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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노고산(老姑山) 독재동(篤才洞)의 장소성과 역사문화경관 해석 (A Interpretation on Placeness and Historic Cultural Landscape of Dokjae-dong on Nogosan, Yangju)

  • 노재현;김화옥;이정한;박주성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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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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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7-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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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본 연구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 독재동 바위글씨와 노고산의 장소성에 주목하여, 이곳의 경관 및 장소특질을 고찰하고 바위글씨에 담긴 경관의미를 추론함으로써 노고산과 독재동 계곡의 역사문화경관적 함의를 밝히고자 한 것으로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삼각산은 조선왕조 6백년 도읍지의 주산(主山)이며 오악(五嶽)을 이루는 중앙의 성산(聖山)으로, 노고산은 삼봉산(三峰山) 즉 삼각산의 우람한 세봉우리를 향배하는 의미공간으로서 그 장소성이 획득된다. 더불어 노고산은 조선의 정기를 상징하는 삼각산을 가장 완벽하게 조망할 수 있는 '망삼각산(望三角山)'의 절대 시점장이다. 독재동 계곡에 산포(散布)된 다수의 바위글씨는 미수 허목의 "고양산수기"의 내용을 현현(顯現)하기 위한 행위이자 경물로 재생산된 산물이다. 그리고 추사 필적의 몽재(夢齋)는 중의적(衆意的) 표현이 읽혀지는 바위글씨로, 먼저 글자 그대로의 뜻인 '꿈꾸는 집' 이지만 내면적 의미는 "한낮 몽상(夢想)도 바탕을 깊이 헤아려 보면 정당성이 확보된다."는 의미로 '몽재거사'로 알려진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몽재집(夢齋集)" 서(序)의 내용으로 보아 성재의 독재동 거주와 관련된 징표로 추정된다. 또한 몽재라 쓴 바위 하단의 갑자(甲子) 경오(庚午) 무술(戊戌) 갑인(甲寅) 등의 간지(干支)는 추사와의 교유관계가 있는 1804년 5월생 유생(儒生)의 사주팔자로 판단된다. 노고산과 독재동 계곡은 삼각산을 조망하는 장소일 뿐 아니라 송월재 성재 등 미수의 학통을 계승한 기호지역의 남인학자의 공통된 장구지소로써의 응집력을 보여준다. 또한 이곳에 각자(刻字)된 추사체와 미수체(전서체) 바위글씨는 우리나라 서예사의 큰 흐름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는 측면에서도 매우 의미 깊은 역사문화경관이다.

조선시대 화훼식물의 이용과 상징성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Utilization and Symbolizes of the Joseon Dynasty Flowering Plant)

  • 김승민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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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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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4-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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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본 연구는 조선시대의 고문헌과 옛 그림에서 나타나는 화훼식물을 재료로 궁궐정원과 민가정원에 나타나는 지피식물의 이용특성과 상징성을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문화재 지역 및 현대 조경공간에 활용을 위한 기초자료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었다. 첫째, 조선시대 고문헌과 옛 그림에서 출현한 화훼식물의 출현빈도는 매화, 연꽃, 모란, 국화, 파초, 영산홍, 장미, 진달래, 작약 등이 10회 이상으로 높은 빈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다음으로 비교적 출현 빈도가 높은 식물은 치자, 석류(8회), 패랭이꽃, 포도(7회), 난초, 정향, 봉선화, 원추리, 맨드라미, 무궁화, 철쭉류, 창포, 접시꽃, 황매화, 유자(5회), 부용, 동자꽃, 금전화, 베고니아, 해바라기, 양귀비, 수선화, 서향화, 옥잠화 등(4회)이였으며, 그 외에는 29분류군 총 81종의 화훼식물이 조사되었다. 둘째, 궁궐과 민가에서 사용되었던 조선시대 화훼식물의 이용은 분에 심어 가까이 두고 완상하거나 화단, 화계, 화오, 연못 및 담장주변 등에 주로 식재하였음을 고문헌의 기록과 정원도 및 민화의 그림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산홍의 식물재료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에서 다루어지고 연구되어진 민가정원의 관련된 문헌(6점)이나 옛 그림(766점)에서 출현한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대중에게 유통이 극히 일부에 국한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조선시대 화훼식물 상징성은 유교의 절개, 군자, 청빈, 충효사상을 나타낸 경우, 도교의 신선사상이나 불로장생을 나타내는 경우, 민간신앙의 부귀영화나 만사형통을 기원하는 경우로 구분할 수 있었다. 이는 식물을 덕성함양의 대상이나 기복의 대상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조선시대 이용했던 화훼식물은 선비가 닮고 싶은 이상과 지향하는 정신세계와 일치하였기 때문에 선조들의 상징으로 나타났다고 본다. 조선시대 이용하였던 화훼식물은 수목종류에 따른 보편적인 판단기준이 아닌 다양하고 주관적이며, 또한 정신적인 측면으로 접근하여 해석할 때에 조선시대 화훼식물의 조경공간에서의 활용범위 또한 넓어질 것으로 사료된다.

조보(朝報)에 대한 몇 가지 쟁점: 필사보조의 기원, 명칭, 폐간시기, 기문기사 성격과 민간인쇄조보를 중심으로 (Considering a Few Issues on 'Chobo': Handwritten Chobo's Origin, Name, Discontinuance & Privately Printed Chobo)

  • 김영주
    • 한국언론정보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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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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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7-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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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이 논문의 목적은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조보의 기원 문제를 다시 한번 검토해보고, 조보의 명칭 및 폐간시기 문제를 비롯하여 기문기사 성격, 선조 때 발생한 민간인쇄조보 발행사건 등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는 데 있다. 내부적 통보매체인 필사조보는 조선왕조 초기에 해당하는 15세기 말경(대략 성종대)에 탄생하여 중종조에 체계적인 발전을 이룩하였으며, 정부의 인쇄관보와 한말의 유수한 민간일간지들이 발행되었던 1907년 11월(승정원의 왕명출납기능을 수행하였던 비서감이 폐지됨)까지 지속적으로 발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보의 명칭 가운데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용어는 조보(朝報)였고 그 다음이 저보(邸報)였다. 다음으로는 조지(朝紙), 기별(奇別), 난보(爛報), 경보(京報)의 순이었으며, 나머지 용어들 예컨대, 기별지(奇別紙), 저장(邸狀), 저지(邸紙), 보장(報狀), 한경보(漢京報), 영기(營奇) 등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기별'은 조선조 중반(중종대-인조대)에, '조지'는 조선조 후반(숙종대-고종대)에 집중적으로 사용되었다. 필사조보는 폐쇄성과 난초체라는 속기로 필사되어 주요 독자층인 사대부들이 구독하기가 매우 불편하였으므로 1577년(선조 10년) 8월 서울에 사는 수명의 민간인(양민층인 기인(其人))들이 의정부와 사헌부로부터 발행허가를 얻어 목활자로 인쇄조보를 발행하였다. 민간인쇄조보가 약 3개월 동안 발행된 시점에, 선조는 "사국(史局)을 사설화(私設化)하고 국가기밀을 누설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폐간조치하고 신문발행 관련자 30여 명을 유배시키고 언론 양사(사헌부와 사간원)의 책임자를 경질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조선시대 일부 기인(其人)들이 중국 인쇄조보를 본 떠 만든 민간인쇄조보(목활자본)는 그당시 중국의 인쇄신문 형태(길이 $20{\sim}25cm$, 폭 $10{\sim}15cm$, 면수 $5{\sim}10$쪽)와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민간인쇄조보는 선조의 탄압정책으로 약 3개월 만에 폐간되는 비운을 맛보았지만 영리를 목적으로 민간인이 발행하고 활판인쇄술을 세계 최초로 채용하여 발행하였다는 점에서 세계 최초의 '활판인쇄 상업일간신문'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신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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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경제의 발현과 확산의 공간적 특징: 북촌의 창의적 소매업을 중심으로 (Spatial Characteristics of Cultural Economy Emergence and Diffusion: Creative Retail Shops in Bukchon)

  • 이경옥;이금숙
    • 한국경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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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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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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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본 연구에서는 문화적인 요소가 응집되어 있는 북촌지역을 사례지역으로 지역의 문화가 경제적인 공간구조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고자한다. 북촌은 조선왕조의 고궁과 많은 역사적인 문화재, 전통한옥들이 남아 있고, 현대적 미술관과 박물관들이 들어서 있어 전통문화와 현대문화예술이 공존하는 곳이다. 최근 이 지역에는 문화와 직 간접적으로 연관된 경제활동들이 들어서면서 경관이 크게 변화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북촌 지역에 입점하고 있는 문화와 관련된 창의적 수제품을 생산하여 판매하는 소매점들이 이곳에 입지하는 이유가 이지역의 장소성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으며, 그 입지적 특징은 무엇인가를 밝혀보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본 연구에서는 문서화된 통계자료의 활용과 함께 이곳 소매점 업주들을 상대로 한 심층면담조사를 실시하여 통계자료에 나타나지 않는 구체적인 자료를 확보하여 분석하였다. 분석 결과 이곳에 입점하고 있는 창의적 소매점들이 이곳에 입점한 주 이유는 전통과 현대의 풍부한 문화적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북촌 지역의 장소성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이 북촌에 소매점을 개점한 가장 큰 이유는 북촌에 내재되어 있는 문화요소와 그에 따른 경제적 가치 때문이다. 이곳에 소매점을 내고 있는 업주들은 전반적으로 고학력이며, 많은 경우 외국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돌아와 이곳에 본인의 창의적 문화상품을 제작하는 작업장을 겸하여 점포를 내고 있다. 그들이 북촌에 입점한 이유는 북촌의 장소성을 그들이 제작하는 제품의 가치 창출에 영향을 주는 문화자본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작가주의에 입각하여 자신이 직접 디자인하여 손수 제작한 작품을 소량 생산하여 판매하는 유연적인 전문적 생산의 전형을 이룬다. 이곳에 입지하고 있는 점포에서 판매되는 대부분의 제품은 기획 생산 유통 과정이 장소와 밀접히 통합되고 있다. 이들은 초기에는 주요 통행로인 삼청동길을 따라 입점하고 확산되었으나 최근에는 통행량이 적은 이면도로인 화개길을 따라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도 계속 진행 중이며, 북촌이 지니고 있던 기존의 장소성에 작가주의에 입각한 문화상품을 생산 공급하는 개성있는 상점들이 입지하여 문화와 경제가 접목된 독특한 문화경제경관을 형성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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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朝鮮王朝)의 왕비법복(王妃法服)에 관한 연구(硏究) (A STUDY OF SACREDOTAL ROBE FOR QUEEN IN CHO-SUN DYNASTY)

  • 홍나영;유희경
    •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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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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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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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3
  • Sacredotal robe(法服) means full court dress. We can't know about the shape of sacredotal robe before Dae-Han Empire(大韓帝國) since there are no remains of it. The study of sacredotal robe for queen have also been made centering around the socredotal robe granted from Ming(明) dynasty and the system of Juck-Eui(翟衣) in Dae-Han Empire. In this thesis I tried to study about the sacredotal robe for queen from King Gong-Min(恭愍王) of Koryeo(高麗) dynasty to the close the Cho-Sun(朝鮮) dynasty by investigating the Literature of Cho-sun Dynasty Chronicles(朝鮮王朝實錄), Ga Rae Do Gam Eui Gue(嘉禮都監儀軌), Sang Bang Jung Rae(尙方定例), Gook Hon Jung Rae(國婚定例), Sok-Orae Eui-Bo(續五禮儀補), and Dae Myung Whe Jeon(大明會典). The first documents on sacredotal robe for queen is regarded as that in the period of King Gong Min., which says that Chil Whee Gu Bong Gwan and Juck Eui of the 9th grade had been given from Ming dynasty. The sacredotal robe for queen in Chosun had been granted from Ming dynasty since the 3th years of King Tae-Jo(太祖) to the 3th years of King In-Jo(仁祖). They were Ju Chui Chil Juck Gwan, red Dae Sam(大衫), Bae Ja(褙子) embroidered with. pheasants on blue silk, and ivory flat baton (笏), which belonged to the court dress for the first class of court lady. When Qing(淸) dynasty succeeded to Ming dynasty, Cho-sun adopted the system of luck Eui which had it's origin in the system of Ming, denying to comply with Chung. But as a matter of fact, the system of sacredotal robe for queen actually used was one which were different from the dress system of Ming and converted into our national ways. In the latter period. of Cho-sun, the system of Bae Ja or Juck Eui were used together until the period of King Young Jo(英祖), and the system of Juck Eui which was written in Gook Hon Jung Rae was continually used from King Young Jo to the close of Cho-sun. It was composed of Juck Eui, Beol Eui(別衣), Nae Eui(內衣), Pe Sool(蔽膝), Dae Dae(大帶), HaPi, Sang(裳), Ok Dae(玉帶), Pae Ok(佩玉), Gue(圭), Mal(襪), Suk, and Myun sa(面紗), The headdress was used in our own ways, not complying with Juck Gwan(翟冠). The color of Juck Eui was red for queen, deep blue for the consort of the crown prince. The color of Juck Eui in DaHan Empire was deep blue, different from that of Juck Eui in Cho-sun. Bo(補) for queen wus embroidered with dragon with five claws and the one for the consort of crown prince with dragon with four claws. The back length of Juck Eui was longer than front about 28cm (1尺), and the front opening was straight down. 51 motifs of a brace of pheasants which were similiar to Bong(鳳) were embroidered on Juck Eui for queen. But we can't find out whether there 31 or 51 on Juck Eui for the consort of the crown prince. The system shows independant aspects, because there are Bo, Myun Sa, Sang, Ha Pi, Beol Eui, and Nae Eui which were not found in the system of Ming. As mentioned above, I have studied on the sacredotal robe for queen. But we can't guess the detail of sacredotal robe for queen, because there are no remains at all. Therefore I expect more study on t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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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조대 고려와 교류하였던 제국과 고려의 복식제도에 관한 연구

  • 임명미
    •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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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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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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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3
  • 1. The relationship between Korea and Buk-Song had maintained for 164 years(964 1126 A.D). The period of relationship was from KwangJong Year 13(4years after establishing Buk-Song), Song Tae-Cho 1 year, to HeumJong Cheong Dang 1st year(InJong 4years in Koran). Author divides into three periodic terms, and remarkable diplomatic facts are as follows. 1) KwangJong year 13(963 A.D) SungJong year 13(994 A.D) : Normal relations, Song needed Korea's armed support. 2) MokJong year 6(1003 A.D) HyunJong year 9(1018 A.D) : Not steady relations and broke up, by MunJong year 26, Dang requested to resume the diplomatic relations. 3) MunJong year 25(1017 A.D) InJong 4(1126 A.D) : Song utilized Korea as a back supporter, but Song destructed by Keum. 2. Korea was donated knightage without offcial clothing by BukSong 10 times(KwangJong year 13 SungJong year 11). However during 164 years. Song presented some clothings Korea friendly. 3. Even though Korea cound not continue the steady diplomatic relations, Korea had been influenced the social systems including cloth-ing systems by Dang. Song dynasty. 4. The author studys historical materials which show that TongilSh-Shinra adapted social systems of Dang dynasty including clothing systems, which was succeeded to Korea for 200 years. Details are as follows ; 1) Original clothing color-systems which were Ja(purpil), Cheong(blue), Hwang(yellow), Pi, called 4-clored-system, of Tongil-Shinra, was suceeded to Korea, Above mentioned clothing systems of three countries of Korean peninsula. 2) When Korea unified the certificate of Pisam holders were superior from those of Tongil-Shinra and Hoo-Bakjae. There two classes used same seried-color 'ja, (Dan, Pi), Cheong(blue), Hwang(yellow)', or 'ja, (Dan, Pi), Cheong' and lasted to KwangJong year10 as a of-ficial clothing. 3) KwangJong year 7, according to the three colored official clothing system of Hooju, accepted Hooju's KwangJong year 11, that shifted 'Ja, (Dan, Pi), Cheong, Hwang', or, Ja, (Dan, Pi) Cheong', to 'Ja, Dan, Pi, Rok(green)'. 4) The clothing systems which are ja, (Dan, Pi), Rok which established KwangJong year 11 shifted to Song's, Ja, Ju(orange), Rok, Cheong, which had happened SungJong year 14 to MokJong 1st year. 5) 4-colored systems ('Ja, Pi, Rok, Cheong (distictable : sky blue, ocean blue)' shifted to 3 colored system which established Song ShingJong 1st year, which succeeded to Nam-Song and Keum. 5. The relationship between Korea and Yo had maintained for 207 years(918 1125 A.D). The period of relationship was from TaeJo 1st year to InJong year 3. 6. Yo, and Korea were called for king(15 times), prince(7 times). 7. Korea was donated knightage by Yo. The time when HyunJong year 13, Yo donated official clothing. From that time had used to do. The author divides into three periodic terms and discrives the shifting the formal clothing systems. Details were as follows ; 1) HyunJong year 13 MunJong year 8 : Even donating clothing systems from Yo had maintained for 35 years, Yeo, Song, Yo, three countries had not have formal cloth-ing, because they had been on the strug-gling. So that Korea had followed the same way of informal clothing. 2) MunJong year 918 : Yo donated the formal clothing to Korea for the King. Diplomatic condition was in the control, so that whole three countries used formal clothing. 3) MunJong year 19 YeaJong year 3 : Korea was donated 'Kuryumyun Kujangbokje', which became the formal clothings vs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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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과실류(果實類)의 역사적(歷史的) 고찰(考察) (A Historical Study on Fruits in Korea)

  • 강춘기
    • 한국식생활문화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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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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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0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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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0
  • 한국(韓國)에서 농경(農耕)의 시작은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말기(末期)에서 부분적으로 시작되어 보편화된 것은 B.C 4000년경으로 보고 있다. $B.C\;8000{\sim}B.C\;6000$년 전쯤의 어느 신석기(新石器) 유적(遺蹟) 중에서 농경(農耕)에 쓰였던 석기(石器)들과 함께 도토리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유사이전(有史以前)의 한국인(韓國人)들의 조상(祖上)들은 도토리와 개암 아가위 등 야생식물(野生植物)의 열매를 따서 이용했을 것이다. 부족국가시대(部族國家時代)의 마한(馬韓)에서는 밤을 재배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복숭아, 오얏, 배, 매화(梅花)를 재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中國)의 기록(記錄)을 보면 신라(新羅)에서는 잣, 호도, 석류, 백제(百濟)에서는 밤이 유명하다. 발해왕조(渤海王朝)에서도 오얏과 배, 잣이 유명하였다. 고려시대(高麗時代)에 복숭아, 오얏, 매화, 앵두, 잣, 살구, 포도, 대추, 배, 귤, 유자, 은행 등을 재배 이용하였다. 조선초기(朝鮮初期)의 지리서(地理書)인 $\ulcorner$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Ircorner$(1454)와 $\ulcorner$新增東國與地勝覽$\Ircorner$(1492)에는 개암, 아가위, 복분자(覆盆子), 비자, 잣, 은행, 대추, 밤, 감, 석류, 살구, 복숭아, 호도, 모과, 귤, 유자, 앵두, 포도, 능금 등 우리가 현재 재배하고 있는 과실나무가 거의 재배되고 있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 들어온 과실(果實)로써 위의 지리서(地理書)에 없는 과실(果實)로는 비파(枇杷)와 무화과(無花果)이다. 비파는 조선초기에 들어온 듯하여 무화과(無花果)는 16세기 전후에 들어온듯 한데 이들 두 종류의 과실나무들은 내한성(耐寒性)이 약한 종류(種類)이기 때문에 지금도 제주(濟州)와 전남(全南), 경북(慶北) 등지에만 재배되고 있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 들어 와서는 많은 농서(農書)들이 출간(出刊)되었는데 거기에는 과수재배법(果樹栽培法)과 이용법(利用法)도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900년 전후해서 西洋에서 피칸 양앵두 뿐만 아니라 최근 키위 등이 수입되어 상당히 이용되고 있다. 또 이외에도 과실(果實)의 약리적(藥理的)인 면을 이용하여 모든 과실을 한약(漢藥)으로써 의료면(醫療面)에도 널리 이용(利用)되었다. 과실(果實)은 우리들의 식생활(食生活)을 풍성하게 하기 때문에 과실의 소비량은 생활수준(生活水準)의 척도(尺度)가 된다. 이렇게 오랜 역사를 통하여 과수(果樹)들을 개량(改良)하고 도입(導入)하면서 재배(栽培) 이용(利用)하여 온 과실류(果實類)의 지위는 우리의 食生活史에 확고하게 유지(維持)되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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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규장각 의궤 책의 문양을 통한 운보문 편년 설정 방법 (A Method for Establishing Chronology of Cloud Patterns Based on the Cover Patterns of Oegyujanggak Uigwe Books in the Late Joseon Period)

  • 이은주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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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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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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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국립중앙박물관의 외규장각 의궤 중 운보문단(雲寶紋緞) 책의(冊衣)를 대상으로 운보문의 편년 설정 방법을 도출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외규장각 의궤 중 운보문단 책의는 현종 즉위년(1659) 『효종국장도감의궤(상·하)』부터 영조 20년(1744) 『사도세자가례도감의궤』까지 86년간 89책(冊)에서 사용되었다. 둘째, 의궤 책의에 사용된 보문 종류는 14종으로 파악되었는데 잡보(雜寶)인 금정(金錠), 만자(卍字), 방승(方勝), 방승(쌍), 보주(寶珠), 산호(珊瑚), 서각(犀角), 서보(書寶), 애엽(艾葉), 여의두(如意頭), 전보(錢寶), 전보(쌍), 특경(特磬), 화보(畵寶)이다. 셋째, 운보문 판독 방법은 다음과 같다. (1)보문의 명칭을 결정한다. (2)운두(雲頭) 꼭지점을 기준으로 운두가 일방향(一方向)으로 배열되었는지 양방향(兩方向)으로 배열되었는지를 확인한다. (3)운두에 연결된 만자꼬리 중 상하꼬리 방향이 좌향인지 우향인지 파악한다. (4)운두를 중심으로 사분면에 배열된 보문 조합이 '1조(組) 보문형'인지 '2조 보문형'인지 확인하고 운두 꼭지점을 기준으로 좌향꼬리는 좌상(左上) 면에서 시계 역방향으로 보문을 판독하고 우향꼬리 운보문은 우상(右上) 면에서 시계 순방향으로 보문을 판독한다. 2조 보문인 경우는 첫 보문의 명칭을 가나다 순으로 따져 '제1조 보문'과 '제2조 보문'을 결정한다. (4)운보문에서 판독한 내용을 유물명부터 유물번호, 소장처, 왕조, 연도, 1-1면, 1-2면, 1-3면, 1-4면, 방향, 2-1면, 2-2면, 2-3면, 2-4면, 운두 크기, 단위문 크기 등 16항목으로 정리한다. 이러한 판독법의 활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운보문의 연대 파악을 위한 '정하 운보문 판독법'으로 명명하였다. 넷째, 현종 즉위년(1659)부터 영조 20년(1744)까지 86년간의 의궤 89책 책의에서 28종의 운보문단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운보문에 사용된 보문은 단독보문과 조합보문을 포함하여 45종으로 확인되었는데, 특히 보주(85건), 산호(84건), 서보(42건), 방승(쌍)(41건) 등이 많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다섯째, 운보문 판독법을 연대가 정확한 초상화와 출토복식, 전세유물 등에 운보문 판독법을 적용해본 결과, 유물의 연대 파악에 도움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조선시대 개인 일기의 현황과 특징 (A Study on Personal Diaries in the Joseon Period)

  • 이종숙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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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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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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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조선시대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각종 『의궤』 등 공식 기록과 함께 각 개인이 남긴 문집이나 편지, 일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록유산이 있다. 그 가운데 독자를 염두에 두지 않은 개인 일기는 그 어떤 기록보다 솔직하고 생생한 현장감이 담겨 있기에 일찍부터 그 가치를 주목받아왔다. 그런데 이순신의 『난중일기』,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과 같은 유명한 몇몇 일기를 제외하고 조선시대 개인 일기는 세상에 쉽게 드러나지도 않고 제대로 정리되지도 못한 채 기록유산 보존·관리의 사각지대에서 훼손·유실되고 있다. 조선시대 개인 일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록으로 작성 당시부터 좋은 품질의 종이를 사용한 경우가 드물다. 또한 작성자 사후(死後)에는 대부분 집안 후손에서 후손으로 전해지면서 보관되다보니 동시대에 제작된 실록, 의궤와 같은 기록유산보다 상태가 양호하지 못했던 역사적 환경이 있다. 또 간혹 보존 상태가 양호한 개인 일기를 접하게 되더라도 대부분이 정형화(整形化)된 활자본이 아니라 행·초서(行·草書)로 기록된 한문필사본(漢文筆寫本)이기 때문에 한글 전용 세대인 우리들이 정리하기에는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조선시대 관찬사료(官撰史料)의 방증사료(傍證史料)로서의 가치가 부각되고, <대장금(大長今)>과 같은 사극의 콘텐츠로 활용도가 커질수록 조선시대 개인 일기에 대한 연구와 보존·관리 방안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도 현실이다. 이러한 종합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본고는 최근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조사한 조선시대 개인 일기의 현황을 분석하고 내용 분류와 시기별 특징에 대하여 개괄적인 검토를 하였다. 이들 검토 내용이 향후 조선시대 개인 일기의 연구 방향과 보존·관리에 일조되기를 기대한다.

광화문광장 조성과정 및 설계 연구 (A Study of the Planning Process, Design Idea and Implementation of the Gwanghwamun Plaza)

  • 신현돈;조경진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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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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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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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 연구는 2009년에 개장한 광화문광장이 조성이 되기까지의 과정 및 설계 아이디어 도출에 대한 제 전반의 사항들을 다룬다. 광화문광장 조성은 일제에 의해 왜곡되었던 조선왕조 국가상징축을 복원시키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광화문광장 조성은 여러 단계를 거쳐 진행되었으며,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광화문광장 조성 논의 단계로 세종로를 광장으로 만들기로 확정짓기 전까지 논의 단계이다. 광화문광장사업이 2007년에 현실화되기 전까지 세종로를 광장화 하고자 했던 여러 시도와 함께 행정 주체가 광화문광장 사업을 조성하기로 확정짓고 설계공모에 들어가기 전에 주요 결정사안들을 시민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결정해 나갔던 단계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단계는 광화문광장 기본구상 및 설계 단계로 최종 설계안은 아이디어 현상설계와 턴키 설계 공모 두 단계를 거쳐 확정되었다. 최종 설계안은 국가상징도로로서의 세종로 축과 육조거리를 복원하는 등 역사적 맥락을 회복하는데 주안점을 두었으며, 역사복원 존(zone), "조망 및 역사재현 존(zone)", "문화 존(zone)", "도시 존(zone)"으로 주제를 설정하여 구성하였다. 광장 조성은 역사성의 재현, 조망권 확보, 일상 문화공간 창조에 주안점을 두었으며, 아이디어 현상공모 단계에서 턴키 기본설계 단계에서 시공에 이르기까지 '기억과 전망의 장소'라는 기본 개념은 유지되었다. 더불어 광장 고유의 비움 및 유동성의 특성을 반영코자 하였다. 세 번째 단계는 시공 및 조성 단계로 광화문광장이 실제로 만들어지는 단계이다. 이 단계를 거치며 몇 가지 요인으로 인해 광화문광장은 최종설계안과 일부 다른 모습으로 완공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광화문광장 조성 논의 단계부터 완공하기까지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살펴보고, 그동안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당초 설계안, 설계안이 변경될 수밖에 없었던 여러 요인과 이유, 완공 이후의 광화문 광장의 공공성에 대한 논의까지를 모두 종합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더불어 이를 통해 도시 공공 공간 조성에 있어 합리적인 방안을 도출해 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해 보고, 추후 유사 프로젝트에 참고자료가 될 수 있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