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영국 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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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영국 상선 선원의 기승 구조와 근로 요건 (Manning Structure and Working Conditions of British Merchant Seamen during the 18th Century)

  • 김성준
    • 한국항해항만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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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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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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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
  • 18세기 영국은 시대적 변혁기였다. 영국은 대외적으로는 단속적으로 전쟁을 계속해야 했고, 내적으로는 산업 사회로 전환하고 있었다 영국의 선주들은 계속된 전쟁과 선박량의 팽창으로 인해 선원 부족 문제에 직면하였다. 영국 선주들은 이에 대해 척당 선원 수를 줄이고, 선원의 임금을 올려줌으로써 해결하고자 했다. 18세기가 경과하는 동안 영국 상선의 척당 선원 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다. 1710년 100톤급 선박 1 척당 22-23명이던 선원수는 1810년에는 5명으로 급감하였다. 이처럼 척당 선원 수가 감소한 것은 조타기, 양묘기, 권양기 등의 기계가 도입되고, 선박과 범장의 개량이 꾸준히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18세기 내내 단속적으로 전쟁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선주들로서는 적은 선원으로 선박을 운항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선주들은 임금을 올려줌으로써 선원들을 해상 생활로 유인하고자 했다. 18세기 중엽25실링에 불과했던 선원의 임금은 프랑스혁명전쟁기에 이르면 5-10파운드까지 치솟았다. 척당 선원 수가 감소하고 선원의 임금이 꾸준히 상승한 것은 전쟁이 지속된 18세기에 영국의 선주들이 급변하는 해운 환경에 적절히 대응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사무엘 플림솔과 플림솔 마크 제정 운동

  • 김성준
    • 한국항해항만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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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항해항만학회 2019년도 추계학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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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4-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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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오늘날 해사산업계에서는 선박에 화물을 실을 수 있는 최대선인 만재흘수선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국제만재흘수선 협약이 처음으로 성안된 것은 1930년이었고, 60개국이 서명하여 국제적으로 발효된 것은 1966년에 이르러서였다. 그러나 그에 앞서 1875년 영국의 의원이었던 사무엘 플림솔은 아무런 제한없이 화물을 선적하여 침몰사고가 빈번하여 수많은 선원들의 목숨을 잃는 현실을 개선하고자 갑판적재 금지와 화물적재 안전선의 현측 표시 등을 골자로 한 만재흘수선 제정 운동을 범국민적으로 벌였다. 이 논문에서는 19세기 중엽 사무엘 플림솔이 주도했던 만재흘수선 제정 운동의 시대적 배경과 전개 과정, 그리고 19세기 중엽 영국에서 선박 침몰 사고가 빈발했던 근본적 원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로써 19세기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선박의 안전을 크게 제고시킨 만재흘수선 제정에 끼친 사무엘 플림솔의 공헌에 대해 재평가하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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