 화가들이나, 한양에 작품이 유입되었던 정섭과 주당 등의 중국 작품을 실견하며 이들의 화풍을 수용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도시 및 시골에 거주하는 성인들의 성인병에 대한 지식, 태도 및 실천 - 고혈압, 당뇨병 및 암을 중심으로 - (The Knowledge, Attitude, and Practices Related to Noncommunicable Diseases Among Korean Adults Residing in Urban and Rural Areas -Focusing on Hypertension, Diabetes, and Cancer-)

  • Kim, Byung-Sung;Kim, Kong-Hyun;Lee, Chae-Un;Shin, Hae-Rim;Park, Hyung-Jong
    • 보건교육건강증진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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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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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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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2
  • 의학이 발달하고 수명이 연장되고, 그리고 식사가 보다 서양화되는 등 생활양식이 변화됨에 따라 성인병이 1970년대부터 한국에 보다 늘어나게 되었다. 본 연구는 면접 및 설문지법을 이용하여 성인병, 특히 고혈압, 당뇨병 및 암에 관하여 도시 및 시골 거주자들의 지식, 태도 및 실천을 비교 연구하였다. 연구기간은 1990년 1월 부터 12월까지 1년동안이었고 대상은 전체 716명으로 그중 360명은 부산시 거주자였고 356명은 부산 근교의 시골거주자였다. 고혈압, 당뇨병 및 암에 대해 알고 있다고 응답한 대상자는 각각 92.6%, 92.0% 및 74.7%였다. 고혈압, 당뇨병 및 암의 지식도에 있어서 도시 거주자들이 시골 거주자보다 유의하게 더 많이 알고 있었다(각각 p<0.001). 그러나 성인병에 관한 태도와 지식에 있어서는 도시 거주자와 시골 거주자 사이에 유의한 차이가 없었다(p<0.05). 고혈압의 지식도는 거주지(r=0.2159, p<0.01) 및 수입 (r=0.1882, p<0.01)과 유의한 상관관계가 있었고, 당뇨병에 관한 지식도는 거주지(r=0.3952, p<0.001), 수입(r=0.3663, p<0.001) 및 직업(r=0.2576, p<0.001), 수입(r=0.4138, p<0.001), 직업(r=0.3044, p<0.001) 및 성별(r=-0.1887, p<0.01)과 유의한 상관관계가 있었다. 성인병에 관한 태도는 성별(r=0.4748, p<0.001), 경제상태(r=0.2209, p<0.01) 및 고혈압 지식도(r=0.1844, p<0.01)와 유의한 상관관계를 나타내었다. 성인병에 관한 실천은 본 연구에서 어떤 변수와도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인병이 이전보다 더 많아짐에 따라 연령이 증가하는 나라와 개발국가에서 성인병이 주요한 대상질환이 될 것이고, 질병예방과 건강증진의 차원에서 성인병을 예방하기 위해 보건교육에 보다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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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지 선종의 외과적 치료[17례 보고] (Surgical Treatment of Bronchial Adenoma - Reports of 17 Cases -)

  • 문석환
    • Journal of Chest Surg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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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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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7-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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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2
  • Bronchial adenoma, firstly described by Muller[1882] had been reported on the subject stressed their benign nature prior to 1940`s, but these tumors including carcinoid tumor, mucoepidermoid carcinoma, adenoid cystic carcinoma, pleomorphic adenoma are now known to possess the various degree of malignant natures from benign course, low grade malignant potential to distant lymphatic or hematogenous metastasis or combination. Although histologically diffeerent, four varieties except carcinoid tumor which is a spectrum of neu-roendocrine tumor originating Kulchitsky cell of the bronchial epithelium and form the part of the APUD tumor spectrum, are morphologically and in many respects clinically similar to the corresponding tumor of the salivary gland is a specific varient of adenocarcinoma that occurs most commonly in the major and minor salivary gland and less frequently tra-cheobronchial tree, esophagus etc. To better understand the clinical characteristics and assess more precisely the malignat nature of bronchial adenoma, we studied 17 cases of bronchial adenoma, which had been experienced at the Department of Thoracic and Cardiovascular surgery of Catholic University Medical College from April 1977 to september 1991. Seventeen cases of bronchial adenoma consist of 2 carcinoid tumors, 6 adenoid cystic carcinomas, 8 mucoepidermoid carcinomas and one pleomorphic adenoma. There is a slight predominace of male patients[10/17] and the age of pt studied varied with a higher incidence occurring between the ages of 40 years and 60 years[mean age, 46.5 years]; the youngest being 15 years and oldest 69 years. Their leading complaints were hemoptysis[4], exertional dyspnea[8], fever & chilness [4], and symptoms mimicking the bronchial asthma[4]. Diagnosis was aided by the radiologic studies such as chest X-ray, polytomography, CT scan, brochography and bronchoscopy. The preferred locations of fumor were in the trachea[4], main stem bronchus[3], bronchus intermedius[3], bronchus of RUL[2], LUL[1], RLL[1], LLL[3] with no peripheral location. Modalities of treatments were single or combination of surgical resection, radiation therapy, chemotherapy. Complete resections were permitted in 12 cases with late recurrences of 4 cases ranging from 6 months to 10 years: pneumonectomy[4], lobectomy[4], bil-obectomy[2], sleeve resection[2]. Gross findings of resected specimens in 14 cases showed that 4 cases were polyp-like pedunculated mass[entirely intraluminal mass] with intact mucosa, 8 cases were broad-bas-ed sessile mass[predominatly intraluminal] and the main portions were located below the mucosa similar to tip of iceburg[predominantly extraluminal] in 2 cases. Follow-up information was availble in all 17 cases ; eight were alive without evidence of disese ranging from 1 month to 13 years. But seven cases died of the causes related to tumor[6 cases within 12 months, one case 10 years after pneumonectomy]. We concluded that 8 cases[47%] of 17 cases were metastasizing bronchial adenoma and precise survival rate cannot be answered by the scanty materials available for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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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복 소재용 면직물의 키토산/은나노 콜로이드용액 처리에 따른 표면 특성과 물리적 성질 (Surface Characteristics and Physical Properties of Cotton Fabric for Patient Clothing Material through a Chitosan/Nanosilver Colloidal Solution)

  • 정경미;배현숙
    • 한국의류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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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권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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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73-1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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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실제 환자복 소재로 사용되는 면직물의 내구성, 치수안정성, 구김회복성 등의 성능을 개선하고 경제적인 측면을 고려한 기능성 가공을 하기 위하여 가공제로 천연고분자이며 생체적합성이 우수한 키토산과 고착효율이 좋지 않은 키토산의 단점을 보완하면서 부가적인 성능을 기대할 수 있는 은나노 콜로이드용액을 혼합비에 따라 처리하고, 키토산 단독 처리직물과 비교함으로서 가공처리직물의 구조 및 물리적 특성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은나노 콜로이드용액의 혼합비가 클수록 부착률이 증가하였으며, 키토산/은나노 콜로이드용액 가공에 따른 결정화도의 저하나 백도 저하도 일어나지 않았다. 건(乾)강도와 강연도는 키토산 단독 처리직물이 가장 좋았으나, 습(濕)강도와 건(乾), 습(濕)방추도는 은나노 콜로이드용액의 혼합비가 3:1일때 가장 우수하였다. 은나노의 혼합비가 커질수록 가공처리 직물의 치수변화율이 감소하여 형태안정성이 향상되었고, 필링성 및 마모강도도 저하되지 않아 면직물이 환자복 소재로서 내구성이 우수한 물리적 특성을 나타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