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전장상황 인식

검색결과 42건 처리시간 0.016초

차기구축함 전투관리체계에 통합된 전술데이터링크 기반의 한국형 기동함대 통제 HCI 설계에 관한 연구 (A Study on HCI Design based on Tactical Data Link integrated in KDDX Combat Management System for Korean-Type Mobile Fleet Control)

  • 송하석
    • 한국정보전자통신기술학회논문지
    • /
    • 제12권5호
    • /
    • pp.482-492
    • /
    • 2019
  • 해군 함정은 고속함, 호위함, 구축함, 상륙함 등 다양한 클래스로 구성되어 있다. 함대 레벨의 기동작전 시 다양한 클래스의 함정이 작전에 포함될 수 있으며, 기함은 소속된 기동함대 세력에 대한 작전 수행 권한을 가진다. 기동 함대에 소속된 함정 간 통신 수단으로는 음성망, 문자망, 전술데이터링크 망 등 다양한 통신 수단이 존재한다. 기존 함대 레벨의 기동작전은 음성과 문자망 위주로 수행되었으며, 전술데이터링크는 함정 간 전술정보 공유를 위주로 사용되었다. 본 연구는 함대 기동작전 시 차기구축함과 같은 기함의 작전통제를 위한 능력 확보를 위해 함정 간 통신 수단인 전술데이터링크를 기반으로 함대레벨의 작전통제를 위한 HCI를 설계하고자 하였다. 최근 해군 함정은 함정에 탑재된 센서, 무장 및 전술데이터링크 운용이 전투관리체계에 통합된 형태로 개발되고 있으며, 본 연구도 전투관리체계에 통합 개발된 전술데이터링크를 기반으로 HCI를 설계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 기동함대 작전 시 전투관리체계 운용자의 전술데이터링크 운용 효율성을 확보하고, 기동함대 사령관 및 작전요원의 전장상황인식 능력을 향상시키고자 하였다.

경산(經山) 정원용(鄭元容)의 문학론(文學論) 고찰 (Study on Literature theory of Gyeong-san(經山) Jeong Won-yong(鄭元容))

  • 권은지
    • 동양고전연구
    • /
    • 제72호
    • /
    • pp.67-95
    • /
    • 2018
  • 경산(經山) 정원용(鄭元容)(1783-1873)은 1802년(순조 2)에 과거에 급제하여 약 70여 년간 관직생활을 역임하였다. 정원용은 뛰어난 행정능력으로 세도정치기의 상황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뛰어난 문장으로 당대의 여러 문인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정원용은 당대 정치와 학술 그리고 문예 방면에서 영향력이 있었고 방대한 저술들을 남겼지만, 그에 대한 연구 성과는 소략한 편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정원용의 문학 전반을 살펴보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써 먼저 그의 문학론(文學論)이 어떠하였는지를 고찰하였다. 정원용이 지니고 있었던 문학론(文學論)을 고찰한 결과, 크게 세 가지 측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정원용은 모방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었다. 정원용은 문장을 지을 때 다른 사람의 작품과 구절을 모방하는 태도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해 자신의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고인(古人)을 따르려고 하는 태도에 반대하고 자신의 뜻을 드러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유원은 정원용의 문장에 대해서 평가하며 자신만의 색채로 일가를 이루었다고 하였고, 정원용은 김조순의 시에 대해서 언급하며 그가 다른 사람의 작품과 구절을 베끼지 않고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를 통해서 정원용이 문장을 지을 때 모방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정원용은 시를 지을 때에 眞意를 추구하였다. 정원용은 두계(荳溪) 박종훈(朴宗薰)(1773-1841)에게 준 서찰에서 '공교롭기를 구하다가 도리어 진의(眞意)에 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위불가구공이반해진의야(謂不可求工而反害眞意也)]'라고 하였는데, 이를 통해 정원용이 시를 수식하는 데에 뜻을 두고 이에 힘쓰기 보다는 정(情)에서 발한 바를 꾸미지 않고 자연스럽게 시에 드러내는 것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정원용은 시를 지을 때 다른 사람의 것을 베끼지 않고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하였고, 또 뜻에서 발한 것을 억지로 꾸미고자 애쓰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것을 모방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뜻을 담아내기보다는 겉을 꾸미는 데에 그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모방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또 진의(眞意)를 추구했던 것은 서로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정원용은 기록을 중시하였다. 그는 지방관으로 부임할 당시 일어났던 사건들과 공문(公文)을 기록하고 부임지에서 지었던 시문(詩文)을 편찬하였으며, 우리나라 제도에 참고가 되는 전장제도(典章制度)를 집성한 책을 저술하고, 평생을 일기로 기록하는 등 다양한 방면에서 200여 편에 달하는 많은 저술들을 남겼다. 이러한 정원용의 기록정신은 그의 관직생활과 연관이 깊다고 할 수 있다. 정원용은 평생을 관직에 있었던 사람으로 자신의 경험이 나라를 경륜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목적에서 기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록행위를 통해서 자신 또한 훗날 도움을 받고자 하였기에 방대한 기록물들을 남기게 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