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진한고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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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당(石堂) 김상정(金相定) 문학론과 산문 일고 (A Study on Suk Dang Kim Sangjeong's Prose Works)

  • 하지영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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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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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9-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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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석당 김상정(1722~1788)은 18세기 중반 노론계 3대 문장가로 꼽혔으며 "고문론(古文論)"을 추구해야 하는 당위를 어느 누구보다 뚜렷하고도 과격하게 피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작가이다. 그가 안도제(安道濟), 신대전(申大傳) 등과 주고받은 서신에서 펼친 고문(古文)-금문(今文) 문학논쟁은 조선 내에서 진한 고문론의 지속적인 전개를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 그의 고문론(古文論)은 김창협(金昌協) 이후로 노론계 문단에서 정통으로 계승되어왔던 당송고문론에 대한 자체적 반성과 함께 문학적, 시대적 자신감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표절과 모방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명대 전후칠자(前後七子)가 피력한 진한고문론과도 변별점을 두고 있다. 실제로 그의 문장에서는 전범을 표절하고 과도하게 인용하거나, 난해하게 문장을 조탁하는 등의 방식은 잘 확인되지 않는다. 그는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선별하고 장면과 대화 중심으로 담백하게 재현해 나가며, 우언적 글쓰기를 통해 당위적 교훈을 전달하였다. 이는 그가 추구하였던 진한고문, 특히 사체 산문의 미감과 접점을 가진 부분으로 논할 수 있다. 김상정의 글쓰기는 이전 시대 진한고문을 추구하며 난삽한 글쓰기를 하였던 작가들과도 구분되면서도, 의론을 중시하는 당송고문과도 변별되는 독특한 특징을 지닌다. 김상정의 상고적 문예 지향은 대명의리를 추구하고 고동(古董)과 고문(古文)을 선호했던 이윤영(李胤永), 김상숙(金相肅), 이인상(李麟祥), 홍악순(洪樂純) 등 노론 청류(淸流)계 문단의 예술 담론과도 상통한다. 이들의 문예 취향은 자신들의 보수적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이면서도 문예에 전념하는 자신들의 삶을 옹호하는 근거로 활용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원말명초(元末明初) 문학 동향 및 송렴(宋濂) 문학관의 변화 (The change of Song lian's viewpoint of Literature and The Literary trend in the Late Yuan and the Early Ming dynasty)

  • 박경남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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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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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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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고는 원말명초(元末明初) 문학의 전개과정을 검토하면서 명대(明代) 초기 관각문학의 기틀을 다졌던 송렴(宋濂) 문학의 위치를 점검해 보았다. 그는 명대 문학사에서 도학자적 문학관을 견지했던 것으로 단순 요약되고 있지만, 그 과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본고는 문학론과 관련된 송렴의 글을 연대기적으로 분석함을 통해 그가 청 장년기까지도 진한고문(秦漢古文) 등의 고문사(古文辭)에 빠져 오랫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음을 밝힐 수 있었다. 송렴은 삼십 세에 스승 황진(黃?)과의 만남을 계기로 육경에 침잠하며 도학적 문예관을 가지게 되었지만 고문사의 유혹을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했다. 오십 이후 주원장(朱元璋)을 도와 명 건국의 주역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비로소 자신의 경세적 문학관을 실천적으로 확립하였고, 이후 자신의 도학적-경세적 문학관을 이론적으로 정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은 또한 청 장년기 그 자신의 문학 수련의 주요한 대상이자 명초의 가장 중요한 문학적 전범이기도 하였던, "사기" 등의 진한고문을 부정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요약하면, 원말명초의 격동의 시기에 송렴은 개인적, 시대적으로 문학관의 변화를 겪으며, 그 생애 말년에 육경 및 송대의 도학자와 한유(韓愈) 구양수(歐陽脩) 등의 당송고문을 성인(聖人)의 문(文)으로 통하는 치세의 문학으로 재정립함으로써 명대 문학의 이념적 좌표와 새로운 문학적 전범을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