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중국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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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문화 분야의 DDC 분류체계 개선방안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Improvements of Food and Culture in Dewey Decimal Classification System)

  • 정연경;최윤경
    • 한국비블리아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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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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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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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 연구는 문헌분류표를 바탕으로 음식문화 분야와 한식을 고찰하여 음식문화의 다양한 주제를 보다 더 효과적으로 분류할 수 있도록 DDC의 개선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를 위해 동서양의 대표적인 분류 체계인 DDC, UDC, LCC, KDC, NDC, 중국도서관도서분류법을 대상으로 식생활 풍습, 식사 예절, 영양과 식이, 식품과 음료, 식단과 상차림, 음료 기술, 식품 공학으로 나누어 음식문화와 관련된 항목들을 비교분석하였다. 분석 결과, 6개 분류표의 한식에 대한 분류 항목은 거의 없었으며 앞으로 한국 고유의 음식과 상차림 등이 분류표에 반영될 필요성을 확인하였다. 분류표에 새로운 분류 항목이나 주기의 추가를 위해서는 문헌적 타당성을 가져야 하므로 다양한 한식에 관한 조리법이나 간행물을 발간하고 이를 전 세계에 알려야 할 것이다.

국가 기록관 웹사이트에 나타난 이용자 참여 커뮤니케이션 도구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User Participatory Communication Tools of National Archives Websites)

  • 박덕란;사공복희
    •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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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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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1-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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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인터넷과 정보기술의 발달로 인해 기록관을 직접 방문하기보다는 홈페이지를 통한 서비스 요구가 확대되고 있는 오늘날 무엇보다 이용자들의 의견과 요구사항을 적절하게 수용할 수 있는 열린 소통도구가 필요하다. 본 논문에서는 게시판과 이메일, 그리고 전화 이외의 이용자 참여 커뮤니케이션 도구, 특히 이용자들에게 친근감과 실시간 소통을 제공하는 소셜미디어에 대한 정보가 국가기록관의 홈페이지상에 존재하는지와 그 활성화 여부를 한국, 미국, 영국, 캐나다, 중국, 그리고 일본의 기록관을 중심으로 조사하였는데, 소셜미디어중에서 가장 활성화된 도구는 페이스북이고, 미국의 기록관이 가장 다양한 소통 도구를 제공하였다.

이익모의 병진연행록에 관한 연구 (A Study on Ik-mo Lee's Yeonhaengrok)

  • 노기춘
    •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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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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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3-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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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연행록은 1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연경을 사행하고 돌아 온 사행사의 일원에 의해 쓰여진 기록이다. 이익모가 저술한 병진연행록은 사은겸동지사 서상관인 이익모가 1796년 11월 24일부터 익년 3월 7일까지 매일 매일의 일정을 생생하게 기록한 연행록이다. 이 연행록은 임기중의 $\ulcorner$연행록전집${\lrcorner}$ 에도 누락된 새로 발견된 연행록이며, 전라남도 장흥군 용산면 상금리(금곡)에 위치한 수원 백씨 종가에서 새로 발견되었다. 특히 병진연행록은 청의 건륭황제(고종)가 옹염(인종)에게 선위 의식을 거행한 후 첫 번째에 해당하는 정규 사절단의 공식 기록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중요한 문헌이다. 이 연구는 이익모의 연행록에 대하여 서지적 특징과 연행록의 필사시기 및 수원 백씨 종가에 입수된 과정, 그리고 연행록에 수록된 내용을 중심으로 병진 사행의 3사신, 북경까지의 왕복 노정 및 북경에서의 체류 일정 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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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차원의 PID 기반 연구 개체의 식별 및 활용에 관한 연구 (A Study on Identifying and Utilizing PID-Based Research Entity at a National Level)

  • 김규환
    •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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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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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5-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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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본 연구는 영국, 독일, 캐나다, 일본, 중국, 호주 등 주요 국가의 운영 사례 조사를 토대로 연구 개체 및 PID 선정안과 PID 컨소시엄 구축 및 운영 전략을 제안하였다. 연구 개체 및 PID 선정 기준은 '연구생명주기'와 'PID 인프라 성숙도' 2가지를 제시하였다. 2가지 선정 기준에 따른 연구 개체-PID 쌍은 초기 단계에는 '연구자-ORCID', '출판물-DOI', '데이터-DOI', '기관-ROR', '보조금-DOI', '프로젝트-RAiD'를 고려하고 이후 단계에서는 PID 인프라 성숙도가 신흥 단계에 있는 다른 연구 개체와 PID로 확장해 나갈 것을 제안하였다. PID 컨소시엄 구축 및 운영 전략은 다양한 PID 이해관계자의 참여를 독려하고 국내·외 PID 기관과의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PID에 대한 인식 제고와 활용율 증대를 위한 교육 및 홍보 활동을 추진하고 정책적 지원과 재정적 안정성을 확보해야 함을 제안하였다. 이를 통해 국내 연구 개체들이 글로벌 차원에서 가시성과 접근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고종연간 집경당(緝敬當)의 운용과 궁중(宮中) 서화수장(書畵收藏) (The Collection of Paintiongs and Calligraphy at Jipgyeong-dang Hall during King Gojong's Reign(1897~1907))

  • 황정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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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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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7-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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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본 논문은 경복궁 집경당의 운용과 수장품의 내역을 통해 고종연간 궁중 서화수장의 추이를 살펴본 것이다. 그동안 집경당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채 건립시기는 경복궁 중건공사가 이루어진 1867년 이후이며 주로 내외신 접견처로 활용된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이글에서는 집경당과 한 건물로 배치된 함화당의 상향문과 기타 관찬사료의 기록을 통해 집경당이 1890년경에 건립되었으며, 그 운용에 있어서도 국왕의 접견처보다는 주로 고종의 강학(講學) 공간이자 풍부한 서책과 서화를 보관한 궁중 도서관, 서화수장처로서 기능을 하였음을 조명하였다. 서책을 보관한 장서각이 궁궐의 특정 영역과 관계없이 분포했던 반면, 서화작품을 수장한 수장처는 조선후기 이후 연침(燕寢) 영역에 위치하기 시작했다. 고종과 비빈들의 침전 영역에 속한 집경당이 서화수장처로 이용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특히 고종연간에는 건청궁과 집옥재를 중심으로 국가의 문화적 기틀을 마련하고자 한 정책으로 인해 경복궁 연침영역에 궁중 도서관이 밀집해 있었다. 당시에는 헌종에 의해 발전한 19세기 전반의 궁중 서화수장에 힘입어 각 궁궐마다 선왕선후의 초상, 그들의 어필, 조선왕실 서책, 그밖에 국내외 서화가들의 작품이 다량으로 소장되어 있었다. 한편, 고종의 적극적인 외국서적 수입정책과 개항기라는 시대상황과 맞물려 궁중으로 유입된 서화자료의 내역은 크게 달라져 있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1800연대를 전후로 간행된 중국 청대 서화, 화보(畵譜), 총서류 및 일본화보, 서양지도가 상당량 유입된 정황이 파악됨에 따라 조선 고유의 작품을 위주로 했던 전통적인 수장 성격에서 벗어났다는 점이다. 이러한 집경당 소장 서화의 외래적인 성격은 19세기 서화단에 있어 김정희 일파를 중심으로 한 청대 첩학(帖學) 비학파(碑學派) 서풍(書風)의 수용, 그리고 장승업 조석진 안중식 등이 청대 산수 인물화풍을 적극 수용하여 중국화풍의 대대적인 유행을 가져온 경향과도 상통한 맥락이었다고 하겠다.

유희춘이 판각을 주도한 서적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Books Engraved under the Auspices of Yu Heui-Chun)

  • 배현숙
    •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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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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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7-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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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본고는 조선조 중기의 관료이며 학자인 미암 유희춘의 일기를 통해 당시 서적 간행의 양상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미암 유희춘은 만년에 관직생활을 하면서 일기를 남겼으니 이 $\boxDr$미암일기$\boxUl$에 일상의 일이 매우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하여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서적, 가정사까지도 알 수 있다. 본고는 이 일기를 통해 미암의 서적과 관련된 여러 일 가운데 미암이 주도적으로 간행하려고 노력한 서적을 밝혔다. 아울러 당시에 편성된 책판목록에 수록되었는지의 여부도 확인하였다. 미암이 개인적으로 간행하고자 한 서적은 2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외조부 금남 최부의 문집인 $\boxDr$금남집$\boxUl$과 중국기행문인 $\boxDr$표해록$\boxUl$이다. 다른 하나는 아동용 도서로 문해용의 $\boxDr$신증류합$\boxUl$과 도덕교육용의 $\boxDr$속몽구$\boxUl$이다. 이들 서적을 인출하기 위해 판각한 당시의 책판은 당대의 책판목록에 수록되어 있어야한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누락되어 있다. $\boxDr$미암일기$\boxUl$를 통해 책판목록에 누락된 서적을 보완할 수 있으므로 $\boxDr$미암일기$\boxUl$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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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장 『김대전전(金臺全傳)』의 판본과 서사 연구 (A Study on Jin Tai Quan Zhuan (金臺全傳): A Narration in the Form of a Xylographic Book)

  • 김명신
    • 비교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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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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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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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이 논문은 "김대전전(金臺全傳)"을 연구대상으로 하여 한국과 중국의 판본 상황을 살펴보고 작품의 서사 양식을 분석하여 작품의 가치를 조명하고자 했다. "김대전전(金臺全傳)"은 청(淸)나라 말기에 창작된 작자미상의 협의소설(俠義小說)로 가장 오래된 판본이 남경도서관(南京圖書館)에 소장되어 있는데 1881년에 출판된 석인본(石印本)이다. 우리나라 국민대학교에 소장된 희귀판본과 비교해보면 판형과 문자 형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내용은 거의 차이가 없다. 작품의 서사 구조는 김대(金臺)의 유랑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그의 등장, 결연, 시련, 입공, 귀환 등으로 순차적으로 진행되면서 김대의 영웅적 행위가 점점 확대되고 있다. 김대(金臺)는 소년영웅으로 기녀와 연분을 맺는 파격적인 애정 형태를 보인다. 그는 의리를 중시하여 친구들과 함께 유랑하다가 악인을 죽이게 되지만 결국 송(宋)나라를 위해 세 차례나 공을 세움으로써 안방정국왕(安邦定國王)으로 봉해진다. 김대(金臺)와 더불어 활약한 500명의 영웅 유형은 지휘자형(指揮者型), 지략가형(智略家型), 행동가형(行動家型), 직관형(直觀型) 등으로 분류된다. 이들은 금산(金山)에서 의형제를 맺은 이후 국난 극복을 위해 모인 인물들인데, 거칠고 호방한 성격을 가졌지만 결국 왕칙(王則)과 반란군을 제거하는 일등공신들이 된다. 김대(金臺)와 적대한 악인들은 그의 영웅성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이다. 김대는 악인들과 사소한 개인적 갈등으로부터 국난에 이르기까지 점점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양상을 보인다.

몽산 어록 조선본의 간행과 유통에 대한 연구 - 『몽산화상법어약록(蒙山和尙法語略錄)』과 『몽산화상육도보설(蒙山和尙六道普說)』을 중심으로 - (A study on publication and distribution of Mengshan analects in Joseon Dynasty Focusing on two books of Mengshan, Mengshan Heshang Sermons Abstract and Mengshan Heshang Liudao Pushuo)

  • 김은진;송일기
    •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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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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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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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이 연구는 중국의 송 원대 임제종 양기파의 승려, 몽산 덕이의 대표 어록인 "몽산화상법어약록"과 "몽산화상육도보설" 조선본을 분석한 것이다. 그의 어록과 저술은 고려 말에 전해져 우리나라 불교계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법어약록은 39종, 육도보설은 24종이 현존하고 있으며 본 연구는 63종을 연구대상으로 간행 시기별, 간행 지역별, 간행 참여자를 분석하였다. "법어약록"은 대부분 16~17세기에 간행되었다. 1467년 간경도감본이 최초의 판본이며 한문본이 1525년에 처음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1467년 간경도감에서 세조와 신미에 의해 처음 편찬된 책이다. 육도보설은 모두 15~16세기에 간행되었는데 언해본은 1종만 존재하며 모두 한문본으로 고려 말에서 조선 전기 몽산 어록의 유통 가능성을 보여준다. 두 책은 모두 전국적으로 유통되었으며 "법어약록"은 국가에서 간행되었다는 점에서 몽산의 어록이 매우 중요하게 다뤄졌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두 어록 모두 지리산 지역에서 활발히 간행되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대규모 불사에 "법어약록"도 함께 간행되었다. 몽산 어록의 간행에 있어 참여자로 화주는 71명, 각수는 109명이 참여하였다. 화주는 다른 사찰에서의 불서 간행에 참여한 경우가 거의 없으나 각수는 대부분이 참여한 것이 확인된다. 몇몇은 활발한 간행활동을 보이는데 이들은 각 지역의 대표 각수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63종의 "법어약록"과 "육도보설" 판본은 조선 전기 불서 간행의 모습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몽산의 어록은 조선 전기 불교계의 개혁과 유불도의 공존을 모색하는 상황 속에서 적극적으로 수용 및 유통되었던 것이다.

고려시대(高麗時代) 간행(刊行)의 불경판화(佛經版畵) 연구(硏究) (A Study on the Buddhist scripture published in the Goryeo Dynasty)

  • 석혜영
    •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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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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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73-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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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연구는 고려시대 제작된 불교 경전에 포함된 판화와 관련된 개괄적인 현황을 살펴보기 위함이다. 고려시대 간행된 판화본 중 해인사 소장 대장경에 포함된 것은 ${\ll}$화엄경(華嚴經)${\gg}$ 주본(周本) 80점(5점 중복), 진본(晉本) 12점을 비롯하여 ${\ll}$예수경(豫修經)${\gg}$ 3종 44점과 송광사에 ${\ll}$천태은사한산습득시집(天台隱士寒山拾得詩集)${\gg}$의 판화 1점이 현전한다. 또한 초조대장경 중 현재 일본 남선사에는 소장된 ${\ll}$어제비장전(御製秘藏詮)${\gg}$ 권1-10까지에는 50개의 판화가 현전하며, 이것은 권11-20까지 중복해서 사용 되었으며, 권21에는 불전도(佛傳圖) 형식의 판화가 3점 포함되어 있다. 이 외에 본고에 다룬 고려시대 간행된 불경 판화는 12종 19점으로, 중국에서 유입된 불경 판화의 모티브를 차용하면서도 고려인들만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독창적인 도상을 만들어 내었다는 점과, 특히 조선 초기 제작된 다양한 불경 판화의 원형을 제공해주고 있어 그 시원을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김유신 관련 사료를 통해 본 시기별 인식 (Periodical Perceptions from Historical Materials for KIM Yoo-Shin)

  • 박찬흥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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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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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7-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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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김유신은 살아 있을 때는 물론이고 죽은 뒤에도 신라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살아 있을 때는 태종과 문무왕을 보필하여 '일통삼한'의 대업을 이룩한 최고의 신하로 평가받았다. 당나라는 물론이고 고구려와 일본에서도 김유신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 평가했다. 김유신은 죽은 뒤에도 태종을 도와 대업을 이룬 '좋은 신하' 또는 '성스런 신하'라고 인식되었다. 또, 문무왕과 함께 '두 명의 성인'으로 추앙되었으며, 불교적으로 33천의 한 사람이 내려온 것이 김유신이라고 인식되었다. 신라 하대에는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어 '무(武)를 일으킨 대왕'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고려시기에는 신라에 이어서 진천현 태령산의 사당에서 국가제사로 받들어졌다. 김부식은 김유신과 태종무열왕 문무왕의 관계를 빗대어 자신의 처지를 보여주려 했는데, 김유신을 두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큰 공을 이룬 인물로 평가했다. 또 윤관은 김유신이 신령스러운 기적을 많이 일으킨 장군으로 인식했고, 이승휴는 김유신이 오묘한 병서를 얻어 무예에 뛰어났다고 말했다. 고려 말의 정추도 김유신이 기이한 능력을 가진 장수이고 큰 무공을 세웠다고 인식했다. 조선시기에서도 태종무열왕 문무왕과 신하 김유신의 절대적인 신임관계로 인해 김유신이 큰 공적을 세웠다는 평가가 지속되었다. 그리고 김유신은 신라의 무(武)를 대표하는 인물이거나 신라 왕조 전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고 보았다. 나아가 중국의 인물에 견줄만한 능력과 공훈이 있는 인물이라고 인식되었다. 조선에서도 김유신이 병법에 뛰어났고 쇠뇌와 같은 훌륭한 무기를 활용했다고 보았으며, 특히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그들은 김유신이 왜적을 소탕해주기를 바랐다. 김유신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무(武)를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되었다. 그리고 성리학적 관점에서 이러한 김유신의 행적을 통해 그를 충신이라고 인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