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일제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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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시기 동양평화에 대한 두 시각 - 안중근과 박영철을 중심으로 - (Two Views on the Oriental Peace of Modern Era - Focusing An, Joonggeun and Park, Youngcheol)

  • 오재환;구사회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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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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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9-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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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이 논문에서는 민족 존망의 위태로운 시기에 활동했던 안중근과 박영철이라는 두 사람을 통해 근대 지식인의 자세와 현실에 대한 대응 방식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민족정신의 표상인 안중근과 친일파였던 박영철을 비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고에서 그것을 시도한 것은 사회진화론이라는 똑같은 이데올로기라도 그것을 어떻게 적용시키느냐에 따라 결과는 판이하였기 때문이다. 안중근과 박영철은 같은 시기에 태어나서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로 이어지는 변혁기를 살았다. 이들에게 민족 주권과 동양평화라는 공통적인 화두가 있었지만 삶의 방향이나 행적은 서로 달랐다. 전자는 일제의 심장을 겨누었고, 후자는 그것의 심장부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들은 동양평화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19세기 이래로 대두된 적자생존과 우승열패로 귀결시키는 사회진화론을 전제로 개진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의 논리는 사회진화론에 결합된 인종주의를 토대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중근은 동양 각국이 서로의 주권을 침해하지 않고 공존해야 동양평화가 이룩된다고 보았고, 박영철은 동양이 일본을 중심으로 뭉쳐야 동양평화가 이룩된다고 보았다. 이들 두 사람은 같은 시기를 살았지만 시대 의식도 대조적이었다. 안중근은 일제가 한국의 주권을 빼앗아 동양평화가 깨질 것으로 보았다. 반면에 박영철은 일본과 한국이 일체가 되어 대동아공영을 이룩한 바, 평화시대가 도래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후자는 한국의 주권보다는 일본의 근대 문명에 관심을 보이며 한국이 그것을 본받아야 한다고 보았다.

한국 근대초기 서양 목구조의 수용과 교회 내부공간형태에 관한 연구 -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교회건축의 지붕틀 구조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Acceptance of Western timber structure and the Interior space of Church buildings in the early modern period in Korea - Focused on the roof structure of church architecture in the Flowering and Japanese occupation period -)

  • 김정신
    • 한국실내디자인학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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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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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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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This Study is concerned with the acceptance of Western timber structure and the interior space of church buildings in the early modern period in Korea. Timber roofs have represented a wide variety of constructional forms and have been fundamental to any technological appraisal of the evolution of both of Western and Eastern architecture. Especially the roof structure of the church buildings reflects the technological level, aesthetic sense, and spacial concepts of the age. Between Western timber structure and Korean timber structure, there are many differences in not only structural form but also form of roof, members, load, frame system and etc. And there were various types of framing technique such as timber truss, timber arch, timber vault in the western style church architecture in the early modern period in Korea. I have summarized the character of the acceptance process of Western timber structure and the influences on the interior space of church buildings.

한국 근대 고등수학 도입과 교과과정 연구 (Korean tertiary mathematics and curriculum in early 20th century)

  • 이상구;함윤미
    • 한국수학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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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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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7-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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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초등(elementary), 중등(secondary)교육에 이어지는 대학 및 직업 교육을 총칭하여 고등(tertiary) 교육이라고 한다. 본 연구는 한국의 근대 고등수학 도입과정과 정규대학 교과과정으로의 정착 과정을 확인한다. 우리의 고등 수학교육은 산학자의 전통수학, 육영공원, 원산학사, 1895년 교육과정에 수학을 필수과목으로 도입한 성균관, (교동)소학교, (교동)한성사범학교, (한성)중학교, 민족 사립학교, 종교학교, 배재학당 및 이화학당의 대학부, 숭실대학, 사범학교, 관 공립전문학교, 사립전문학교, 경성제국대학, 경성대학, 국립서울대, 김일성대를 시작으로 해방과 함께 전국의 주요대학을 통하여 전수, 발전 확산되며 오늘에 이르렀다. 1900년 근대 수학교과서의 발간을 시작으로 1909년까지 한글로 쓰인 근대 수학책이 봇물 터지듯 발간되었다. 그러나 오랜 수학적 연구의 전통과 1880년대에 시작된 고등교육에서의 서구식개혁노력은 1905년 이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의 간섭부터 시작하여 1910년 한일합방을 계기로, 특히 중등교육이상의 수학교육과 수학적 연구의 전통은 천천히 붕괴되었다. 최소한 1910-1945년 사이에는 한반도에 중등교육이나 교양수학의 수준을 넘어서는 진정한 고등 수학교육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한반도가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을 때 한국은 모든 전문 직종에서 심각한 인력난을 겪었다. 특히 수학과가 단 하나도 없어 수학분야 이학사가 10여 명도 못되는 수학분야의 교수인력의 부족은 심각하였다. 단 한명의 교수도 연구경험을 가지지 못한 수학분야의 상황은 한국이 21세기 현대수학의 주류에 진입하는 과정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면서 신설된 다양한 국 공립 및 사립학교들에서 대학수학이 교수되었고 교육과정이 국제기준으로 정착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한국에 근대 고등수학이 누구에 의하여 어떻게 도입되었으며, 어떤 교재로 누구에 의하여 지도 되었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정규 대학과정의 교육과정으로 정착되었는지를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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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산(壺山) 박문호(朴文鎬)의 윤리사상과 시국관 (Hosan Park Moon Ho's Idea of Morality and Viewpoint of Social Situation)

  • 지교헌;지준호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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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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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5-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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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호산(壺山) 박문호(朴文鎬)는 서구열강의 각축전과 일제의 침략 그리고 척사위정운동과 항일의병운동 등 참으로 다사다난한 시기를 살았다. 따라서 그의 학문과 사상은 이러한 조국의 어려운 환경과 관계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그의 사상 가운데, 서구의 기독교가 전통적인 사상과 미풍양속을 파괴하는 것으로 본 점, 일제에 아부하는 역적을 토벌하고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에 대하여 복수할 것을 주장한 것, 그리고 서구의 제국주의적 침략은 단호히 막아야 하지만 대내적으로 개물성무(開物成務)와 화민성속(化民成俗)을 이루어야 한다는 개화론(開化論)을 주장한 것은 이러한 시대적인 역사적 환경과 직접적으로 관계된다. 호산 박문호의 시국관은 전통적인 윤리사상과 교육사상을 고수하는 입장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변화하는 새로운 시대적 요구를 외면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적 요구라는 것도 시대적이며 사회적인 모든 여건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며, 전통 윤리사상을 고수한다고 하여 반드시 시대적 요구에 배치된다고 볼 수도 없다. 호산 박문호가 살다 간 시대는 왜양(倭洋)의 침략 앞에 정치적인 불안정은 극도에 달하였으며,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대한 국민적 또는 국가적 합의는 거의 이루어질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당면과제는, 우선 일본과 구미 각국 즉, 왜양(倭洋)의 침략을 물리치는 일보다 더 화급한 일은 없었던 것이며, 그리함으로써 정치적 안정과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고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제하여 유가적 정치이상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신구(新舊) 관념의 교차와 전통 지식 체계의 변용 (The Conceptual Intersection between the Old and the New and the Transformation of the Traditional Knowledge System)

  • 이행훈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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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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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5-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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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고는 서양 근대 문명 수용 초기(1890~1910)에 발생한 신구 관념의 대립과 충돌을 중심으로 전통 지식 체계의 변용을 역사의미론적으로 탐색함으로써 한국의 근대를 성찰하는 데 목적이 있다. 한국에서 신구 관념을 놓고 벌어진 주체 간의 투쟁은 전통개신론자들과 문명개화론자들의 주장에서 첨예하게 드러났다. 서양의 충격에서 비롯된 신구 관념의 대립과 충돌은 우주 자연으로부터 사회 정치체제, 학술?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였지만, 전통 지식 체계를 이해하는 시각에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신구 관념에 따른 전통 지식 체계의 구축과 변용과정에서 문명개화론자들에게 '구(舊)'는 단순히 과거의 '지나간', '오래된' 것이 아니라 파괴하고 제거하지 않으면 새로운 문명 건설을 방해하는 장애물이었다. 그러나 전통개신론자들에게 '구(舊)'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이념 속에서 다시 '신(新)'으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함하고 있는 '개신(改新)'의 대상이었다. 박은식의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이나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은 전통 지식 체계를 '신학(新學)'으로 재편하려한 대표적인 시도였다. 보편성과 객관성, 합리성을 추구하는 과학적 방법을 수용함으로써 전통 지식 체계는 근대적인 학문으로 변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학(新學)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성학(聖學)으로서의 위상은 탈각되었고, 신앙과 종교적 전통 또한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전통 지식 체계의 변용과 '구학의 신학화' 과정에서 신구 관념의 교차가 발생하였다. 여기서 특히 신구 관념의 교차를 가능하게 한 '실(實)(학(學))'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세기 전후 발간된 다종의 근대 매체는 신구 관념의 다층적 전개 양상을 여실히 보여주는데, 전통 지식 체계가 신학(新學)으로 변용될 수 있었던 계기로서 '실학'이라는 개념적 준거틀이 작동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시기 실학이 지칭하는 대상은 대체로 서양의 학문인 '신학(新學)'을 표상하고 심지어 등치되기도 했지만, 전통개신론자들은 문명개화론자들이 점유하였던 '실학' 개념과 그 의미를 재해석함으로써 전통 지식 체계를 신학으로 바꿀 수 있었다. 이들은 과학 기술에 압도되어 점차로 거세되어가던 전통적 가치를 '신학' 수용의 토대로 인식하고, '실학(實學)'을 개념을 준거로 하여 '신학(新學)'을 재전유(再專有)(re-appropriation)하였다. 일제의 강점이 구체화 되어 전통 지식 체계의 주체적 변용 시도는 일정한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지만 '구학의 신학화'는 '동도서기(東道西器)' 논리가 지닌 모순과 문명개화론의 탈주체성을 넘어서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도덕 원리와 경쟁 원리가 충돌하고 '진화'와 '진보'가 대세인 현실에 대응하려했던 '동도서기(東道西器)' 논리는 이미 분리될 수 없는 도(道)와 기(器)를 분리 가능한 것으로 상정해야만 성립되는 모순을 안고 있었고, 문명개화론은 서양을 내면화하여 자기 비하와 멸시로 주체의 균열을 야기하고 전통 지식 체계로부터 단절됐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근대만화의 예술적 특징에 관한 연구 - 1900년대 초부터 1945년까지 작품의 조형적 측면을 중심으로 - (A Study on Artistic Characteristics of Korean Modern Cartoon - Centering on the field of modeling in the period from the early 1900's till 1945 -)

  • 김종옥
    • 만화애니메이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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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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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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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본 논문에서는 한국 근대사회 대중문화의 신총아(新寵兒)로 자리매김 된 만화의 특징을 분석하고 그 사회적 의미를 밝혀 한국만화의 역사적 위상 정립을 위한 연구를 목적으로 하였다. 만화가 학문으로서 연구 영역을 확대하고, 한국 사회 속에서 독특한 대중문화장르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태동기부터 한국만화가 갖는 역사적 위상을 고찰하고 정립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만화는 시각문화로 문맹률 높던 근대한국사회에서 커뮤니케이션 매체의 목적을 훌륭하게 실현한 장르였다. 이 시기 근대만화의 등장은 격변기(激變期) 대중을 계도(棨導)하며 주권회복운동을 펼쳐 나갔던 개화파 지식인들에게 중요한 선전 ${\cdot}$ 교육의 도구였으며, 역으로 친일의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또 영리를 목적으로 매체를 운영하던 신문사(출판사)들에게는 중요한 독자 확보의 수단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 논문은 1900년대 초반부터 1945년 일제강점기에서 해방을 맞는 시기까지를 한국만화의 태동기로 보고 그 특징을 밝혀 보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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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후기부터 일제 식민지 초기(1906-1915년)까지 사용되었던 과학교과용 도서의 조사 분석 (A Study of School Science Textbooks which was used from 1906 to 1915 in Korea)

  • 박종석;정병훈;박승재
    • 한국과학교육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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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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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3-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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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8
  • 본 연구에서는 대한제국 후기부터 일제 식민지 초기에 사용된 과학교과용 도서의 목록과 그 출판 현황을 밝혀 당시의 과학교육에 대한 구체적 실태를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지표를 시하기 위하여 한국의 초기 과학교육에서 기반의 전환이 있었던 대한제국 후기 과학교육의 현실을 보여줄 수 있는 과학 교과서의 출판실태를 1906-1915년을 중심으로 조사하였다. 학 교과서 목록을 작성하고 당시의 출판 상황 및 사용 내역의 실태를 조사하는 데는 학부( 部) 및 총독부에서 발간한 "교과용도서일람"(敎科用圖書一覽)의 $4{\sim}9$판을 기본 사료(史料)로 하고, 당시에 발간된 관계 자료와 이에 대한 연구 자료를 통하여 내용을 확인하여 보완하였다. "교과용도서일람"은 을사늑약 이후 학부에서 발간하기 시작하여 한 합방 이후에는 총독부에서 계속 발간한 것이다. 이 책자에는 당시 사용하던 교과용 도서 체가 수록되어 있다. 한국에서 1906년부터 1915년 사이에 사용된 과학 교과서는 이과, 이 학, 물리, 화학, 박물, 생리, 위생, 생리위생, 동물, 식물, 천문, 지문, 광물, 지질 등 다양한 름을 가졌다. 이들 교과서명은 정부에서 정한 교육과정 속의 과학교과명인 이과, 박물, 물리, 화학보다 범위가 넓었고, 오히려 각종 사립학교에서 정한 과학 교과명에 일치하였다. 따라서 이때 발간된 과학 교과서는 사립 학교에서 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 과학 교과서 중 한국에서 발간된 것은 주로 1906년 이후부터 등장하며 이때 애국계몽운 동 영향으로 학교가 설립되고 교육을 받는 대상도 증가된다는 점에서 한국의 실질적인 과 교육은 1906 년 이후에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개화기 한국에서 발간된 과학 교 는 학부 또는 총독부로부터 그 사용에 대한 통제를 받았다. 1908년의 사립학교령과 교과 도서검 정규정, 그리고 1909년의 출판법은 교과서를 통제하는 주요 수단이었다. 한국에서 간된 62종의 과학 교과서중 사용금지를 당한 것은 18종인데 2종은 불인가, 13종은 검정무효 그리고 3종은 검정무효 및 검정불허가 처분을 중복으로 받았다. 이는 과학 교과가 학부나 총독부의 검열로부터 다른 교과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었지만 일제가 점차 교 서 통제를 강화하면서 과학 교과서에도 통제를 가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국의 근대 과학교육은 1906년에 이르러 실질적인 체제가 확립되면서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실시되었 데 이 시기에 비록 번역된 도서가 많이 있었지만 동시대적 지식을 담고 있었던 62종의 과학 과서가 한국에서 발간되었고, 76종에 달하는 일본의 과학 교과서가 도입되어 사용되었으며, 40여명의 한국인이 과학 교과서를 번역 또는 편술하는 등 한국 과학교육에 종사하였다는 에서 한국 과학교육의 자생적인 성장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1910년 제에 주권을 상실 당하면서 그 성장력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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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한국의 뮤지컬 수용 역사와 문화제국주의 (Acceptance History of Korean Musical Theatre in 1960s and Cultural Imperialism)

  • 이계창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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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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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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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뮤지컬은 유럽의 오페라로 대표되는 서구 음악극 전통에서 시작된 대중예술 장르로서 20세기 미국 브로드웨이를 중심으로 꽃을 피웠으며, 현재 전 세계적으로 공연예술 분야에서 대중의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상업예술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이 장르의 특성 상 드라마의 전개나 캐릭터의 표현 등은 말이나 몸짓이 아닌 음악을 주요 매개체로 사용하며, 그 음악의 스타일은 특정 계층이 아닌 대중의 기호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근대화는 곧 서양화이고 일본이 조선의 개화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일제의 식민주의 음악교육은 조선 민중에게 일본 이데올로기 및 문화를 강제적으로 주입함으로써 일본에의 협력과 순종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가 편찬한 "보통교육 창가집"을 교재로 한 식민주의 음악교육은 한민족의 음악적 정체성이 일본음악 및 서양음악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해방 이후 냉전체재 하에서 미국의 대외정책에 따른 친미적 남한 정부 수립을 위한 자본주의 경제 메커니즘과 더불어 '미8군 쇼 무대'와 '영화'로 대표되는 미국 대중문화, 이 두 가지 요소들의 유입으로 인한 비가시적인 '문화제국주의'의 영향으로 우리의 전통음악은 '국악'이라는 단어에 갇혀 '과거의 음악'이라는 의미로 한정되어지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미국 대중문화의 유입으로 뮤지컬을 접하게 되었고, 우리 전통예술의 현대화를 통한 '건전한 문화'의 보급을 지향한 당시 박정희 정권의 문화정책 기조에 따라 '한국적 뮤지컬'을 지향하는 '예그린악단'이 창단되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예술을 기반으로 현대화 된 공연예술을 만들고자 했던 계획은 1966년 <살짜기옵서예>의 성공으로 가능성을 보였으나, 이후 정권 실세의 후원 중단 등의 이유로 더 이상 주체적으로 운영할 능력을 상실한 관변단체로 전락하는 운명에 처하면서 무산되고 만다. 일제의 식민주의 음악교육과 해방 이후 미국 대중문화의 유입이라는 문화제국주의 책략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한국 뮤지컬의 태동기에 우리의 전통연희 양식이 서양 음악과의 교류, 확장을 통한 자주적인 민족예술로 자리매김하지 못한 1960년대의 상황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것이 21세기 현재 한국 뮤지컬 시장을 서구 라이센스 뮤지컬이 주도하게 된 배경이며, 아울러 서양음악을 기반으로 한 뮤지컬 창작 현실의 주요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육당(六堂)과 만해(萬海) 시조(時調)의 어조(語調) (Study on the Tone of Yukdang's and Manhae's Sijo)

  • 이태희
    • 한국시조학회지:시조학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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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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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9-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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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이 논문은 개화기에서 일제 식민지에 이르는 격동기를 살다간 두 지식인이자 선각자였던 육당 최남선과 만해 한용운의 시조를 살펴보았다. 육당과 만해의 삶은 여러 측면에서 공통된 요소를 지니고 있다. 두 사람은 모두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독립운동에 관여하였다. 또한 문학 활동의 경우에도 신시와 시조 및 한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활동을 보여 주었다. 이 논문에서는 두 사람의 시조 작품을 대조하여 고찰했다. 특히, 각각의 시조 작품에 나타난 어조의 측면을 중심으로 '님'을 노래한 경우와 '생활'을 노래한 경우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논의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님'을 노래한 시조들을 살펴보았다 육당과 만해 모두 님과의 이별을 전제하고 있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시조는 다음과 같은 면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여 주었다 육당의 경우, 님의 부재로 인한 허탈감과 상실감을 위주로 한 소극적 수동적 어조로 나타났다. 만해의 경우, 님과의 만남을 전제로 한 적극적 능동적 태도로 나타났다. 둘째, 생활을 노래한 시조들을 살펴보았다. 육당의 경우 개인적 서정의 세계에 대하여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반면. 만해의 개인적 서정의 세계에 대하여 체념적이며 부정적 의미 지향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대조적인 작품의 어조는 두 사람의 현실인식의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되며. 앞으로 보다 심미적인 측면에서 논의가 이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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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전통음악공연의 형태와 특징 - 서양식 장르와의 혼성공연형태를 중심으로 - (Types and Characteristics of Traditional Music Performance of the 1920s - Focused on the mixed performances type in the western-style genre -)

  • 금용웅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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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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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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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일제강점기 전통음악공연은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이면서 점차 축소, 약체화 되어 갔고, 개화기 이후부터 사회전반에 꾸준히 확산되기 시작한 서양문물의 영향으로 서양식 장르의 공연이 활성화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전통음악공연은 단독공연형태보다는 서양식 장르와 함께 연행되는 혼성공연(混成公演)형태를 보이는데, 특히 서양음악과의 혼성공연형태가 주를 이루었고 이 밖에 연극, 강연, 영화, 댄스, 마술과 같은 장르와도 함께 공연되었다. 이와 같은 서양식 장르와의 혼성공연형태는 1920년대에 들어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전통음악공연의 한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 따라서 서양식장르와 전통음악의 혼성공연형태에 대한 연구는 한국근대음악사에서 아직 조명되지 않은 전통음악의 공연형태를 밝혀, 일제강점기 전반적인 전통음악공연의 동향을 파악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으나, 지금껏 이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진 바가 없는 실정이다. 이에 본 연구는 1920년대 서양식 장르와 전통음악의 혼성공연형태에 대해 당시의 신문기사들을 중심으로, 서양식 장르와 전통음악의 혼성공연형태 활성화 배경과 형태별 특징에 대해 고찰하였다. 서양식 장르와 전통음악의 혼성공연형태 활성화 배경에서는 1920년대에 들어 서양식 장르와 전통음악의 혼성공연형태가 이전에 비해 활성화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원인은 1920년대에 들어 공연의 주최나 후원 단체들이 늘어남에 따라, 전반적인 공연의 개최 수가 이전보다 급격히 증가하였고, 증가한 공연의 양상이 서양문물의 확산으로 더욱 다양해진 대중들의 기호 충족을 위해 대부분 혼성공연형태로 이루어진 데에 기인하고 있었다. 서양식 장르와 전통음악의 혼성공연형태별 특징에서는 전통음악과 함께 공연된 서양식 장르들을 분류하여, 전통음악이 개개의 서양식 장르와 함께 공연되었을 때 어떠한 특징이 나타나는지 살펴보았다. 첫째, 서양음악과 전통음악의 혼성공연형태에서는 전반적으로 서양음악의 프로그램 수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당시에 흔치 않았던 서양악기와 전통악기의 합주가 이루어지기도 하였고, 부제나 날짜별로 두 장르를 구분하여 공연되기도 하는 특징을 보였다. 둘째, 연극과 전통음악의 혼성공연형태에서는 전통음악이 창극과 유사한 형식으로 연극에 직접 참여하거나, 연극의 무대전환을 위한 막간공연의 역할로 연극과 독립되어 공연되기도 했고, 관객모집이나 여흥을 위해서도 공연되는 특징이 있었다. 셋째, 강연과 전통음악의 혼성공연형태에서는 전통음악이 강연의 전이나 후에 연주 되어서 강연의 분위기 조성과 여흥의 역할을 하는가 하면, 관객모집을 위해서도 공연되는 특징을 보였다. 넷째, 영화와 전통음악의 혼성공연형태에서는 전통음악이 영화에 직접 참여하거나, 독립적인 공연의 성격을 띠기도 했고, 영화 상영 후 여흥을 위해서도 공연되는 특징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