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좌주문생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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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별곡(翰林別曲)>의 창작(創作) 배경(背景)과 조선시대(朝鮮時代) <한림별곡(翰林別曲)>의 유행(流行) (Epidemic form of creative background and Joseon Dynasty of Hanlim another song)

  • 권혁명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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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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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37-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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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본고는 <한림별곡(翰林別曲)>이 조선시대에 유행한 사실을 초점으로 하여 조선시대 <한림별곡>의 유행 배경으로서 고려시대 <한림별곡>의 창작상황을 도출하고, 이를 토대로 조선시대 유행한 <한림별곡>의 구체적인 양상을 살펴보는 데 목적을 두었다. 2장에서는 조선시대 <한림별곡>의 유행 배경으로서 <한림별곡>의 창작 상황을 도출하였다. 그 결과, <한림별곡>은 관계중심의 '좌주문생연'이 아니라 소속 집단이 강조된 '한림연'에서 창작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 조선 초기 좌주문생관계가 무너지고 '긍호방탕(矜豪放蕩)'하다는 평가를 받은 <한림별곡>이 '한림연'을 계승한 예문관의 '면신연'을 통해서 조선후기까지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3장에서는 2장을 토대로 조선시대 <한림별곡>의 유행 양상을 살펴보았다. 본고는 기존 연구 성과를 수용하되, 2장과의 유기적인 맥락 하에서 살펴보았다. 즉, 조선시대 <한림별곡>의 유행은 두 가지 양상을 띠는데, 하나는 군주나 국가적 문제와 관련하여 예문관(藝文館), 사관(四館)의 공식적 자리에서 유행하였고, 다른 하나는 <한림별곡>이 예문관의 면신연과 결합하자 전자보다 사적인 성격을 띤 공간에서 가창되었다는 것이다. 예문관의 면신연과 결합한 <한림별곡>은 조선 전기 허참례 면신례의 성행과 비례하여 유행하였고, 면신연을 금지하는 구체적인 절목이 만들어진 중종 36년부터는 점점 위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한림별곡>은 예문관(藝文館)이나 사관(四館)에서의 가창은 약화되고 일반 사대부나 지방 관리의 주연(酒筵) 공간, 기방(妓房) 등을 중심으로 유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후기 <한림별곡>의 유행은 김만중의 시를 통해서 볼 때 17세기 후반까지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