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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영(金澤榮)의 1909년 귀국(歸國)과 안중식(安中植) 필(筆) <벽수거사정도(碧樹居士亭圖)> (Kim Taek-yeong's Return to Korea in 1909 and Scholar Byeoksu in a Pavilion by An Jung-sik)

  • 강민경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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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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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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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심전 안중식(1861~1919)이 그리고 창강 김택영(1850~1927)이 제시(題詩)와 기문(記文)을 지었으며 석운 권동수(1842~?)가 글씨를 쓴 <벽수거사정도>는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대한제국의 미술: 빛의 길을 꿈꾸다"에서 처음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 작품은 안중식의 드문 실경산수이며, 20세기 초 서울 상류주택의 면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그러나 또한 이 작품이 당시 지식인의 교유 관계를 단적으로 드러낸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벽수거사정도>를 그리게 한 벽수 윤덕영(1873~1940)은 순종비 순정효황후 윤씨(1894~1966)의 백부이자 훗날 국권피탈에 일조한 인물이었다. 순종이 윤덕영에게 "벽수거사정"이란 현판을 하사하자, 그 기념으로 윤덕영이 만든 작품이 바로 <벽수거사정도>이다. 한말(韓末) 한문학의 대가로 꼽히는 김택영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1달 전 가족을 이끌고 청의 강소성(江蘇省) 남통(南通)으로 망명을 떠났었는데, 1909년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그의 귀국에는 이재완(1855~1922)과 윤덕영 등이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김택영은 역사서 편찬을 위한 자료수집의 목적을 품고 귀국하였지만, 그와는 별도로 평소 알던 사람들, 새롭게 알게 된 이들과 끊임없이 만나며 교유하였다. 그 범위는 서울을 넘어 지방에 살던 인물, 나아가 일본인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었다. 이는 당시 시문을 매개로 교유하던 지식인들의 관계망이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들의 정치적 성향이나 신분, 국적과는 별개로 작동하고 있었다. <벽수거사정도>는 그러한 19세기 말~20세기 초 지식인 사이에서 일어났던 지적 교류의 한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삼국유사 「처용랑망해사(處容郞望海寺)」조 깊이 읽기 - 울산광역시 처용문화제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 (In the view of the identity of Cheoyong Cultural Festival of Ulsan)

  • 강석근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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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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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65-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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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고는 "삼국유사" "처용랑망해사"조를 보다 정치하게 읽고 그 의미를 새롭게 해석한 논문이다. 울산광역시 처용문화제추진위원회에서는 "처용랑망해사"조를 근거로 그동안 49회의 '처용문화제'를 개최해 왔지만, 처용의 정체성에 대한 각종 시비로 인하여, '처용문화제'는 자주 흔들려 왔다. 필자는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새롭게 제시하기 위하여 "처용랑망해사"조를 새롭게 해석하였다. "처용랑망해사"조에 나오는 포석정의 남산신, 금강령의 북악신, 동례전지신(地神)의 춤이 망국에 대한 경고였던 것처럼 <처용가>와 처용이 '춤추고 물러나는[창가작무이퇴(唱歌作舞而退)]' 행위는 '체념과 관용'이 아니라 분명한 '위협과 경고'였다. 망해사(望海寺)의 '망(望)'은 '보다'는 뜻이 아닌 '보름'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망해사는 '어둠에 막히고 미실(迷失)되었던 도로[운무명일(雲霧冥?) 미실도로(迷失道路)]가 밝고 청정하게 된 것과 같은 보름 바다의 절이라는 뜻이다. 신방사(新房寺)의 의미는 울산 개운포 지역이 헌강왕의 순수(巡狩)와 망해사 창건으로 '새롭게 정화된 지역'의 절이 되었다는 뜻이다. "처용랑망해사"조의 주된 키워드는 '벽사진경(僻邪進慶)'이다. 삿됨을 물리치고 경사로 나가는 것이 벽사진경인데, 개인굿이나 나라굿인 나례(儺禮)의 목적도 벽사진경에 있다. 밝은 달이 뜨는 바다, 새로운 기운으로 재창조된 신방(新房)이 곧 벽사진경의 세상인 것처럼, 사방신(四方神)의 헌무는 벽사진경이 된 새로운 신라에 대한 간절한 바램이었다. 처용은 예지력을 가진 신격으로서 역신을 구축(驅逐)하는 탁월한 권능을 가진 주사(呪師)였다. 49회나 개최되었던 처용문화제는 해매다 정체성 문제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처용문화제에서 채택한 <처용가>와 처용의 정체성은 '화합과 관용'이 아니라, '예지(叡智)와 권능(權能)'이다. 따라서 '처용문화제'의 슬로건인 '화합과 관용'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역신(疫神)과 처용부인의 간통을 당연시하고, 처용의 정체성을 '화합과 관용'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이다. 따라서 처용문화제의 정체성과 구체적인 슬로건에 '예지와 권능'과 '벽사진경'의 의미가 도입되어야 하며, 앞으로 처용문화제추진위원회는 '울산광역시와 울산시민들이 늘 삿된 기운을 물리치고 두루 경사를 맞이 하자는 벽사진경의 개념을 처용문화제 프로그램에 적극 수용해야 할 것이다.

민주화 초기 노동자 영화의 (불)가능성 -<구로아리랑> 연구 (On the (Un-)Possibility of a Labor Film in the Early Period of Democratization -A Study of Guro Arirang)

  • 오자은
    • 대중서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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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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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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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이문열의 동명의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박종원의 데뷔작 <구로아리랑>은 1987년 민주화의 흐름을 타고 노동자의 관점에서 노동 투쟁을 다룬 최초의 제도권 노동영화이자, 그동안 스크린이 외면해 온 여성 노동자의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선구적인 작품이다. 박종원은 노동 문제와 관련하여 당시에 여전히 굳건하게 서 있던 레드컴플렉스의 장벽을 뚫고 사회의 이념 지형의 중추를 이루는 중산층을 설득하고자 하며, 진보의 메시지를 중산층 대중이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전달하기 위해 계급적 적대나 투쟁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성과 윤리와 결부된 문제로 치환하는 감성에 의지한다. 박종원은 이러한 감성을 '상식적인 일반인의 감각'이라고 부르며 그 보편성과 객관성을 강조한다. 이 연구는 <구로아리랑>에서 노동 문제를 제도권 상업 영화 속에서 대중이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다루기 위해 어떤 전략을 취하는지, 또 그러한 전략에 반영된 '상식적인 일반인의 감각'이 어떤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지니는지를 비판적으로 고찰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론의 첫 번째 장에서는 영화가 원작 소설의 아이러니를 해체하고 인물의 구도를 순수한 선인과 악인의 대립으로 재설정하여 선인이 희생양이 되는 멜로드라마적 구성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밝힌다. 이로써 관객에게 노동자들이 겪는 비극에 강한 정서적 공감과 연대의식을 불러일으키려 한다. 두 번째 장에서는 영화의 다양한 장면과 에피소드들이 동정과 애도의 모티브로 수렴되며, 이는 대부분 당시 커다란 대중적 반향을 일으킨 문화적, 현실적 경험과 사건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을 보일 것이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결정적 장면에서는 87년 6월 항쟁의 기억이 강력하게 소환된다. 이에 따라 <구로아리랑>은 검증된 동정과 애도의 패치워크와 같은 양상을 보인다. 세 번째 장은 노동자들이 결정적인 투쟁에 나서는 대목에서 임금에 대한 요구를 스스로 뒤로 돌리고 인간적 신뢰와 대우의 문제를 앞세운다는 영화의 설정이 가지는 함의를 검토한다. 그것은 노동 문제의 정치적 차원을 제거하고 이를 윤리적 문제로 환원함으로써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보편적인 가치와 정서에 호소한다. 그러나 문제의 층위를 계급적 이해 관계의 충돌을 피해 순수한 인간성의 차원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노동자는 한 편으로는 깊이 동정할 만한 수동적 희생자의 위치에 떨어지고, 다른 한 편으로는 현실에 초연한 지사적 태도와 자제심을 갖춘 투사로 이상화된다. 영화는 이로써 현실적 설득력을 상실하며 영화 자체로서의 서사적 개연성도 약화된다. 중산층과의 연대를 환기하는 87년 항쟁의 기억은 영화 속에 조화롭게 통합되지 못하고 패치워크적 전체의 일부로 남는다.

행정수도 건설안의 타당성과 시의성 (Validity and Pertinence of Administrative Capital City Proposal)

  • 김형국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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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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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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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행정부 이전이란 비상카드를 꺼낼 정도로 국토불균형이 심각하다고 보는 참여정부의 인식에는 절대 공감한다. 하지만 수도 이전은 단지 균형개발 이유만으로 추진하기에는 구실이 약하다. 경제 사회적 상황 못지 않게. 아니 훨씬 더 중요하게 국내외 정치상황과 직결된 것이 수도의 입지요 이전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반, 3공이 수립했던 '임시' 행정수도안은 안보가 절대 이유였다. 그때 김대중 야당지도자는 휴전선에서 멀리 안전거리를 확보하려함은 군사적 고려일 뿐, 백성들의 호국의지를 더 무게 있게 감안한다면 대치 현장에 바싹 붙여 수도를 유지함이 옳다 했다. 실제로 독립 파키스탄은 수도를 카라치에서 인도와 영토분쟁중인 카슈미르 인근 이슬라마바드로 옮겼다. 이번 행정수도발상에서 핵구름이 짙게 드리워진 급박한 한반도 정세에 대한 고려가 일체 없음은 유감이다. 개인도 건강이 있고 나서야 꿈을 들을 수 있듯이. 나라 또한 안보가 확실해야만 비로소 국토균형개발도 추진할 수 있다. 현대도시이론에 따르면 국가운명은 대도시가 변수라 했다. 방위가 소홀한 수도는 나라를 결딴내는 인질이 될 염려가 있다는 말이다. 이 말대로 북한이 아직 버리지 않은 무력 적화통일전략의 주 공격대상은 단연 서울이다. 때문에 우리 국체를 지키자면 서울을 북한의 인질이 되는 상황을 막는 방패로 삼아야 마땅하다. 주한미군 주력이 서울 북방에 자리잡은 것도 대한민국 안보를 위해서는 서울 사수가 절대적이란 판단에 근거한다. 그 사이. 입장은 다를지언정 같은 민족이 두 국가로 나눠져 있음이 '비정상'임을 남북한이 다함께 인정한다. 예측 불가사항인 통일은 뜻밖에 빠를 수도 있다는 말이다. 통일의 그 날이 수도이전의 적기일 것이다. 제대로 만들자면 최소한 20년은 걸릴 일인데 졸속으로 수도를 이곳저곳으로 끌고 다닐 수 없지 않은가. 자유민주가 확보되는 통일의 그 날이면 브라질이나 호주처럼 새 국운의 장소 상징을 만들자는 국민적 합의는 자연스럽게 생겨날 것이다. 안보가 문제될 게 없다해도 정부발상은 국토균형발전에 별로 기여할 것 같지 않다. 새 입지로 점찍은 충청권은 수도권 인접효과를 가장 많이 누려온 선택된 곳이지 격차해소 대상인 푸대접 또는 무대접 지역이 아니다. 이 시점에서 안보와 균형개발을 동시에 지향하면서 멀리 통일이후도 고려한 후보지를 굳이 찾는다면 한반도의 중심성도 있는 휴전선 근접 철원 일대가 그럴싸하다. 남북대치의 현 상황을 깊이 유념한 끝에 통일의 그 날까지 천도를 미룬다해도 균형발전 실현의 지름길은 분명 있다. 그건 중앙부처의 지리적 분산이 아니라 중앙권력의 지방분권이다. 아니할 말로 수도란 상징 장소를 새로 만들 여유 돈이 있다면, 이를테면 그냥 마시기를 기피하는 전국 수돗물 수질을 높이고. 적자에 허덕인 끝에 대형 참사도 낳았던 지방 대도시 지하철을 돕는 것이 옳다. 그리고 천도는 통일의 천기(天機)에 맞추는 것이 옳다.

정릉(貞陵) 이장과 광통교(廣通橋) 개수를 통해 본 조선 초기 지배 이데올로기의 대립 (Collision of New and Old Control Ideologies, Witnessed through the Moving of Jeong-regun (Tomb of Queen Sindeok) and Repair of Gwangtong-gyo)

  • 남호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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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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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4-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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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정릉(신덕왕후릉)의 축조와 이장에 얽힌 논란은 조선 초기, 신구(新舊) 지배 이데올로기 사이의 충돌이 잘 드러난 사례이다. 태조의 경처였던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은 도성 안에 조성되지만 태조 사후, 태종에 의해 도성 밖으로 이장되고 그곳에 남아 있던 석물들은 청계천의 광통교를 보수하는데 쓰인다. 야사에서는 태종이 강씨를 저주하기 위해 도성 밖으로 능을 옮기고 남은 석물들로 광통교를 만들어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했다고 전한다. 태조 말년, 강씨와 태종은 대립하던 관계였으나 태조가 왕으로 옹립되기 전까지는 오히려 정치적 동반자에 가까웠다. 정릉이나 광통교와 관련된 실록의 기록은 더 담백하다. 정릉의 천장은 능묘가 도성 안에 있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는 의정부의 상언을 따른 것이다. 광통교 개수를 위해 정릉을 격하하고 이장시켰다는 주장에는 사실 관계가 반영되어 있지 않다. 논자는 광통교 개수에 정릉의 석물이 재사용된 것에 대해 당시 도성 안팎에서 건축자재소요량이 급증하여 효율적인 조달 필요성이 대두되었을 가능성을 상정하였다. 정릉이 도성 안에 조성되었다가 다시 도성 바깥으로 이장된 원인은 태조와 태종이 가졌던 사상적 배경의 이질성에서 찾았다. 태조는 유교국가의 통치자였으나 죽은 왕비를 위해 도성 내에 원찰과 무덤을 조성한다. 여기에는 불교의 힘을 빌려 죽은 신덕왕후의 권위를 위의하고 지지세력을 규합하고자 한 노림수가 있었다. 원의 다루가치 집안에서 태어나 지방군벌로 성장한 이성계는 높은 유학적 소양을 가지지는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오히려 호불적 성향을 띄는 구체제의 인물이었다. 반면 태종 이방원은 고려 말 과거시험에 급제했던 엘리트 유생이었으며 주자학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유교국가에서 도성이 가지는 상징성에 대한 이해가 더 깊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삼국시대 이후, 율령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 시스템이 정립된 이래로 도성 바깥에 무덤을 만드는 경외매장의 원칙은 거의 예외 없이 지켜져 왔다. 정릉은 태조 개인의 강한 의지로 도성 내부에 조성되지만 왕 이전에 유학자였던 태종에게 이러한 모습은 바람직하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태종은 즉위 후, 주도적으로 도성 재정비를 추진하는데 이는 '예치'를 강조하는 유교 이데올로기를 한양도성의 경관에 명확하게 구현하고자 한 의지의 발현으로 보여진다. 정릉의 이장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 아래 진행되었던 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우리나라 다목적 공연장의 탄생배경에 관한 소고 (A Brief Review of Backgrounds behind "Multi-Purpose Performance Halls" in South Korea)

  • 김경아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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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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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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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이 연구는 군사정권의 권력 전개양상에서 드러나는 문화정책이념이 '다목적 공연장'의 개념형성으로 발현되는 과정을 살펴보는데 있다. 한국의 공연장 현황은 우리나라 공연문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 각 지방자치단체마다 그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예술회관(문예회관)을 중심으로 한국의 공연문화와 향유문화가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문예회관들은 다목적홀로 운영되고 있으며 운영주체는 절대다수 정부와 지방정부 또는 출자출연기관의 재단법인 등 공공영역에서 운영한다. 따라서 정부와 지방정부의 문화예술정책의 대상이며 제도적 측면과 긴밀한 상관관계를 가지게 된다. 박정희 정권은 초헌법적인 유신을 공포하고 우리나라 문화예술법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문화예술진흥법」(1972.9)을 제정한다. 이법을 근거로 「문예중흥5개년계획」(1973)을 수립하고 문화시설들을 짓기 시작했다. 전국의 '문화예술'회관, 또는 '문화'회관이 다목적홀로 지어진 데에는 문화예술진흥법의 "문화예술"에 대한 정의를 "문학, 미술, 음악, 연예 및 출판에 관한 사항"으로 명시함으로써 지금의 '다목적'개념의 근거가 된다. 한편, 문화공보부의 조직직제는 "문화와 예술"을 관장함을 명시하고 대중문화와 예술진흥을 구분 짓는 문화행정체계를 갖춘다. 그러나 이시기 대통령의 연설에 나타난 박정희의 화법은 '문화예술=예술'로 인식하고 있다. 예술은 문화에 포함되는 개념이지만 문화예술=예술로 인식함으로써 정치적 시국이나 시행부서에 따라 그 해석을 달리하였고, 이러한 모호성은 예술이 이데올로기적 활용에 정책적으로 동원되는 기제가 된다. 이러한 배경에서 문화예술진흥법에 근거하고 문화공보부의 관장 하에 1978년 다목적 공연장인 세종문화회관이 개관한다. 그러나 제도상의 문화예술=다목적과 설립을 추진했던 정부조직의 문화≠예술, 권력이 인식했던 문화예술=예술은 대중음악의 대관문제를 두고 가치충돌로 표출된다. 1979년 12·12사태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민족문화를 앞세운 국풍81을 통해 저항세력을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정권의 의도는 실패하였고, 저항과 지지의 양축에서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는 방안으로 국민의 문화향유 기회확대 정책에 방점을 둔다. 이는 앞 정권의 문화예술에 관한 인식의 전환이며 박정희 정권과의 차별화를 추구한 것이다. 전두환 정권에 있어 앞 정권과의 차별성은 곧 정권의 정당성 확보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향유기회의 확대는 문화영역의 분배 차원에서 추진되었다. 따라서 장기적인 안목의 예술발전으로 자리매김 되지 못했고 하드웨어의 상징성으로 정권의 정당성 확보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오늘날 다목적 공연장의 개념은 유신체제하에 만들어진 법체계의 "문화예술"의 정의에 기인한 것이며 이를 근거하여 공공 공연장의 운영목적으로 '다목적'의 개념이 탄생한다. 군사정권을 이은 전두환 정권은 프로시니엄 구조의 다목적 공연장을 정권의 정당성 확보의 수단으로 표출하였고, 전국적으로 재생산 되어 오늘날 한국의 공연문화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