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크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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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음악 산업 재건을 위한 감정 분석 엔진 연구 (Sentiment Analysis Engine for Cambodian Music Industry Re-building)

  • 삭소니타 코으른;김윤선
    • 한국시뮬레이션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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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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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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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캄보디아의 대중음악은 크메르 루즈 정권 기간 동안 예술가의 90 %가 사망 한 이래로 완전히 잊혀졌다. 1979 년부터 전쟁에서 회복 한 후 1990 년 음악은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캄보디아 대중 음악의 역 동성과 흐름은 다면적 사회 경제적, 정치적, 창조적 세력에 의해 관찰 되고 있지만, 표절과 불법 복제로 수년간 대중음악산업에서 널리 퍼져 많은 문제가 되어왔다. 최근에는 크메르(캄보디아언어) 전통 음악을 팬과 아티스트 모두에게 보존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의식이 높아져 캄보디아 젊은 인구의 새로운 트렌드가 되었으나, 음악 품질은 여전히 한계상태에 봉착해 있고, 전통 대중 음악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대중의 드백과 영감이 필요하다. 이 연구는 캄보디아에서 가장 많은 대중음악 관련 사이트인 페이스 북 페이지의 게시물과 코멘트에서 수집 된 문장들을 감정분석을 사용하여 음악 순위 차트(웹 사이트)를 구현하였다. 크메르어에서 영어로 번역하고 감정 분석을 수행하고 순위를 생성하는 알고리즘 개발하였다. 그 결과로 제안 된 시스템에서 번역 및 감정분석의 정확도가 80 %임을 보여주었다. 순위에서 높이 평가된 노래는 크메르(캄보디아언어)로 된 전통대중음악으로 이 논문의 취지와 부합이 되었다. 캄보디아 전통대중음악을 다시 부활하기 위해서 제안 된 시스템과 순위 알고리즘을 사용하여 음악제작의 경쟁 우위를 높이고 제작자가 특정 활동 및 이벤트에 맞는 새 노래를 작곡하는 데 도움이 될것으로 사료된다.

중.소와 동남아시아

  • 이해민
    • 국방과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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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호통권1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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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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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
  • 향후 동남아시아와 중국의 관계는 현재의 캄푸치아 사태가 어떻게 해결되는가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을 것이다. 중국이 크메르 루즈를 계속 지원할 것인지, 아니면 캄푸치아협정이 체결되어 이를 준수할 것인지에 따라 아세안, 인도차이나 국가들의 중국에 대한 인식이 좌우될 것이다. 아세안 국가중 인도네시아, 말레이지아, 태국 그리고 필리핀등은 모스크바와의 상호관계를 현저히 격상시켰으며, 소련이 이 지역의 평화달성에 보다 큰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였다. 지금까지는 강경한 반소파였던 싱가포르도 소련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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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홍낭시다 유적 출토 갈유도기와 기와의 원료특성과 제작기술 해석 (Interpretation on Raw Material Characteristics and Manufacturing Techniques of Brown-glazed Stonewares and Roof Tiles from Hong Nang Sida Temple, Laos)

  • 진홍주;장성윤;김수경;이명성;문동혁;전유근
    • 한국광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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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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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3-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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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이 연구는 12세기에 건립된 라오스 홍낭시다 사원에서 출토된 크메르문명 갈유도기와 기와의 물리적 특성, 광물학적 및 지구화학적 분석을 통해 원료물질을 조사하고 제작기술을 해석하고자 하였다. 3점의 갈유도기 유약은 광물이 모두 용융되어 유리질화된 상태이며, 용융제 산화칼슘 함량이 15 % 이상인 전형적인 라임계열이다. 태토의 주구성광물은 석영과 멀라이트, 크리스토발라이트로 동정된다. 기질은 치밀하나 기질의 재결정화가 일어나지 않아 크리스토발라이트가 상전이로 기인한 것이 아닌 화산암 생성토를 원료로 도기를 제작한 영향으로 판단된다. 주사전자현미경 관찰에서 멀라이트가 관찰되어 950 ℃ 이상에서 소성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6점의 무시유 기와는 외면색상이 적갈색, 회백색, 청회색으로 구분된다. 속심 색상은 외면과 색 계열이 유사하나 청회색 기와는 속심이 적갈색인 샌드위치 구조로 완벽한 환원환경을 경험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무정형 철산화물 노듈이 다수 관찰되고 화학조성이 상당히 유사하여 동일 기반암에서 생성된 원료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성온도는 운모류, 헤르시나이트, 멀라이트 동정에 따라 900 ℃ 이하, 900~950 ℃, 950 ℃ 이상의 세 유형으로 분류된다.

프레아피투 사원 평면도 복원을 통한 유구 간 상관관계 고찰 -앙코르 유적 "프레아피투 사원" 연구 (1)- (A Study on the Correlation among Historic Remains of the Preah Pithu through the Floor Plan Restoration -A Study of Preah Pithu Monument in Angkor (1)-)

  • 박동희;김지서;김철민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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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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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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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We surveyed Preah Pithu monument group site in Angkor. We made the map of present condition throughout the actual measurement and 3D scan. And we restored the floor plan, and completed the map of site placement. During this processing, we confirmed the middle axis of temples and studied the relation of temples and made clear the order of sites. Throughout this studying, we verified the middle axis of sites is not matched in Preah Pithu monument group. It is different aspect comparing with general Khmer religion architectures which were built with the planification belonging to strong royal authority and shared main axis through whole sites. In other words, we can estimate that Preah Pithu monument group was not built with planification rather than expanded as occasional demand during the process of actual use.

프레아피투 까오썩 사원(사원T) 치수계획 연구 - 앙코르유적 "프레아피투 사원" 연구(2) - (A Study on the Dimensional plan of Kor Sork Temple(temple T) on the Preah Pithu Monument Group - A study of Preah Pithu Monument in Angkor(2) -)

  • 박동희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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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7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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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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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This study investigated the dimensional plan of Kor Sork temple in Preah Pithu complex, Angkor by civil surveying, 3D scan, measured integer ratio and regularity. According to epitaph and preceding researches, Khmer temples were built based on structural planing with the constant ratio and regularity by using special construct measure scales "Hasta" and "Byama". The study assumed the same unit method was applied in Kor Sork temple and identified the regularity of actual measurement value about the temple. The assumed construct measure scale (Hasta) used for the design of this temple is 413mm. The overall apart arrangement of the temple is different in the East-West direction and the North-South direction. In the East-West direction, the whole scale is 180 hasta, and it is divided into 20 hastas. On the other hands, it was confirmed that the North-South direction is 96 hasta and it was divided four quadrants in 24 hastas. Regarding the detailed design, the regularity according to the constant ratio was confirmed. 7 hasta was used as the basic unit on the first floor and 6 hasta were used as the basic unit on the second floor of the terrace. the basement and the central sanctuary is of 6 hasta and 8 hasta were used as the basic standard.

리티 판의 다큐멘터리 <우리의 모국 프랑스>에 나타난 아카이브 활용 양상과 역사서술 방식 (Rithy Panh's Practices on Archive Images and Methods of Historiography in La France est notre patrie)

  • 유지수
    • 한국엔터테인먼트산업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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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3권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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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9-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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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리티 판 감독의 2015년 작 다큐멘터리 <우리의 모국 프랑스 La France est notre patrie>는 시각적 구성에 있어 아카이브 이미지와 무성영화에서 차용한 인터타이틀을 사용하고, 청각적으로는 음악과 효과음을 주로 한 외재적 음향에 기대고 있는 파운드 풋티지 영화이다. 감독은 프랑스 식민지배하에 놓인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에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기 영화역사와도 궤적을 같이하는 시기에 촬영된 이미지를 발굴하여 재구성한다. 본 논문은 캄보디아 크메르 루주 대학살의 생존자인 감독의 기억과 역사 인식이 아카이브를 통해 영화와 맺는 실천적 관계를 고찰한다. 또한 벤야민의 역사적 몽타주와 변증법적 이미지 개념을 적용하고, 무엇보다 영화가 제시하는 중층적 시점에 주목하여 <우리의 모국 프랑스>가 구현하는 역사서술 방법을 분석한다. 이를 통해 이 영화의 구성적 특이성이 어떻게 자기반영성에 충실한 에세이 영화를 추동하며, 대항기억의 담론을 일으켜 메타역사로서 관객을 복합적 사유의 문턱으로 인도하는가 밝히고자 한다.

무왕(武王, 1738-1765) 시기 메콩 델타에서의 영토 확장 추이: 제국으로 가는 길, '잠식지계(蠶食之計)'와 '이만공만(以蠻攻蠻)'의 변주 (Territorial Expansion the King Võ (Võ Vương, 1738-1765) in the Mekong Delta: Variation of Tám Thực Chi Kế (strategy of silkworm nibbling) and Dĩ Man Công Man (to strike barbarians by barbarians) in the Way to Build a New World Order)

  • 최병욱
    • 동남아시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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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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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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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베트남이 메콩 델타로 영토를 팽창하는 역사 속에서 완거정은 두 개의 얼굴을 갖는다. 하나는 현재 베트남 영토 내에 있는 메콩 델타 거의 전부를 획득하는 데서 그의 공헌이다. 또 하나는 베트남 역사를 읽는 독자들의 눈을 현재의 베트남 영역에만 머물게 하는 그의 역할이다. 독자들에게 완거정의 메콩 델타 획득은 베트남 남진사의 마지막 단계로 인식된다. 그러나 완거정의 업적은 부분적이었을 뿐이다. 이 연구는 메콩 델타에서의 영토 팽창 추이에서 완거정 보다 무왕에 주목한다. 무왕의 목표는 완거정의 공헌에 의해 성취된 영토 획득보다 더 야심적이었다. 그리고 이 야심은 새로운 세계, 새로운 국제 질서를 건설한다는 그의 꿈에 의해 추동된 것이며, 그가 건설한 수도 푸쑤언은 이 새 국제 질서의 중심지였다. 여기서 그는 황제가 되기를 희망했다.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필자는 세 가지의 요소를 검토하고 있다. 첫째는 무왕 왕권의 성격이다. 두 번째는 메콩 델타에서의 군사 작전을 위한 준비 과정이다. 셋째는 새로이 무왕의 판도로 편입된 땅의 성격에 대한 것이다. 북부 홍하 델타에 근거한 레 황실의 신하를 자처하던 선대 지배자들의 태도와 결별하면서 무왕은 즉위한 지 6년 뒤인 1744년 자신이 왕임을 선포했다. 행정 조직이 개편되었고 의복과 풍속도 북부의 것을 버리고 남국의 것을 제정하였다. 무왕은 캄보디아, 참파, 수사, 화사, 만상, 남장 등 조공국도 충분히 확보했다. 레 왕조와 비교해 이 조공국의 숫자는 더 많았으며 19세기 대남 제국의 조공국 수와 맞먹었다. 필자는 이 시점에서 무왕이 실제로 원했던 자리는 왕이 아니라 황제였음을 지적한다. 비록 무왕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그는 자신을 천왕이라고 칭함으로써 통상적인 왕은 아님을 분명히 했다. 캄보디아 왕이 캄보디아 영토 내의 참족을 공격한 게 무왕에게는 캄보디아에 개입하는 충분한 이유로 작용했다. 무왕은 이 참족이 자신의 신복이라 여겼다. 왕은 그들이 자신의 판도 내에 있는 참 즉 순성진 참인의 일부라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무왕은 1750년에 캄보디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동시에 그는 태국왕에게 외교 서한을 보냈는데 여기서 그는 캄보디아가 자신의 배타적 조공국임을 천명했다. 캄보디아의 영토였던 메콩 델타에의 공격을 개시하기 전에 무왕은 푸쑤언을 새로 건설해 제국의 위상에 걸맞는 권력중심지로 삼았다. 인플레이션, 기근, 경제 왜곡 등도 이 시기를 특징짓는 면모였다. 그러나 이 연구는 무왕의 메콩 델타 진출 이유라고 이야기되어 온 이런 경제적인 측면보다 제국 건설자로서 무왕이 보이던 적극적 정책에 더 관심을 가지며 이런 정책에 기초한 영토 팽창의 욕구가 메콩 델타의 광활한 땅을 차지하고자 하는 데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1754년부터 3년 동안 현재 베트남의 영토에 해당하는 메콩 델타 대부분이 무왕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여기에는 완거정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무왕이 차지하고자 한 영역의 범주는 여기에 더해 메콩 오른편에 해당하며 현재의 사이공보다 위쪽에 있는 껌뽕짬, 프레이비엥, 스바이리엥을 포괄했다. 많아진 조공국의 수에 걸맞게 제국의 영토는 넉넉히 확대되어야 했다. 무왕의 전략은 '잠식지계'와 '이만공만'의 변주곡이었다고 이 글은 주장한다. 무왕은 하부캄보디아에 해당하는 델타를 야금야금 차지했다. 이는 누에가 뽕잎을 먹는 것과 같다는 게 일반적인 이해 방식이다. 그러나 무왕의 최종적 목표는 위에서 언급한 메콩 델타 세 개의 주까지 다 먹어치우는 것이었다. '다 먹어치운다'는 건 '잠식'의 또 다른 의미이자 적용이었다. 무왕은 현 롱안 지역으로부터 쩌우독에 이르기까지의 땅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참인을 이용해 캄보디아를 쳤다. 이것은 '이만공만'의 표준적 적용이었다. 이에 더해 그는 막씨가 관할하던 중국인 망명자들을 이용해 하띠엔과 그 주변 지역을 캄보디아 왕으로부터 취했다. '이만공만'의 또다른 적용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19세기에 출현할 응우옌 왕조의 제국 질서 뿌리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을 주장한다. 제국 질서는 홍하 델타에 근거한 대월 제국 왕조들의 오랜 역사의 결과물이 아니라 푸쑤언에 앉은 무왕의 신 세계질서를 계승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만공만'과 '잠식지계'는 무왕의 후손들에게 여전히 유용했다. 그의 손자인 쟈롱은 타이, 크메르, 라오, 중국인, 산지민, 유럽인 같은 '만'을 이용해 또다른 '만'인 '떠이썬 도적떼(西賊)'를 이겼다. 떠이썬에는 수많은 중국인 및 중국 해적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참인, 산지민이 있었다. 무왕의 증손자인 민망 황제는 화려한 제국을 건설했다. 동시에 그는 캄보디아와 참 영역을 몽땅 먹어치우면서 영토 확장에도 골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