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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의 영화적 해석과 변모의 과정 (The cinematic interpretation of pansori and its transformation process)

  • 송소라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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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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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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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본 연구는 판소리를 소재로 한 영화를 대상으로 영화 속에서 판소리가 수용된 양상을 살핌으로써, 판소리에 대한 현대사회의 인식과 기대의 변화를 탐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조선후기 상하층의 사랑을 두루 받았던 판소리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겪으며 그 위상이 꺾이게 된다. 일본에서 유입된 신문물의 영향과 미국 문화의 유입으로 대중적 관심을 잃게 되며, 고루하고 낡은 전통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이에 국가는 점차 사라지는 판소리를 보호 및 계승하기 위해 1964년 판소리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지만 1980년대까지도 판소리의 자생적 대중성 확보는 어려웠다. 그러나 판소리는 국가의 꾸준한 지원과 명창들의 판소리 전승 노력, 그리고 2000년대 들어 우리의 것을 세계화하자는 사회문화적 담론 속에서 점차 동시대의 대중과 호흡하는 노력을 해왔고, 문화콘텐츠의 주요 소재로도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팝밴드 '이날치'와 현대무용그룹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가 선보인 뮤직비디오 형식의 'Feel the Rhythm of KOREA'가 보여주듯 현재의 주목받은 대중문화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현대사회 속에서 점차 변화해가는 판소리에 대한 대중적 인식과 판소리의 위상은 영화라는 대중매체 속에서도 엿볼 수 있다. 본 연구는 1993년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를 비롯하여 최근의 <소리꾼>까지 판소리를 소재로 한 6편의 영화를 선별하여 이와 같은 변화의 추이를 탐색하였다. 먼저 1990년대에 제작된 영화 <서편제>와 <휘모리>이다. 이 두 편의 영화는 모두 당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대의 판소리, 즉 20세기 초중반 전승의 위기와 대중적 관심에서 멀어진 판소리의 현실을 보여주며, 그 속에서도 판소리 자체의 예술적 완성을 위해 치열하게 분투하는 소리꾼의 모습을 영화에 담아내었다. 판소리가 가진 정서로써 '한'과 북과 소리의 조화를 통한 판소리 미학을 강조함으로써 우리 소리의 숭고함과 특수함을 대중에게 선보였다. 판소리에 관해 관심이 적었고, 따라서 이의 가치를 잘 모르던 대중은 즉각 이에 화답하며 우리 음악과 우리의 정서에 대한 폭발적 지지를 보여 이른바 '<서편제> 신드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서편제>와 <휘모리>는 우리 소리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부족한 시기, 그러나 그 필요성이 지속적으로 요청되던 199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이 영화의 내용과 구성에 반영되며 당대 판소리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기대를 드러내었다. 다음으로 2008년에 제작된 영화 <소리, 아이>와 2012년의 <두레소리>이다. 두 영화는 판소리와 국악을 하는 동시대의 어린이, 학생을 주인공으로 하여 예술을 하는 아이들의 성장기를 그려나가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들 영화에서 판소리는 '요즘 세상에 누가 그것을 하냐'의 소리를 듣는 옛 음악도 아니고, 혹독한 수련과 고통 속에서 완성이 되는 숭고한 음악으로 묘사되지도 않는다. 부모님의 권유, 집안의 사정 속에서 판소리를 시작한 아이들이 소리를 익히고 성장하고, 갈등하고, 고민하는 이야기를 통해 판소리는 동시대의 하나의 자연스러운 예술로 그려질 뿐이다. 판소리를 비롯한 국악의 정통성을 신념화하여 강조하지 않고, 교조적으로 이를 대중에게 전달하지 않는다. 이는 동시대의 예술로 판소리를 바라보는 2000년대의 달라진 대중적 인식을 반영하는 속에서 판소리가 해석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2015년의 <도리화가>와 최근 상영된 2020년의 <소리꾼>이다. 흥미롭게도 두 작품 모두 판소리가 민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던 조선후기를 영화의 시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영화의 이야기를 판소리의 역사를 토대로 구성하였는데, <도리화가>의 경우는 실존 인물인 신재효와 진채선을 바탕으로 영화적 상상력을 덧붙인 서사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소리꾼>의 경우는 광대의 소리가 판소리 사설의 원류가 되었다는 판소리 이론과 판소리 <심청가>의 서사를 활용하여 당대 존재했을 법한 소리꾼의 삶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두 영화는 판소리의 역사에서 이야기의 소재를 찾아 이를 영화화하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전통을 문화콘텐츠의 소재로 삼고자 하는 시대적 분위기와 연결된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국가 간의 문화장벽이 허물어지고 있는 때에, 콘텐츠의 소재는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 역사를 활용한 이야기가 그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통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문화콘텐츠의 소재로 삼고자 하는 시도는 2000년대 들어 본격화되었고, 판소리의 음악뿐만 아니라, 판소리의 역사 또한 활용 가능한 콘텐츠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의 판소리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옛것도, 낡은 전통도 아닌 동시대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예술이자, 다양한 콘텐츠의 소재로 활용 가능한 자리에 온 것이다. 상기 영화들은 현대 판소리가 걸어온 길과 변모하는 위상, 그리고 이에 따라 달라지는 대중적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판소리 문화의 흐름을 이해하는 기초가 될 수 있다.

낙동강 리모델링 농경지 수분함량별 잡초발생 특성 분석 (Ecological Traits of Weed Flora with Different Soil Moisture in Remodeled Paddy Field of Nakdong River)

  • 황재복;윤을수;정기열;박창영;최영대;전승호;오인석
    • Weed & Turfgrass 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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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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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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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낙동강 유역 리모델링 농경지의 토양수분 함량별 잡초발생 양상과 군락특성을 분석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조사한 3지역의 pH는 6.3~6.4이었으며 EC는 0.1~0.4 ds $m^{-1}$이었다. 토양수분 함량은 사몰포가 14.6%로 가장 높았으며, 김해가 9.8%, 칠현이 5.6% 순이었다. 또 토양화학성은 사몰포가 유기물 함량은 14.8 g $kg^{-1}$로 김해와 칠현에 비해 높은 경향이었으며, 유효 인산의 함량은 48.0 mg $kg^{-1}$이었다. 리모델링 농경지 및 논뚝에서 발생한 초종은 전체 23과 62종으로 과별로는 국화과가 11종(17.7%)으로 가장 높았으며, 화본과 9종(14.5%), 콩과 8종(12.9%), 방동사니과 7종(11.3%)이었고, 기타 27종(43.6%)이었다. 초종별 우점으로는 사몰포가 피(100%) > 알방동사니(9.0%) > 미국가막사리(3%) > 미국개기장(4.8%) > 한련초(4.4%) 순이었고, 김해는 바랭이(100%) > 미국개기장(49.4%) > 피(48.8%) > 여뀌(27.1%) > 좀명아주(10.2%), 칠현은 미국개기장(90.8%) > 바랭이(66.7%) > 참방동사니(8.6%) > 미국가막사리(7.6%) 순이었다. 잡초 건물중은 사몰포에서 535.4 g $m^{-2}$로 가장 높았고, 그 다음으로 칠현에서 346.2 g $m^{-2}$이었으며, 김해에서는 316.1 g $m^{-2}$이었다. 잡초형태별로는 사몰포가 화본과 > 광엽잡초=방동사니과 순이었으며, 김해와 칠현은 광엽잡초 > 화본과 > 방동사니과 순이었다. 잡초군락의 평균유사성 계수는 18.1%로 토양수분 함량별로 다른 조사 지점간에 81.9%로 초종들의 구성에 차이가 많았다.

한반도 남해안 고섬진강 절개곡 시스템의 형성과 진화: 1. 여수해협의 후기 제 4기층에 대한 순차층서 (Formation and Evolution of the Paleo-Seomjin River Incised-Valley System, Southern Coast of Korea: 1. Sequence Stratigraphy of Late Quaternary Sediments in Yosu Strait)

  • 전승수;장진호
    • 한국해양학회지: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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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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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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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
  • 한반도 남해안의 여수해협에서 지역적으로 대비가 가능한 3 개의 단위층(UH, LH, PL)이 탄성파(3.5 kHz) 자료의 분석을 통해 세분되었다. 단위층 UH는 최상부에 위치하는 펄층으로서 북쪽으로 가면서 얇아지면서 본 해역의 북부(광양만 입구)에 이르러 삼각주에 얹히는 특징을 보여 현세의 해수면 상승과 관련된 해침체계역 (transgressive systems tract)으로 해석된다. 그 하부의 단위층 LH는 본 해역의 북부에서 후퇴경향을 보이는 삼각주 퇴적체($LH_1$)로서 해저면에 노출되는 반면, 본 해역의 중${\cdot}$남부(여수해협)에서 하곡, 계곡, 소분지 등을 충진한 해침퇴적체($LH_2$)로서 UH층과 PL층(플라이스토세 퇴적층)사이에 놓이는 특징을 보인다. 그리고 단위층 UH와 $LH_2$의 경계면은 북쪽으로 가면서 점차 얕아지는 경향을 보이고, 그것의 지형도는 현재 발달되어 있는 조류로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여 북쪽(육지 방향)으로 가면서 점차 젊어지는 조석침식면(tidal ravinement surface)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마지막 빙하최성기(last glacial maximum) 이후의 범세계적 해수면 상승(eustatic sea-level rise)은 본 해역의 중${\cdot}$남부를 침수시켜 조석침식면에 의해 두 층(UH와 $LH_2$)으로 세분되는 해침체계역을 형성시킨 반면, 본 해역의 북부에서는 조석침식면이 없이 두 개의 후퇴형 삼각주 로브로 구성된 독특한 해침체계역 ($LH_1$)을 형성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동일한 해수면 상승시기에도 불구하고 지역에 따라 퇴적층의 누적양상(stacking pattern)이 달라지는 이유는 지형, 퇴적물 공급, 조류 등의 지역간 차이 때문이며, 특히 본 해역의 북부에서 해수면 상승과 더불어 조석침식면이 발달하지 못한 까닭은 비교적 넓고 반폐쇄적인 분지형 지형과 섬진강으로부터 많은 퇴적물 공급, 그리고 비교적 약한 조류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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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기음반과 라디오방송을 통해 향유된 시조의 양상과 특징 (Communication and Enjoyment of Sijo through the Mass Media in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 박지애
    • 한국시조학회지:시조학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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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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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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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이 글은 20세기 이후 새롭게 등장한 근대적 대중매체 중 유성기음반과 라디오 방송을 통해 소통되고 향유된 가곡창과 시조창의 실상을 객관적 자료를 통해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먼저 유성기음반으로 취입된 가곡 및 시조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가곡과 시조 유성기음반은 취입 초기부터 '고급문화의 향유'를 강조함으로써, 잡가 위주로 취입되던 당시의 전통노래 음반과의 변별성을 강조하였다. 둘째, 유성기음반 취입이 본격화되는 192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가곡창 위주로 음반 취입이 진행되었으며, 유성기음반이 대중화되는 1930년대 이후에는 가곡창보다는 시조창 위주로 음반이 취입되었다. 다음으로 라디오로 방송된 가곡 및 시조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라디오방송에서는 가곡 방송이 시조 방송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세하였다. 둘째, 가곡 방송은 가곡창만으로 하나의 프로그램을 구성하여 방송하였으며, 시조는 1930년대 후반에 와서야 시조창만으로 방송 프로그램이 구성되었다. 당시 시조와 함께 방송된 노래 양식은 가창가사뿐만 아니라 긴잡가, 통속 민요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셋째, 시조 방송은 연행자와 방송 곡목에 따라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라디오방송이 시작된 1926년부터 1932년까지는 19세기 연행문화의 연장에 가까운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라디오가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는 1933년부터 936년까지는 기생들이 주도적으로 활동하며, 당시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잡가 및 통속민요와 시조창을 묶어 방송 레퍼토리로 구성한 시기이다. 1937년 이후는 이왕직아악부, 향제 가객들의 방송 진출 등 기녀 집단 일변도로 구연되던 방송 환경은 다변화되는 시기이다. 가곡과 시조는 1920년대와 3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대중매체를 통한 노래 향유와 전승이라는 달라진 매체 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것으로 파악된다. 빠른 악곡 위주의 음반 취입, 시조창과 잡가 및 통속민요를 하나의 방송 프로그램으로 편성한 것 등은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달라진 매체 환경에 맞추어서 새롭게 만들어진 신가요와 기존의 노랫말을 더욱 통속적으로 변화시킨 잡가와의 경쟁에서 가곡과 시조가 우위를 차지하기는 힘들 수밖에 없다. 이러한 노래 향유 환경의 변화 속에서 1930년대 중 후반에 이르면, 가곡과 시조 담당층은 오히려 전통적인 형태를 재현하는 방향으로 기존의 통속적인 노래 양식들과 변별되고자 하였다. 이왕직아악부의 음반 취입과 방송 참여, 지방 가객들의 진출, 남성 연행자들의 참여 등은 가곡과 시조의 향유문화를 다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통속적인 노래와의 '격조의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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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가곡의 사설시조 가창 양상 (Saseol-sijo singing aspect of current Gagok)

  • 김영운
    • 한국시조학회지:시조학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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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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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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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시조는 조선 후기 한국의 문학작품 중 단형시가를 대표하는 문학 장르이다. 시조의 기본형식은 3장 6구 12음보의 형식을 갖춘 평시조로, 평시조 한 수의 노랫말은 45자 내외의 길이를 지닌다. 그러나 시조의 한 종류인 사설시조는 노랫말의 글자 수가 많이 늘어나 100여 자를 넘는 작품도 있다. 이 같은 사설시조 중에는 한문 어휘를 많이 사용하고, 심지어는 한시에서 몇몇 구절을 차용한 '엄숙하고 우아한 느낌'의 작품도 있으나, '외설스럽고 노골적인 내용'의 작품도 많이 있다. 문학작품인 시조는 가곡과 시조창이라는 성악곡의 노랫말로 사용되는데, 동일한 시조시가 가곡과 시조의 노랫말로 활용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러나 성악곡인 가곡 중에서 사설시조를 노랫말로 사용하는 악곡 중에는 '외설스러운 작품'은 거의 부르지 않고, '엄숙한 느낌'의 노래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 논문은 현재 전승되는 가곡 중에서 사설시조를 노래하는 악곡은 대부분 '엄숙하고 우아한 느낌'의 노랫말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외설적이고 노골적인 내용'의 사설시조를 가곡에서 노랫말로 사용하기 어려운 이유를 살펴보았다. 그러한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불규칙하게 늘어나는 노랫말과, 그에 따르는 반주 때문으로 보인다. 가곡은 악보에 기록되어 전하는 정해진 선율을 다수의 악기가 반주 한다. 따라서 사전에 선택된 노랫말에 따라 일정하게 만들어진 노래선율과 반주선율에 의하지 않으면 연주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한 문학작품의 감상은 개인적인 독서활동을 통하여 사적으로 이루어지지만, 가곡은 다수의 인원이 열린 공간에서 공개적인 연주를 통하여 연행하는 것이다. 특히 조선 후기의 사회적 제도와 관습 속에서 신분이 다른 남녀가 함께 모여 외설스럽고 노골적인 노래를 부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 글을 통하여 사설시조의 문학적 특성으로 일컬어지던 서민적이고 통속적인 성격은 가곡으로 불려진 사설시조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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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서남해안 두우리 조간대에서 표층 퇴적물 및 퇴적구조의 특성과 계절변화 (Depositional Characteristics and Seasonal Change of Surface Sediment and Sedimentary Strucutre on the Doowoovi Tidal Flat, Southwestern Coast of Korea)

  • 백영숙;전승수
    • 한국석유지질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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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권1_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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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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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한국 서남해안에 위치한 두우리 조간대는 사주와 보호섬이 존재하지 않고 외해로 열려있는 전형적인 개방형 조간대이다. 이러한 개방형 조간대에서는 바람에 의한 파랑이 퇴적작용에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므로, 계절에 따른 파랑에너지의 차이가 조간대 표층퇴적물의 분포와 퇴적구조의 특성에 직접적으로 반영된다. 두우리 조간대는 상부의 조수해빈 (tidal beach), 중부의 전형적인 조간대 (intertidal flat)와 최하부의 니질대 (lowermost mudflat)로 구분된다. 이러한 구분은 표층퇴적물의 구성뿐만 아니라 조간대의 경사도에 의한 구분과도 일치한다. 조간대 내에서의 퇴적물은 1차 퇴적구조와 사서질 퇴적물의 함량에 따라 다시 사질 조간대, 혼합 조간대와 니질조간대로 나누어진다. 두우리 조간대의 표층퇴적상은 계절에 따라서 퇴적물의 함량과 퇴적구조에 변화를 보이며, 퇴적상의 변화양상은 계절풍의 방향과 세기, 폭풍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북서계절풍이 강한 겨울철과 봄철에는 사질 조간대의 퇴적상이 우세하며, 약한 남동풍이 우세한 여름철에는 니질 조간대의 퇴적상이 우세하게 분포한다. 가을철에는 혼합 조간대가 우세하게 나타난다. 표층퇴적물은 여름에는 전 조간대가 약 20 cm 두께의 니질 퇴적물로 뒤덮이고 가을이 지나 겨울로 가면서 니질 퇴적상에서 사질 퇴적상으로 바뀐다. 이러한 표층퇴적상의 변화는 바람도 세어지고 풍향도 바뀌어 조간대를 공격하는 파랑의 에너지가 강해지면서 여름철에 퇴적되었던 니질 퇴적물을 침식시키기 때문이다. 캔코아 주상시료에서 퇴적구조는 여름철에는 조간대 상부 ($0{\~}l.3 {\cal}km$)에서는 니질 퇴적물의 평행엽층리와 상승연흔 사엽층리가 하부 $(1.7{\~}2.3 {\cal}km)$에서는 괴상의 니질 퇴적층이, 겨울철에는 전체적으로 평행엽층리와 연흔사층리가 우세하게 나타나며, 부분적으로 둔덕사층리 (HCS)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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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마임의 전통성과 정체성 - 기원, 역사, 특징 - (Tradition and Identity of Korean Mime)

  • 김익두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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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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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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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마임(mime)/무언극(無言劇)이란 '신체를 움직이는 기술'을 뜻하고, 오늘날에는 사실적이고 상징적인 몸짓으로 이야기를 전달하고 하나의 성격을 창조하고 묘사하는 기술을 뜻한다. 한국 마임의 시원은 멀리 선사시대의 '신성한 몸짓'에서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대의 마임에 관한 자료는 고고학적 발굴 자료들, 구비전승 자료 및 이후에 기록된 이 시대 관련 문자기록들 등이다. 부족국가시대에는 인간이 수행하는 가장 원초적인 연극 형식인 윈시 제천의식(祭天儀式) 등에 마임의 흔적이 나타난다. 삼국시대의 마임은 악가무희사(樂歌舞戱詞)가 종합된 이른바 '가무백희(歌舞百戱)' 혹은 '산악백희(散樂百戱)' 형태로 존재했다. 이 시기의 마임은 '호선무(胡旋舞)' '광수무(廣袖舞)' '괴뢰희(傀儡戱)' '기악(伎樂)' 검무(劍舞) '무애무(無㝵舞)'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백제 '기악(伎樂)'은 불교적인 내용의 가면 묵극(黙劇) 곧 마임으로 보인다. 남북국시대에는, 신성한 제의극보다는 세속극이 더욱 더 강화되고 정형화되고 다양화되었으며, 이러한 변화에 따라, 마임도 그만큼 다양한 정형화를 이루었다. 구체적으로는, '처용가무(處容歌舞)' '황창무(黃倡舞)' '대면(大面)' '월전(月顚)' '속독(束毒)' '산예(狻猊)' 등에서 시 시대의 마임 전통을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마임은 매우 다양한 내용과 형식의 인형극, 탈놀음, 무용극 형태로 나타난다. 이 시기에는 '처용가무(處容歌舞)'와 같은 기존의 전통 마임이 사회적으로 널리 보편화되고, '헌선도(獻仙桃) 포구락(抛毬樂) 연화대(蓮花臺)'와 같은 마임 형태의 무용극이 수입되었다. 조선시대에의 마임은 광대(廣大) 서인(西人) 주질(注叱) 농령(弄鈴) 근두(斤頭) 등과 같은 '규식(規式)이 있는 유희[규식지희(規式之戲)]'와 수척(水尺) 승광대(僧廣大) 등과 같은 '웃고 희학하는 놀이[소학지희(笑謔之戱)]'로 분화된 연극의 변화와 더불어 발전했다. 이 시기에 들어오면, 연극적 양식들이, 무당굿 풍물굿/농악 인형극/괴뢰희 탈놀이 조희 판소리 궁중 가무악극(歌舞樂劇) 등으로 매우 다양하게 분화 발전됨에 따라, 마임도 이런 다양한 연극적 양식들의 변화 발전 속에서 다양하게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한국의 마임은 역사적으로 매우 유구한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독자적인 양식으로 분화되지 않은 채, 여러 연극 양식들 속에서, 그 연극 양식의 일부분으로 존재해 왔다. 이러한 특징과 전개 양상에 따라, 한국의 마임은 굿놀음식 마임, 인형놀음식 마임, 잡색놀음식 마임, 탈놀음식 마임, 궁중무용식 마임, 판소리식 마임 등등, 다양한 양식적 분화를 이룩해 왔으며, 그 각 양식적 분화에 따라 각 양식별로 매우 특특하고도 다양한 특징들을 확립해 왔다.

<꼭두각시놀음>의 현재화 방안 연구 - 극단 '사니너머'의 <돌아온 박첨지 시즌2>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modernization of 'Kokdugaksinorum')

  • 최윤영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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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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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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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이 글은 극단 '사니너머'에 의해 공연된 <돌아온 박첨지 시즌2>의 분석을 통해 전통연희의 현재화 방안을 모색하고, 작품이 지니는 공연사적 의의를 정립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돌아온 박첨지 시즌2>는 남사당패 놀이종목 중의 하나였던 <꼭두각시놀음>의 동시대적 변주를 시도했다. 이를 위해 <꼭두각시놀음>의 주인공이자 서사전달자인 박첨지의 역할을 배제하거나 축소시킴으로써 박첨지 주변 인형들의 부각을 꾀했다. <돌아온 박첨지 시즌2>는 원 텍스트에 우리사회의 민감한 뉴스들과 사건들을 끌어와 접목했으며 '장구잽이' '북잽이' '세월호' '바바리맨 김가' '육방' '매호씨' '초란이' 등의 창작모형과 인형들을 제작해 현대판 <꼭두각시놀음>을 구축하는데 동참시켰다. 창작인형들과 '박첨지' '꼭두각시' '상좌중' '이시미' 등과 같은 전통인형들의 조합은 <꼭두각시놀음>이 성행했던 조선시대를 뛰어넘어 현대사회를 패러디하고 비판하는데 매우 적절히 적용될 수 있었다. <돌아온 박첨지 시즌2>의 등장인형들이 우리시대를 풍자하고 비판하는데 주로 활용되었다면 줄놀음 풍물놀이 버나놀이 사자놀이 등의 놀이장면들은 극적 재미를 창출하고 남사당패의 놀이정신을 환기시켜주는 이중의 효과를 꾀할 수 있었다. 남사당패 레퍼토리 중의 하나인 인형극의 형식을 차용해 줄놀음 풍물놀이 버나놀이와 같은 남사당 놀이종목들을 중첩시킴으로써 극적효과를 극대화하고 이로써 관람객들과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실효를 거둘 수 있었다는 점이다. <돌아온 박첨지 시즌2>는 <꼭두각시놀음>의 단선적이고 단조로운 공간적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무대 전면과 후면에 단계적으로 층위를 두고 검은 천을 두름으로써 깊이 감을 자아냈다. 이렇게 앞뒤로 확장된 무대는 인물들의 등 퇴장시 웅장한 장관을 연출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볼거리와 연극적 재미를 창출하는 매개체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돌아온 박첨지 시즌2>는 현전하는 <꼭두각시놀음>에 존재하는 않는 '동시대 사회상의 비판과 현실참여'라는 원전의 기본정신을 되찾게 되었다. 전통연희를 보존하며 동시에 현대화가 가능할 수 있음을 입증한 것이다. 극단 '사니너머'의 이러한 시도는 전통연희 보존회 혹은 전수회가 추구해야할 궁극적이고 바람직한 모델을 제시해주었다. 연희단체들에게 공연을 올리는 목적과 연습에 임하는 자세에 대해 명쾌한 답을 주었다. 전승연희 본연의 임무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전통연희의 원형적 특성을 살려 현대 관객들과 소통하는 방식은 연출기법의 외연을 확장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었다. <돌아온 박첨지 시즌 2>가 전통을 현재화하는 기존의 연출방식을 뛰어넘어 독창적 노선의 새로운 공연양상을 창출하였기 때문이다.

산간농촌 노년층의 소달구지 이용관행과 그 의미 (The Customary Employment of So Dalguji(Ox-Cart) among the Old Generation in a Mountain Village and its implication)

  • 손대원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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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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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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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이 연구의 기본적인 접근방법은 문화변동론적 시각에서, 소달구지 이용의 근현대적 양상이 어떠하며 그것이 갖는 사회 경제적 적절성과 문화적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 연구는 한 마을의 자연지리적 경제적 문화적 특성에 따라서 전통적 문화요소가 어떻게 지속 변용되는지를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조사지역인 경북 군위군 부계면 가호 2리인 동림마을에서는 소달구지를 일제강점기부터 이용하여 왔으며, 1972년 저수지 축조를 계기로 전통적 소달구지를 개량소달구지로 교체하였다. 1970년대까지는 소달구지로 농산물과 짐을 운반하고, 멀리 부계면이나 군위읍 소재 장터까지 소달구지를 타고 다녔다. 그러다가 1980년대 초반 경운기 도입 이후 소달구지는 마을에서 서서히 사라지면서 단순한 이동수단으로 그 기능이 변했다. 반면 젊은층은 현대식 운송수단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면서 1980년대에는 경운기가, 1990년 후반부터는 트럭이 마을의 주요 운송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70대 이상의 노인들은 계속 소달구지를 이용하였다. 노인들은 노동력이 고령화되어, 현대식 운송수단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경사진 농토를 경작하고, 원거리에 분산된 농토에 쉽게 접근하기 위해서 소를 사육하면서 소달구지를 개량하여 지속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동림마을의 개량형 소달구지 이용 전통은 노령의 농민들이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을 실천하는 것이며 고령화된 농촌사회의 문화적 표상이기도 하다. 즉, 노인들이 전통문화의 적합성과 실용성을 인정하여 소달구지라는 전통적 운송수단을 재창조하게 되었다. 그리고 산간농촌이라는 지리적 제약조건 속에서 남녀 노인들이 소달구지를 즐겨 이용하는 현상은 동림마을 노인들의 문화적 표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동림마을에서 소달구지가 지속적으로 이용되는 것은 농민들이 고령화되면서, 소달구지가 마을의 자연지리적 경제적 측면과 노인들의 문화적 관성이 잘 부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제반 상황과 조건에 맞게 문화를 전승 변용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격구희(擊毬戱)와 개최공간의 역사적 고찰(1) - 고려조 궁궐을 중심으로 - (Historical Conciderations of Gyeokgu Game and Play Space - Focused on the Goryeo Dynasty Palace -)

  • 최우영;윤영조;윤영활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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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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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4-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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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격구(擊毬)는 중국에서 국내에 전래되어 고려시대 궁궐과 민간에 크게 성행하며 조선시대로 전승된 집단 공놀이 유희이다. 이 연구는 격구가 가장 왕성했던 고려시대 궁궐을 중심으로 고려조 군왕들이 격구희를 즐긴 행태와 격구희가 열린 뜰인 구정(毬庭)의 역사 공간적 의미와 장소적 특성을 고증에 의해 구명하고자 하였다. 조사자료는 고려왕조실록3개 사료(史料)에서 격구 관련기록을 채록(採錄)하여 조사, 분석하였다. 조사결과, 군왕들의 격구희(擊毬戱) 참석행태는 역대 34명 군왕 중 12명이 격구에 관여했으며, 모두 46회 사록(史錄)에 남겼다. 참석행태는 46회 중 9회는 군왕이 격구경기에 직접 참여하였고, 37회는 군왕이 참관하였다. 이중 제18대 의종이 17회(36.9%)로 격구기록을 가장 많이 남겼다. 격구가 열린 곳은 본궐, 이궁, 누정, 사찰, 민간저택, 시전 및 시가, 기타 궐밖 등 모두 25곳으로 이곳에서 총 46회의 격구희가 열렸다. 개최 장소 중 이궁 5개소에서만 격구희가 21회(45.6%)나 열려 이궁의 이용률이 가장 높았다. 특히 이궁 중에서도 수창궁과 장원정에서의 개최가 많았는데, 이는 모두 의종 때 기록이다. 격구희는 고려 말까지 성행하며 군왕이 직접 시가나 저자에 나와 군중과 같이 격구희를 즐기는 국가적 축제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