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위(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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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경(內經)", "난경(難經)"중영위기혈관염적탐토(中榮衛氣血觀念的探討)-이문자고석위핵심관점(以文字考釋為核心觀點) - "내경(內經)", "난경(難經)"에 나타난 영위기혈(營衛氣血) 관념에 대한 고찰 - 문자학적 해석을 중심으로

  • 옹의덕;임소경
    • 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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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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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3-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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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본 논문은 "난경(難經)"과 "내경(內經)"에 나타난 영위기혈(營衛氣血)의 관념에 관한 연구로서 문자의 훈석(訓釋)을 중심관점으로 삼아 전문적 문자학(文字學) 서적 및 고대경전원저(古代經典原著)를 인용하여 그에 근거해 해설하였다. 문자적(文字的) 근원(根源)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문자학적(文字學的) 관점을 이용하여 여러 전적(典籍)들에서 서술된 관념들을 한층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예컨대 본문(本文)에서 논술한 '영'(榮)자에는 "무성하며 밝고 윤택(潤澤)하여 일정한 규칙에 따라 온몸을 순환한다(번무광윤(繁茂光潤), 규도환주(規度環周))"는 의미가 있으며, '위'(衛)자에는 "온몸을 순환하면서 지키고 방어한다(환요어주(環繞於周), 수위방호(守衛防護))"는 의미가 있는데, 중의경전(中醫經典)에서는 영(營)과 위(衛)라고 명명(命名)하여, "온몸을 순환하면서 영양(營養)을 공급하고 몸을 보호하는 작용"을 나타내었다. 문자는 이치를 담고 있으며, 의학의 이치는 글로써 전해진다. 중의(中醫)의 사상(思想)은 모두 이러한 경전고적(經典古籍) 속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러한 경전저작을 학습할 때에는 그것이 표현하는 형식을 분명히 이해해야 하는데, 특히 그 가운데 문자(文字)에 대한 분명한 인지는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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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 건국 초 중앙군(中央軍)연구 (A Study on central army in the early Joseon Dynasty)

  • 박희성
    • 융합보안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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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권6_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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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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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조선은 건국과 동시에 군제를 개혁하였다. 고려의 이군(二軍) 육위(六衛) 체계를 바탕으로 하여 10위(衛) 50령(領)으로 개편하였다. 하지만 사실상의 중앙군사력은 이성계의 친군인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에 있었다. 이들과 더불어 중앙군사력의 중추를 이루는 것은 각도의 절제사가 상경시킨 시위패(侍衛牌)였다. 또한 반법제적인 성격의 성중애마(成衆愛馬)도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곧 군령과 군정체제는 정비되기 시작한다. 먼저 군령체제의 개혁으로 지휘체제의 일원화를 위해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를 설립한다.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는 판사 정도전에 의해서 군사전반에 걸친 강력한 통어권(統御權)을 갖는다. 이어서 정도전은 군사 교육훈련을 강화한다. 교육기관인 훈련관(訓練觀)을 설립하고, 진법훈련을 강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군령체제의 확립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병혁파였다. 왕자의 난 이후 사병 혁파론이 본격적으로 대두하게 되었다. 일부 왕자와 중신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사병을 완전히 혁파하여 새로운 군제의 출발점이 되었다. 군정의 체계화도 이루어졌다. 태조 때 정도전은 십위(十衛)를 십사(十司)로 변경하였다. 이후 세종대에 다시 십이사(十二司)로 확대한다. 또한 태종은 흩어져 있던 이전의 갑사(甲士)들이 복립한다. 갑사(甲士)의 복립을 계기로 하여 과거의 하나의 왕부(王府)를 지키던 사병적인 甲士가 이제는 국가의 녹에 의하여 길러지는 국가의 기간병으로서 과거에 장번적인 갑사(甲士)가 이제는 체번교대(遞番交代)를 행하는 국가제도로서 성립된 규범에 의하여 제도화의 시초를 이루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추가적으로 별시위(別侍衛), 내금위(內禁衛), 겸사복(兼司僕) 등의 각종 특수병종이 증창설 된다. 이들은 금군(禁軍)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각자의 역할을 한다.

"온병조변"(溫病條辨)의 온병학설(溫病學說)에 관(關)한 연구(硏究) -關于(관우) "온병조변"(溫病條辨)적온병학설연구(的溫病學說硏究)-

  • 박현국;김기욱
    • 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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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권1호통권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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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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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청대적명의오국통(淸代的名醫吳摘通), 불근시'온병'제가(不僅是'溫病'諸家), 우시관어림상각과논치적명가(又是關於臨床各科論治的名家). 관어(關於)${\ulcorner}$온병조변${\lrcorner}$(溫病條辨)상온병학(上溫病學)술리논적특정(術理論的特征), 정리여하(整理如下). 대온병병인(對溫病病因), 파융합제가문학설(把融合諸家們學說), 규명시종일관(糾明始終一貫), 제시료정상화비정상적'복기'(提示了正常和非正常的'伏氣'), '사천시영현행지기'('司天時令現行之氣'), '려기'인기온병적삼도인치온'지학설('戾氣'引起溫病的三圖因致溫'之學說). 吸收諸家們的長處(흡수제가문적장처), 創案'三焦辨證'濃體系(창안'삼초변증'농체계). 수선(首先), 타이'삼초'위강영구분병위적상하(他以'三焦'爲綱領區分病位的上下), 천채(淺採), 기차이'륙경'위구별설명장역부화경락적불동(其次以'六經'爲區別說明?驛腑和經絡的不同), 재일차이'위기영혈'(在一次以'衛氣營血') 구별료표리적선후(區別了表裏的先後). 우용횡향급종향논술료온사적전변규률(又用橫向及縱向論述了溫邪的傳變規律), 최후제시료'치상초여우(最後提示了'治上焦如羽), 비경불거(非輕不擧). 치중초여형(治中焦如衡), 비평불안(非平不安). 치하초여권(治下焦如權), 비중불침(非重不沈).'적약물치료원칙(的藥物治療原則). 재질병적변별구분'온열'화'습열'(在疾病的辨別區分'溫熱'和'濕熱'), 재약물적사용상구별'강조'화'유윤'(在藥物的使用上區別'剛燥'和'柔潤'), 저우시오씨적온병학술특징지일(這又是吳氏的溫病學術特徵之一). 재치법(在治法), 방제(方劑), 약양(藥量), 전법(煎法), 복법(服法), 음식(飮食), 조양등적온병치료방면(調養等的溫病治療方面), 제시료광범위적'금기'학설(提示了廣範圍的'禁忌'學說). 타심각적감각도료오치온병적결과(他深刻的感覺到了誤治溫病的結果), 위료방지오치(爲了防止誤治), 관전치료'금기'(灌展治療'禁忌'), 현재야필요준수적충분적가치(現在也必要遵守的充分的價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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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三國遺事)』의 환웅(桓雄)과 염제신농(炎帝神農)과 기록학적 비교고찰 (A Philological Comparative Study on HwanWoong of Samgukyusa and YanDi-ShenNong)

  • 윤순
    • 한국기록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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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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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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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
  • "삼국유사(三國遺事)", 권일(卷一)의 "고조선(古朝鮮)"조(條)를 신화와 역사기록 두 부분으로 나누어, 먼저 단군신화(檀君神話) 속의 환웅(桓雄)과 중국의 염제신농(炎帝神農)의 신격(神格)을 비교 고찰하였는데, 그들은 매우 유사한 신격을 가지고 있었다, 즉 인류의 생활과 농업에 필수적인 태양신(太陽神), 농경을 가르친 농업신(農業神), 그리고 약초(藥草)의 성질을 밝혀내어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했던 의약신(醫藥神) 신격과, 문물을 발명하고 문화를 창시했던 문화영웅(文化英雄)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신화시대에서 역사시대로 발전해 가는 단계상에서 신(神)들이 담담했던 역할은 창세(創世) ${\rightarrow}$ 교화(敎化) ${\rightarrow}$ 통치(統治) 과정으로 변천해 가는데, 환웅과 염제신농은 모두 교화(敎化)의 단계에 있었고, 교화의 내용은 모두 그들의 신격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환웅신화와 염제신농신화는 고대 한국과 중국의 정신문화 발전과 물질문명 발달과정 중 같은 단계에서 발생한 신화인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역사기록 부분을 통하여 "위서(魏書)"의 본질과 단군 환웅의 시대를 고찰하였다. "위서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었다"라는 기록은 "위서"의 저술 시점(時點)을 밝히는 것이고 '위(魏)'는 위(魏)는 (위(衛))만조선(滿朝鮮)을 가리키는 것이다. 위만조선으로부터 2천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본문기록의 "당요동시(唐堯同時)"설(說)과 매우 근접한다. 그러므로 "위서"는 중국의 사서(史書)가 아니라 위만조선의 역사서일 가능성이이 크다. 본문의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와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단군 건국년대를 밝히는 중요한 기록이다. 기자동래(箕子東來)는 은주교체(殷周交替) 때(B.C 1122년)로, 단군이 이때까지 1500년 간 나라를 통치하였으므로 고조선 건국년대는 B.C 2622년이다. 이는 요(堯)임금보다 훨씬 이전인 왕제(黃帝)(B.C 2698-2358) 시대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단군의 부신(父神)인 환웅의 사대는 아무리 늦어도 B.C 3000년 전후일 것인 바, 이는 염제신농(B.C 3218-2699) 시대에 해당되므로 환웅과 염제신농이 교화활동을 한 것도 동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이 "삼국유사 고조선"편은 우리민족의 상고시대(上古時代) 역사를 규명해주는 기록학적으로 의의가 깊은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