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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기 백선도(百扇圖)의 새로운 제작경향 - 독일 로텐바움세계문화예술박물관 소장 <백선도(百扇圖)>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선도(百扇圖) 초본(草本)>을 중심으로 - (New Trends in the Production of One Hundred Fans Paintings in the Late Joseon Period: The One Hundred Fans Painting in the Museum am Rothenbaum Kulturen und Künste der Welt in Germany and Its Original Drawings at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 권혜은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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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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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9-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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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 논고는 19세기 이후 형성된 서화(書畫)의 유통과 확산의 양상을 당시 활발히 제작된 장식병풍 중 하나인 <백선도(百扇圖)>의 예를 통해 살펴본 글이다. 백선도는 화면에 다양한 형태의 부채를 겹쳐서 배치하고 각각의 선면(扇面) 안에 여러 종류의 화제(畫題)를 그린 것을 말한다. 부채와 선면화(扇面畫)라는 소재는 이전부터 존재하였지만 장식용 회화의 소재로 등장한 것은 19세기 이후로, 호사취미 경향을 반영하여 주로 병풍(屛風)으로 활발히 제작되었다. 지난 2016년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미술 속 도시, 도시 속 미술'에서 독일로텐바움세계문화예술박물관 소장 <백선도>가 새로이 소개된 바 있다. 6폭으로 구성된 이 병풍에는 한 폭 당 5개 이상의 다양한 종류의 부채들이 등장하고 각 부채 면에는 단순히 채색한 것 뿐 아니라 다양한 화목(畫目)의 그림들이 남아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을 주목해야 하는 것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동일한 초본(草本)이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이전의 왕실이나 사대부들이 사적인 공간에서 향유하였던 서화(書畫)는 민간으로 확산되었고 시장을 통한 유통의 단계로 넓어졌다. 집안을 꾸미고 장식하는 풍조에 따라 화려한 장식그림들이 선호되었고, 한 폭에 다양한 형태의 화면과 다채로운 畫目(화목)의 그림을 그려 완성하는 백납도병풍 제작이 성행하였다. 로텐바움박물관 소장 한국 컬렉션의 상당수는 독일 주재 조선국 총영사이자 독일의 사업가였던 하인리히 콘스탄틴 에두아르 마이어(Heinrich Constantin Eduard Meyer, 1841~1926)의 수집품이다. 그는 1890년대 후반부터 1905년까지 조선과 독일을 오가며 다양한 유물들을 수집하여 독일에 돌아가 1909년까지 순차적으로 수집품을 로텐바움박물관에 전달하였으며, <백선도>도 그 중 하나이다. 새롭고 장식미가 돋보이는 <백선도>는 조선에 들어와 있던 외국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로텐바움박물관 소장 <백납도>는 제2폭의 뒷면에 "동현(銅峴)"이라는 지명이 적힌 종이조각이 거꾸로 붙어있어 흥미를 끈다. 동현은 지금의 서울 을지로 1가와 을지로2가 사이에 위치했던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도화서(圖畫署)를 비롯한 혜민서(惠民署)·장악원(掌樂院) 등의 관청과 시전(市廛)이 있어 가내수공업이 성하던 지역이었다. 실제로 1900년대 초 이곳에는 서화를 유통하는 상점들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마이어가 수집했던 서화들의 구입처가 동현에 위치했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하겠다. 로텐바움박물관 소장 <백선도>는 총 6폭의 병풍으로, 1980년대에 한국 서화 소장품들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선도 초본>은 1945년부터 1950년 사이 국립민족박물관에 입수된 작품이다. <백선도 초본>은 총 7점으로, 7점 중 6면 화면의 여백에 화면의 순서까지 정해져 있어 본래 총 8폭 병풍용 초본임을 알 수 있다. 한 화면에는 5개 이상의 다양한 접선(摺扇)과 단선(團扇)들이 배열해있는데, 작은 장식에서부터 부챗살의 문양까지 초본부터 사실적으로 묘사되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 '석간주(石間朱)', '홍(紅)', '묵(墨)', '청(靑)' 등과 같이 부채에 들어갈 색 대부분을 지정하고, 빈 부채에는 '유(油)'라고 적거나 비워두었으며 이 중 10개의 부채에는 화훼초충도(花卉草蟲圖)나 고사인물도의 밑그림이 남아있다. 이를 실제 로텐바움박물관 소장 <백선도>와 비교하면 화면의 크기와 비례까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어, 초본의 매뉴얼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펼쳐진 부채 면에는 산수, 고사인물, 화조, 영모, 초충, 어해 등 다양한 장르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화접도(花蝶圖)나 어해도(魚蟹圖) 등은 19세기 유행하였던 소재로 당시 화단의 경향을 잘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 것은 김홍도(金弘道)의 전형적인 화풍을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지금까지 알려진 백선도나 백납도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특징이다.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는 상대적으로 제한된 작은 화면에 그려야 하는 백납도나 백선도의 특성상 잘 다루지 않는 소재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홍도의 <서원아집도>병풍과 화면의 구성이나 화풍 모두 매우 흡사하다. 더구나 <백선도>병풍의 몇몇 장면은 김홍도의 작품 중에서도 1796년작 《병진년화첩(丙辰年畫帖)》과 유사한 화면들을 다수 발견할 수 있어 흥미롭다. <사인암(舍人巖)>과 흡사한 산수도(山水圖)를 비롯하여 <서원아집도>, <쌍치도(雙雉圖)> 등에서 김홍도 화풍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부채 속 그림을 그린 인물은 김홍도 화풍의 영향을 받은 직업화가일 것으로 보이며, 작가는 《병진년화첩》을 직접 감상한 적이 있거나, 서화시장에 《병진년화첩》을 베껴 그린 부본(副本)이 유통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현재까지 알려진 병풍으로 된 백선도는 10점 내외인 것으로 파악되며, 이 작품들을 비교해보면 화면의 구성이 부채 1개 정도 차이가 있거나 비례와 좌우가 바뀌었을 뿐 화면구성이 매우 유사함을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일정한 패턴의 화면구성은 같은 시기 민간에서 성행한 책가도(冊架圖)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특징으로, 19세기 서화의 수요층이 넓어짐에 따라 세밀한 표현과 화려한 장식성이 요구되는 회화들의 대량 제작을 위한 초본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도안이 복잡하여 범본이 필요한 곽분양행락도나 요지연도, 백동자도, 해학반도도 등의 규모가 큰 장식병풍에서 적극 활용되었으며, 실제 남아있는 작품에서 몇 가지의 도상들이 반복하여 등장하고 있어 초본을 참고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시장의 수요에 맞추어 대량 제작할 수 있는 초본 활용이 성행했던 당시의 경향은 화면을 다채로운 부채들로 채우고 그 부채 면에 각기 다른 그림을 그려야하는 백선도 제작에 있어서도, 초본을 요긴하게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더구나 테두리를 그은 후 다양한 화목의 그림을 담는 백납도에 비해 백선도는 다양한 형태의 부채들을 먼저 그려야하는 공정을 거쳐야 했기 때문에, 대량 제작이 어렵고 그만큼 남아있는 작품이 상대적으로 적은 원인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로텐바움박물관 소장 <백선도> 병풍과 국립중앙박물관 <백선도 초본>은 새로운 화풍이 수용되어 시도되었던 조선 말기 화단의 경향을 잘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다수의 백선도들이 박기준의 작품과 유사한 화풍과 화면 구성 보이는 것에 비해, 김홍도의 영향이 분명히 드러나는 매우 이례적인 예라는 점에서 앞으로도 더욱 심층적인 분석이 요구되는 작품이다.

주요(主要) 고농서(古農書)를 통(通)한 조선시대(朝鮮時代)의 도작기술(稻作技術) 전개(展開) 과정(過程) 연구(硏究) - IX. 도작기술(稻作技術)에 대(對)한 종합고찰(綜合考察) (A Study on Transition of Rice Culture Practices During Chosun Dynasty Through Old References IX. Intergrated Discussion on Rice)

  • 구자옥;이숭겸;이은웅;이홍석
    • 한국잡초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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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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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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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2
  • 조선왕조초기(朝鮮王朝初期)부터 농업초기정책(農業初期政策)은 지역농업(地域農業)의 현실적(現實的) 조건(條件)과 결부(結付)된 농사직설(農事直說)과 같은 농서(農書) 발간(發刊)에 의해 부여(附與)되었다. 그 책(冊)들은 새롭고, 집약적(集約的)인 농업기술(農業技術)을 제공(提供)하였다. 이 농서(農書)는 그 당시(當時)에 농촌지역(農村地域)에서 경험(經驗)된 우수한 농업기술(農業技術)을 수집(蒐集)하여 만든 것이다. 농사직설(農事直說)에 따르면 벼 재배(栽培)는 무삶이(담수직파법(湛水直播法)), 건삶이(건답직파법(乾畓直播法)), 이앙법(移秧法) 그리고 산도법(山稻法)(육도법(陸稻法))으로 분화(分化)되었다. 이들 농법(農法)에 구비된 고도기술적특성(高度技術的特性)은 과학적제초기술(科學的除草技術)과 적극적인 시비법(施肥法), 축력(畜力)과 인력용(人力用)의 농기(農機)로 일관되게 체계화(體系化)시킨 농작업방법(農作業方法)에 근거(根據)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해안(海岸)의 습지(濕地)와 황지(荒地)의 개간(開墾)은 화경(火耕)와 윤목(輪木)이라 칭하는 제초장비(除草裝備)로 인하여 가능케 되었다. 또한 벼의 묘령단계(苗令段階)에서 토양(土壤)의 간인(間引), 토기작업(土寄作業)과 동시에 섬세한 제초작업(除草作業)을 할 수 있도록 분화(分化), 발달(發達)된 호미가 있었다. 직파(直播)벼재배(栽培)는 저류지(貯溜地)와 소택(沼澤)을 만들어 평야수전(平野水田)의 직파재배(直播栽培)를 가능케 하였으며, 곡간지답(谷間地畓)은 보(洑)를 만들어 개간했다. 이들은 관수(灌水)에 의해 제초를 쉽게 하는 동시에 관수중(灌水中) 무기영양(無機營養)을 통(通)한 토양비옥도(土壞肥沃度) 유지 및 벼의 생리적(生理的) 호조건(好條件)을 부여하여 논의 생산성(生産性)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 또한 이앙(移秧)을 하면 더욱 성력재배(省力栽培)가 가능하였을 것이지만 전국적인 물의 사용제약성(使用制約性)때문에 이앙법(移秧法)을 원칙적으로 금해 오지 않을 수 없었다. 건전재배(乾田栽培)에서 직파재배(直播栽培)가 수립되었으며, 수도(水稻)가 직파(直播)되고 유묘기까지 건토(乾土)에 재배(栽培)되었으며 농사직설(農事直說)에서처럼 비올때 관수토양(灌水土壤)에 재배(栽培)되었다. 조선중기(朝鮮中期)(AD 1495-1725)에는 벼 농사(農事)에서의 제초효율(除草效率)과 편리성(便利性) 때문에 정조식(正條式) 이앙법(移秧法)을 포함한 탁월한 성력농법(省力農法)(한정록(閑情錄))과 벼 이앙에 근거(根據)(농사직설(農事直說))하여 못자리(묘대) 기술(벼의 조기이앙(早期移秧)이 강조(强調)되었다. 비료분(肥料分)을 다량투입(多量投入)하고 우력(牛力)을 이용(利用)하여 심경(深耕)해야 한다는 일련(一連)의 기술(技術)들은 토지(土地)와 노동생산성(勞動生産性)을 향상 시키는 것이었다. 농가집성(農家集成)때보다 산림경제(山林經濟)때에 발전된 사항은 오늘날의 육묘대법(陸苗垈法)과 마찬가지인 건앙법(乾秧法)을 개발하여 이앙재배(移秧栽培)하게 만든 것이며, 답이모작(畓二毛作)을 확립(確立)시켜서 답작(畓作)의 노동(勞動) 및 토지생산성(土地生産性)을 높이게 된 것이다. 이결과 소경영생산양식(小經營生産樣式)을 경영형(經營型) 부농적(富農的) 생산양식(生産樣式)으로 변화시켜 광작농법사회(廣作農法社會)를 태동(胎動)시켰다. 우하영(禹夏永)(1741-1812) 은 천일록(千一錄)을 통하여 당시의 광작농(廣作農)이 갖는 폐단을 집약적(集約的) 농법(農法)으로 개혁하고자 하였고, 그가운데 탁월한 견해로서 농지(農地)를 토질(土質)에 따라 이앙법(移秧法)과 grooving 파종법(播種法)(전(田))으로 땅(토지(土地))의 이용을 구분한 것이다. 특히 서유가(徐有架)(산림경제(山林經濟))가 주장한바 이앙(移秧)의 유리성(有利性)은 제초노력이 절감되고 묘대(苗垈)와 본답(本畓)의 토지기력(土地氣力)을 얻기 때문에 벼의 좋은 생육(生育)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는 벼를 뽑았다가 다시 심기 때문에 새롭게 기력이 얻어진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앙법(移秧法)에 앞선 재평가(再評價), 이모작(二毛作)의 한계성(限界性), 반답법(反畓法)의 제약론(制約論), 광작(廣作)의 폐단에 처한 금지론(禁止論)이 있었다. 그당시 이지연(李止淵)에 의해서 벼의 수도수분생이(水稻水分生理), 토지(土地) 및 제초(除草)의 편리성(便利性)을 고려한 수도직파재배법(水稻直播栽培法)이 쓰여 졌는데 그것은 가장 안정한 농가소득을 확보하는 창조적인 작부체계(作付體系)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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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당진찬(奉壽堂進饌)의 무대와 공연 요소 분석 (Analysis of the Stage and Performance Elements for Bongsudang-jinchan Banquet in Joseon Dynasty)

  • 송혜진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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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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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3-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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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고에서는 1795년 화성 행궁에서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열린 봉수당진찬의 의례와 악무를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 및 "정조실록", "홍재전서(弘齋全書)"등의 봉수당진찬 의례기록과 <화성능행도병>등의 도상자료, 일기체의 한글가사 작품인 이희평(李羲平)의 <화성일기(華城日記)>등의 자료를 중심으로 분석하여 무대와 공연요소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잔치의 주인공에게 충(忠)과 효(孝)의 의미를 담은 음악과 춤, 꽃과 음식, 술과 글을 예를 갖춰 올리는 궁중연향은 예악(禮樂)의 원리에 바탕을 둔 국가의례로서 조선왕조 500년 동안 고유한 음악문화를 형성해왔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면서 '예'라는 상징적이며 총체적인 틀 안에서 상호 유기적인 관계에 놓여있던 연례의 음악과 춤들이 개별 악곡과 춤으로 해체되어 '작품화'되었고. 궁중음악과 춤의 철학이나 원리, 시공간에 대한 이해는 현저히 축소된 채, 음악과 춤의 전통은 형식과 예술적 표현 중심으로 변화해왔다. 1990년대 이후, 궁중의례 전통의 재현(再現)을 목적에 둔 연구와 행사가 추진되면서, 이와 연관된 공연예술 활동도 점차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며, 특히 봉수당진찬은 다양한 방식으로 현대무대화 하고 있다. 그러나 원전(原典)의 재현(再現) 및 복원(復原) 문제, 완성도 및 예술성에 대한 문제는 과제로 남아있으며, 지금까지는 "원행을묘정리의궤"에 수록된 의주의 외형적 재현에 관심을 두었을 뿐, 무대조건이나 공연요소에 중점을 둔 심도있는 분석은 부족하였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본 연구에서 무대구성과 공연요소 중심으로 분석해 본 결과, 조선시대 궁중연향 중에서 유일하게 '행궁'에서 개최된 봉수당진찬은 '예악의 정치'를 의례와 악무로 구현하는 궁중연향의 기본적인 면모를 보여주면서도 '군신동락(君臣同樂)'의 친화의 비중이 높은 연향이었음을 밝혔다. 내연과 외연의 성격이 섞인 봉수당진찬에서는 가림막을 최소화하여 신분의 차서(次序)와 남녀유별(男女有別)의 원리를 충족시키면서도 삼면에 둘러친 휘장 안에 외빈의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술과 음식, 음악과 춤을 다 같이 공유하도록 배치되었다. 또한, 연향공간의 상징성을 내포한 차일을 백관들의 공간에 치고, 임금이 솔선하여 선찬(膳饌)과 산화(散華)를 명함으로써 군신동연(君臣同宴)의 의미와 범위를 확장시킨 점을 알 수 있었다. 이는 봉수당진찬이 '예악의 원리'가 강하게 드러나는 여느 궁중 연향에 비해 '정(情)'을 나누는 화친(和親)에 기반을 두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봉수당진찬에서는 여느 내연에서보다 임금의 역할과 비중이 높았으며, 특히 의주 외의 기록으로 전하는 여러 가지 상황 - 7작 이후에 정조가 신하들을 가까이 불러 나눈 대화, 신하들에게 음식과 꽃을 내림, 잔치를 주제로 직접 시를 짓고, 신하들에게도 이에 화답하게 한 일 등-은 의주에 따른 단선적인 연향의 진행에 변화를 주고, 연향의 의미를 확장시키는데 한 몫 하였다. 이밖에, 봉수당진찬의 주악과 정재의 구성을 분석해 본결과 연향에서 여러 인물들의 대화와 움직임이 매우 절제된 것은 여느 궁중연향과 비슷하지만, 춤과 음악을 통해 구현된 소리와 색채감은 매우 다채로웠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봉수당진찬에서는 정조 이전에 치러진 내연에 비해 다양한 종류의 정재를 상연하였고, 이 중에는 새롭게 초연된 레퍼토리도 있었으며, 또 기존의 공연을 새롭게 재구성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선유락>이나 <검무> 등, 지방 관아 및 민간의 레퍼토리를 궁중연향으로 수용한 점, 풍류방에서 즐겨 연주되기 시작한 생황을 <학무> 와 연계한 것은 전통적인 규범과 관습에 매이지 않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궁중연향의 '열린구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산률(山律) 선우영(鮮于英) 필(筆) <금강산 묘길상도> (The First North Korean Painting in the Collection of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Myogilsang on Diamond Mountain by Seon-u Yeong)

  • 이성미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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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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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7-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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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산률(山律) 선우영(鮮于英)(1946~2009) 필(筆) <금강산 묘길상도>(2000)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게 된 최초의 북한 화가 작품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묘길상도> 가운데 가장 큰 종축(縱軸) 형식으로 크기가 세로 130.2cm, 가로 56.2cm에 이르는 지본수묵진채(紙本水墨眞彩) 그림이다. 선우영에 관하여는 최근 우리나라에도 수차례 개최된 전시회에서 비교적 잘 알려졌다. 그는 1989년 공훈예술가, 1992년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는 등 이른바 '진채세화(眞彩細畫)'의 대가로서 북한을 대표하는 화가가 되었고, 60여 점의 작품이 북한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그림의 주제인 <묘길상> 마애불은 금강산 내금강 지역에 있는 만폭동 골짜기의 높이 40m 벼랑 아래에 15m 정도 크기로 새겨진 고려시대의 마애불이다. 이 마애불의 명칭은 마사연(摩詞衍) 동쪽에 있었던 묘길상암(妙吉祥庵)에서 유래한다. 마애불의 오른쪽 옆 바위에는 직암(直庵) 윤사국(尹師國)(1728~1709)이 쓴 '묘길상(妙吉祥)'이라는 큼직한 음각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필자는 불상의 수인(手印)을 오른손과 왼손이 모두 엄지와 약지(藥指)가 만나는 하품하생인(下品下生印)과 비슷하지만 왼손이 아래를 향하고 있지 않고 오른손과 거의 직각을 이루며 복부에 놓여있으므로 설법인(說法印)으로 보았다. 즉 이 불상은 설법인을 결하고 있는 석가상(釋迦像)이라고 결론지었다. 선우영의 <금강산 묘길상도>는 조선시대 같은 주제의 그림들과 비교하면 불상의 자연 환경, 즉 벼랑 아래 감실에 새겨진 불상이라는 점과 불상이 인간의 모습이 아닌 암각상임을 수묵진채로 표현한 유일한 그림이다. 구도와 색감이 자아내는 초현실주의적 분위기 또한 이 <금강산 묘길상도>의 특징이라 하겠다. 이 그림을 포함한 선우영의 대부분 작품이 진채로 바위 질감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그림이지만 그의 만년작 <파도>(2008)와 같이 전통적의 수묵화에 가까운 그림도 그렸던 폭넓은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화가이다.

제주 팽림월대(彭林月臺)의 경관특성 및 관리방안 (Characristics and Management Plans of Myeongwoldae and Myeongwol Village Groves Located in, Jeju)

  • 노재현;오현경;최영현;강병선;김영숙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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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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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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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본 연구는 제주시 한림읍 소재 명월대와 명월숲의 생태문화경관적 특성 파악과 가치 발굴을 목적으로 시도되었다. 이를 위해 이곳의 장소성을 밝히고 명월대와 명월숲의 경관특성을 조명하는 한편 지속가능한 활용과 보존을 위한 관리방안을 제시하였다. 본 연구의 주요 결과는 다음과 같다. 명월성과 명월포구는 예로부터 군사요새이자, 명월 수류촌은 서부 제주지역 행정의 중심지인 한림읍 명월지역의 위상을 보여줄 뿐 아니라 명월지역에 존재했던 월계정사와 우학당은 교육문화의 본산으로, 교육 중심지 명월리의 장소성을 대변한다. 명월대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시와 풍월을 즐기고, 장기와 바둑을 두던 유풍이 남아있는 음풍농월의 현장이자 제주도의 대표적인 유교 문화경관이다. 현재의 명월대 유구는 일제강점기인 1931년 홍종시(洪鍾時)를 중심으로 한 명월청년회 주도로 이루어진 정비사업의 결과이다. 사각형-팔각형-원형 등 3단으로 구성된 명월대의 석축 구성은 유교사상의 천인합일사상을 바탕으로, 중앙의 팔각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명월대교와 명월교는 모두 초기에는 홍예교로 석축된 것으로 추정되며 명월교는 제주에 남아있는 유일한 홍예교로 근대문화유산적 가치가 있다. 명월숲의 식물상은 총 97분류군(taxa)이 확인되었으며, '식물구계학적 특정식물종의 분류군 및 등급기준'에 준하면 IV등급에는 가는쇠고사리, III등급에 호랑가시나무, 후추등, 까마귀쪽나무, 멀구슬나무, 산유자나무, 노랑하늘타리, 아욱메풀, 아왜나무 등 8분류군으로 나타났다. 반면에 귀화식물은 제주도에만 이입된 솔잎미나리를 비롯하여 14분류군이 확인되었다. 명월숲에는 팽나무 41주와 푸조나무 30주, 산유자나무 2주, 소나무, 동백나무, 멀구슬나무, 호랑가시나무 각각 1주 등 도합 77그루의 수목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조사된 자료를 근거로 명월대와 명월숲의 보존관리방안은 다음과 같다. 명월대와 명월교 그리고 명월숲을 하나의 통합 영역으로 한 보존관리가 필수적이다. 명월교는 제주도내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홍예교로 수준 높은 석공예물로 장기적인 보존방안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교량노후화로 인해 사고위험에 노출되고, 안전진단이 요구되는 명월대교는 정밀안전진단 결과에 따른 대책이 요구된다. 재시공시 초건 시의 모습인 2수문의 완벽한 홍예교로 건립하여 명월대와 함께 향후 대표적 지역 명소로 보존 및 활용해야 할 것을 건의한다. 또한 조사결과에 근거한 종조성으로 볼 때 현재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9호 '명월 팽나무군락'의 명칭은 '명월 팽나무-푸조나무군락'으로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팽나무와 푸조나무 구분 없이 이루어진 일련번호 체계는 개선되어야 하며 노거수목 및 특정식물종이나 귀화종에 대해서는 생육상태에 대한 주기적인 모니터링이 요구된다.

북한산 이계구곡(耳溪九曲)의 위치비정과 집경(集景) 특성 (Studies on the Assumption of the Locations and Formational Characteristics in Yigye-gugok, Mt. Bukhansan)

  • 정우진;노재현;이희영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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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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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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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 연구는 이계 홍양호가 설정하고 그의 손자 관암 홍경모가 경영한 이계구곡의 향유거점을 문헌 및 현지조사를 통해 실증적으로 추적하는 한편, 구곡의 형식 및 집경방식에 나타난 특징을 검토하는 것이다.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우이동은 조선시대에 도성의 영역에 속한 땅이자 지금도 행적구역상 서울특별시에 속한 곳이다. 따라서 이계구곡은 예나 지금에나 수도에 있는 유일한 구곡이었다는 특별한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이계구곡은 우이천 상류의 만경폭을 제1곡으로 시작하여 계곡을 따라 내려오며 제2곡 적취병, 제3곡 찬운봉, 제4곡 진의강, 제5곡 옥경대, 제6곡 월영담, 제7곡 탁영암, 제8곡 명옥탄, 제9곡 재간정으로 구성된다. 이중에서 만경폭, 찬운봉, 옥경대는 그 위치를 확정할 수 있을 정도로 특징적인 경물상이 명확히 드러나 있었으며, 진의강, 월영담, 명옥탄, 재간정 터는 구곡기의 묘사와 현지의 지표상황을 통해 유력한 추정지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적취병, 탁영암의 경우 비근한 영역 내에 기문의 내용과 유사한 복수의 지점들이 나타났는데, 지형 경관 경물의 현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제1의 추정지를 판단하였다. 이로서 1곡에서 9곡까지 총거리 2.1km의 선적 경로와 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점은 구곡이 5리(약 1.96km)에 지나지 않는다는 관암의 설명과도 근사하다. 2. 18세기 말에 설정된 이계구곡은 홍양호가 우이동을 풍산 홍씨의 소유로 귀속시킨 뒤 선영의 묘소가 있는 터전을 가문의 공간으로 만드는 일련의 작업에서 비롯되었다. 이계구곡은 구곡이 상류에서부터 하류방향으로 전개된다는 점과, 거점지가 8곡에 위치하는 등 구곡의 일반적인 형식과 적지 않은 차이점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는 가문의 영역을 우이동 초입에 위치한 타 가문의 세력권과 분리시켜 우이동을 점유하려는 원심적 구성으로 해석되지만, 한편으로 우이동을 대표하는 경물인 미륵폭포[만경폭]부터 계곡의 주요 승경에 곡의 순서를 정하고 8곡에 위치한 자신의 거처를 사실상 구곡의 지향점으로 삼는 구심적 공간 만들기의 결과로도 판단된다. 3. 이계구곡에는 여타의 구곡에 비해 설정자와 경영자가 남긴 기문과 시문이 다량 제작된 반면, 구곡도, 각자 등 동반되는 시각적 매체가 전무하다. 그러나 관암의 문집에 수록된 "이계구곡대자첩(耳溪九曲大字帖) 발미(跋尾)"에는 각자를 새기려고 했던 시도가 있었음이 나타나 있다. 본 연구는 송시열 글씨로 알려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미공개 필첩이 홍양호의 구곡명 유묵을 성첩한 "이계구곡대자첩" 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전기(前期)의 의료제도(醫療制度)에 대한 연구(硏究) (A study of the Medical System in the Early Chosun-Dynasty)

  • 한대희;강효신
    • 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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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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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55-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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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6
  • Up to the present the scholastic achievements in the history of the medical system have been rather scare despite its importance in the Korean History. Hence, this dissertation attempts to examine the significance of the institute in the Korean History, covering the period from the ancient times through the early Chosun-Dynasty. In the ancient times, the medical practice relied primarily upon human instincts and experiences at the same time, shaman's incantations were widely believed to cure diseases, the workings of evil spirits supposedly. For the period from the Old Chosun through Samhan(巫堂), Chinese refugees brought a long medical knowledge and skills of the continent. New Chinese medicine, traditional practices and incantations were generally used at this time. Medicine and the medical system were arranged by the period of the Three Countries(三國時代). No definite record concerning Koguryo remains now. As for Paekje, however, history shows that they set up the system under the Chinese influence, assigning medical posts such as Euibaksa(medical doctor), Chaeyaksa(pharmacist), and Jukeumsa(medicine man) within Yakbu(department of medicine). Scientifically advanced, they sent experts to Japan, giving a tremendous influence on the development of the science on ancient Japan. After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countries, Shilla had their own system after the model of Dang(唐). This system of the Unified Shilla was continued down to Koryo and became the backbone of the future ones. In the ancient time religion and medicine were closely related. The curative function of the shaman was absolute. Buddhism played a notable part in medical practice, too, producing numerous medical monks. The medical system of Koryo followed the model of Dang with some borrowings from Song(宋). Sangyakkuk(尙藥局) was to deal exclusively with the diseases of the monarch whereas Taeeuigam(太醫監) was the central office to handle the national medical administration and the qualification test and education for doctors. In addition, Dongsodaebiwon(東西大悲院), Jewibo(濟危寶), and Hyeminkuk(惠民局) were public hospitals for the people, and a few aristocrats practiced medicine privately. In 987, the 6th year of Songjong(成宗), local medical operations were installed for curing the sick and educating medical students. Later Hyonjong(顯宗), established Yakjom(clinics, 藥店) throughout the country and officials were sent there to see patients. Foreign experts, mainly from Song, were invited frequently to deliver their advanced technology, and contributed to the great progress of the science in Korea. Medical officials were equipped with better land and salary than others, enjoying appropriate social respect. Koryo exchanged doctors, medicine and books mainly with Song, but also had substantial interrelations with Yuan(元), Ming(明), Kitan(契丹), Yojin(女眞), and Japan. Among them, however, Song was most influential to the development of medicine in Koryo. During Koryo Dynasty Buddhism, the national religion at the time, exercised bigger effect on medicine than in any other period. By conducting national ceremonies and public rituals to cure diseases, Taoism also affected the way people regarded illness. Curative shamanism was still in practice as well. These religious practices, however, were now engaged only when medication was already in use or when medicine could not held not help any more. The advanced medical system of Koryo were handed down to Chosun and served the basis for further progress. Hence, then played well the role to connect the ancient medicine and the modern one. The early Chosun followed and systemized the scientific and technical achievement in medicine during the Koryo Dynasty, and furthermore, founded the basis of the future developments. Especially the 70 years approximately from the reign of Sejong(世宗) to that of Songjong(成宗) withnessed a termendous progress in the field with the reestablishment of the medical system. The functions of the three medical institute Naeeuiwon(內醫院), Joneuigam(典醫監), Hyeminkuk(惠民局) were expanded. The second, particualy, not only systemized all the medical practices of the whole nation, but also grew and distributed domestic medicaments which had been continually developed since the late Koryo period. In addition, Hyeminso(惠民局, Hwarinwon(活人院)) and Jesaenwon(濟生院)(later merged to the first) played certain parts in the curing illness. Despite the active medical education in the capital and the country, the results were not substantial, for the aristocracy avoided the profession due to the social prejudice against technicians including medical docotors. During the early Chosun-Dynasty, the science was divided into Chimgueui (acupuncturist), Naryogeui(specialist in scrofula) and Chijongeui (specialist in boil). For the textbooks, those for the qualification exam were used, including several written by the natives. With the introduction on Neoconfucianism(性理學) which reinforced sexual segregation, female doctors appeared for the female patients who refused to be seen by male doctors. This system first appeared in 1406, the sixth year of Taejong(太宗), but finally set up during the reign of Sejong. As slaves to the offices, the lowest class, female doctors drew no respect. However, this is still significant in the aspect of women's participation in society. They were precedents of midwives. Medical officials were selected through the civil exam and a special test. Those who passed exams were given temporary jobs and took permanent posts later. At that time the test score, the work experience and the performance record of the prospective doctor were all taken into consideration, for it was a specialized office. Most doctors were given posts that changed every six months, and therefore had fewer chances for a goverment office than the aristocracy. At the beginning the social status of those in medicine was not that low, but with the prejudice gradully rising among the aristocracy, it became generally agreed to belong to the upper-middle technician class. Dealing with life, however, they received social respect and courtesy from the public. Sometimes they collected wealth with their skills. They kept improving techniques and finally came to take an important share in modernization process during the late Chosun-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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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 '경우궁도(景祐宮圖)'에 관한 연구 (Study on the Painting of Gyeongwoo-gung Shrine (景祐宮圖))

  • 김경미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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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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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6-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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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조선시대 종묘(宗廟)에 모실 수 없는 왕의 사친, 등극하지 못한 세자와 같은 왕족의 신위를 모신 공간, 사묘(私廟)는 왕명에 의해 건립되고 관리되었다. 또한 사묘의 영건은 각 의궤(儀軌)에 담겼고 이와 함께 왕실사묘의 평면배치도 등이 남겨졌다. 정조의 후궁으로 순조(純祖)를 생산한 수빈박씨(綬嬪朴氏)의 신위를 모신 경우궁의 영건기록인 1824년 "현사궁별묘영건도감의궤(顯思宮別廟營建都監儀軌)"가 현존하기에 그간 소개된 바도 없고 연대조차도 알 수 없었던 <경우궁도(景祐宮圖)>의 제작 연대, 사용재료 및 장황(粧潢)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즉 <경우궁도>는 1822년에 타계한 수빈박씨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궁내에 설치했던 혼전(魂殿)을 폐하고 궁밖에 별도로 마련한 터에 왕명에 의해 1824년 현사궁별묘를 영건하면서 영건도감(營建都監)에서 제작한 <현사궁별묘전도>인 것으로 확인된다. 영건도감에서 <경우궁도>의 제작이 이루어졌을 것이기에 의궤에 제시된 화원(畵員)들이 주목되지만 이들의 현존작이 없어 화풍을 비교할 수 없음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경우궁도>는 <동궐도(東闕圖)>에서 볼 수 있는 완벽한 평행사선구도로 일목요연하게 많은 전각 등을 묘사하고 있는 점이 가장 큰 양식적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주지하듯 건축물을 다룬 그림들은 해당 건축그림 제작 의도에 맞게 시점을 택해 그리거나 아니면 다시점을 이용해 그리게 된다. 우리 회화에서 건축물을 다룬 그림은 일찍부터 평행사선구도, 정면부감시 또는 다시점 등을 적절히 활용하여 제작되었다. 18세기에 이르면 평행사선구도로 정확하게 그리면서도 회화성도 높은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19세기 전반기에 이와 같은 현상이 최고로 발전한 듯 <동궐도>가 등장한다. <경우궁도> 또한 완성된 평행사선구도로 200칸 가까운 많은 전각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치밀하게 표현하고 있어 <동궐도>와 같은 계열에 속하는 건축그림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또한 수지법, 옥우법, 지면의 표면질감 표현 등 구체적 화법의 비교를 통해 알 수 있다. 다만 사당공간 중 가장 중요한 정당권역만은 의궤도설 '정당이하제처(正堂以下諸處)'라는 평면배치도와 그대로 일치하여 평행사선구도를 버리고 정면부감시 및 사방전도식묘법으로 표현된 점은 <경우궁도>만이 갖는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다. 동시대 영건과 관계된 그림은 아닌 개인의 거주지를 표현한 그림에 이와 같이 시점을 각각 달리하여 표현한 예가 있기도 하여 사당공간을 그린 그림만이 가지는 특성인지는 아직 정확히 알 수 없다. 한편 왼편 하단으로 향하는 평행사선구도를 택해 그릴 경우 화면 왼편 상단과 오른편 하단은 비게 된다. 경우궁도가 이에 부합되는 화면을 보여주는데 반해 동궐도는 다양한 나무 등을 채워 빈 여백 없는 완벽한 화면 구성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현상은 두 작품의 장황의 현황과도 일치하는데 지본 낱장으로 완성된 경우궁도는 화첩으로 표제까지 달아 완성된 동궐도와는 완성도의 면에서 차이가 있다고 판단된다. 이는 마치 동궐도가 그 묘사의 사실성, 기록성을 넘어 감상의 목적까지도 고려하여 작품제작 및 장황까지 마친 것이었다면 경우궁도는 영건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화면에 옮겨 그리는 기록이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제작되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1788년 김응환의 봉명사경과 《해악전도첩(海嶽全圖帖)》 (Kim Eung-hwan's Official Excursion for Drawing Scenic Spots in 1788 and his Album of Complete Views of Seas and Mountains)

  • 오다연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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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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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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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해악전도첩(海嶽全圖帖)》은 금강산과 해금강, 관동팔경을 그린 60점의 실경산수화와 51편의 기문(記文)으로 이루어진 화첩으로 규모와 화풍에 있어 보기 드문 작품이다. 그림의 특징은 화면을 가득 채운 구성과 남종화풍을 따르면서도 거칠고 파격적인 화법, 산석(山石)의 기하학적이고 입체적인 표현 등이다. 1973년의 특별전, '한국미술이천년(韓國美術二千年)'을 처음으로 화첩의 일부만 공개되었던 작품은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에서 그 전모가 공개되었다. 《해악전도첩》이 김응환(金應煥)(1742~1789)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은 화첩의 마지막 장에 쓰여진 관지(款識)와 현재 행방이 묘연한 <칠보대>에 찍힌 '복헌'이라는 도장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응환을 지시하는 관지와 도장은 모두 후대에 더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본 연구는 화첩을 둘러싼 여러 요소를 고찰하여 제작자를 재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해악전도첩》 제작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18세기 금강산 기행사경도의 전통과 봉명사경을 살펴보았다. 정선(鄭敾)(1676~1759)의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1711)을 비롯하여 심사정(沈師正)(1707~1769), 김윤겸(金允謙)(1711~1775), 최북(崔北)(1712~1786 이후), 강세황(姜世晃)(1713~1791) 등은 조선 후기 최고의 여행지였던 금강산을 유람하고 기행사경도를 제작하였다. 화가들은 이전의 전통을 계승하여 내금강의 명승명소를 주로 그렸고, 자신들이 경험한 장소를 새롭게 시각화하였다. 이러한 기행사경도는 여행을 기념하며 동행자나 후원자를 위해 여러 장면을 담을 수 있는 화첩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개별적인 금강산 기행사 경도의 제작이 증가하는 가운데 1788년에 정조(正祖)(재위 1776~1800)가 도화서 화원인 김응환과 김홍도(金弘道)(1745~1806 이후)에게 영동9군과 금강산의 명승(名勝)을 그려오도록 명한 일은 공적 업무였다. 정조는 이들의 관계 및 지방관으로서의 경력, 서로 다른 화풍 등을 고려해 봉명사경의 화원으로 선발하였다. 김응환과 김홍도는 영조(英祖)(재위 1724~1776)조부터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하며 선후배이자 동료로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나아가 이들은 영남 지역의 찰방(察訪)으로서 지방관의 업무를 수행한 경험이 있었다. 두 화원의 화풍은 서로 달라 김홍도는 부드럽고도 섬세하게 필선을 운용한 반면, 김응환은 굳세면서도 울창한 풍치를 잘 표현했다. 두 명의 화원은 각자의 개성으로 봉명사경 기간 동안 100여 폭의 초본을 그렸고, 이를 선별하여 60~70여 폭의 화첩 혹은 두루마리를 완성하였다. 이들의 그림은 18세기 전중반에 내금강과 관동팔경 위주로 제작된 금강산 기행사경도의 전통을 더욱 풍부하게 했고 영동과 외금강의 명승명소를 새롭게 발견하며 소재를 확장시켰다. 현재 《해악전도첩》은 원(元), 형(亨), 이(利), 정(貞) 4책으로 이루어졌는데, 원(元), 형(亨)책은 내금강의 그림 29점이며 이(利)책은 외금강의 장면 17점, 정(貞)책은 해금강과 관동팔경 14점으로 구성되었다. 비단 위에 그려진 각 그림은 기하학적으로 산석을 표현했으며, 연백으로 금강산의 암봉을 흰색 혹은 회청색으로 표현했다. 《해악전도첩》의 구도와 화법은 정선, 강세황, 심사정, 정충엽(鄭忠燁)(1725~1800 이후), 김응환, 김홍도의 화법과 비교할 수 있어 18세기 후반의 시대 양식을 갖는다. 특히 화첩의 일부 그림은 김홍도의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1788)과 구성 및 회화적 모티프가 매우 유사하여 두 화첩간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반면에 <영랑호>, <해산정>, <월송정> 등은 김홍도의 그림과는 구별된다. 이를 통해 화가가 김홍도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도 자신만의 개성적인 화첩을 제작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해악전도첩》에는 다른 화첩에는 등장하지 않는 <자운담>, <백운대>, <안문점망비로봉>, <백정봉>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각 장면마다 경물의 특징을 구체적이고 참신하게 묘사하였다. 특히, 화가는 산석을 기하학적으로 표현하고 선과 면을 도드라지게 하여 입체감을 강조하였다. 그는 남종화풍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화법을 확립했고 이를 자유자재로 운용하면서 화면에 동적인 리듬감을 부여했다. 이처럼 60점의 그림은 거칠고 파격적으로 보이지만 나름의 질서 안에서 일관성을 견지하고 있다. 본고는 화법과 봉명사경의 정황을 종합해 《해악전도첩》의 제작자를 김응환으로 추론하였다. 나아가 김하종(金夏鍾)(1793~1878 이후)의 《풍악권(楓嶽卷)》(1865년 이후)과의 친연성은 《해악전도첩》의 화가를 김응환으로 추정한 또 하나의 이유였다. 《해악전도첩》은 김홍도의 《해산첩》과는 달리 후대에 미친 영향력이 미비한데 김하종의 《풍악권》만이 《해악전도첩》의 소재와 화법을 따르고 있다. 김하종은 《풍악권》에서 50년 전, 춘천부사 이광문(李光文)(1778~1838)을 위해 제작한 《해산도첩》(1816)과는 전혀 다른 화법을 구사했다. 그는 김응환의 《해악전도첩》과 유사한 구성과 회화적 요소, 화보식 인물표현을 따르면서 사의적인 분위기를 강조하였다. 개성김씨의 일원이자 김응환의 종손인 김하종은 가문에 전해지는 《해악전도첩》류의 그림을 감상했고 이를 새롭게 번안했다고 추측된다. 화첩에 포함된 51편의 기문은 그림 다음 장에서 그려진 장소를 설명하고 있어 각 그림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도움을 준다. 기문은 그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앞의 장소로부터의 이동 정보, 이름의 유래, 지형적 특징, 관련 정보 등이 서술되었다. 이와 같은 백과사전식 혹은 지리지와 같은 기문은 19세기 전반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금강산 화첩류에 더해졌다. 《해악전도첩》의 백화암 기문에는 1845년의 암자에 대한 중건 내용이 기록되어, 기문의 연대를 추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김하종에게 《풍악권》을 주문한 이유원(李裕元)(1814~1888)도 각 그림에 글을 붙였는데 이 글들은 김응환의 화첩에 포함된 기문 51편과 내용 및 서술방식이 흡사하다. 이유원의 기문은 《해악전도첩》의 기문이나 그 초고(원본)와 관련성이 높지만 두 화첩의 기문 필사의 선후관계를 판정하는 데에는 좀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해악전도첩》은 김홍도의 봉명사경 초본 및 김홍도의 영향으로 제작된 19세기의 금강산 화첩과는 구별된다. 이 화첩은 화원 김응환의 회화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지평을 넓히고 18세기 후반 실경산수화의 또 다른 층위를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광신 연 - 아연 광상의 유체포유물 및 안정동위원소 연구 (Fluid Inclusion and Stable Isotope Studies of the Kwangsin Pb-Zn Deposit)

  • 최광준;윤성택;소칠섭
    • 자원환경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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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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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05-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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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
  • 광신 연-아연 광산은 단층 열극을 충진한 열극 충진 광상으로서 조선계의 삼태산층과 시대미상의 서창리층에 발달된 석영과 탄산엽맥으로 이루어져 있다. 광화작용은 3회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각 광화시기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광화 I기=barren한 석영의 침전기, 광화 II기=석영과 능망간석에 수반된 연-아연 광물의 주 침전기, 광화 III기=barren한 방해석의 침전기. 특히, 연-아연 광물은 주로 광화 IIb기에 침전하였다. 유체포유물 연구에 의하면, 광화 IIb기 광화유체의 온도와 염농도는 $182^{\circ}{\sim}276^{\circ}C$와 2.7~5.4 wt. % NaCl 상당 염농도였으며, 연-아연 광물의 침전은 주로 비등작용과 더불어 후기의 천수 혼입작용에 기인하였음을 지시한다. 광화작용은 약 600~700 m의 심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섬아연석과 유비철석의 성분 함량을 이용하여 추정한 광화 IIb기의 황분압($log\;fs_2$)은 -15.5~11.8 atm이다. 황화물의 황동위원소 조성 (${\delta}^{34}S_{CDT}=9.0{\sim}14.5$ ‰)에 근거한 열수유체의 전(全) 황동위원소값 (${\delta}^{34}S_{{\Sigma}S}$)은 약 14 ‰로서 매우 높은데, 이는 심부 화성기원의 황이 퇴적암류내의 황산염과 다소 혼합 된 결과로 사료된다. 산소-수소 동위원소 분석 연구에 의하면, 광화유체는 낮은 수-암비 환경 하에서 주로 주변 모암인 삼태산층 (${\delta}^{18}O=20.1{\sim}24.9$ ‰)과 상당히 반응한 심부 순환 천수로부터 형성되었다. 한편, 광화유체의 산소동위원소값 (${\delta}^{18}O_{H2O}$)은 광화작용의 진행과 더불어 체계적으로 감소 (광화 I기, 14.6~10.1 ‰; 광화 IIa기, 5.8~2.2 ‰; 광화 IIb기, 0.8~-2.0 ‰; 광화 IIc기, -6.1~-6.8 ‰)하였다. 이는 열수계 내로의 천수 혼입이 시간 경과와 더불어 점진적으로 증가하였음을 지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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