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조선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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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생태학관점에서 본 전통사찰의 공간조형개념 연구 - 조선시대 선(禪)적 특성이 두드러진 전각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Space Formative Concepts of Traditional Temple viewed in the Seon Ecology - Focused on Traditional Seon Buddhist Temple of Joseon Dynasty -)

  • 이고은;김개천
    • 한국실내디자인학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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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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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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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Since environmental pollution emerges as an important issue, integration of academic discipline has been accomplished for development of environmental ethics. Combination of Buddhism and Ecology is the instance of this background. The background of this research is the assumption that from Seon Ecology standpoint, Buddhist temple would define conception of Seon Ecology specifically. The study based on advanced study about Seon Ecology, the peculiarity of Seon Ecology was dependent originations, order, the nature of Buddha, moderation, and impersonated nature. In addition, this study researched how these peculiarity has relation with traditional temples. This attempt has a significance in that finding a new approach of interpreting traditional temple and possibility of Seon Ecology Seon Ecology space formative concepts of traditional temple is cyclical allness, transitory balance, Denial of perfection and natural void characteristics from Seon Ecological studies. This study examined how characteristic of Seon Ecology is reflected in traditional temple, through analyzing Buseoksa-Anyangru, Bongjeongsa-Yeonsanam, Seonamsa simgeomdang, Songgwangsa woohwagak, Hwaamsa woohwaru which have remarkable characteristic of selection using above space formative concepts. traditional temple was filled with life coexisted with dynamics, independence, and equality within interrelationship between nature and architecture.

한국 신종교 운동으로서 대순진리회 (Daesoonjinrihoe in Korean New Religious Movements)

  • 데이비드 김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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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4_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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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5-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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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아시아 국가들은 근대사에 들어 서양 제국주의와 식민지주의로 인해 정치·사회적 과도기를 경험하였다. 지역종교들도 이러한 영향에서 예외는 아니었는데 19-20세기에 나타난 신종교들이 그 좋은 사례들이다. 한국도 이러한 지구적인 현상에 포함되었다. 주변국들의 문화적 계몽주의와 조선왕조의 쇄국정책 사이의 정치적 혼란은 방향 감각 없는 국가적 위기를 초례했고, 정치·사회적 부패와 국가적 불안정은 중·하류층 시민들로 하여금 고통스러운 삶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진리나 믿음을 찾게 동요하였다. 근대사에 근원을 둔 대순진리회는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성공적인 신종교일 뿐 아니라 현대사회의 기존 종교들에게도 많은 도전을 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신종교운동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그들의 교리나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 다른 신종교적 현상들과 어떻게 구별될까? 이 논문은 창시자인 강증산의 역사적인 출현과 업적을 "성취관념"에서 분석해 볼 뿐 아니라 대순진리회가 기존의 유교, 불교, 도교의 가르침을 단순히 혼합한 것이 아니라 음양합덕, 신인조화, 해원상생, 도통진경의 특유한 가르침들은 미륵사상, 천지공사, 인존사상과 함께 그들의 최고신인 구천상제가 후천세계를 위해 성취한 완전한 미션을 반영하는 창조적인 사상임을 논증할 것이다.

전통조경요소로써 도입된 학(鶴)과 원림문화 (Cranes(Grus japonensis) Adopted as a Traditional Factor in Landscaping and Gardening Culture)

  • 김해경;소현수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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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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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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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 연구는 학과 관련된 고문헌과 조선시대 산수화를 분석하여 원림에 도입된 동적(動的) 조경요소인 학으로 인해 형성된 원림문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결과를 도출하였다. 첫째, 학은 부처의 화현(化現), 신선 세계와 장수의 희구(希求), 은일자의 고고한 삶을 표현하는 매개체로써 불교 도교 유교적인 상징 의미를 지녔다. 삼국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학을 길렀던 기록이 있으며, 조선시대 선비는 학시사(鶴詩社) 학 품평회를 개최하거나 출사(出仕)를 거절하는 의미로 학을 활용하였다. 둘째, 원림에 학을 도입하기 위해서 야생의 학을 잡아 길들여 학옥 학우리나 울타리를 만들어 가두고, 물을 공급해 주는 연못으로 생육환경을 마련했다. 또한 학을 전담 관리하는 노비가 있었으며, 춤을 추도록 훈련시킨 후 마당에 관념적 의미에서 한 마리의 학을 방사하거나 학의 생태를 고려하여 두 마리의 학을 방사했다. 셋째, 학을 감상하는데 있어서 학과 짝이 되어 상징성을 만드는 수목으로써 은일 처사의 의미체인 매화와 장수 의미를 지닌 소나무를 원림에 식재하였다. 더불어 조선시대 선비는 학과 함께 완상(玩賞) 오수(午睡) 독서(讀書) 탄금(彈琴)으로 풍류를 즐겼다.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시대 선비는 학이 상징하는 의미를 그림으로 그리거나 시를 짓는데 그치지 않고 동적 전통조경요소로써 원림에 학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으며, 선비의 풍류와 연관시켜 학의 생김새, 몸짓, 소리를 포함하는 공감각적 감상을 즐겼다.

조선 말기 괘불(掛佛)의 새로운 도상(圖像) 전개 (The evolvement of new composition of painting in Gwaebul (Buddhist Ceremonial Painting) at late Joseon dynasty)

  • 이은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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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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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3-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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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조선시대 말기인 1885년에서 1926년에 조성된 괘불은 18점이 현존하고 있는데, 그 중 12점이 서울 경기지역 사찰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 초기의 능침사찰(陵寢寺刹)과 원찰(願刹)은 왕실의 후원을 받았으나 태종의 오교양종(五敎兩宗)의 혁파로 인해 불교의례의 규모가 축소되면서 사찰도 피폐해졌다. 그러나 18세기 말부터 다시 왕실과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존속해온 사찰은 다시 번창하게 되었다. 국내 외의 사회적인 혼란했던 이 시기는 국가 및 왕실의 안녕을 빌고 망자(亡者)의 극락왕생을 위한 대중적인 사상이 괘불에서는 새로운 경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괘불에 보이는 새로운 도상은 1853년 남호당 영기(南湖堂 永奇)(1820~1872)가 삼각산 내원암에서 판각 간행한 ${\ll}$아미타요해경(阿彌陀要解經)${\gg}$ 권수 판화에 그려진 아미타삼존도로부터 시작된다. 고려 말에 유행한 수월관음도의 재등장은 망자추선(亡者追善)과 제난구제(諸難救濟)의 역할과 허응당 보우의 〈수월도장공화불사여환빈주몽중문답(水月道場空華佛事如幻賓主夢中問答)〉이라는 도량의식의 '수월도양공화불사(水月道揚空華佛事)'의 허상과 망상이라는 도량의식,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만일회의 성행 등이 괘불 도상과 연관되면서 새로운 도상 출현은 조선 말기 괘불에 새로운 이슈로 나타난다는 점이 주목된다. 괘불의 화풍도 진하고 탁하고 채색과 음영법, 초본을 여러 번 활용한 동일한 도상에서 중앙집권적화된 화사계보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도 이 시기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전기 '격치' 개념의 의미화 (The Conceptual Formation of 'Gyeokchi' in the Early Joseon Period)

  • 이행훈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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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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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9-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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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대학" 8조목의 하나인 격물치지는 유학의 공부론이자 정치의 출발점이다. 유학의 목표는 수기안민, 내성외왕으로 집약된다. 조선 전기격치 개념은 이를 위한 학문과 위정의 시초로서의 의미가 강조된다. 이는 유학이 국가 운영의 핵심적인 가치 체계로 자리하게 되면서, 불교에 의지해 국가를 운영하던 시스템의 일대 변환과 사상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인륜 규범을 정하고 사회를 질서 짓는 근거로 유학이 부상하면서 유학의 경세론적 특성이 두드러진 것도 이 시기였다. 조선조 내내 "대학연의"는 제왕의 학문과 정치의 모범으로 경연에서 강론되었고, 그 출발점으로 '격치'가 논의되었다. 한편 '격치'와 관련한 다양한 해석과 논변은 경학사상사적으로 정주 성리학이 조선 성리학으로 심화되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격물'과 '물격' 해석을 둘러싼 논변은 인식 주체와 대상의 문제를 넘어 리의 본질을 궁구하는 문제와 맞닿았고, 기호와 영남 유학을 가르는 분수령이 되었다. 다양한 해석과 논변에도 불구하고 앎과 실천을 통합하는 유학의 공부론은 인문학의 역할과 위상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 시대에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시장 논리에 내맡겨진 과학기술의 방향과 속도를 조절하는 데에 대학과 인문학의 역할은 오히려 강화되어야 하고, 학문의 궁극적인 목표를 재성찰함으로써 이러한 문제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진묵조사유적고』와 『전경』에 나타난 진묵 설화의 차이에 대한 재해석 -문헌 전승과 구전 전승의 차이를 중심으로- (A Reinterpretation of the Differences between the Tales of Jinmuk shown in The Investigation of Historical Remains of Patriarch Jinmuk and The Canonical Scripture: Highlighting Differences between Literary Transmission and Oral Transmission)

  • 김태수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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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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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9-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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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攷)』(이하 『유적고』)와 증산(甑山) 및 대순사상에 나타난 진묵(震默) 설화의 차이와 관련, 선행연구에서는 증산이 종교적 이유로 설화의 원 의도를 변형한 것으로, 또는 믿음과 가치관의 차이로 본다. 이는 한국불교와 증산·대순사상 간 가치관의 차이를 전제로 양자를 회통하려는 해석이다. 본 연구는 가치관에 따른 기술 차이라는 이상의 관점을 수용한다. 다만 이러한 기술 차이를 불교와 대순사상 간 세계관 차이가 아닌, 문헌 전승과 구전 전승의 차이라는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한다. 이는 각각 19세기에 최초 문헌설화로 구성된 『유적고』와 18세기 이래 전래 된 민간전승을 의미한다. 이러한 해석 지평에서 진묵-봉곡(鳳谷) 관계를 조명하면, 『유적고』는 초의(草衣)·김기종(金箕鍾) 등 지식층의 가치관·의도를, 구전설화는 조선 후기 민중들의 희망을 투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증산 또한 천지공사에서 민간전승을 활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16C에서 19C에 이르는 유불 관계 맥락에서 『유적고』 찬술 경위와 의도를 분석했다. 특히 『완당집(阮堂集)』·승려 문집 등을 통해, 유학 측에서는 예도 정신의 진작이라는 시대 이념에 따른 자료의 순화·교정이 필요했고 초의 역시 불교에 불리한 구비전승을 윤색·삭제한 것으로 보았다. 반면 『유적고』에 수록되지 않은 진묵 설화가 18세기에도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영당중수기」 및 현존 구비전승을 볼 때 증산의 기술은 민중의 염원을 담은 시속의 민간전승을 수용한 것으로 평가했다. 즉 정치·사회적 이유로 유불 화합 내용만 채택한 『유적고』에 비해 『전경』은 조선 후기 회자 된 구비전승을 충실히 반영한 것으로 이해했다. 근거로는, 진묵-봉곡 관계를 조명한 구전설화에서 봉곡의 시기나 살해에 관한 서사가 많다는 점, 증산이 정치적 입장·신분이 아닌 마음과 뜻에 따라 모든 계층의 인물을 아울렀음을 들었다. 따라서 구전 전승의 특성상 면면히 이어 내려오는 서사 내용을 개작할 필요가 없었고 민중의 소리를 투영한 것으로 해석했다.

조선전기 관경십육관변상도에 보이는 고려 전통의 계승과 변용 -정토인식과 왕생관의 변화를 통해- (Study on the Inheritance and Transformation of the Goryeo Tradition in the Illustrations of the Sixteen Contemplations of the Amitayurdhyana Sutra of the Early Joseon Dynasty -with the Focus on the Concept of Rebirth in the Pure Land-)

  • 이승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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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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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6-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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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조선전기 제작된 관경변상도는 전환기 조선사회의 시대상 뿐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정토인식이 화면의 구성과 도상에 잘 투영되어 미술사적, 문화사적 가치가 높다. 조선 15세기 관경변상도는 모두 3점으로 이중 1435년 <지온지 관경변상도>와 1465년 <지온인 관경변상도>는 왕실인물과 고위승려의 발원으로 조성되었다. 이 두 작품은 1323년 <지온인 관경변상도>의 구성과 도상을 계승하면서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고려후기에 융성했던 천태종(天台宗)의 정토신앙경향을 계승하고 있다. 이는 고려 왕실과 귀족사회에서 선호했던 자력적(自力的)인 정토신앙의 경향이 조선의 왕실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천태사상의 영향을 받은 정토신앙은 조선전기까지 계승되어 천태종이 불교의 통폐합과정에서 선종에 흡수되기 전까지 유지되었다. 천태정토신앙의 경향은 이 두 작품이 각각 천태승 행호와 행호를 진불(眞佛)로 모셨던 왕실의 어른 효령대군이 발원하였다는 사실로도 뒷받침된다. 한편 유교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사회가 안정화되어 감에 따라 관경변상도를 포함한 정토불화들은 점차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교학적이고 자력적인 정토인식보다는 아미타불의 힘에 의해 구원받고자 했던 타력적인 정토신앙이 확산되는 시기와 맞물린다. 변화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도상이 용선접인도상이다. 자력적인 정토왕생을 좀더 가치있다고 여겼던 시기에 제작된 <묘만지 미륵하생경변상도>의 용선접인 도상에서는 부처님의 인도를 받고 있지 않다. 이에 비해 조선전기의 용선접인 도상에서는 아미타부처님이 관음, 지장, 혹은 인로왕보살등과 함께 왕생자를 이끌고 배를 타고 있는 형상으로 묘사된다. 이는 아미타불의 원력으로 극락왕생한다는 타력왕생관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조선전기 제작된 3점의 관경변상도는 유교주의 사회에서 타력적인 신앙을 선호하는 정토신앙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불화로서 매우 의미가 크다.

세조의 원각사13층석탑 건립과 그 의미체계 (King Sejo's Establishment of the Thirteen-story Stone Pagoda of Wongaksa Temple and Its Semantics)

  • 남동신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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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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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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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1467년에 완성된 원각사13층석탑은 한국 역사상 최후의 호불군주에 의한 최후의 도성불탑이다. 필자는 세조가 즉위 10년을 맞이하여 도성(都城) 중심부에 13층석탑을 세우고 탑에 석가사리(釋迦舍利)와 함께 '신역원각경(新譯圓覺經)'을 봉안한 뜻을 세조의 관점에 입각하여 살펴보았다. 머리말에 이어 제II장에서는 13층탑의 경전적 배경을 다각도로 고찰하였다. 특히 필자는 13층탑 건립의 직접적인 소의경전으로서 『대반열반경후분(大般涅槃經後分)』을 최초로 발굴하고, 이 경전이 7세기 후반 중부 자바에서 번역되고 동아시아에 유통된 사실을 추적하였다. 아울러 13층탑의 기원으로서 이른바 카니시카양식의 탑을 주목하고 동아시아와 한국에서의 13층탑 조성 사례를 개관하였다. 그리고 불교문헌을 탐색하여 '13층'이 깨달음[Buddha]으로 나아가는 수행 단계를 상징함을 입증하였다. 확실히 '13'은 불교도에게는 매우 특별하면서도 신성한 숫자라 할 수 있다. 이어서 제III장에서는 세조의 원각사13층탑 건립의 불교적 정치적 함의를 탐색하였다. 불교적 함의와 관련해서는, 세조가 중국에서 직접 구입하여 조선에 최초로 유통시킨 『번역명의집(翻譯名義集)』과, 그가 최초의 한글 번역에 직접 개입한 『원각경(圓覺經)』에 주목하였다. 『번역명의집』은 14세기에 출현한 일종의 불교용어집인데, 세조는 원각사탑을 창건할 무렵 이 문헌을 통하여 13층탑의 소의경전인 『대반열반경후분』을 알았을 것으로 추론하였다. 한편 세조는 대장경 전체를 상징하는 단일경전으로 '신역 원각경'을 원각사탑에 봉안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그가 최초의 한글 번역에 깊이 관여한 『원각경언해』였다. 아울러 『원각경언해』의 저본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달리 종밀(宗密)의 『원각경략소(圓覺經略疏)』임을 밝혔다. 원각사탑 건립의 정치적 함의와 관련해서는, 조선 초 왕실의 능사(陵寺)(또는 진전사원(眞殿寺院))에 세워진 석탑-경천사13층석탑(敬天寺13層石塔), 개경사석탑(開慶寺石塔), 연경사석탑(衍慶寺石塔), 신륵사다층석탑(神勒寺多層石塔)-들을 비교 검토하였다. 그 결과 세조가 자신의 왕위계승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정치적 상징으로서 원각사13층석탑을 건립하였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본고에서 필자는 13층탑으로서의 원각사탑의 의미체계를 온전히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여말선초 정점에 달한 불탑 문화를 이해할 뿐 아니라, 카니시카대탑에서 기원하고 『대반열반경후분』에 근거하는 동아시아의 13층탑을 연구하는 데 한국적 연구모델로서 기여하리라 기대된다.

한국사상사에서의 묵가(墨家) 비판 - 벽리단론(闢異端論)의 전개 양상을 중심으로 - (The Critic on Mohism in the History of Korean Thoughts Centered on the Theory of Rejecting Heterodoxy)

  • 윤무학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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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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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9-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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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이 글은 선유(先儒)들의 묵가에 대한 비판을 개괄하고, 이를 전제로 하여 고려말부터 시작하여 조선조 후기에 이르는 묵가 비판의 전개 양상을 고찰한 것이다. 우리나라 고려 이전의 문헌에서는 묵가나 묵자를 비롯한 제자백가를 명시적으로 배척한 사례가 보이지 않는다. 여말선초에 이르면 성리학의 수용과 더불어 맹자의 벽이단론의 관점이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양주와 묵적에 대한 비판을 전제로 불교와 노자를 배척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조 지식인들의 묵가에 대한 이해와 비판 양상의 특징은 묵가의 이념 자체에 대한 비판보다는 주로 다른 이념이나 부조리에 대한 비판의 도구로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말선초의 불교와 노자, 중후기의 문장학(과거학), 서학(천주교), 나아가 관료들의 부패 등이 포괄된다. 내용면에서 본다면, 묵가의 십대 주장 가운데 「겸애」와 「절용」(절장, 비악)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조선 중후기에 이르면서 「명귀(明鬼)」와 「천지(天志)」에 대한 비판이 포함되고 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중국사상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침략전쟁을 반대하는 평화 이념이 반영된 「비공(非攻)」이나 운명론을 부정하는 「비명(非命)」에 대한 비판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가의 인문주의적이고 현실주의적 측면에서 볼 때 적극적으로 비판할 여지가 없었던 데 연유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묵가 이념과는 별도로 묵자 개인의 묵수(墨守)와 관련된 행위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또한 후기에 이르면서 묵자서는 이념서가 아니라 유교 경전 내용을 고증하기 위한 사료로서 활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명승시선(朝鮮名勝詩選)』에 나타난 명승자원 연구 (A Study on Scenic Sites Introduced in 『Joseon MyungSeung Sisun (朝鮮名勝詩選)』)

  • 이창훈;이원호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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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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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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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 초기에 한반도 내 명승지를 소개할 목적으로 발간된 나루시마 사기무라[成島鷺村]의 "조선명승시선(朝鮮名勝詩選)"에 수록된 명소들의 유형과 특징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책을 집필한 의도와 과정을 살피기 위해 서문(序文)과 예언(例言)의 내용을 해석하고, 본문에서 소개하는 약 1700개소의 명승지의 유형, 분포, 특징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인문경관이 자연경관의 2배 이상 소개되고 있으며,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경관유형으로는 불교유적, 누 정, 명산 순으로 나타났다. 그 외 "조선명승시선"은 우리나라선인이 작성한 시문(詩文)의 내용을 활용하여 전래 명승지로써의 개념을 확장하고자한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으며, 일제강점기라는 전환기적 상황을 배경으로 근대 성격을 갖는 근대공원, 근대기념물, 해수욕장, 기차역 등이 사람들에게 새로운 명소로 소개되는 시기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연구범위 선정에 있어 명승지의 인식이 변모하는 일제강점기 전과 후 사정을 전체적으로 다루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이 시기에 한반도 내 명승이 소개되는 여타 문헌에 대한 비교 분석의 연구 등은 추후 과제로 남겨두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