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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朝鮮時代) '향화(向化)'개념에 대한 연구(硏究)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중심(中心)으로 - (A Study on the Concept of 'Hyanghwa' of Chosun Dynasty)

  • 서근식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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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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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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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향화(向化)'라는 말을 우리에게 낯선 단어이지만, 다문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한번쯤 음미해볼 가치가 있는 단어이다. 현행 국어사전에서는 유교(儒敎) 덕치주의(德治主義)의 교화(敎化)와 관계있는 단어로 정의되었으며, 향화(向化)라는 말자체도 이미 교화(敎化)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향화인(向化人)은 덕치주의(德治主義)라는 명분(名分)보다는 경제적 정치적 이익이라는 실질적인 이유 때문에 조선으로 이주해 온 경우도 많다. 따라서, 향화인(向化人)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덕치주의(德治主義)라는 명분(名分)과 경제적 정치적 이익이라는 실상(實狀)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황조인(皇朝人)이라는 말도 '향화(向化)'를 이해하는데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황조인(皇朝人)은 멸망한 명(明)나라의 유민으로 북방민족(北方民族)이나 왜(倭)로 이루어진 향화인(向化人)과는 대비된다. 실상(實狀)에 있어서 향화인(向化人)과 황조인(皇朝人) 모두 국제정세의 변화 때문에 조선으로 이주해 온 것이지만, 이들은 '화이(華夷)'라고 하는 명분상(名分上)의 이유 때문에 다른 대우를 받았다. 조선을 '아(我)'라고 한다면 향화인(向化人)과 황조인(皇朝人)은 모두 '타자(他者)'이다. 조선은 '타자(他者)'와 올바른 '관계'를 맺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향화인(向化人)이라는 '타자(他者)'와 황조인(皇朝人)이라는 '또 다른 타자(他者)'가 생겨난 것으로 보아 둘 사이의 '관계'는 올바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향화인(向化人)과 황조인(皇朝人)이라는 명칭은 '타자(他者)'가 원한 것이 아니라 조선에서 일방적으로 규정한 것이다. 향화인(向化人)이라는 '타자(他者)'와 황조인(皇朝人)이라는 '또 다른 타자(他者)'가 생겨난 것은 '화이(華夷)'라는 이념 때문이다. 이념이라는 색안경을 걷어내야만 '아(我)'와 '타자(他者)'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할 수 있다. 이 논문은 이념이라는 색안경을 걷어내는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길상사건(吉尙事件)을 통해 본 17세기 초 향화호인(向化胡人) 관리 실태와 한계 - 『향화인등록(向化人謄錄)』을 중심으로 - (Management of Naturalized Citizens from Yeozin and Its Limitation Through the Event of Guilsang(吉尙) in the Early 17th Century - Centering on 『Naturalization Registration』)

  • 이선희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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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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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3-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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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이 논문은 1602년 12월 함흥에 사는 향화인 길상(吉尙)이 무단 상경함으로써 촉발된 사건의 발생배경에서 처결까지의 과정을 살폈다. 이를 통해 당시 향화인에 대한 관리 실태 및 향화인의 처지와 향화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접근하고자 하였다. 길상사건은 "향화인등록(向化人謄錄)"에서 자세한 정황을 찾을 수 있었다. 길상의 무단 이탈은 국법을 어긴 것임을 영의정을 비롯하여 예조나 비변사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길상의 무단 상경에 대한 형정은 보이지 않는다. 길상 처리문제는 향화호인의 완취에 대한 찬반과 이주지에 대해서만 진행되었다. 완취는 당시 누루하치의 성장과 해서여진과의 세력전으로 인해 불안해진 6진 지역 번호들의 혼란과 관계하여 어려운 결정이었다. 계속 내려오는 향화호인들이 이전에 투화한 일족과 함께 살기를 원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완취에 대해 관대한 편이었다. 정리(情理)가 갖는 강한 명분에 대해 반대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주지에 대해서는 남쪽으로, 혹은 북쪽으로의 이주가 예조, 비변사 및 대신 사이에서 논란을 거듭하였다. 이주지로 결정될 경우 관할관찰사가 이해 당사자가 되는 탓에 함경도, 경기도, 충청도 등 관찰사 역시 장계를 통해 각 도의 입장을 전달하였다. 길상 일가의 이주지는 서울에 살기를 원하는 길상 일가의 강한 반발로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변경되어야 했다. 향화호인의 이주와 안접에 대한 처리는 도별로 달랐다. 향화인의 무단 상경은 길상사건 3년 후 길상의 조카 마보태가 길상 일가와 함께 살겠다는 이유로 재차 발생함으로써 야인의 향화가 지속되는 한 여러 차례 발생하였음을 반추하게 한다. 그러나 길상사건에서처럼 향화호인에 대한 처리는 일반 백성에게처럼 정해진 법에 따라 처리할 수 없는 일이었음을 길상사건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향화인의 조선 정착 사례 연구 - 여진 향화인을 중심으로 - (Some Instances of Manchurian Naturalization and Settlement in Choson Dynasty)

  • 원창애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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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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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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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고려 말에 동북면에 들어와서 거주하던 토착여진과 요동 지방 내륙에서 남하하여 두만강 유역 부근에 자리잡은 알타리 올량합 올적합 등의 여진족이 향화하였다. 향화한 여진인에게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우대 정책이 시행되었다. 특히 향화인에게 과거 응시를 허락한 것은 이들을 조선의 백성으로 인정한 단적인 예이며, 이들이 과거를 통해서 자신들의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향화인 가운데 성공적으로 조선에 정착하여 양반으로 성장한 사례가 있는데, 청해 이씨와 전주 주씨이다. 청해 이씨는 여진의 대추장으로서 관하민도 500호나 되었으며, 개국공신 회군공신 배향공신으로서 조정에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혜택을 충분히 받았다. 게다가 이지란의 아들 이화영 역시 공신으로서 그의 정치적 입지를 굳혀갔고, 종친과의 혼인으로 왕실과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이지란과 이화영이 마련한 기반 위에서 양반 가문으로서 계속 성장된 것은 이화영의 아들 이효양(李孝讓)과 이효강(李孝綱) 집안이다. 이 두 가문에서 배출된 과거 급제자는 문과 7명, 무과 15명, 생원 진사시 16명 등이다. 청해 이씨의 주된 거주지는 서울과 경기 지역이었으며, 일부 함경도 지역에도 남아있었다. 전주 주씨는 함흥에 같이 정착했던 주만(朱萬)은 개국원종공신에 책봉되었고, 주인(朱仁)은 중앙으로부터 서반직을 제수받았다. 전주 주씨는 함흥에 토착하여 재지 세력으로 성장되었다. 16세기부터 문과 급제자가 배출되기 시작하여 17세기 이후로 문과 급제자 22명, 생원 진사시 입격자 40명을 배출한 문인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전주 주씨의 관직 진출을 보더라도 서북 인사에게 통청되기 어려웠던 언관직 진출이 많았다. 전주 주씨는 함흥을 중심으로 재지 기반을 확고히 하고 언관과 같은 청직에 진출되면서 함경도의 명문 성관으로 부상되었다.

영조대(英祖代) 황조인(皇朝人)에 대한 인식 (The conception of "Hwangjoin(皇朝人)" during the reign of King Youngjo)

  • 노혜경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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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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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7-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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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황조인은 조선 중기까지 중국 사람을 뜻하는 말로 쓰이다가 영조 대에 와서 명나라 유민으로 조선에 들어와 정착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황조인 개념이 생성된 배경을 보면 양난(兩亂) 이후 국가 재건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념적 기반으로, 효종 때의 '북벌론(北伐論)'은 이후 '존주론(尊周論)'으로 대체되었고, 숙종 때 대보단 창설로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의 정당성이 확보되었다. 영조 때에는 대보단의 확대개편 및 양란에 희생된 충신열사에 대한 현창 작업 등이 이루어졌다. 영조는 존주론과 대명의리론에 대한 자신의 이론화 작업에 힘썼다. 이는 '풍천(風泉)'의식의 유포, 어제서(御製書)의 편찬과 교육, 다수의 영조어제(英祖御製) 저술 등으로 표현되었다. 영조 때의 황조인과 그 후손에 대한 정책은 충량과(忠良科)의 설치, 대보단에 삼황(三皇) 배향, 황단 수직(守直)임무, 관직 제수, 증직(贈職) 등으로 시행되었다. 또 황조인의 명부인 "화인록(華人錄)'을 만들어 향화인과 차별된 우대책을 시행했다. 한편 영조의 '풍천(風泉)'의식이 널리 전파되어, 당대의 지식인들은 그 개념을 작품 속에 썼다. 이규상의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과 송규빈(宋奎斌)의 "풍천유향(風泉遺響)" 등이 그것이다. 황조인에 대한 일반 민의 생각은 황조인의 우대책으로 인해 그들의 처지를 시기하고 부러워하는 방향으로 나타났다. 이렇듯 영조 시기 황조인에 대한 인식은 대명의리론과 존주론을 기반으로 이를 정책에 반영하는 방식으로 드러났고, 황조인에 대한 정책 또한 같았다. 향화인과는 다른, 명의 후손을 보호하고 우대하는 가운데 조선의 위상을 분명히 하려는 정치적 이념이 깔린 것이다.

고전 서사 속 항왜(降倭)의 형상화 양상에 대한 연구 (How did Japanese who surrender to Joseon reflect in old proses)

  • 서신혜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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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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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1-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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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조선에 투항한 왜인을 항왜라 한다. 특히 임란전후에 수많은 왜인들이 조선인이 되어 살았는데, 고전 서사에서 이들의 모습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이글에서 살폈다. 고전서사에서 항왜는 주로 칼솜씨가 좋은 용맹한 인물들로 소개되며, 그러므로 그들은 각종 전쟁의 상황에서 전공(戰功)을 세우는 것으로 드러난다. 홍세태의 "김영철전"과 권칙의 "강로전" 및 김충선에 대한 인물전 등에서 이런 모습이 드러난다. 이런 작품에서, 항왜인들은 조선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오랑캐인 후금(後金)(이후 청(淸))을 치는 데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인다. 항왜인들이 이런 충성의 모범으로 그려짐으로써, 충성을 다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던 인물들의 불충이 상대적으로 부각되도록 그려졌다. 하지만 서사에서 의도적으로 항왜인들의 일면만을 강조되는 것과 달리, "검승전"에서는 항왜 개인의 고민과 갈등을 엿볼 수 있다. 이런 고민은 조선인이나 일본인이나 인간의 성정은 공통된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서로 이해하며 어우러져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조선초기 귀화인(歸化人)의 사향(賜鄕)과 특징 (A Study on the Sahyang and Characteristics of Naturalized Citizens in Early Chosun)

  • 임선빈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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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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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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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 논문은 귀화인(歸化人)(향화인(向化人)) 가운데 조선초기 실록기사에서 사향(賜鄕)[왕으로부터 관향(貫鄕)을 하사받음]이 확인되는 인물들의 사향 과정과 활동에 대해 살핀 글이다. 조선초기 실록을 통해 검토 가능한 사향(賜鄕) 사례는 한인이 4명[오진(吳眞), 이민도(李敏道), 당성(唐誠), 매우(梅佑)]으로 다수이지만, 서역에서 온 회골인(回?人)[위그르인, 설장수(?長壽)]과 외오아국(畏吾兒國) 출신[이현(李玄)]도 있으며, 향화(向化) 왜인(倭人)도 2명[평순(平順), 피상의(皮尙宜)]이나 된다. 이들이 우리나라에 귀화한 시기는 고려 충렬왕 때부터 조선 정종 원년까지 걸쳐있으며, 귀화한 인물은 관향을 하사받은 인물의 증조, 조, 부, 본인 등 다양하다. 이들의 사향 시기는 태조 태종 세종 세조조이며, 하사받은 관향은 계림(鷄林) 임주(林州) 해주(海州) 상주(尙州) 밀양(密陽) 충주(忠州) 창원(昌原) 동래(東萊) 태안(泰安) 등으로 전국에 걸쳐 있다. 사향지(賜鄕地)는 처향(妻鄕)일 가능성이 높다. 관향(貫鄕)을 하사받은 인물은 역관(譯官)이 다수로 대명외교(對明外交)와 대일외교(對日外交)에 많은 공적을 보이고 있으며, 그 외에 의술(醫術)과 점술(占術), 율문(律文) 분야에서 활동한 인물도 있다. 과거급제를 한 설장수는 지공거(知貢擧)도 담당했으며, 이민도와 당성은 조선 개국에 기여하여 개국공신과 개국원종공신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활동실적이 있었기에 왕으로부터 관향을 하사받는 사향(賜鄕)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향의 영광을 입은 관향이지만, 현재 임주 이씨, 창원 평씨, 동래 피씨 등은 그 후손을 확인할 수가 없다. 귀화(歸化) 한인(漢人)의 후손은 모두 현존하지만, 향화(向化) 왜인(倭人)의 후손은 단절되어 있다. 이는 조선시대의 대외인식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전처리 방법에 따른 더덕(Codonopsis lanceolata)의 휘발성 향기성분 비교 분석 (Comparative Sampling Procedures for the Volatile Flavor Components of Codonopsis lanceolata)

  • 김정한;김경례;김재정;오창환
    • 한국식품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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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4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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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1-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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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2
  • 더덕(Codonopsis lanceolata)의 휘발성 향기성분을 분석하기 위해 gas co-distillation(GCD), solvent extraction/fractionation(SLF), headspace sampling(HSS) 방법을 사용하여 향기성분을 분리농축하고 분석 비교한 결과 SEF와 HSS 방법으로 얻은 농축물들의 향이 원래의 더덕향과 가장 유사했으며 gas chromatogram들의 양상도 비슷했으나 peak들의 크기에 있어서 차이를 보였다. SEF 농축물에서는 달콤한 향을 기리고 HSS 농축물에서는 풋내를 비교적 강하게 느낄 수 있었으나 GCD 농축물의 경우 일정 증류시간이 지나면 한악취를 느낄 수 있었다. SEF와 HSS 방법은 GCD에 비해서 적은 조작 단계로 손쉽게 빠른 시간내에 분리 농축이 가능했다. 농축한 향기성분은 GC-MS와 극성이 다른 두 column을 사용한 GC-RI system을 이용하여 확인하였다. 특히 GC-RI는 isomer의 확인에 효과적이었으며 극성 FFAP column은 극성 화합물의 확인에 보다 적합했다. 35가지의 향기성분들을 동정하였는데 그중 24개의 성분들은 simultaneous distillation extraction 농축물에서는$^{(5)}$ 확인되지 않았던 향기성분들이다. 화인된 성분들중 trans-2-hexenal, cis-3-hexen-1-ol, trans-2-hexen-1-ol, hexanol은 더덕의 풋내를, 1-octen-3-ol은 신선한 풍미를 그리고 amyl propionate를 비롯한 다수의 에스터 화합물 등은 더덕 특유의 달콤한 향에 복합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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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광화 완충용액의 pH 변화가 상아질의 재광화에 미치는 영향 (THE EFFECT OF THE pH OF REMINERALIZED BUFFER SOLUTIONS ON DENTIN REMINERALIZXATION)

  • 김성철;노병덕;정일영;이찬영
    • Restorative Dentistry and Endodon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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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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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1-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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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치아 우식증은 구강 영역에서 가장 흔한 질환이나 여러 가지 복잡한 요소가 작용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발생기전과 치료법에 대해서는 완전히 이해되지 않은 상태이다. 특히 초기우식의 재광화에 있어서 pH의 영향에 대하여 논란의 여지가 있다. 본 연구에서는 유산 완충용액을 이용하여 상아질에 인공 우식을 형성하고 이때의 무기질 소실을 측정하고, 탈회된 시편을 pH가 다른 세 가지 재광화 용액 (pH 4.3, 5.0, 5.5 군)으로 재광화시켰을 때 나타나는 무기질의 침착되는 양과 침착이 일어나는 부위를 Microradiograph를 이용하여 정량적으로 비교 분석하였다. 또한 주사전자현미경을 이용하여 수산화인회석 결정의 정상 상태 탈회된 상태, 그리고 재광화가 일어났을 때의 상태를 정성적으로 비교하여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1. Microradiograph분석시 pH가 증가할수록 탈회된 상아질에서 재광화양이 유의차 있게 증가되는 경향을 보였고, pH가 낮아질수록 재광화가 일어나면서 더 깊게 탈회되는 양상을 보였으나, pH 5.5 군은 전반적으로 재광화가 일어나는 경 향을 보였다 (p<0.05). 2. 주사전자현미경 소견에서 상아질 우식의 재광화는, 유기기질 망을 둘러싸고 있는 수산화인회석 결정의 표면으로부터 진행되며 결국에는 탈회 시 파괴된 공간을 채워가는 양상으로 관찰되었다. 3. 재광화 5일 후 pH 4.3. 5.0군에서 무기질이 침착되어 수산화인회석결정이 정상보다 커졌으며, pH 5.5군에서 재광화된 부위의 결정은 정상으로 회복되는 양상을 보였다. 재광화 10일 후 pH 4.3, 5.0 군에서 재광화 5일 후에 정상보다 커졌던 결정들이 정상상아질의 결정 크기로 줄어들었으며 pH 5.5군에서는 결정의 크기가 2배정도 커진 경우도 관찰되었다. 본 실험의 결과에 의하면 상아질의 우식과 재광화 과정은 단순한 탈회와 재광화의 독립적인 과정이 아니고 동력학적으로 탈회와 재광화가 동시에 일어나는 과정이며, 이때 재광화는 기존의 수산화인회석 결정의 표면으로부터 진행되었다.

느타리버섯의 향기(香氣) 성분(成分)에 관한 연구(硏究) (Studies on the Volatile Aroma Components of Pleurotus ostreatus)

  • 홍재식;이지열;김영회;김명곤;정기태;이극로
    • 한국균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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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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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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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6
  • Pleurotus ostreatus로 부터 휘발성 향기 성분을 분리한 다음 GC 및 GC/MS를 이용하여 성분을 화인하고, 마쇄 후 시간 경과에 따른 휘발성 향기 성분 및 지방산 변화를 조사한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분리된 향기 성분은 버섯 고유의 향(香)을 지니고 있었고 수율(收率)은 123 ppm이었다. 2. 분리 확인된 27종의 성분 중 비교적 많이 함유된 성분은 약 67%의 1-octen-3-ol을 포함하여 3-octanone, 3-octanol, 2-octenol 및 2, 4-decadienal이었으며 $C_8$화합물이 전체량의 약 80%를 차지하였다. 3. 버섯을 마쇄 후 시간 경과에 따라 n-hexanol, 3-octanol, 1-octen-3-ol 등의 alcohol 류는 증가하였으나 n-hexanal, 1-octen-3-one 등의 aldehyde 및 ketone 류는 감소하였으며 전체 지방산에 대한 불포화 지방산의 비율도 감소하는 경향이었다. 4. 버섯에 linoleic acid와 linolenic acid를 각각 첨가하여 마쇄했을 때 향기 성분 중에서 $C_6{\sim}C_{10}$화합물이 차지하는 비율도 증가하였는데 linolenic acid보다는 linoleic acid를 첨가했을 때 더 많이 증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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