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tle/Summary/Keyword: 애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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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세기 인물을 통해 본 안의삼동(安義三洞)의 주요 유람처와 공간인식 (A Study on the Major Attraction and Space Recognition in Anuisamdong(安義三洞), through the People of the 16th to 19th centuries)

  • 김동현;신현실;이원호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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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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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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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 연구는 과거 안의삼동을 유람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던 인물들의 공간인식을 살펴보고자 관련 문헌에서 확인되는 인물들의 학파별 관계와 경관요소들을 분석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결과를 도출하였다. 첫째, 안의삼동 관련 기록을 저작한 인물들은 영남 유학계보와 함께 안의삼동 일대 거주하는 지역사림을 중심으로 관계가 확인되었다. 15세기 정여창을 시원으로 16세기 남명학파 중심의 관계가 나타났으나 당시에는 학맥과 관계없이 안의삼동을 유람했었다. 17세기에는 남명학파와 퇴계학파의 대립으로 퇴계학파의 영향은 확인되지 않으며, 18세기 영남학파로 발전되면서 남명학파, 퇴계학파, 기호학파의 비중이 유사하게 나타났다. 19세기 이후에는 학맥보다는 일제 항거운동에 참여했던 애국지사의 비중이 높게 나타났다. 둘째, 안의삼동 관련 문헌에서 주로 이용되는 장소는 원학동, 화림동, 심진동 순으로 확인되었다. 관련문헌의 대상으로 이용된 주요 요소는 총 21개소로, 이 중 수승대, 모리재, 농월정, 사선대, 척수암이 주를 이루었다. 원학동의 요소들은 수승대를 중심으로 16세기 이후 주요지점으로 각광받았다. 화림동의 요소는 18세기 이후 점차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나, 심진동의 경우 원학동이나 화림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비중을 보이고 있었다. 셋째, 안의삼동을 방문했던 인물들의 관계와 문헌 분석 결과 안의삼동에 대한 공간인식 양상은 경관 묘사, 안의삼동에서의 감회, 문헌에 내재된 상징성으로 구분되었다. 안의삼동의 경관인식은 수경관과 지형경관 중심의 묘사가 주로 확인되는데, 당시 인물들이 안의삼동을 계곡경관 중심의 명승지로 인식했을 것으로 보인다. 16·17세기 남명학파와 퇴계학파의 상호영향관계는 각 학파의 주요 인물들이 안의삼동의 유람을 수련문화로 인식하던 양상이, 18세기 유람문화의 성행과 19세기 혼란스런 정세를 거치면서 과거 선조들의 자취를 그리워하는 정서로 이어졌다. 이외에 주로 나타나는 상징적 표현은 신선세계로의 장소성이 확인됨에 따라 탈속의 장소로 인식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Dioxin의 투여가 마우스의 체중, 정자수, 정자활력, 정소 및 장기중량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 (Effects of Dioxin on the Body Weight, No. of Sperm, Motility, Testis and Organ Weight in Mice)

  • 김상근;김민수;왕애국;남윤이;현병화
    • 한국가축번식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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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4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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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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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 본 연구는 dioxin이 생체에 미치는 영향을 구명하고자 dioxin 10~40 $\mu\textrm{g}$/kg을 mouse에 2일간 투여했을 때 체중, 정자수와 정자활력, 정소중량, 장기중량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였다. 1. Dioxin 10, 20 $\mu\textrm{g}$/kg 투여군의 체중은 30.6$\pm$2.9~40.7$\pm$3.9g, 30.8$\pm$4.1~39.5$\pm$3.1g이었으며, 30, 40 $\mu\textrm{g}$/kg 투여군의 체중은 31.0$\pm$3.5~39.0$\pm$3.5g, 30.6$\pm$3.4~38.3$\pm$4.0g 으로서 대조군의 30.6$\pm$2.8~44.5$\pm$3.1g에 비해 약간 낮은 치를 나타냈으며 dioxin 투여량이 증가할수록 감소하는 경향을 나타냈다(p.0.05). 2. Dioxin 10~40 $\mu\textrm{g}$/kg을 각각 2일간 투여했을때 WBC수는 대조군에 비해 현저한 증가치를 나타냈고 RBC수는 대조군에 비해 다소 증가되었으나 유의한 변화는 인정되지 않았으며, Hb량과 PCV치 및 PLT수는 대조군에 비해 크게 증가된 경향을 나타냈다. 3. Dioxin 10, 20$\mu\textrm{g}$/kg을 투여군의 정자수는 112.5 $\pm$ 3.7 ~ 119.4 $\pm$4.2 $\times$ $10^{6}$$m\ell$, 103.9 $\pm$ 3.8 ~ 110.2 $\pm$ 3.6 $\times$ $10^{6}$$m\ell$이었으며, 30, 40 $\mu\textrm{g}$/kg 투여군의 정자수는 97.5 $\pm$ 3.4 ~105.7 $\pm$ 4.4 $\times$ $10^{6}$$m\ell$, 87.2 $\pm$ 3.7 ~ 98.5 $\pm$ 3.8 $\times$ $10^{6}$$m\ell$로서 대조군의 119.0 $\pm$ 4.3 ~ 120.7 $\pm$ 4.8 $\times$ $10^{6}$$m\ell$에 비해 현저히 감소된 정자수를 나타냈다(p<0.05). 4. 정자활력은 10, 20, 30, 40 $\mu\textrm{g}$/kg을 각각 2일간 투여했을 때 69.4 $\pm$ 3.0 ~ 86.6 $\pm$ 4.7%로서 대조군의 93.0 $\pm$ 3.6 ~ 94.7 $\pm$ 4.2%에 비해 정자의 활력이 현저히 감소되었다(p<0.05). 5. Dioxin 10, 20, 30, 40 $\mu\textrm{g}$/kg을 각각 2일간 투여했을 때 정소중량은 대조군에 비해 약간 감소된 경향을 나타냈다. 6. Dioxin 10, 20, 30, 40 $\mu\textrm{g}$/kg을 각각 2일간 투여했을 때 신장, 비장 및 간의 중량은 정상대조군과 비교할 때 약간의 증가를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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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재 서병오(1862-1936)의 1889년작 난죽석도 연구 (A Study on the 1889 'Nanjukseok' (Orchid, Bamboo and Rock) Paintings of Seo Byeong-o)

  • 최경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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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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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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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서병오(徐丙五, 1862-1936)는 서구적 '미술' 개념의 도입으로 일본화 내지 서양화로 기울던 일제강점기 시서화일치의 대구 문인화단이 형성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1879년 이하응(李昰應, 1820-1898)과의 만남을 계기로 서화계에 입문하였으나, 문인화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부터이다. 그의 예술세계는 세 시기로 구분되며, 학습기인 1879년부터 1897년까지는 관직 진출을 목표로 하였던 때문인지 중국 화보를 임모하거나 이하응의 영향 아래 사군자화를 여가에 그리는 정도였다. 발전기는 1898년부터 1920년까지로 그는 애국계몽운동 등 사회적 지도자로 활동하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삶의 방향을 문인화가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중국 여행에서 다시 만난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의 운미란과 포화(蒲華, 1830-1911)의 묵죽법을 근간으로 새로운 화풍을 적극 모색함과 동시에 산수, 화훼, 기명절지 등의 화목도 다루었다. 완숙기인 1921년부터 1936년까지는 대구와 한양을 오가며 근대 한국 화단의 서화가로 왕성하게 활동하였으며, 묵란과 묵죽에서 윤묵의 호방한 필법을 특징으로 하는 개성적 화풍을 완성하였다. 특히 학습기의 경우 관련 기록이나 현전작품이 드물어 서병오의 창작활동이나 화풍 등에 관한 것은 추론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본고에서 집중적으로 분석한 서병오의 1889년작 난석죽도 11점은 학습기의 화풍 연원이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1889년작 난죽석도 가운데 묵란도는, 이하응이 1882년 7월 청군에 의해 체포되기 이전에 그린 초기 군란도와 석란도에서 영향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묵죽도는 한양에 널리 알려진 양주화파 정섭(鄭燮, 1693-1765)과 김정희의 제자 허련(許鍊, 1809-1892)의 화법을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이하응의 석란도 형식을 응용하여 변화를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괴석도의 경우 직접적인 관련성은 찾지 못하였으나, 19세기 후반 청나라의 괴석화가 주당(周棠, 1806-1876)과 여항화가 정학교(丁學敎, 1832-1914) 등에게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결론적으로 서병오의 1889년작 난죽석도는 학습기에 그려진 것으로 운현궁을 찾았던 허련과 정학교 같은 동시기 화가들이나, 한양에 작품이 유입되었던 정섭과 주당 등의 중국 작품을 실견하며 이들의 화풍을 수용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