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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선정전 와룡매(臥龍梅)의 환수 문화재로서 문화콘텐츠적 가치 (A Value Inquiry of Cultural Relics of Waryongmae and a Restitution of Cultural Heritage)

  • 온형근;김충식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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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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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6-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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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국외 소재 문화재 환수는 일제강점기인 1915년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의 반환을 원년으로 삼아 올해로 107년째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2012년에 설립하여 문화재 조사 연구와 협력과 매입 등을 통한 문화재 환수, 보존과 복원, 교류와 협력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설립 후 매년 문화재 환수와 소재 파악이 늘고, 환수 유형에 따른 반환 문화재도 많아지고 있다. 이 연구는 문화재 환수와 와룡매의 문화콘텐츠적 가치를 탐구하는 목적으로 수행되었다. 와룡매는 위 재단에서 발간한 책 『우리 품에 돌아온 문화재』에 돌아오는 과정이 문화콘텐츠로 기록되었다. 이 기록을 입체적으로 수정·보완하여 창덕궁 선정전 뜰에 자라던 와룡매의 환수 과정에 정교한 스토리텔링을 입혀 문화콘텐츠적 가치를 높이는 방향을 탐구하였다. 문화재 환수 개념이 적용된 와룡매의 문화콘텐츠적 가치는 첫째, 처음이고 유일무이하다는 점이다. 와룡매는 그동안 성사되었던 다양하고 많은 문화재 환수 중 살아 있는 식물로는 처음이고, 그래서 유일무이하다는 문화콘텐츠적 가치를 지녔다. 둘째, 환수와 환국이라는 두 차례의 과정을 거쳤다는 점이다. 와룡매는 1992년과 1999년 두 차례의 환수와 환국 과정을 거쳐야 했던 독특한 문화콘텐츠적 가치를 가졌다. 첫 번째 환수는 일본의 언론이 대서특필하였고, 두 번째 환국은 한국의 언론이 집중하여 보도하였다는 것도 특징이다. 본고는 환수 문화재 와룡매에 대해서 비주얼 콘텐츠 19개, 인터랙티브 콘텐츠 11개, 스케이프 콘텐츠 12개 등 모두 42개의 문화콘텐츠적 가치를 탐구하였다.

조선시대 능비(陵碑)의 건립과 어필비(御筆碑)의 등장 (Formative Stages of Establishing Royal Tombs Steles and Kings' Calligraphic Tombstones in Joseon Dynasty)

  • 황정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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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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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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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 논문은 조선 초 중기, 조선후기, 대한제국기 세 시기로 나누어 조선왕릉에 건립된 신도비와 표석의 시기별 건립추이와 양식적 특징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그 결과 왕실 능비(신도비와 표석)는 일반 사대부가와 달리 건립한 시기와 주체, 후계왕의 의도에 따라 시기별 차이를 보이며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15~17세기는 왕릉 신도비의 건립과 재건이 이루어진 시기, 18세기는 신도비가 표석으로 대치되어 다수 건립되었고 국왕의 어필을 직접 돌에 새긴 어필비가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이며 대한제국기는 황제국으로 격상됨에 따라 조선 개국자인 태조와 왕후, 선조들에 대한 추숭(追崇) 사업이 활발해지면서 표석 중건이 이루어진 시기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본다면, 결국 우리나라 능비의 역사는 조선후기를 기점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왕릉 신도비의 형식은 삼국시대의 부정형한 석비의 초보적인 형태에서 벗어나'귀부이수'형의 당비(唐碑) 형식을 수용한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 말 탑비의 퇴화된 양식에서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15세기 건립 당시부터 선왕에 대한 숭모 예를 표현하고자 하는 국왕과 왕의 치적이 국사(國史)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므로 신도비를 별도로 세울 필요가 없다는 신료들의 입장이 대치되면서 건원릉 제릉 헌릉 구 영릉 4곳에만 건립된 채 왕릉에는 한동안 석비가 건립되지 않았다. 신도비 건립이 중단된 이후 17세기에 이르러 왕릉에 아무런 표(表)를 해 둘 수 없다는 의견이 제기됨에 따라 형식이 간소한 표석이 건립되기 시작했으며, 1682년 작 영릉(寧陵)의 표석은 최초로 왕릉에 건립된 표석이자 장대한 규모, 섬세한 조각기법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왕릉의 능표는 영조 재위 기간인 1740년대부터 대규모로 건립되었다. 열성(列聖)에 대한 추숭과 어필간행 등을 통해 자신의 왕위 계승의 전통성을 공표하고자 했던 영조는 제릉의 신도비를 재건하는 한편, 의릉(懿陵)을 비롯하여 총 20곳에 달하는 곳에 표석을 세우는 역사(役事)를 추진했고, 처음 친필 글씨를 돌에 새긴 어필비를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 어필비 제작 현상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소실된 어필을 보존하려 한 숙종의 신념을 계승한 영조에 의해 제도적으로 추진되면서 어필을 새긴 능비가 등장한 배경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시대사적으로 주목할만하다. 이러한 표석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다시 한번 다량 제작된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고종은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태조의 조선 건국에 두고 태조와 그 4대 선조에 대한 추숭과 기념물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고 전면과 후면 모두 자신의 글씨로 채움으로써 역대 어느 왕보다 통치자로서 권한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었다. 이상 언급한 왕릉의 신도비와 표석의 건립 추이는 동시대 원 묘에 건립된 신도비, 표석과 비교 고찰을 통해 시대별 특징과 왕실 조각품으로서 성격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날 것으로 생각한다.

현존 최고(最古)의 매향비(埋香碑): 영암 정원명(貞元銘) 석비(石碑) (The oldest Maehyang-bi (埋香碑) of Memorial Inscriptions existing on record; Yeong-am's 'Jeongwon (貞元)' Stone Monument)

  • 성윤길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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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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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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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영암 정원명(貞元銘) 석비(石碑)는 전남지역 소재 금석문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발견 직후부터 매향비의 가능성이 언급되어 더욱 주목되었다. 하지만 정원(貞元) 2년(786)이라는 절대 연대가 있어 비교적 이른 시기의 금석문임에도 불구하고 이 석비를 주제로 한 단독 논고는 많지 않다. 필자는 이 석비에 대한 기존 연구 성과를 검토하면서 3D 스캔 자료, 1995년 탁본 자료, 국립광주박물관 소장 탁본을 기초로 하여 4행 42자의 명문을 다시 판독하였다. 검토 결과 이 석비는 매향비임이 확인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 문헌인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에 매향(埋香) 입석(立石)이나 글자를 알아볼 수 없다고 기록되어 이 석비가 매향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고려 말~조선 초의 현존 매향비에 자주 산견되는 '매(埋)' 혹은 '매향(埋香)'이라는 표현은 없으나, '탄장(呑藏)'과 '합향십속(合香十束)'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는 점에서 매향비임을 알 수 있었다. 즉 '매(埋)'의 의미를 '탄장(呑藏)'으로 대신 표현하였다고 생각된다. 이에 대한 방증 자료는 남북국시대 금석문인 888년 건립의 진감선사 대공탑비이다. 여기에는 '해안식향(海岸植香)'이라는 표현이 있어 '매(埋)'자를 쓰지 않아도 그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따라서 정원명 석비에 '매(埋)'자가 확인되지 않는다고 하여 매향비가 될 수 없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정원명 석비가 매향비라는 방증 자료는 도갑사 어귀에 있는 국장생(國長生) 주변 금표석(禁標石)의 명문에도 있다. 금표석의 명문은 조선 후기 중흥의 군주였던 정조의 능, 즉 건릉(健陵)에 사용되는 향탄(香炭)을 월출산 도갑사 주변에서 마련하였을 가능성도 시사하고 있다. 금표석에 새겨진 '향탄(香炭)'은 당연히 향(香)과도 관련 있기 때문에 예전부터 도갑사가 있는 월출산 주변 지역이 향(香)과 관련되어 오래된 역사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석비에 보이는 명문, 조선후기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의 기록, 금표석의 명문 등, 이 모든 것이 정원명 석비가 매향비임을 알려주고 있다. 실물로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매향비가 고려 말 1371년과 조선 초 1410년 두 개의 연대를 보이고 있는 영암 입암리 매향비임을 고려할 때, 786년 건립의 정원명 석비는 조선 후기 문헌과 그 문헌을 증명하는 실물로서, 우리나라 최고(最古) 매향비라는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